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눅 17:11-19)
오늘 우리 교회는 맥추감사절 예배로 드립니다. 맥추감사절은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정하신 절기입니다. 출23:14절에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이 명령에 따라서 일년에 삼대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유월절'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지킨 절기로 해방절기입니다. 두 번째 절기가 바로 오늘 우리가 드리는 '맥추절'인데 이날은 오순절이라고도 하고 칠칠절이라고도 하는 절기로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절기로는 '수장절'로 일년 동안 농사를 지은 것을 창고에 들이고 가을의 들판에 초막을 짖고 일주일 동안 생활하여 조상들이 광야에서 40년 간 초막을 짖고 생활하던 것을 기념하며 지키던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우리가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할/ ◀제목 소개!▶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감사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할/
①예수님의 감사기도를 찾아보겠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감사 기도 후에는 반드시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⑴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요11:38).
베다니 마을에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3남매가 조용하게 살았습니다. 아주 다복하게 생활하는 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가며 자주 그 집에 들러 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3남매들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비통해 했습니다. 이미 무덤에 뭍인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뒤늦게 소식들 듣고 찾아오신 예수님은 나사로가 묻힌 무덤으로 가십니다. 가셔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아버지여 내 말을 들어주심을 감사하나이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아주 특별한 기도입니다. 그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돌을 옮겨놓으면서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하고 말합니다. 그 말은 소생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돌을 굴려 보았자 헛수고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감사의 기도부터 하십니다. '내 기도를 들어주심을 감사하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이렇게 죽음의 현장에서도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기도가 응답되어 죽은 나사로가 살아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할/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이것이 상당한 의식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오늘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뒤로 슬픔과 눈물이 있어야 할 초상집에서 우리는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하고 찬송을 부릅니다. 그리고 '이 영혼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의 기도를 합니다. 부모가 죽은 자리에서 부름 받은 것을 감사하며 감사의 기도를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영원한 천국을 믿고 바라보기에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멘!/
⑵아주 보잘 것 없는 떡과 물고기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하셨습니다(요6).
벳세다 광야에 5천명이 모였습니다. 그때가 마침 유월절이 가까운 때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일 년에 세 차례의 명절이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명절이 유월절입니다. 이 유월절에는 12살 이상이면 예루살렘으로 거의 다 모입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근방에 사는 유대인들이 유월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벳세다 광야에 모인 것입니다. 그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주님의 말씀에 경청했습니다. 주의 말씀을 달고 오묘한 말씀이며 영혼의 양식이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무리들이 듣고, 심령의 갈증이 해소되며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말씀에 도취되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릅니다. 해가 지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들은 모두 굶주렸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안드레가 어린아이에게서 가져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올렸습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음식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11절에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침내 그곳에 모인 5천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할/
여러분, 성도가 음식을 앞에 놓고 감사의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아멘!/ 그런데도 이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음식이 나왔을 때 진지하게 감사의 기도를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는 감사의 기도를 하지만 음식점에서 집에서 음식을 앞에 놓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이 정상적인 신앙인입니다. /믿/ 예수님은 그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를 하나님 앞에 축사하셨습니다. 축사하셨다는 말은 감사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어도, 주어도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5천명이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부스러기를 주워 모았습니다. 열 두 광주리였습니다. /할/
▶오병이어의 기적의 비결은 오직 감사 한 가지였습니다. 감사만 하셨는데도 축복이 따라 왔습니다. 이것이 감사의 능력입니다.
㈀감사만 했는데도 '원대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할/ 감사하면 오늘도 '원대로'의 축복이 임합니다. /믿/
㈁감사만 했는데도 '먹고 남는 풍요'가 있었습니다. 감사 전과 감사 후가 전혀 다릅니다.
가난의 언어가 부요의 언어로 바뀌어졌습니다. '이백 데나리온도 부족하다.'는 말이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로 바뀌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가진 오병이어가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는 빈곤의 언어가 '저희가 배부른 후에'라는 풍요로 바뀌었습니다. 모자랄 것 같다는 말이 '남았나이다'라는 즐거운 비명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중간에 있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축사입니다. 감사만 해도 풍요가 있습니다. /아멘!/
⑶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도 감사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마26:26-28절에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 감사의 기도는 죽음 직전 전날 밤에 하신 감사의 기도입니다. 내일이면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저녁식사를 하시던 중 '이 떡을 받아 먹으라, 이 떡은 나의 살이니라, 또 이 포도주를 마시라, 이 포도주는 나의 피니라'하고 나누어주십니다.
마지막 만찬에서의 감사의 기도, 이것이 기도의 묘미입니다. 신앙생활의 깊음은 감사의 삶에 있습니다. 감사도 그냥 일상적인 감사가 아니고 정말 극한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이 감사의 기도입니다. /할/
▶어느 불구자가 팔다리를 모두 잃었습니다. 몸통만 남았습니다. 이 불구자가 붓글씨를 쓰는데 입으로 붓을 물고 글씨를 썼습니다. 한참 글씨를 쓰다가 벅차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만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입을 남겨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할/ 이것이 신앙의 묘미입니다. 거기에 얼마나 깊이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상황이 전혀 감사할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은 정신적으로 극한 상황입니다. 이 만찬을 마치고 곧 산으로 올라가서 밤새워 철야 기도해야 합니다. 내일새벽이면 체포됩니다. 그리고 아침 9시면 십자가에 달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죽음의 순서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룟 유다가 와 있습니다. 천연스럽게 와서 주는 대로 받아먹습니다. 발을 씻겨주니까 아무 거리낌 없이 내 발도 씻겨 달라고 발을 내 맡깁니다. 그러니 그 모습을 보는 예수님의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도 개의치 않고 주님은 떡을 들고 포도주 잔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시며 먹고 마시라 이것은 나의 살이고 피라 하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할/ 그래서 이것이 진정한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멘!/
⑷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주님은 감사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요9:30절을 보면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다 가고 십자가에서 6시간동안 신음하시다가 마침내 운명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복음서마다 예수께서 마지막 운명하시는 모습을 달리 표현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마지막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더라'고 표현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고 운명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아주 극적인 장면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19:30절에 보면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 '다 이루었다'는 말은 아주 '만족하다'는 말입니다. 또 이 말은 '아버지께서 잘 감당하고 마치도록 도와주심을 감사합니다'라는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감사의 기도입니다. 모두 극한 한계상황에서 감사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의 감사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믿/아멘!/
②본문에서 감사한 사람은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뿐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이 말은 우리 인사말 가운데 표현 상으로는 가장 좋은 인사입니다. 해석을 붙이자면 잘 먹으라는 말은 '건강 하라'는 말이고, 잘 살라는 말은 '부자 되라'는 말입니다. '건강하고 부자 되라'는 의미의 대단히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우리 인사말이 욕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인사말을 듣고 유쾌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이 아름다운 인사말이 욕이 되었습니까?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아홉 명에게 잘 먹고 잘 살라는 인사가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⑴본문의 배경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그 지형은 아주 묘한 곳입니다. 사마리아와 유대 국경 사이의 버려진 아주 척박한 땅입니다. 그곳은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는 버려진 지역입니다.
그 지역에 불쌍한 나환자들이 촌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을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소외된 사람, 불행한 사람을 찾아가시는 사랑의 주님이심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거기에 열 명의 나환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애절하게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열 명이 제사장에게 가다가 다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이방인이 돌아와서 예수님 앞에 감사를 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 이방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며 구원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한 사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돌아와 감사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 이방인은 예수님의 뜻을 이루었고, 예수님 앞에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열 명의 환자 가운데 아홉 명은 병만 고쳤습니다. 그들은 주님 앞에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주 앞에 나와서 사례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라아 사람은 돌아와서 감사함으로서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는 병도 고치고, 구원도 받았습니다. /할/
⑵문등병자들의 처지는 어떻습니까?
이 문둥병이라는 것이 언제 걸리는 지도 모르게 걸려 가지고 서서히, 서서히 죽어 가는 그런 병입니다. 참 비참한 병입니다. 손발이 떨어지고, 코가 떨어지고, 눈알이 빠지고 이러면서 마지막에 비참하게 죽어 가는 문둥병인데, 이 당시 이것은 난치병이요, 전염병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이 병에 걸렸다 하면 가정에서 격리됩니다. 사회에서도 버림받습니다. 심지어는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어느 동굴 같은데서 모여 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얼마의 식량을 보내주면 그걸 먹고살아야 합니다. 만일에 식량이 부족해지면 때를 지어 동네로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서 얻어먹는 그런 집단입니다. 여기 오늘 열 명이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보여라' 제사장은 당시에 의사입니다. 그런고로 문둥병이 나았는지 문둥병이 아직 있는지는 제사장이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너는 나았다' 라고 인정을 하면 그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뭐 안수한 것도 아니고 안찰한 것도 아니고 깨끗케 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제사장에게 보여라' 이 말을 듣고 가야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그러나 이 사람들이 이 만큼의 믿음이 있었고 이 만큼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그 제사장에게 보이려고 가는 길에 보니 나았습니다. 얼마나 희한합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바로 그 순간 사마리아 사람 하나는 길을 돌려서 예수님께로 와서 발 앞에 꿇어 엎드리고 사례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아홉은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⑶'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마땅히 왔어야 할 사람이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섭섭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섭섭해하시는 것은 성경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은 의외의 말씀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쳐주셨고 눈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하셨고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려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은혜를 베풀고 감사인사를 받으려고 하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고쳐주고 마셨습니다. 은혜를 베풀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유난히 아홉 사람 나병환자에 대해 섭섭해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해 섭섭해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감사해야 할 사람이 감사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섭섭해하십니다.
우리가 자식을 길러보지만 부모로서 자식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어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주는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마음 한 구석에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면 기쁩니다. 부모의 마음을 알아주면 고맙고 눈물이 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은혜를 모르면 섭섭한 것입니다.
⑷다시 한 번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돌아온 한 사람에게 '고맙구나, 너 하나라도 돌아왔구나' 이렇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굉장히 깊은 탄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 명이 다 나음을 입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자조와 안타까움이 포함된 말입니다. '아홉 명도 당연히 찾아와서 내게 감사해야 되거든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주님은 그 아홉 명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감사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고도 예수님과 단절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데 복 받고는 그만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은혜 받고 예수님을 등져버리는 이 아홉 명에 포함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돌아온 한 사람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입니다. 우리는 그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그 비유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그냥 가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가지이지만 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는 이것이 나무 밑의 뿌리까지도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뿌리에게 빨아올린 수분과 영양분을 먹고 이 가지도 함께 사는 것입니다. 뿌리는 땅에 있는 수분과 영양분을 다 섭취하여 나뭇가지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가지가 땅에 있는 수분까지도 함께 호흡을 하는 생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나뭇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므로 가지에서 줄기가 나고 잎이 맺히고 이 잎이 태양을 받고 빛을 받고 공기 안에 있는 온갖 영양분을 섭취하면서 다시 말하면, 우주공간과 호흡을 하면서 이 나뭇가지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나뭇가지입니다. 이 가지가 붙어만 있으면 땅을 호흡하고 우주를 호흡하는 생명체가 됩니다. 그러나 이 나뭇가지가 몸에 붙어 있지 않고 떨어져 나가 있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상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는 모든 것을 호흡합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 있으면 하나님은 나를 다스리기 위하여 온 우주를 움직이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한반도 전체의 사람들을 나 하나를 위하여 움직이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뭇가지는 땅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둥지에 붙어 있으면 땅과 관계가 있고 태양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으면 우주를 통치하시는 그 분은 이 우주의 모든 만상을 통하여 나를 간섭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단절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 병 나음을 받은 아홉 명은 주님과 끊어졌습니다. 이 아홉 명의 모형은 오늘 우리들 가운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교회는 다니면서도 영적으로는 예수님과 단절되어 감사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야 됩니다. /믿/아멘!/
⑸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복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돌아와 감사한 그 한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할/ 열 명이 다 병 고침을 받았지만 예수께 돌아와 감사를 표한 한 사람만 구원을 받았다는 선언을 듣게 된 것입니다. 육신의 병 고침이 곧 영적인 구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감사 없는 신앙은 실상 위험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몰랐던 아홉 사람도, 기도도 했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도 했지만, 구원을 받았다는 선언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들은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시간표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시간표는 그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믿으십시오. 그러나 내가 영적으로 예수님과 단절이 되어 살면 하나님 앞에 깨닫지 못하고 감사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살면 하나님의 시간표가 내게 복이 되지 않습니다.
이 역사 속에, 이 우주 안에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는 이 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살 때, 나 하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천하의 좋은 것들을 예비하고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감사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감사는 마음만 먹으면 합니다. 감사는 특정한 일에, 특정한 기간에, 특정한 사람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적인 감사는 '항상' '범사에' '누구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맥추감사절기를 주셨고, 이 절기를 통하여 감사의 제물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할/
여러분, 우리의 신앙 생활에 혹시 감사가 빠져 있다면, 다시 한번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③감사가 무엇입니까?
⑴감사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감사해야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사해야될 가장 첫 번째 이유는 감사는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혼자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좋아한다고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때까지는 그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원래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게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주신 선물을 받는 손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로 받으면서 입으로 나오는 말은 '감사합니다.'입니다.
아무리 장작을 많이 쌓고 석탄을 많이 채굴해도 타지 않으면 불이 아닙니다. 종은 칠 때까지는 쇠붙이입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드러날 때만 사랑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믿는 자에게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대답입니다. 주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감사하십시오. 감사하지 않으면 믿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할/
⑵감사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시103:2절에 '너희는 여호와의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어떻게 시작됩니까? 그 분이 내게 행하신 일을 기억함으로 시작됩니다. 맞습니다. /아멘!/
그런데 그 반대가 무엇입니까? 배은망덕이지요. 나는 그처럼 애쓰고 수고했는데 상대편이 잊어버리면 얼마나 기분 나쁩니까? 망덕입니다. 감사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할/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 많이 감사해야될 그런 민족입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이만큼 사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께서 이 민족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내 개인의 삶 속에 함께 하신 그 축복들을 헤아려가면서 기뻐해야 됩니다. 감사해야 됩니다.
⑶감사는 깨달음과 직결됩니다.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깨달음으로써 감사로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적게 받은 것이 아니라 적게 깨닫고 있기 때문에 감사를 적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기를 다 같이 마시고 살고 있지만 이 공기가 하나님의 은혜로 내게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공기를 마시면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공기를 마시면서 하나님을 의식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깨달음의 의미와 함께 합니다. 열 사람은 다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똑같이 예수님 앞에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깨달음을 입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었구나,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결과였구나'라고 깨닫고 돌아와서 감사했습니다.
올해도 전반부가 다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뒤돌아보면 우리의 믿음의 분량에 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습니다.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돌아갔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한 아홉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예수님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깨닫고 돌아와 예수께 감사했지만 아홉 사람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때부터 이들의 인생관은 극과 극으로 갈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부르짖을 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예수님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다가 병이 나을 때까지도 열 명 모두 예수님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아홉 명은 그 때부터 예수님과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은혜를 받고 예수님과 끊어졌습니다. 병 고침을 받고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할/
⑷감사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왜 감사하는 것이 힘듭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감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감사헌금을 하면 누가 좋겠는가? 하나님이 좋겠지, 교회가 좋겠지, 담임목사님이 좋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감사를 하지 못하고 하더라도 힘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10:12-13절에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듭니까?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도를 행하고 섬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13절의 말씀은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명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보고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왜 경외하라고 하십니까? 왜 섬기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내가 '네 행복을 위하여 권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내가 감사를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내가 충성을 안 해도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충성하고 감사하라고 하십니까? 감사하는 너의 행복을 위하여 너의 감사를 구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가 나를 순종하라. 너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네게 요구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감사하는 우리가 복 받도록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아멘!/
⑸감사는 생각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십시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란 작품이 있습니다. 어느 해 가을, 초라한 3층 지붕 밑 방에 폐렴을 앓는 '존지'란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폐렴으로 계속 고생하면서 삶의 의지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병상 건너편 집 담 장의 담쟁이 넝쿨을 바라보면서 그 넝쿨의 마지막 잎이 떨어지면 자신의 생명도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드디어 담쟁이 넝쿨의 마지막 한 잎새가 남았습니다. 존지는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마지막 잎새가 남은 그 날 밤은 유난히 비바람이 심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존지는 마지막 잎새가 떨어진 것을 보려고 커튼을 젖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지 않고 아침햇살에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마지막 잎새가 붙어 있었습니다.
원래 그 마지막 잎새는 이미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집 1층에 사는 무명의 노(老) 화가 '베어먼' 할아버지가 담 장에 마지막 잎새를 그려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 잎새가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존지는 생각했습니다. '저것도 떨어지지 않는다면 내 생명도 쉽게 없어지지 않을 거야' 결국 그 그려진 마지막 잎새가 존지를 병에서 일으킵니다.
생각의 힘은 생각을 초월합니다. 죽는다고 생각하면 살 확률이 현저히 줄고, 산다고 생각하면 죽을 확률이 현저히 줍니다. 오래 전에 광고 멘트 중에 '땅은 작아도 생각이 크면 된다'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생각의 크기가 땅의 크기보다 중요합니다. 성공을 생각하면 실패할 확률이 크게 줄어들고, 실패를 생각하면 성공할 확률이 크게 줄어듭니다.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빌1:3절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세요!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살면서 이 사도 바울의 고백을 많이 하십시오. 배우자에게 '여보!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해요'라고 고백하고, 부모님께도 '어머님! 아버님! 저는 어머님과 아버님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해요'라고 말하고, 자녀들에게도 '얘들아! 나는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한단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러면 더 감사한 생각이 들고, 삶이 정말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아멘!/
저도 우리 성도님들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이렇게 행복하게 목회하는 것은 우리 교회 성도들과 온라인 성도들의 사랑과 기도 때문입니다. /할/
여러분, 항상 우리의 생각의 방향을 잘 잡으십시오.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하면 감사할 일은 없고 원망할 일만 생깁니다. 원망이 많은 것은 환경이나 성품이 나쁜 것보다 생각의 방향을 잘못 잡았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을 감사하는 방향으로 조금만 바꾸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분이 우산 없이 비를 맞고 가다가 조용히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비가와도 빗물이 눈으로 흐르지 않도록 눈썹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가다 생각해보니까 또 감사할 일이 생겨서 그는 또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 콧구멍을 밑으로 뚫어주셔서 비가와도 숨 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할 때마다 감사거리를 발견하고 감사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할/
삶에는 밝은 부분도 있고, 어두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때 밝은 부분을 보기로 작정하고 감사를 선택할 수도 있고, 어두운 부분을 보기로 작정하고 불평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는 선택입니다. 왜 삶이 피곤하고 힘들게 느껴집니까? 감사를 잃어버리고 서로 시기하고 원망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한 교회에 다니는 두 교인이 서로를 너무 미워하니까 천사장이 안타깝게 여기고 서로를 축복하며 살도록 그들에게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축복하며 기도하면 그 기도대로 응답하고, 옆 사람에게는 기도한 것의 두 배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옆 사람 때문에 두 배를 받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 천사장의 제의를 듣고 한 사람이 100억을 달라고 하려는데 옆 사람이 200억 받는 것이 너무 배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금방 기도제목을 바꿔 기도했습니다. '천사님! 저에게 100원만 주세요!' 그러자 옆 사람은 겨우 200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200원을 들고 너무 화가 났습니다. 모처럼 천사장의 중재로 미움을 털어 버리려고 했는데 옆 사람이 더 미워졌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천사님! 저의 한쪽 눈을 뽑아주세요' 그 기도는 옆 사람의 두 눈을 빼달라는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면 삶이 얼마나 힘들어집니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시기하는 본능이 있기에 감사를 굳게 작정해야 합니다. 이해하기로 작정하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어느 날, 한 미국 성도가 기차를 타고 가면서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옆자리에서 쿵 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까 덩치가 큰 흑인 여자가 아이들 5명을 데리고 자기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갑자기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그의 입에서 감사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제 옆에 앉은 이 여자가 제 아내가 아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을 바꾸면 어느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감사하기 시작하면 그 감사가 어려운 상황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위대한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무엇보다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구하십시오. 고통을 축복으로 바꾸고,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태도가 바로 감사입니다. 행복은 많이 가진 사람의 것이 아니라 많이 감사하며 누리는 사람의 것입니다.
⑹가장 훌륭한 성도는 누구일까요? 기도하고 헌신하는 사람도 훌륭한 성도이지만 무엇보다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철이 들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철드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바로 감사입니다. 구원의 기준은 십자가의 복음이지만, 철이 드는 기준은 감사하는 태도입니다. /할/
⑺그럼 범사에 감사하는 태도를 가지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겸손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한 가지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우리는 원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처럼 '나는 원래 사형수였는데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것도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고난조차 은혜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생각하고 자기를 작게 생각하는 사람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자기를 작게 여기면 상대방이 크게 보이고 감사가 나옵니다. 아내는 거울 볼 때마다 점차 커지는 자신의 몸집을 보며 남편에 대한 감사가 깊어집니다. '이런 나를 찾아 밤마다 집에 와주는 남편이 고맙다.' 남편도 자기를 작게 여기면 아내에 대한 감사가 나옵니다. '나 같은 못된 남편을 보고도 계속 살아주는 아내가 고맙다. 내가 여자라면 나는 절대로 나 같은 사람과 못 살 거야'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반면에 자기를 높게 보면 생각할 때마다 불평뿐입니다. '내가 어쩌다 저런 사람을 만나서 이런 고생을 하나? 정말 큰 실수다.' 그렇게 자기를 높게 보니까 항상 손해 본 것 같습니다. 그런 자신에 대한 거품평가를 없애야 삶에 IMF가 없게 됩니다. 실속도 없이 자기를 높이면 감사가 없어지고 그때부터 삶이 불행해지지만 자신을 바르게 평가하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어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할/
⑻영성이 무엇입니까? 철든 믿음을 가지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사물을 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게 예쁜 구석이 있음을 발견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아! 저 사람에게 저렇게 좋은 면이 있었다니' 그처럼 무엇이든지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면 불행이 틈타지 못하지만 더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면 눈앞에 다가온 축복도 놓치게 됩니다.
▶미국 보스턴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의 가는 길이 전혀 달랐습니다. 형은 열심히 매사에 헌신하는 삶을 살면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매사에 이기적으로 살다가 결국 친구를 죽여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동생의 사형선고 소식을 듣고 형은 주지사를 찾아가 끈질기게 사면 요청을 했습니다. 마침내 몇 년 만에 사면장을 받아들고 면회를 가서 동생에게 물었습니다. '존! 앞으로 감옥에서 나가면 어떻게 살겠니?' 그때 동생이 말했습니다. '내가 나가면 나를 잡아넣은 사람들에게 반드시 복수할 거야' 그 말을 듣고 형은 동생이 더 큰 죄를 지을 것 같아 그 사면장을 찢어버렸다고 합니다. /할/
원망은 눈앞에 다가온 축복을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감사는 축복을 예비하는 최고의 길이고, 원망은 망하는 최고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불행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며 원망하는 무책임한 사람을 결코 축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을 원망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도 원망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선하게 살겠다고 다짐하고, 원망할 것이 있어도 그 속에서 감사하는 책임적인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해주십니다. /아멘!/
⑼감사하는 신앙은 헌신이 따릅니다.
헌신은 사람의 마음도 움직이고,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입니다. 이제 신앙생활의 틀을 '받는 삶'이 아니라 '드리는 삶'에 두십시오. 드리면 남에게도 유익이 되지만 무엇보다 자신에게 유익이 됩니다.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헌신하면 무엇보다 믿음이 커집니다. 능력은 사용해야 커지듯이 믿음도 헌신의 모험을 해야 커집니다.
헌신이 없으면 점점 무력해지지만 헌신의 모험을 하면 점점 능력 있게 됩니다. 헌신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축복의 열매가 돌아오게 됩니다. 특히 어려울 때는 더욱 헌신하려고 하십시오. 어려울 때는 본능적으로 불평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때 서로 격려하며 도와주며 헌신하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교회에서도 서로 헌신하며 감사할 때 교회의 분위기도 좋아지고 교인도 행복해집니다.
⑽헌신하면 누구보다 아름다운 걸작 인생이 됩니다.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베어먼 할아버지는 존지를 살리려고 추운 밤에 담쟁이 넝쿨의 마지막 잎새를 힘써 그렸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에게 폐렴이 생겨 결국 존지가 회복되던 날 그 할아버지가 대신 죽습니다. 그 베어먼 할아버지는 평생 걸작품하나 남기지 못한 무명 화가였지만 그의 '마지막 잎새'는 어느 작품보다 훌륭한 작품이었고, 그 할아버지의 삶 자체가 최고의 작품입니다.
이 세상에 헌신처럼 복된 것은 없습니다. 어떤 분은 가장 헌신하면서도 그 헌신을 내세우지 않고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감사하는 마음은 꽃밭과 같고, 불평하는 마음은 가시밭과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에 따라 감사하는 샘이 될 수도 있고. 원망하는 시궁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민수네 식구 4명이 복권에 당첨되어 큰집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가 초등학교 1학년인 민수에게 '이사 온 집이 마음이 드나'고 하면서 묻습니다.
민수는 '예, 마음에 꼭 들어요. 예전엔 한 방에서 모두 잤는데 이제는 내 방이 따로 있고요. 누나도 방이 따로 있어요. 그런데 우리 엄마만 안됐어요. 아직도 아빠랑 한 방을 쓰고 있거든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보는 관점에 따라 말을 하게 됩니다.
두 눈이 보이지 않고 말도 하지 못했던 '헬렌 켈러'는 말합니다. '난 너무나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내 인생에서 행복하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습니다.'
프랑스의 황제가 되어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쥐었던 나폴레옹은 말합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행복한 날은 엿새를 넘지 않았다네'
도대체 행복이 무엇이기에 두 사람의 생각이 이처럼 다를까요? 철학자 '칸트'는 행복의 가장 큰 조건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며 감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할/
미국에서는 세 가지 말만 잘하면 일등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thank you, excuse me, i'm sorry' 감사합니다. 실례했습니다. 미안합니다. /할/ 가족에게도 감사하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아멘!/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의 덕목! (롬 12:9-13) (0) | 2022.02.11 |
---|---|
잃은 양을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눅 15:1-10) (0) | 2022.02.11 |
주라! 그리하면 넘치도록 안겨 주리라! (눅 6:38) (0) | 2022.02.11 |
애국자 느헤미야의 눈물의 기도! (느 1:1-11) (0) | 2022.02.11 |
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1-14) (0) | 2022.02.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