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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성결설교 78편

아직 길 위에 있을 때 마5:23~26

by 【고동엽】 2022. 2. 21.

아직 길 위에 있을 때                마5:23~26                   출처 

 

지난 주에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표출하는 분노와 모욕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율법의 명시되어 있는 것만 죄라고

오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말은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죠ㅣ

 

▲우리말 표현에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죠.

법은 인간의 도리를 최소한으로 만들어서 그 선을 그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품이 좋은 사람들은 법에 신경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자신의 양심대로 해도 법이 그어놓은 선에 걸리지 않는 것이지요.

 

과거에는 이 말이 칭찬으로 쓰였습니다.

지금은 ‘세상물정 모르는 어리숙한 사람’,

혹은 ‘요령 없는 꽉 막힌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버렸죠.

 

요즘에는 법의 허점을 이용해서 법을 어기면서도

법에 걸리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 일에 능한 사함들을 좋은 변호사라고 얘기를 하죠.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법망을 피해서 이익을 도모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법대로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만나서 대화하다가,

‘그래 법대로 하자!’ 그러면 좋은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인정과 사정을 다 제쳐 놓고

‘법대로 하자’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법을 넘어서서 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선한 본성을 따라,

살아가게 되자는 이야기죠.

 

▲이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라는 동안에 우리 안에서 형성된 가치관은 지극히 세속적이죠.

 

저처럼 모태신앙인으로 자랐다하더라도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적인 가치관과 세속적인 가치관이 뒤섞여 있습니다.

 

다 잘하고 나서 회심하고 믿은 분들은

더욱더 세속적인 세계관의 지배력이 강하지요.

 

마음과 정신과 몸 안에서 속속들이 그리고 깊이 배인

세속적인 사고방식 가치관이 변화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몇 년 전에 주재원으로 미국에 왔다가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한 분에게 들은 말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사십이 넘어서 처음으로 교회생활을 시작하셨는데요,

예배나오면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달라지는 것을

스스로 보고 놀라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점에서 제일 달라졌느냐?’ 그렇게 물었더니

그분이 하는 말씀이 기억에 새롭습니다.

 

과거에는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저 사람이 나에게 얼마나 유익을 줄까

이것을 생각하고 사람을 만났는데

예배에 나오다 보니까 그런 질문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되고

저절로 그런 생각을 안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아 성령께서 이미 저 사람의 마음속에서 활동하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도 달라지게 되어있지요.

그러한 변화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방식에 깊이 그리고 널리 스며들어서

우리의 습관이 우리의 새로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성령의 능력 안에서 머물어 살라야 하고

늘 깨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 습관이 되고

또한 새로운 천성이 됩니다.

그냥 마음에 끌리는대로 해도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그런 차원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조심해야 될 두 가지 극단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1) 한쪽 극단적인 생각은 인간은 별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비관적인 생각입니다.

그냥 생긴 대로 그냥 주어진 대로 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지요.

 

이 입장에 나름대로 진실이 있습니다.

인간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진실의 전부는 아닙니다.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은 원죄의 결박으로 인해서 별수가 없지만

그러나 성령의 능력 안에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룰 수 있는 수가 생기는 것이지요.

 

2) 다른 하나는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지나친 기대입니다.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도 모든 죄성을 벗고

온전히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의 우리는 죄성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함으로

우리의 죄성을 완전히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동안에는 우리의 변화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때로 넘어질 수 있구요, 때로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잘 아셨습니다.

 

 

◑본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분노 하지 말라 다른 사람에게 모욕도 주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그러므로 내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예수님은 앞에서 다른 사람의 존재감을 부정하는 다 하지 말고

분노를 쏟아 붇지도 말고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깍아내리는 말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셨죠.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우리한테

너무 큰 기대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표이지만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그 상황을 가정해서 너희가 그렇게 하지 못할 때,

그러므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이렇게 하라고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라는 말씀은 예루살렘성전에 가서

제사드리는 광경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지금 주님은 갈릴리에서 말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3일 길을 걸어가서

예루살렘에서 제물로 바칠 양 한 마리를 사가지고

그것을 제사장이 보는 앞에서 제사장의 지시대로 도살하고 피를 다 빼고

그리고 각을 떠서는 제단에 올려 놓기 위해서 제물을 가지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단을 향해 가고 있는 중에

갑자기 얼마 전에 어느 친구와 다투었던 일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 친구가 하도 괘씸하고 내 마음에 상처가 심해서

해서는 안될 말로 그 사람의 자존심을 깎아내린 것입니다.

 

그 모욕으로 인해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하면서

어쩔줄 모르고는 돌아서 가버렸습니다.

 

‘그 친구는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해 그 사람이 나에게 끼친 해를 볼 때,

그것을 받아도 마땅해’ 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 대해서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뭐라고 합니까? 그 즉시로 제물을 거기에 내려 놓고

먼저 가서 그 형제나 자매와 화해를 하고 다시 와서 제물을 드리라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제물을 거기다 놓고 사흘 길을 걸어가서

내가 상처 준 그 사람을 찾아내서 그 사람한테 사과 하고 화해한 다음에

그 사람이 용서해주면 다시 와서 제물을 드리라는 거죠.

그 사이에 제물은 다 썩어버렸을 때니까,

또 한 마리 더 사서 그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굳이 이렇게 해야 할까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각났다면 다 준비한 것인데 그러니까 제물을 제단에 드리고 나서 집에 가서 해도 되는 일 아닙니까?

근데 예수님은 왜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집에 갔다고 오라는 것일까요?

 

이 비유는 적어도 우리에게 2가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1. 첫째는 <예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제사를 준비하는 동안에 자신이 상처준 사람이 떠오른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는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온전히 서서 자신을 비추어 보려는

그런 진실하고 겸손하고 진지한 태도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배에서 마땅히 일어나야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 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해주시는 첫 번째 일이 뭐냐?

우리의 죄에 대해 깨닫게 하시는 일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영어로 convicting grace 라 그렇게 부릅니다.

 

직역하면 ‘고소(책망)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앞에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께 고발하는 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라는 겁니다.

 

어떻게 고소(책망)하는 것이 은혜가 될 수 있습니까?

회개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경험하고 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임하면 우리가 망각했던 혹은 우리가 무시하며 살았던 죄들이 생각이 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그 죄들에 대해서 고발하십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내면에서 자신을 고발하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이지요.

그것이 참된 예배자에게서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 이런 마음으로 예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 앞에 자신을 활짝 열고 성령께서 내면을 비추어주시기를 간구하면

자신에게 있는 죄에 대해서 깨닫고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일이

우리의 예배에서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까?

 

예배자리를 찾는 분들 중에 더 많은 분들은

예배를 통해서 위로를 받고싶어하고요,

모두가 피해자라는 의식을 갖고 살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의 상처를 내어놓고 그 상처를 치료받고 위로받기 원하는 것 아닙니까?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준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상처에 대해서만 알아달라고 기도하는 것

그것이 오늘 대부분의 예배자들의 실상이 아닙니까?

 

▲요즘 젊은이들이 부르는 찬양의 가사들은 대부분 자신의 상처를 알아 주고

아픔을 알아주고 상처를 치유해 달라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예배현장에 가면 뜨거운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격과 눈물은 자기 감상에서 나옵니다.

 

한국 교회만이 아니고 미국교회도 그렇습니다.

최근에 어느 문화비평가가 미국교회 찬양에 대해서 예배에 대해서 쓴 것을 읽었는데요,

그는 지금 미국의 젊은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찬양 그 가사들이 자위적이라,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스스로 위로하는 내용이 전부라고 비판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예배와 찬양중에 많은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은 잠시 자신에게

위로만 줄 뿐,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정말 귀한 눈물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애통해야 하는 눈물입니다.

요즘 예배중에 그런 눈물은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배를 자신의 허위와 불의와 수치를 가리는 도구로 삼습니다.

때로 신실하게 예배드리고 이런저런 일로 봉사를 하는 분들이

사적인 생활 영역에서는 수치스러운 삶을 살고 있음을 볼 때면,

이것이 뭔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거짓말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면 혹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없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면

혹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일을 하고 있다면

혹은 부정한 이득을 얻기 위해서 거짓말과 속임수를 사용하고 있다면,

혹은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언행을 쉽게 생각한다면,

여러분 과연 그사람이 드리는 예배가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어떤 마음으로 이 예배에 오셨습니까?

지금 예배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다고 믿습니까?

그 하나님이 임재앞에 우리가 서있다고 믿습니까?

 

지금 우리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나를 샅샅이 뒤지소서.

그리고 나를 고발하소서라는 태도로 무장해제하고 예배자리에 섭니까?

 

그래서 때때로 압도적으로 임하는 성령의 은혜로 인해서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회개하고 있습니까?

 

그런 일이 우리의 예배가운데 일어나야 마땅합니다.

 

◑2. 둘째로 이 비유는 <예배자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진 사람은

예배드려도 소용없다, 그런 뜻으로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예배드리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샅샅이 돌아봐서

아무 죄가 없다고 판단되면 그때 예배드려라 그런 뜻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만약 그런 뜻이라면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이 예배자리에 서 있을 사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무언가를 특별하게 강조할 때,

이 상황을 만들고 아주 과격한 표현을 쓰십니다.

 

제물을 드리려다가 누군가에 상처준 일이 생각나면

제물을 제단앞에 놓아두고 화해하고 와서 제물을 드리라는 말씀은

제물만큼이나 화해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예배 드리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느냐도 그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중에 지금 이말씀을 듣는 중에

얼마 전에 말로 혹은 행동으로 상처를 준분이 생각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계시다면 이 자리에서 벌떡일어나서 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왜 한분도 일어나는 분이 없습니까?

 

그랬다가는 내 잘못이 탈로 날까봐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의 뜻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겁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고

누군가 매듭을 풀어야 할 사람이 생각난다면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서 화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준일을 예로 드시지만

그것만은 아니지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는 일이 모두 그렇습니다.

참된 예배자는 예배드린 그 마음과 그 태도로 일상을 살도록 힘써야합니다.

 

아니, 참된 예배는 우리의 삶을 그렇게 변화시켜 줍니다.

우리가 예배를 준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예배를 정성스럽게 준비해야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 예배드리는 파트타임 예배자가 아니라

주 7일 하루 24시간 줄곧 예배드리는 풀타임 예배자입니다.

 

풀타임 예배자라는 말은 오늘 이렇게 예배드린 그 마음으로

24시간 매일매일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중의 대부분은 파트타임 예배자들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예배당 문을 열고 가면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인데..

 

진정한 예배는 예배당을 떠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오늘 이 예배당 안에서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믿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더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따로, 생활 따로

이렇게 ‘따로 신앙’이 되는 것이죠.

 

‘따로 신앙’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합니다.

 

자신에게도 해롭고

이웃에게도 해롭고

하나님께도 해롭습니다.

 

일주일 동안 자기 욕심대로 살고는

주일날 예배 자리에 와서 경건한 모양을 흉내낸다고 해서

그게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이런 현상은,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본성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물과 제사에 대해서

아주 혹독하게 비판하곤 하셨습니다.

 

그 중 하나의 예가 이사야서1장에 나옵니다.

사1:11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숫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려고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니라’

 

그리고는 그 후 1:15~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 않겠다.

너희는 아무리 많은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 스스로 씻어라.

너희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 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며,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이 말씀은, 무려 2500여년 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에도 우리에게 딱 드러맞는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 시간에만 우리를 지켜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우리를 지켜보시는 분이십니다.

 

예배드리는 태도에만 관심가지시지 않고

우리의 사람 대하는 태도,

말하는 방식,

돈 씀씀이,

거래하는 방식 등을 모두 관심가지십니다.

 

예배가 참되다면, 그런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예수님은

또 하나의 비유를 드십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는데

그 사람을 나를 붙들고는,

고소하러 재판장에게 끌고 가는.. 그런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는

도중에 얼른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할 단어가 2개입니다.

‘도중에’ 와 ‘얼른’입니다.

 

-도중에 .. ‘아직 길에 있을 때’

‘아직 재판정에 도착하지 않은 동안에’ 란 뜻입니다.

 

-얼른 ..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신속하게 화해하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받을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재판관은 ‘하나님’을,

감옥은 ‘지옥’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금 영원한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가고 있습니다.

어제보다 오늘, 하나님앞에 갈 날이 하루 줄어들었습니다.

시계바늘이 째깍째깍 움직일 때마다 우리는 한발짝 한발짝 더

그 마지막 재판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

우리는 인류 최고 법정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하나님께 가는 기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그 길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단죄 받아서 ‘영원한 감옥’에 던져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죠.

 

그 조치란 무엇입니까?

우리 중에, 우리 스스로 선을 쌓아서

하나님의 커트라인을 통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쌓은 의’를

그것 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다면

우리는 그 분 앞에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 앞에서

‘자기 의’라고 하는 것은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사

그 아들을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그 분과 함께 서게 됩니다.

 

저는 소송(송사)을 당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재판정에 피고로 서 있는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당해 본 사람에게서

들어서 압니다.

 

재판정에 섰을 때, 능력 있는 변호사가

자기 옆에서 자기의 정당함을 변호해 줄 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요!

 

반대로, 자신을 변호해 줄 사람이 없을 때

재판장 앞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경험자들에게 들어서 압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대 앞에 설 때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서셔서

‘아버지, 이 아들 이 딸의 죄 값은

이미 제가 다 담당했습니다!

이 아들은 이 딸은 그 사실을 그대로 진실로 믿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이 아들을 받아주십시오!

이 딸을 받아주십시오!’

이렇게 변호해 주실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길 위에’ 우리가 있는 동안

우리에게 아직 여유가 있는 동안

우리는 진실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 믿음 안에서 매일 매일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따라서

거룩하고 선하고 너그럽고 정의롭게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이라고 해서

도덕적으로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이 깊어질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며

자신의 허물을 깨닫는대로 회개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점점 변화되어 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지할 것은

오직 우리의 죄값을 모두 해결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 세상에서 우리가 거룩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 것처럼

오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진실한 믿음은

자기 자신의 허물과 죄를 더욱 예민하게 느끼고

그래서 거룩하고 선하고 정의롭고 아름답게 살도록

더욱 힘쓰게 만들어줍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교리적으로만 믿고 있는 것이죠.

진실로 그 보혈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제는 우리 죄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떠한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이제 상관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전보다 더욱 더

우리가 이미 거듭났고, 우리가 이미 죄용서함을 받고

이미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로 이름(칭의)을 받았기 때문에

 

더욱 더 과거보다, 믿지 않을 때보다 더욱 더 신경 써서

우리가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 관심 가지시며

우리가 죄 속에 빠져 있을 때, 더 아파하시고, 슬퍼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믿기 전보다 더욱 더

예민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서

거룩하고 바르고 선하게 살기 위해서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직 ‘길 위에’있는 동안

우리가 취해야 할 조치입니다.

 

예수님은 그 조치를 미루지 말고

얼른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 재판관 앞에 당도할지 모르고

일단 당도하고 나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 인생이 끝날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언제 다시 오셔서 인류의 역사를 마무리하실지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비는

매일을 자기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얼른>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요즘처럼 아주 추웠던 어느 날 아침에

같은 반 아이가 한 명 결석을 했습니다.

왜만해선 빠지지 않는 친구라서 웬일인가 싶었습니다.

 

종례시간 선생님은 그 친구가 간밤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인해서

세상을 떠났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저와 우리 반 친구들은 모두 충격에 빠졌죠.

저도 그 때, 연탄 때는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아 내가 언제든지 세상을 떠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그 전에, 연탄가스를 마시고

쓰러져 본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죽음이 먼 얘기가 아니라 내 코앞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친구의 장례식 후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제가 이 밤에 죽으면 주님 품에 받아 주십시오.’라고

아주 진지하게, 심각하게 기도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매일 밤 제 기도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가스보일러 집으로 이사하면서

더 이상 자다가 죽을 염려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밤에 드리던 기도의 내용도 달라졌습니다.

가스보일러가 제 믿음을 갉아먹었습니다. 하하하

 

매일을 마지막 날로 삼고 살아가는 믿음이

제일 좋은 믿음입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갈 때

마지막 날인 듯이 눕고

아침에 일어날 때

또 새로운 하루를 연장해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가 길 위에 살아가는 존재로서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아침이면 또 하루의 삶을 연장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의 생이

매일 무심히 반복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심하게 병들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아니 제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가 우리의 마지막 예배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나이가 먹고 병약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몇 십 년은 끄떡 없을 것같은 사람에게도

마지막은 홀연히 닥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를 여전히 <길 위에> 세워주신 것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내일도 아침에 일어나, ‘아직도 나를 길 위에 가게 해 주셨군요!’

하며 감사해야 되겠죠.

 

그러나 한 편, 또한 오늘이라도 내 여정이 끝난다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대비해야 합니다.

 

그 심판대 앞에 (예수님 없이) 홀로 서는 일이 없도록

늘 매일 주님을 붙들고 사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에 걸맞지 않는

말과 행실로부터 속히 벗어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우리 예배가 회복 되어야 합니다.

예배에 임하는 우리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우리의 삶을 진실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드린 그 마음과 태도로

일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직고(직접 보고)하기에 부끄러운 죄가

내 안에 있다면

아직 ‘길에 있는 동안에’ (살고 있는 동안에)

얼른, 당장, 지체 없이 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또 하루 지속되고 있다는 말은

하루 더 죄를 즐기라는 말이 아니라

하루 더 의에 있어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매일 매일 아직 ‘길 위에’ 세워져 있음에 감사드리면서

홀연히 그 길이 끝나는 날이 올 것을 대비하여

참되게 예배하고, 그리고 예배하는 자세로서

매일 매일 예배하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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