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소 같은 일꾼이 되자! (삼상 6:10-16)

by 【고동엽】 2022. 2. 11.

소 같은 일꾼이 되자! (삼상 6:10-16)

 

미국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지금도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습니다. 원래 그녀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고, 9살 때 성폭행을 당했으며, 14살에 아이까지 낳았다. 20대에는 마약에 손을 댔고, 비만으로 100Kg의 몸무게를 못 이겨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드디어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오늘의 그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의 자서전 격인 책 '이것이 사명이다'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서 자신이 발견한 사명, 그리고 자기가 인생을 다 쏟아 부으며 추구했던 사명 네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⑴'남보다 더 많이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무엇이든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다면, 그것을 축복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사명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⑵'남보다 아파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인생 가운데 남보다 큰 아픔을 겪었다면, 그것을 고통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섬길 사명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⑶'남보다 가슴 설레는 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남이 없는 가슴 설레는 그 어떤 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을 하나의 망상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⑷'남보다 부담이 되는 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명이다.' 마음 속에 어떤 일에 남이 느끼지 못하는 부담이 느껴지면, 그것을 강요로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우리는 이곳에 아름다운 성전을 이전케 하시고, 두 분의 여집사님을 세워주 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두 분의 일꾼을 세우기에 오늘 저는 ◀소 같은 일꾼이 되자!▶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행여나 오늘 제목에 시험 들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게 제목을 붙였습니다.
먼저 소는 나무랄 때가 하나도 없는 그런 동물입니다. 묵직한 성격대로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합니다. 밭을 갈고 논을 갈고 짐을 나르고 우유까지 제공합니다. 죽어서는 가죽을 남기고 고기를 남기고 사골 탕을 남기고 우족 탕을 남기고 심지어 꼬리곰탕까지 남기고 갑니다. 뭐 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몽땅 주인에게 다 주고 갑니다.
오늘 그런 소의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소들이 우리 주님께 쓰임을 받은 소들입니다. 이 두 마리 소가 사명을 받아 주의 길을 가는 성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가운데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일꾼들의 이상적인 상을 말할 때 본문의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 두 마리를 들어서 교훈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도 두 분의 일꾼들을 세우면서 본문에서 우리 모두 은혜 받기를 소원합니다. /할/

 

①먼저 본문의 배경을 알아보아야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삼상 3장 이하에 보면, 사사시대의 황혼기에 엘리 제사장 때에 영적 암흑기가 도래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죄에 빠져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섬기지 아니하고 형식과 의식만 난무'했습니다. 심지어 제사장을 계승해야 할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정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법궤 정신, 예배정신'입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작은 나라이지만 민족 정신이 아주 뚜렷합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정신만은 뚜렷했습니다. 그런데 그 법궤를 모셔야할 제사장의 아들들이 불량자들이 되어서 사람도 무시하고, 법도 무시하고, 하나님도 무시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으니 알만하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정치가, 종교가. 지도자들이, 백성들이 다 무더기로 부패했습니다. 그런 시기에 불레셋이 쳐들어와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이 대패하여 약 4,000명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 궤가 없어서 졌다'고 생각을 하고는 하나님의 언약 궤를 전쟁터로 메고 갔습니다. 이것은 그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고 중요한 일에는 앞세우기를 좋아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법궤를 앞세우고 건넜더니 물이 갈라진 일이 있었고 그래서 법궤가 있는 곳에는 승리가 있고 반드시 기적이 일어난다고 그들은 생각을 했습니다.
'법궤, 언약궤, 혹은 여호와의 궤'라고도 불려지는 이 궤를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는 '길갈'이라는 곳에 보관하고 있었고(수4:18-20). 그 다음에 '벧엘'에 있다가 '실로'(삼상3:3)로 옮겨왔었는데, 당시의 제사장 엘리 때에 '아벡'이란 곳에서 진을 치고 블레셋과 전투에서 무작정 법궤 만을 앞세웠다가 패전함으로 3만 명이 죽고, 그만 법궤 마져 불레셋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 패한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지, 하나님의 언약 궤가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 궤를 가지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에서 엘리의 두 아들이 전사했고,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엘리제사장은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더 슬픈 이야기는 비느하스에 부인이 이런 비보를 듣고 산기를 느껴 해산을 했는데,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는데, 그 뜻이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는 뜻입니다. 이가봇은 '이스라엘의 부끄러움이요,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할/
▶그런데 법궤를 빼앗아 간 블레셋에서는 약 7개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한마디로 큰 재앙이 임하고 고통과 혼란만 왔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음으로 보물을 빼앗았다고 그들은 참 좋아했습니다. 사실 법궤는 금으로 입혀져 있기 때문에 보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십계명을 새긴 두 돌비가 들어 있고,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고,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가 그 안 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언약 궤가 불레셋의 삼대도시인 '아스돗, 가드, 에그린'으로 옮겨지면서 불레셋 나라에 엄청난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그 과정을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⑴블레셋의 아스돗 사람들은 그 두려워하던 이스라엘의 법궤를 빼앗아 온 것은 자기들의 힘이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신 다곤(Dagon)이 하나님을 이긴 것이라고 생각하고 법궤를 다곤 신전에 두었는데 오히려 법궤로 인하여 그들의 다곤 신상이 부서지고 재앙이 일어났습니다(5:2-4).
다곤은 해양 신으로 위는 사람의 모양이고, 아래는 인어처럼 물고기 꼬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곤 신전에 둔 이유는 여호와의 신을 다곤 신과 대결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참패입니다. 다곤은 능력이 없습니다. 박살이 났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대적하는 자는 이렇게 박살이 납니다. 5:3절에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우상 섬기는 사람도 그 열심히 대단합니다. 그들도 산 기도를 합니다. 모욕제거하고 합니다. 가짜를 가지고도 진짜보다 더 열심히 믿습니다.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다곤이 궤 앞에서 엎드려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다고 합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신 신이며 전능자이시며, 스스로 계신 신임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5:3절에 보면 다곤 제사장들이 다른 사람이 알기 전에 도로 제자리에 갔다가 놓습니다. 그런데 4절에 봅시다!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이번에는 아주 속된 표현으로 작살이 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당할 신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엘로힘(전능자)의 하나님이요, 여호와(언약, 약속)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법궤가 재앙을 가져오는 것 인줄 알고, 8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꼬' 의논을 합니다
그 당시 블레셋은 다섯 지방 곧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의 수령들에 의하여 각각 분할 통치되던 부족 연합 성격의 국가로서 그들은 실제 집단 지도 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⑵그리하여 방백들의 의논 끝에 하나님의 진노는 다곤 신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여호와의 궤를 다곤 신당이 없는 '가드'라는 곳으로 옮기도록 결정을 합니다(5:7-8). 그런데 법궤를 가드로 옮겨 간 이후에 가드에서는 더 큰 문제가 성 전체에 발생하였습니다.
9절에 '그것을 옮겨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에 더하사 성읍 사람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종이 나게 하신 지라' /할/ 독종은 돌림병으로 극심한 피부 질환으로 피부가 완전히 망가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아스돗보다 가드에 더 큰 재앙을 내리셨음을 뜻합니다. /아멘!/
⑶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냅니다(10).
이 곳은 다곤 신은 섬기지 않았으나, 대신 '바알세불'을 섬기는 성입니다. 그런데 그 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상5:11-12절에 버면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종으로 치심을 받아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습니다. 감히 그 무엇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가 있습니까? /할/
⑷드디어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이 다시금 모여 심각한 의논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인 이 법궤를 우리의 또 다른 도시로 보낸다 해도 옮겨진 그 도시 역시 앞의 다른 도시들처럼 맹렬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에 아예 법궤가 원래 보관되었던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자'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결국 블레셋 족속들은 법궤로 인하여 많은 재앙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멘!/

 

②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 위한 블레셋의 의논과 방법을 보겠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잘못 다룸으로서 엄청난 재앙을 만났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제 정치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그들의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의 조언을 받아서 종교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먼저 자기들을 괴롭혔던 독종의 모양대로 금으로 다섯 개의 독종을 만들고 또한 금으로 다섯 개의 쥐를 만들어 속건제 제사를 드린 후에 그것들을 상자에 넣어서 법궤와 함께 수레에 실어 보내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대로 행했습니다.
그런데 삼상5:11절에 의하면 법궤를 본처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 법궤가 가는 곳은 당시의 본처인 '실로'가 아니라 예루살렘 서쪽 약 22km 지점에 위치한 '벧세메스'로 보내고 있습니다.
▶왜 블레셋사람들이 법궤를 벧세메스로 보냈을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⑴법궤가 원래 보관되어 있던 '실로'는 당시 블레셋 인들에 의해 심하게 파괴되었고(4:10), ⑵법궤로 인해 마지막으로 재앙을 당한 블레셋 도시 '에그론'과 제일 가까운 성읍이며, ⑶법궤를 관리할 수 있는 제사장들이 거주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수21:16).
이제 블레셋 사람들은 새 수레를 만들어 아직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택하여 수레를 소에 메우고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벧세메스로 향하여 가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는 귀한 사명을 그 소들이 감당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현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소 500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통과하여 북한에 들어간 것이 생각납니다. 이 소들이 남북의 대화를 여는 귀한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베세메스로 떠나는 암소 두 마리를 보면서 오늘 새롭게 직분을 받는 두 분의 여집사님들과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③본문의 소는 어떤 소인가?

 

⑴사명에 선택받은 소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소가 있습니다. 밭을 가는 소, 짐을 나르는 소들이 있습니다. 이 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한 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기 위한 소입니다. 세상일을 하기 위한 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소입니다. 많은 소들 중에 구별되고 선별된 소입니다. 역시 성도가 하나님께 택함 받고 직분자가 됐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모세나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우리가 권사, 안수집사가 되고 여집사가 된 것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나를 뽑아주시고 선택해 주신 그 하나님께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그리고 선택된 사람들은 다 사명의 길을 가야합니다. 이 '사명'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자, 성령의 파견 자, 하나님의 뜻이 임한 자, 하나님의 대사'라는 그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파견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명자요, 성령의 파견자요, 하나님의 뜻이 임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외면하시지 안으시고, 그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힘이 없을 때 힘을 주시고, 좌절할 때 용기를 주시고, 어려움이 있을 때 환경을 제거해주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 즉, 지혜 가 부족할 때는 지혜를 주시고, 능력이 부족할 때는 능력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니까 주의 일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감당할 수 있도록 주의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은혜로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바울의 사명관을 보십시오! 행20: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딤전1:12절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그리고 계2: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아멘!/

 

⑵사명의 멍에를 멘 소입니다(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새 수레'는 한 번도 세속적 목적을 위하여 사용된 적이 없는 수레를 말합니다.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소'는 세속적인 일에 사용되지 않은 짐승을 말합니다.
암소 두 마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궤를 끄는 멍에를 메었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멍에요, 이 세상의 멍에 치고 이보다 더 자랑스러운 멍에를 맨 소는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멍에가 있습니다. 직장의 멍에가 있습니다. 사업의 멍에도 잇습니다. 정치적인 멍에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각기 다른 멍에를 메고 있습니다. 부모의 멍에가 잇고, 자식의 멍에가 있습니다. 남편의 멍에가 있고, 아내의 멍에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멍에는 무엇입니까? 각기 다른 멍에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멍에는 사명의 멍에입니다. 정말 중요한 멍에는 하나님의 법궤인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고 가는 멍에인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할/
또 여기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소'는 경험이 전혀 없는 소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경험이 많은 소에겐 멍에게 그리 큰 고통이 아닙니다. 그러나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소에게는 이 멍에야말로 그렇게 고통스럽고 힘에 겨울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멍에를 멘 소의 고통을 알고 계십니까? 저는 조금은 압니다. 시골에서 밭을 갈 때 소가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러나 소가 없는 집이나 소를 쓸 만큼 넓은 땅이 아니면 사람이 어깨에 걸개를 하고 밭을 갈 때가 있습니다.
저도 소 대신 어깨에 끈을 매고 밭을 간 기억이 있습니다. 엄청 힘이 듭니다. 조금 했는데도 힘이 쏙 빠지고 나중엔 어깨가 벗겨지기도 합니다.
오늘 새로 여집사로 임명받는 분, 어떤 의미에서 아직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소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참 행복한 교회라는 멍에를 메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런 멍에는 우리가 미워서 벌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자고 여러분에게 도움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할/
여러분은 세상일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불려온 분들입니다. 젖먹이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법궤를 메는 이 거룩한 일에 우선순위를 두실 것을 삼가 부탁드립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이 멍에를 맨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쓸고 닦습니다. 주일마다 부식 준비를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마6: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할'
오늘 본문의 두 마리의 암소는 하나님의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블레셋에서 이스라엘의 땅 벧세메스로 가야만 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이가봇'의 비운의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키 위한 사명으로 선택된 암소들입니다. 빼앗긴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옮기는 위대한 사명을 받은 소입니다. 우리들도 이 사명의 멍에를 준 줄로 믿습니다.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여러분,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⑶하나님의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역 자들이 꼭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법궤를 메기 위해 불려온 소도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입니다. 법궤를 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말인데 이 하나님의 일은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둘 이상 힘을 모아서 감당하는 것입니다. /할/
하나가 힘들면 옆에 있던 동료가 힘을 내어 끌고 옆 친구가 지치면 또 다른 친구가 밀어주는 아름다운 협력의 관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방법입니다. /아멘!/
오늘 두 분이 잘 협력하여 아름답게 선을 이루어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축복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⑷이 소들은 사명을 위해서는 자식들도 초월했습니다(10).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이 소에게는 젖먹이는 소가 있었습니다. 모성애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송아지는 떼어서 우리에 가두었습니다. 뒤에서는 어린 새끼의 어미 찾는 소리가 처량합니다.
그러나 두 암소는 사명 때문에 육정을 초월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는 성스러운 목적에 자신을 부인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두 암소는 본능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목적하심에 따라 벧세메스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마10:37-38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가족을 등한히 하라는 말씀은 절대 아닙니다. 주의 일을 하다 보면 때로는 주의 일을 감당키 위해 인정을 초월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이 가정 일보다 우선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나라와 의가 우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 순위는 먼저 그의 나라입니다. 또 한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사랑 받는 사람은 사랑 받을 짓만 합니다.
▶신문 칼럼을 읽다가 재미있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한 수도원 원장이 보잘것없는 아이 하나를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시기하며 따졌습니다. 그러자 원장이 아이들에게 과제 하나를 냈습니다.
새 한 마리씩을 주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몰래 해 질 때까지 새를 죽여서 가져오라는 과제입니다. 해질 녘에 마당에 죽은 새 시체가 수북히 쌓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만 그냥 새를 산채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아이 말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 하셔서 아무리 찾아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거기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를 죽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원장이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래서 내가 이 아이를 사랑한단다.' /할/
시91:14-1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아멘!/

 

⑸사명의 길은 눈물 없이 못 가는 길입니다(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두 암소는 본능적으로 새끼들을 생각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울어야 할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몸이 아파서, 돈이 없어서, 직장을 잃어서, 사업이 안되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신뢰하던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아서, 자기 자신에 실망해서 등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울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울음은 하나님 때문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을 양보하지 않기 위해 당하는 핍박으로 인한 울음, 하나님 말씀을 지키느라고 오는 손해로 인한 울음,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느라고 오는 고통들로 인한 울음입니다. 하나님이 맡긴 사역을 하느라고 인격의 모욕을 당하고 악한 비방을 당하고 물질을 손해보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것 때문에 우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울음입니다. /할/
시골에서 자란 분들은 소의 특성에 대해 잘 알 것입니다. 소의 특성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지 않으려 합니다. 멍에를 한번도 메어 보지 않은 소는 멍에를 메고 쟁기나 수레를 끌을 수 없습니다. 송아지를 낳아 젖을 먹이는 소는 송아지가 없으면 가지 않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
두 암소는 인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한번도 안 가본 길이기 때문에 두려웠을 것입니다. 두 마리가 공동보조를 맞추어야 했기 때문에 힘들었을 것입니다. 멍에를 처음 메어 보기 때문에 몸이 심히 아팠을 것입니다. 젖먹이는 송아지를 떼어놓았기 때문에 마음이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좌우로 치우칠 수밖에 없고 돌이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울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목적지까지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성도마다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될 시간들이 있습니다. 시84:6절에도 '성도는 눈물 골짜기를 통행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죄로 인한 애통의 눈물이 터져야 합니다. 또한 그 죄에 대한 사죄 때문에 북받치는 감격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키 위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눈물을 보십니다. 히스기야 왕이 눈물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그 눈물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눈물을 씻어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계7:17절에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이 날이 곧 옵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눈물 없이 못 가는 길입니다. 주님도 그 길을 가시면서 울고 가셨습니다. 히5: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할/

 

⑹사명자들은 좌우로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여기 '치우치다'는 '빗나가다', '기울다', '떠나가다'의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치우치지 않고 그 사명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했다'는 말은 종종 성경 안에서 철저한 순종을 가르칠 때 사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순종하면 우리가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우리가 손해를 봅니다.
▶어떤 부잣집 주인이 가마꾼들에게 '개가 집을 나갔으니 개를 좀 찾아오너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가마꾼들은 '주인님, 우리는 가마를 메는 일을 하는 사람이지 개 찾는 심부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거절했답니다. 그러자 주인이 이렇게 지시했답니다. '그래? 그럼 내가 개를 찾을 테니 너희들은 가마를 메라'
하루 종일 들로 산으로 다니며 찾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또 나갔으나 헛수고만 했고, 사흘째 되는 날까지 찾았으나 힘만 들고 고생만 했습니다. 그제 서야 가마꾼들이 '주인님, 개는 저희가 찾을 테니 주인님은 앉아 계십시오.' 무슨 소린지 이해가 되시지요? /할/
오늘 소들이 가야할 목적지는 벧세메스입니다. 벧세메스라는 말은 '태양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지역적으로는 제사장의 성읍으로 지정된 유다 지역의 땅입니다.
두 암소는 의견 충돌도 없이 협력하여 정해진 코스로만 갔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천성 문을 향하여 길을 가는 거룩한 순례자들입니다. 이리 치우치고 저리 치우치는 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푯대를 향하여 묵묵히 순종의 걸음만을 걸어야 합니다. /아멘!/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는 좌우로 치우치는 자가 많습니다. 바른 성경적 가치관이 없을 때, 바른 사명감이 없을 때, 바른 역사관, 바른 구원관이 없을 때 좌우로 치우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눅9:62절에서 '손에 쟁기를 잡은 자는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또 약1:5-6절에 '두 마음을 품고 갈팡질팡해서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히12:2절에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할/

 

⑺하나님과 동행한 소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소가 먼 거리인 블레셋 땅에서 유대 벧세메스 땅까지 곧장 갈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자기 힘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동행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줄 믿습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누구든 법궤를 멘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동행하여 주십니다. 어쩌면 법궤는 하나님이 지워주신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불레셋에서 벧세메스로 가는 길은 계속해서 높은 길이 이어지는 경사로입니다.
또한 결코 가까운 거리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블레셋 땅에서 벧세메스까지 그 소가 수레를 메고 성내지 않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장 간 것은 법궤를 멘 그 소에게 하나님이 간섭이 틀림없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못한다, 안 된다'고 거절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환경 탓이라든지 다른 곳으로 그 이유를 돌려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역사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붙잡아 주십니다. /할/
▶그런데 동행자는 세 가지가 일치되어야 됩니다.
㉠목표가 일치되어야 됩니다. 하나는 우로 가고, 하나는 좌로 가자고 한다면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뜻이 일치되어야 됩니다. 뜻이 서로 다르면 다툼만 일어날 따름입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울 수가 없습니다.
㉢보조가 일치되어야 됩니다. 주님과 보조를 맞춰야 합니다. 가족끼리도 보조를 잘 맞춰야 합니다. 성도끼리 보조를 잘 맞춰야 합니다. 주의 종과도 보조를 잘 맞춰야 합니다. /아멘!/

 

⑻목적지까지 잘 도착한 소들입니다.
험한 길, 높은 고개, 고달프고 피곤하며 목마르고 배고픔을 참고 견디며 드디어 벧세메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신앙의 길이 험합니다. 그래서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다 가면 구원 선이 있습니다.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 때문에 그 좁은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는 것입니다. /믿/
히3:14절에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또 엡6:2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신앙은 인내입니다. 축복도 참고 충성하는 자에게 옵니다. 기도 응답도 그렇습니다. 오늘 암소 두 마리는 그의 사명의 목적지까지 잘 도착했습니다. /할/

 

⑼암소 두 마리는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14).
주를 위해 생명을 바친 소들입니다.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는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비록 소이지만 그 법궤를 메고 마지막 도착했을 때 여물이라도 많이 주고 편히 쉬게 해 주어도 시원찮은데, 오히려 법궤를 메고 온 소를 잡아다가 수레를 장작으로 삼고 소를 잡아서 그 위에 번제물로 희생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것은 단번에 제물로 바쳐진 예수님의 모형인 동시에 사명 자들에게 보여준 순교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있게 살다가 죽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살다가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죽음입니다.
우리가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처럼 죽음으로 순교하는 것도 귀하지만 신앙 때문에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충성하는 것도 산 순교자의 삶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어야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바울은 롬14: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라고 했고, 롬12:1절에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할/
벧세메스로 가는 소는 영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제물로 죽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죽어야 사는 종교입니다. 죽어야 사는 길이 열립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날마다 분초마다 인간의 육신의 정과 욕심, 혈기와 고집을 십자가에 쳐서 복종시키고 하나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⑽우리의 자랑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일에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미켈란젤로'는 자기의 작품에 결코 서명을 남기지 않았답니다. 그만한 연유가 있습니다.
그가 로마의 시스틴 성당의 천장 벽화를 그릴 때 두문불출하고 자기의 온 열정과 성의를 다하여 작품에 임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마침내 불후의 명작 '천지창조'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흡족한 마음으로 서명을 한 뒤 성당의 문을 나섰습니다. 그 순간 그는 눈부신 햇살과 푸른 자연의 아름다움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연 속에 스며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솜씨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그 어디에도 서명을 남기시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기껏 작은 벽화를 그려 놓고 나를 자랑하려 했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란 말인가?' 그는 즉시 되돌아가 천장 벽화에 쓰여 진 자신의 서명을 지워 버렸고 그 후로는 그는 어떠한 작품에도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아멘!/
▶그리고 우리들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래 전에 서울 용산의 삼각지 뒷골목엔 '옛집'이라는 간판이 걸린 허름한 국숫집이 있었습니다.
주인 할머니는 35년을 한결같이 연탄불로 뭉근하게 멸치국물을 우려내 그 멸치국물에 국수를 말아냅니다. 10년이 넘게 국수 값은 2,000원에 묶어놓고도 면은 얼마든지 달라는 대로 더 줍니다.
한 번은 노숙자로 전락한 한 사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내온 국수를 허겁지겁 먹었습니다. 할머니는 금새 그릇을 빼앗아서는 다시 국물과 국수를 담뿍 담아서 내놓습니다. 사내는 쉴새 없이 먹었습니다. 그릇을 비우자마자 사내는 정신 없이 도망을 칩니다. 할머니는 도망치는 사내를 향해 소리를 칩니다. '천천히 가 넘어져 다쳐!'
이 할머니는 비록 노숙자이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하게 보입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존귀히 대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겸손의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마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