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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 10장 34-42절

by 【고동엽】 2022. 2. 13.

4 14일 주일설교 1_요한복음 10 34-42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

 

1부 예배에 오시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셨을 것 같고, 아침식사가 급하게 이루어졌을 것 같습니다. 마치고 나서 브런치 커피를 여유 있게 드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데 오늘은 그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마음속으로 그려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 18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품속에 있는 하나님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은 지상의 엘로힘, 하나님께서 말씀을 맡은 자들을 보내셔서 하나님 뜻을 구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들을 엘로힘이라고 했죠. 하나님 자신의 생물학적인 분신이 아니라 영적분신들인 엘로힘들을 이 세상에 파견하신 겁니다. 이 하나님 말씀을 맡은 엘로힘들이 하나님 뜻을 대행하는 기관입니다. 이 말을 우리는 에이전트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한 번 선포될 때마다 실제 이스라엘, 엘로힘이 있는데 이 엘로힘 중에서는 왕 제사장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자마자 실제 이스라엘이 있고, 모세 아론 또는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들이 엘로힘인데 이 엘로힘들이 말씀을 받자마자 잘 증거하고 경청하면, 신명기 5 27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하나님 말씀을 잘 들은 엘로힘들이 잘 듣고 백성들에게 말해주면 백성들이 말씀을 듣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말씀이 일반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과정은 말씀을 맡은 엘로힘들이 얼마나 하나님 가까이 가서 진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는가에 있습니다. 신명기 5 27절이 매우 중요합니다.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여기서 말씀을 맡은 엘로힘들이 만일 말씀을 안 듣거나 듣지 못했는데 들었다고 말하면 mis communication이 아니라 mal communication, anti communication이 일어나겠죠? mis communication 하면 약간 오해가 있는 거죠. mal 하면 틀린, anti communication 하면 정반대의 의사소통이 되는 거죠. 예레미야 23장에 보면 거짓예언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못 듣고 이전에 했던 예언자 선배들의 예언을 표절했습니다. 거짓예언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표절 설교입니다. 예레미야 23, 에스겔 14장을 보면 하나님 말씀을 백성들은 들으려고 하는데 중간에서 말씀을 맡은 엘로힘들이 말씀을 안 들으면 잘못 들으면 거짓 예언자가 됩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imagine, psychological imagination, 자기 심상, 자기 마음에 있는 형상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전달할 수밖에 없겠죠? 두 가지입니다. 날조하거나 표절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진심으로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날조와 표절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지금 상도동 우리 학교 앞에 있는 교회에서, 작은 교회가 아닙니다. 3천명 되니까, 그 교회에서 청년부 교역자가 설교를 표절했는데 너무 감동 받은 청년부회원들이 자기 목사님 설교를 듣고 소감을 올렸습니다. 올렸더니 갑자기 그 설교 표절이라고 공격이 들어온 겁니다. 보니까 하나 틀리지 않고 표절한 겁니다. 지금 현재 난리가 난거죠. 예레미야 23장 거짓예언자들, 그럼 언제 하나님이 말씀을 안 주시냐? 말씀을 사람들이 안 듣기도 해요. 그런데 말씀을 안 주시기도 하거든요. 예언자가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만 안 주실 때도 있어요. 1부는 앞으로 고급세미나 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2부는 정상적으로 헌금 내는 교인들을 위해서 하는 거고, 1부는 어차피 돈도 없는 헌금도 안 내고, 이거 녹음하지 마세요. 가난한 프롤레타리아군, 산업예비군들, 녹음해도 괜찮아요. 1부는 산업예비군들을 위해서 혁명 열기를 키우는 시간이기 때문에 심층학습을 할 거예요. 2부에는 이게 없습니다. 에스겔 14장은 마음에 우상을 품은 백성들에게 말씀을 안 주세요. 다시 말해서 마음에 우상을 품은 백성들 때문에 안 주셔서 못 듣는 거예요. 그래도 계속 말씀을 달라고 하면 백성들의 우상 품은 그 마음에 백성들이 자기가 하나님 뜻이라고 믿고 싶은 그 뜻을 응답으로 줘버려요. 참 중요합니다. 이게 하나님 뜻이라고 믿어버리는 그 마음이 너무 강하면 그 뜻을 하나님 뜻이라고 응답을 해버려요. 멸망을 완성시키려고, 마음에 우상을 품은 백성들의 마음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마음의 품은 뜻 자체가 마치 하나님 뜻인 것처럼 응답을 줌으로 말미암아 멸망을 재촉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열왕기상 22장 길르앗 라못 땅을 차지하고 싶은 아합 왕이, ‘이스라엘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 명쯤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그들이 이르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마음에 우상을 품은 백성들의 깊은 뜻이 응답으로 와버려요. 그러니까 기도응답 받았다는 말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기도응답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한 기만의 응답일 가능성이 높다, 언제 기만적인 응답이 오냐? 하나님 뜻을 들을 마음이 없으면서 하나님 뜻을 찾는 형식을 찾고 싶은 두 마음 품은 기도가 극에 달할 때 거짓 예언자, 이 거짓예언자는 자기가 거짓말 한 게 아닙니다. 거짓말에 속은 예언자입니다. 거짓예언자라는 말은 속이려는 예언자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께 속임을 당한 예언자, 거짓예언자에 의하여 기도응답을 받습니다. 마음에 우상을 품은 백성을 위해서, 실제로 아주 복잡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장 정상적인 경우에는 하나님 백성의 마음도 순종모드로 가 있고 하나님 말씀을 맡은 엘로힘도 순종모드로 가 있는 경우가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 백성들은 순종모드로 가 있는데 하나님 말씀을 맡은 엘로힘 예언자적 인물들이 불순종모드로 가 있을 때는 하나님 백성들의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께 매개하지도 못하고 하나님 마음을 매개하지도 못하니까 백성들은 갈멜의 초장처럼 타들어가고 예언자들은 재물과 호세아가 말한 강도 떼 같은 성직자 계급이 출몰하는 겁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일군의 백성들이 있어야 하고, 그 하나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를 중개해주는 신령한 순종의 화신인 말씀을 맡은 자, 엘로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이 말씀하자마자 실제 이스라엘 민족과 예언자 모두, 둘 다 불순종하는 역사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실제 이스라엘 역사는 말씀 맡은 자들도 불순종했고 실제 이스라엘 백성도 불순종으로 응답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하는 순간 하나님은 불순종으로 응답될 것을 기대하겠습니까, 순종될 것을 기대하겠습니까? 순종될 것을 기대하겠죠. 이론적으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발설하자마자 실제 이스라엘 민족이 불순종한 그 순간에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는 계속 순종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해하려면 이 도표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독생자 의식을 가졌죠? 자기가 아버지 품속에 있다가 왔다고 했죠. 이것은 1500년간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과 말씀 맡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계속 파송하여 주신 역사가 없다면 독생자 의식은 불가능합니다. 독생자 의식은 예언자적 의식의 무한적분입니다. 독생자의식은 1500년간 예언자를 보내주신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의식이다, 독생자의식은 1500년간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역사를 만회하고 대속할 수 있는 완벽한 순종의 역사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선포될 때마다 이상적인 순종을 할 아들을 겨냥하고 선포되었다, 실제 이스라엘에서는 이상적인 순종을 할 아들을 겨냥하고 선포된 그 말씀을 일부는 순종하고 엘리야 이사야처럼, 대부분은 불순종했죠? 예수님의 독생자의식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 아벨부터 스가랴까지 세례요한까지 가느다란 순종자들의 순종경험을 극대 값으로 확장하면 나와요. 예수의 독생자의식을 간단하게 말하면, 이스라엘 1500년 동안 순종한 엘로힘들, 순종하여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들, 즉 하나님 말씀을 맡아서 순종하고 온갖 수난을 감수했던 예언자적 순종의 총화, 예언자적 순종의 적분자입니다. 이건 녹음하셔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3주 내내 고민해서 완성된 도표입니다. 그림이 안 나오네, 마음으로 좋은 그림을 그렸는데, 독생자 그림부터 잘 안 되더라고요. 이 그림을 지금 여러분이 이해하셔야 구약과 신약, 예수님 특히 요한복음의 독생자라는 말뜻을 이해할 수 있어요. 독생자는 불순종했던 야생적 아들들의 불순종 역사를 100% 대속하고도 남는 만큼의 순종을 바친 아들입니다. 불순종의 모든 횟수만큼, 불순종의 횟수가 7 3 500이라면 예수님은 700억 만큼 순종했다는 겁니다. 불순종의 횟수가 7억이다, 독생자이신 예수님,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 독생자의 순종의 횟수는 700억 만큼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예수님의 독생자 의식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 어떤 나라 역사도 이렇게 연속적으로 목적과 기획을 가지고 예언자를 파송해준 역사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목적지향적으로 계획이 뚜렷이 박혀 있는 역사입니다. 제가 우리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지금 여수 통영 고성 하동 일대에 가면 공룡 발자국이 나옵니다. 중생대, 백악기 공룡 발자국이 있는데 이건 뉴욕 메트로폴리탄, 자연사박물관에 가면 나오는 그 공룡발자국과 똑같은 겁니다. 고성에 가면 세계 3대 공룡발자국화석 기념관이 있습니다. 바위에 찍혀 있는 공룡 발자국이 압도적으로 큰 공룡, 여러분 여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무엇이 찍혔냐? 우리가 공룡발자국 화석이라고 하는 이유는 목적지향적으로 보폭이 일정한 채 공룡이 걸어간 발자국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공룡이 살았다고 입증할 수 있죠. 한반도에 공룡이 살았다는 게 나오죠? 일본에는 아직까지 안 나옵니다. 일본은 화산지역이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자기 나라에 공룡 발자국이 없는 것을, 일본은 참 놀라워요. 구석기 시대 유물이 없는 것을 슬퍼합니다. 그래서 일본 고고학자들 중에 한 사람이 어디서 뼈를 묻어다 20년 후에 파서 구석기 유물이라고 했다가 그게 발각돼서 자살했습니다. 일본 역사가들은 일본이 조선반도에서만큼 오래된 혈거인들, 사람들이 주거터전이 나오지 않는 것을 너무 슬퍼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뼈를 가지고 장난을 쳤습니다. 마장동 같은데 말뼈를 사다가 한 것 같습니다. 그걸로 죽기까지 한 것은 너무 심하죠? 더 파보기전까지 죽으면 안 되는데요. 여기서 공룡이 목적지향적으로 걸어간 것은 아르헨티나와 고성일대 3곳에서만 발견됐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 발자국이 목적지향적으로 연속적으로 인류 역사를 어떻게 끌어가시려는지 뚜렷이 당신 뜻을 계시하시고 발자국을 찍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책을 공부해야만 세계 만민의 역사책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책은 단순히 역사의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역사를 해석하는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 구약을 읽어야만 모든 세계 만민의 역사를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에 빛 아래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발자국이 예언자입니다. 예언자적 인물, 예언자라는 놀랍고 독특한 인물이 바로 공룡발자국입니다.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시대와 조건과 계급과 출신성분과 지역에 상관없이 코 아마라 아도나이,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그 야훼의 말씀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으면서까지 야훼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톱으로 켜 죽임을 당했던 이사야, 철퇴에 맞아죽은 예레미야, 25년 이상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죽어갔던 에스겔, 그 모든 예언자들은 왜 이렇게 비참한 운명의 주인공이 됐나요?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가 시퍼런 지상 권력들과 부당한 권력들 앞에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다는 것은 지배계급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배계급의 중심 죄를 지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마치 정치나 경제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너무나 미시적으로 아주 psychological한 영역만 적용하는 것은 거짓예언자들입니다. 모든 하나님 종들은 시대의 중심문제를 정조준하는 말씀을 받게 돼 있습니다. 저도 원래 이런 사람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다가 점점 대담해져서, 공부하다가 점점 시대의 중심문제로 진입한 것이지, 완전히 저는 소시민이었던 사람입니다. 완전 소시민, 그야말로 이런 공공의식이 매우 빈약한 소시민이었습니다. 인생에 큰 꿈도 없었고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었던 너무나 평범한 소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저에게 임하자마자, 임한다는 말은 드바라 아도나이 하야 엘, 이게 말씀이 임한다는 말이거든요. 드바라 아도나이 하야 엘 에샤아우벤 아모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말씀이 happen 한다는 말입니다. 구약에서는 말씀이 들렸다는 말을 안 쓰고 happen 한다는 말을 씁니다. 하나님의 감정과 의지를 담아서 시퍼런 지상 권력을 향해서 정조준하고 겨냥해서 터트리지 않으면 안 되는 불가항력적인 압박에 시달리는 걸 우리는 드바라 아도나이 하야 엘 에샤아우벤 아모스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말은 그 시대의 하나님의 권력,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는 거센 악한 권력을 정조준하는 말을 터트린다는 이게 하나님 말씀을 증거 한다는 거니까 이 말씀 안에서 위로가 나옵니다. 이 말씀의 역사 안에서 병든 권력 때문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가 나오고 눈물에 대한 슬픔이 나오는 겁니다. 시대의 중심 문제를 겨냥하지 않는 모든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기질이 강하건 소시민적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리 소시민적이라도 말씀을 연구하여 성령의 압박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우리 시대에 중심 죄악을 정조준하는 말씀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됩니다. 제가 너무 답답한 상황입니다. 저는 정치에 관심이 없습니다. 정치는 너무 힘든 일이고, 개인적으로 여행을 다니는 걸 좋아하고 붓글씨 쓰는 걸 좋아하고 시간 있으면 바둑 두는 걸 좋아하고, 체스를 해서 아내 이기는 걸 좋아하고, 딸을 이기는 걸 좋아하는 소시민입니다. 지면 또 씁쓸해서 창가를 바라보는 그런 사람이에요. 정치는 저한테 관심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연구할수록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통치를 결사적으로 맞서는 자들과 대결하도록 내게 대결의식을 심어주고, 나를 대담하게 만들어주고 이 말씀 때문에 희생을 당할 수도 있다는 용기를 주시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할 때 이 말이 하나님 말씀을 맡았던 구약시대의 엘로힘들의 역사에 비추어볼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엘로힘의 아들이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구약의 예언자들은 엘로힘이라고 불렸습니다. 시편 86 6절에, 엘로힘이라고 불린 역사가 있는데 내가 하나님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고 말하면서 특권을 누리지도 않고 내세우지도 않고 순종의 무한 부담만 지고 있는 나의 모든 언동을 신성모독이라고 하는 것은 너희가 너무 형식논리에 집착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오늘날도 말로 꼬투리를 많이 잡죠. 말은 맞는데 태도가 참 건방지다,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은 첫째, 아버지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 말뜻을 완벽하게 대행하는 무한순종의 부담을 진다는 뜻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것,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것,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신 것, 죽은 자를 살리는 것,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착한 일만 하는 이런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할 때 형식논리에 사로잡히면 안 되고 그 내용을 봐야 해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할 때 그 알짬은 하나님 명을 받아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무한히 착한 마음을 구현하는 거죠. 예수님의 비파송의식, 내가 세상에 파송 받았다는 의식은 예언자 의식의 절정이거든요. 예언자의식보다 더,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quantum leap, 양자역학적 도약이라고 말해요. 약간 진보한 게 아닙니다. 진보하다가 갑자기 엄청나게 진보하는 걸 우리는 양자역학적 도약, 영어로 quantum leap, 예언자들의 의식은 이 정도였어, 그런데 예수님은 갑자기 엄청나게 올라가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이걸 기억해야 해요. 소작쟁의 비유에서 처음에 종들을 보내다가 마지막에 아들을 보내죠. 그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들과 아들의 차이만큼, 예언자들은 거룩하신 지주이신 하나님의 소작료를 받으러 간 종들이 예언자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땅주인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단순히 예언자적 비파송의식이 아니라 독생자적 비파송 의식을 가졌습니다. 독생자적 비파송의식은 1500년 간 누적된 이스라엘 역사가 없다면 불가능한 의식이고 아담부터 지금까지, 아벨부터 세례요한까지 순종하는 의인들의 죽음의 역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의의가 있습니다. 아벨부터 성전 제단에서 죽임당한 스가랴, 스가랴 예언자까지 말씀을 맡은 자들이 희생당한 역사를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부터 세례요한까지 계속된 이스라엘의 불순종 역사를 의식합니다. 예수님은 한 개인이 1500년 동안 이스라엘 역사 속에 누적된 불순종을 만회하고 해소하고 거룩하게 변화시키기 위해서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종이 만일 아버지 품속에서 복종했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복종은 아버지 품속에 있던 독생자가 성육신 하셔서 빌립보서 2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예수님의 복종은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보다 격조가 다릅니다. 예수님의 복종은 아버지 하나님의 품속에 있던 그분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이 엄청나게 낙차 큰 자기 하강, 내려오는 그 과정은 이스라엘의 모든 불순종을 만회하고도 남는 엄청난 순종입니다. 채무보다 더 큰 돈이 갔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한 이 예수 그리스도, 만일 평범한 사람의 죽기까지의 복종, 예레미야나 이사야의 복종은 의미가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그 엄청난 복종의 힘으로 1500년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을 만회했을 뿐만 아니라 아담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까지 오는 모든 인류의 불순종을 다 상쇄하고도 남는 엄청난 순종을 바쳤다는 것이 독생자의식입니다. 예수님이 독생자의식을 쓸 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역사, 둘째는 이스라엘 민족이 대표했던 인류전체의 불순종 역사,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는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마음, 예수 안에서 인류전체를 의식하는 마음은 어디 있었습니까? 아벨의 피부터 스가랴의 피까지 그 역사, 예수님까지 썼던 말 중에서 창세 이후로’ ‘첫 사람이라는 말을 썼던 맥락, ‘아벨이라는 말을 썼던 맥락 안에서는 예수님 안에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는 마음도 어렴풋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렴풋이 있었지만 아브라함부터 세례요한까지, 인류역사에 말씀이 한 번 선포될 때마다 순종을 적립하기도 하고 불순종을 적립하기도 한 엘로힘들의 역사, 이스라엘 민족도 말씀이 하나님 입에서 나갈 때마다 순종을 하기도 하고 불순종하기도 했죠. 말씀을 맡은 예언자들도 순종하기도 하고 불순종하기도 했죠. 그러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는 아버지 하나님 말씀이 들리자마자 한 번도 불순종을 적립하지 않고 순종을 적립했습니다. 그 순종을 적립한 힘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한 힘이 나온 것이지, 우발적으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결심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품었던 순종을 육신의 모양으로 나타나서 가장 불리한 여건 속에서 순종을 드린 예수님의 역사가 바로 세상에 독생자를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입니다. 로마서 8 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장 암송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 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한다는 것은 이런 스토리를 안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려면 이 구도를 이해해야 해요. 하나님은 말씀하자마자 실제로는 100% 순종할 아들을 겨냥해서 한 말입니다. 실제로 그 말씀을 받는 아들, 실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말씀을 맡았던 엘로힘들은 때때로 실수하고 때때로 허물입고 때때로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고 하는 기가 막힌 생각을 하게 됐는가를 추정해볼 때 이스라엘 역사 안에 있었던 예언자들의 역사가 없으면 예수님과 같은 이런 의식은 불가능했다고 말씀드립니다. 다시 말합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는 하나님의 발자국이 목적지향적으로, 매우 하나의 기획성을 가지고 연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나타났다고 했죠. 하나님 발자국이 일관성 있게 나타났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부터 세례요한까지 일련의 예언자들이 계속 출신성분과 지역과 시점과 계급성분과 직업과 상관없이 계속 나타났다, 이런 역사는 그렇다면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세계 어떤 역사도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고 대신 중계하는 예언자적 인물이 연속적으로 기획적으로 목적지향적으로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그럼 다른 나라 역사에는 이런 게 도무지 없습니까? 아닙니다. 도무지 있습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제일 두꺼운 900페이지 되는 <예언자들>이라는 책의 제일 마지막 챕터, 세계도처의 예언자들이라는 챕터를 보세요. 세계도처의 예언자들은 파편적으로 산발적으로 비연속적으로 불명료하게 나타났습니다. 그 말은 통영과 여수는 공룡발자국이 암반에 뚜렷이 새겨져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공룡발자국인지 사자발자국인지 모르는 애매모하고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갈지자 같은 파편적인 발자국이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룡발자국이 목적지향적으로 드러난 그 고고학적 유물을 가지고 희미한 것을 해석해야 할까요? 희미한 것을 가지고 뚜렷이 드러난 것을 해석해야 할까요? 더 명료한 계시를 가지고 덜 명료한 계시를 해석한다, 칼빈의 <성경해설> 1권 책입니다. 뚜렷이 드러난 발자국을 가지고 희미하게 드러난 발자국을 해석한다, 오늘 여러분께서 공부해야 할 부분은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이스라엘 역사를 잘 봐라, 김회권 목사가 한 것을 잘 봐라,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은 구약역사에서 신성모독이 아니라 오히려 철두철미하게 예언자적 역사의 정점에 서 있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변호합니다. 너무 멋진 변호입니다. 두 번째로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 말하는 맥락을 잘 보아라, 보통 하나님 아들이라 말이 갖는 특권적 지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 뜻 앞에 나를 zero, 0으로 돌리는 자기 부인적 맥락에서만 하나님 아버지 아들이라고 썼다, 세 번째로 내가 하나님 아버지 아들이라는 주장만 했느냐? 아니다, 내 주장은 열매를 맺었다, 각종 선한 일이다, 마태복음 11 4-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가 하나님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고 말할 대 이런 선한 일을 하는가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 독생자라는 자기 의식을 세 가지 점에서 변호했습니다. 첫째 구약역사 예언자 역사에서, 말씀 맡은 자를 엘로힘이라 불렀던 역사에서입니다. 둘째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하는 맥락의 관점에서 즉 순종의 무한책임을 강조할 때만 썼다, 비특권적인 하나님 아들을 강조했습니다. 셋째 효용의 관점에서,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을 때는 선한 열매를 가지고 한 것이지 절대로 주장만 가지고 한 것이 아니다, 열매의 관점을 효용론적 관점이라고 합니다. 제일 처음 관점은 구약예언자 역사의 관점, 둘째는 맥락의 관점, 셋째는 효용의 관점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말을 했단 말이에요.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가서 했던 설교를 일부분 읽어드립니다. 사도행전 10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결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이다, 로마서 8 16-17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잘 보세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할 때 세 가지 점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할 때는 구약역사의 빛 안에서 하나님 아들이 걸어간 궤적의 길을 볼 때 특권의 길입니까? 당파적 이익입니까? 교회적 종교적 이익입니까? 아닙니다. 철두철미하게 그 시대 목마른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간, 영적 등고선을 따라 올라가서 하나님 음성 가청권 내로 고독하게 걸어간 사람들이 하나님 아들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가 하나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인도함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들입니다. 이걸 강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주장을 할 때, 하나님 자녀라 주장할 때 영의 인도함을 받는가 자기점검이 필요합니다. 영의 인도함을 받을 때 두 가지가 나타납니다. 첫째 영적 등고선을 따라서 신명기 5 27절처럼 된다, 즉 점점 하나님 말씀을 잘 듣는 등고선을 따라 올라간다, 둘째 당파적 종교적 이익을 내세울 때 쓰면 안 되고 우리가 희생해야 할 때만 해야 한다, 우리의 배타적 이익, 우리의 모든 경제적 이익들, 정치적 이익들을 내려놓을 때만 하나님 아들이라고 써야 한다, 직장에서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큰소리 뻥뻥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겁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끝까지 은닉해야 합니다. 언제 기독교인임을 드러내야 하면 죄를 지으라고 할 때 드러내야 합니다. 그렇게 드러내야지 맥락 없이 나 부장인데 기독교인이야, 우리 부서에서 조심해야 해, 불교 조심해야 해, 이런 식으로 공포를 놓는 것 굉장히 악한 겁니다. 끝까지 향기를 표하다가 마지막 은퇴할 때, 부장님 혹시 종교가 뭐하세요? 물을 때 아주 뜸을 들이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이렇게 해야지, 처음부터 기독교를 표방하는 건 너무 어리석은 겁니다. anti missionary, 반선교적인 겁니다. 초대교인들이 언제 기독교인임을 표방했느냐면 로마의 공공부조에 나가지 못할 때, 로마 제우스 신전을 축조하지 못할 때 그때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못 간 것이지, 기독교인이라고 설친 게 전혀 없습니다. 착한 일 할 때는 절대로 기독교인인 것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철딱서니 없습니다. 하나님 영을 받는 하나님 자녀들은 자기 부인의 현저한 능력이 생깁니다. 셋째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임을 증거 하려면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 사도행전 10 38, 마태복음 11 4-5, 이런 일을 하는 교회가 있을 때는, 하나님 어디 계세요? 이런 말이 없습니다. 이걸 하나님 말씀 맡은 이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맡은 이가 이런 활동을 하면 무신론은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어디 있습니까? 무신론은 하나님의 존재론적 질문 아닙니다. 99%의 무신론은 하나님의 효용론적인 질문입니다. 무신론의 99%는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최종적 형이상학적 판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효능이 무엇이냐? 효능론적 질문이에요. 이건 도스토예프스키가 인정했던 질문이에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 빌리 그래함과 오랫동안 집회를 같이 했던 사람이 찰스 테프였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이여 안녕 하면서 무신론자가 됐어요. 그 이유가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도무지 도와주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성이 난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리석어요. 아프리카에 있는 그 어린 아이들은 하나님이 위에서 도와주는 게 아닙니다. 말씀 맡은 지상에 있는 이 엄청난 교회가 돕고도 남습니다. 한국교회가 아프리카의 기근을 다 도울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 돈은 아프리카의 빈민을 다 도울 수 있어요. 우리가 실천하지 않고 그 여백에 생기는 무신론을 다시 하나님 탓,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효용론적 질문을 형이상학적 질문으로 돌리게 만드는 이 모든 죄가 우리의 본성 안에 있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안 하니까 하나님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 생기고 무신론자가 생기는 거예요. 여러분이 혼날 사람이 아닌데 그만합시다. 혼내는 거 아닙니다. 나 혼자 거울 앞에서 막 흥분하다가 하는 겁니다.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이런 생각을 하면요. 이런 정교한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소리치면 그건 우리가 잘못한 거예요. 효용론적 무신론에 대한 답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0 38, 마태복음 11 4-5, 성령의 기름 붓듯 부어 선한 일을 하는 교회와 신자가 많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면 무신론은 적어도 사라진다, 그렇게 말할 수 있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한국교회와 가향교회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은 하나님 자녀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자의식을 가질 때 선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 자녀라는 그 말을 거룩하고도 자기 부인적인 맥락에서 쓰면서 하나님 아들이라는 그 말을 쓸 때 시대의 중심죄악을 겨냥하면서 우리 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쓰게 하여 주소서.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엄청난 구도 속에서 하나님과 당신은 하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깊은 속뜻을 만분의 일이라도 깨닫게 하여 주시고 진정한 독생자 예수님의 보혈공로 의지하여 작은 독생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기도)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저희들이 마태복음 11 4-5, 사도행전 10 38절과 같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지 않기 때문인 것을 고백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무신론을 이겨내게 도와주시고 무신론을 해소할 만큼 착한 일에 투신된 교회가 되게 도와주시고 이 귀한 헌물이 하나님 백성 살리고 하나님 우리 바깥에 있는 백성 살리는데, 억조창생 살리는데 거룩하게 낭비되는 물질 되게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생계가 없어서 거리를 방황하면서 자기 존엄을 확신하지 못하는 아들딸이 있습니다. 이 완악한 세상에서 한 데나리온 벌 수 있는 포도원을 붙여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용기주심과 격려하심이 오늘 머리 숙인 모든 가향의 지체들과 그들의 가족과 일터위에 자녀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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