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원망하지 맙시다. (출16:1-12/민21:4-9)
부부 참새가 전기 줄에 앉았습니다. 부부 참새는 '네가 앞에 앉아라. 아니다. 네가 앞에 앉아라' 서로 싸우다 아내 참새가 앞에 앉았습니다. 그때 포수가 쏘는 총에 아내 참새가 맞아 죽어가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어려운 자리에 꼭 나를 앉히더니 기어이 이렇게 나를 죽게 만드느냐? 당신은 내 생애에 도움이 안 돼, 설거지를 한번이나 도왔나? 그렇다고 나를 호강한번 시켰나? 벌레도 못 물어 오는 주제에 애들이나 잘 키울지 모르겠네. 바보 같은 게 새 장가 든다고 옆집이나 기웃거리지 않을지 모르겠네...' 계속 재잘대며 끝까지 불평, 원망을 늘어놓았습니다.
듣고 있던 남편 참새가 포수에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총알 한방 남았나요?' '왜?' '남았으면 저 주둥아리에 한방만 더 쏴 주세요.'
원망, 불평의 병은 죽을 때까지 잘 고쳐지지 않는 난치병 가운데 하나랍니다. 불평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천국에 데려다 놓아도 불평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지옥에서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불평에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감사하며 사는 길, 감사를 회복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시50: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할/ ◀제목 소개!▶
출애굽기와 민수기서의 내용 중 두드러지는 단어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원망'이라는 단어입니다. 출애굽기도, 민수기도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 길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은 민족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 밑에서 신음하고 있던 그들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모세를 보내어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갈 때도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광야 길은 기온이 변덕스럽습니다. 낮에는 머리가 벗겨지도록 뜨겁고 밤에는 오한이 날 정도로 기온이 뚝 떨어집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후 속에서 이스라엘이 잘 견디도록 낮에는 구름기둥을 덮어 그들을 시원하게 해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을 치솟게 하셔서 그들의 추위를 막아주었습니다.
광야 40년 길에는 하나님이 수 없는 기적과 축복 속에 그들이 인도를 받았습니다. 물이 없을 때 반석을 쳐 생수를 내셨고, 배고프다고 하면 하늘에서 맛나를 내려서 그들을 먹여 주셨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면 메추라기를 보내어 그들은 냄새나도록 먹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뚝하면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부르는 부정적인 별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고집과 아집과 교만과 불순종과 거역으로 똘똘 뭉친 그들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 두 곳을 찾아 읽었는데 이 두 곳에서도 그들의 원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원망'이란 단어는 '진행되는 여건이 기대처럼 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인간 감정의 표현'이라고 웹스터 사전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원망이란 '수군거리며 불평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원망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쉽게 많이 범하는 죄입니다. 잘 되면 내 탓이고 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우리는 뚝하면 부모를 원망하고 형제를 원망하고 친구를 원망하고 남편을 원망하고 주의 종을 원망합니다.
이 원망은 아담 때로 거슬러 갑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나서 하나님께 따진것은 '당신이 지어준 여자 때문에' 죄를 지었다는 항변으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원망의 결과는 파멸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원망이라는 범죄를 매우 심각하게 다룹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오히려 '범사에 감사하라'고 적극적으로 명령합니다. 감사는 무엇입니까? 원망의 반대말입니다.
▶먼저 출애굽기와 민수기 속에서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원망의 사건들을 한번 간추려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원망이 구체화되고 집단화되기 시작한 것은 출애굽한 이후부터입니다.
▶먼저 출애굽기에서 그들의 원망을 찾아보겠습니다.
①출14:12절을 보면 홍해 앞에서 뒤쫓아오는 바로 군대들은 바라보면서 그들의 첫 번째 원망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다'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원망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바라보고 잠잠해 졌습니다.
②출15:22-27절에 보면,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 마라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다며 원망이 또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원망도 쓴 물을 단물로 치료하신 기적 때문에 잠잠해 졌습니다.
③오늘 본문 1-12절을 보면 애굽에서 나온 지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들은 또 다시 원망이 시작되었습니다.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와 떡을 배부르게 먹고 있을 때 죽었더라면 좋을 뻔했다는 것이 원망의 내용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배고파 죽겠다는 원망입니다. 이 원망은 하나님이 내려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 때문에 잠잠해졌습니다.
④출17:3절을 보면 그들이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다며 또 원망했습니다. 이 원망도 하나님은 반석에서 생수가 터지게 해 주심으로 잠잠해 졌습니다.
▶또 민수기로 건너가 보면 거기에서도 원망이 나옵니다.
①민13장을 보면 모세가 12지파 중 한 지파에 한 사람씩 모두 12명을 택하여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파송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는데 절대 다수인 10명이 불 신앙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땅은 정말 기름진 땅인데 그 원주민들을 보니까 얼마나 키가 크고 힘이 장사인지 우리는 거기에 비하면 꼭 메뚜기 같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런 힘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기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느냐? 이젠 우린 다 죽었다'고 보고하자 이스라엘 회중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쿠데타의 움직임까지 있었습니다. 이때 신앙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으로 인하여 쿠데타는 겨우 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전전긍긍하면서 이스라엘이 민21장까지 왔는데 이때 이스라엘은 가나안 남방 아랏왕과 싸워 이겼고, 다른 부족들도 물리쳐 승리한 뒤라 의기 양양해졌습니다. 이제는 '가나안을 정복하는가 보다'하고 부픈 마음으로 전진하는 중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에돔 땅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에돔왕은 큰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돔 사람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습니다. 바로 이삭의 큰아들, 에서의 자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과는 형제지간이어서 모세는 애굽왕에게 정중하게 대사를 보내어 길은 좀 열어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니 애돔 땅의 대로만 통과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교섭했으나, 그 결과는 강경한 거절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군으로는 애돔과는 싸움이 안됩니다. 그만큼 애돔은 강군 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는 수 없이 가나안을 지척에 두고도 다시 홍해 길로 내려가는 처량한 광야 생활이 계속되므로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원망이 또 다시 시작됩니다. 민21:4절을 보면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그리고 5절에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고 하면서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을 치솟았습니다.
특히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속 상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부부간에 살아가다 보면 속상한 일들이 있지요. 아이들 때문에 마음 상한 일들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업 때문에 직장생활 때문에 이 세상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다가 마음 상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특히, 이스라엘은 '길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 길에도 이런 상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37:5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또 잠16:3절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상한 마음이 있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예수님의 보혈로 고침 받고, 말씀의 능력으로, 치료하는 광선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치료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왜 그렇습니까? 마음 상한 작은 상처 하나에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도 무너지고 행복도 무너지고, 사명도 무너지고 좋은 관계도 무너져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사람이 말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말 한대로 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죽겠다'고 하면 죽을 일만 생깁니다. /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고 그들을 지켜주셨는데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죽게 됐다고 원망하니까 하나님은 도처에서 불 뱀을 보내어 그들의 말한 대로 죽게 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수를 셀 수 없는 원망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요, 자화상이라는데 충격이 있습니다. /아멘입니까?/
이스라엘은 사건이 있을 때마다 원망을 터뜨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가득히 원망의 폭탄을 알고 살아갑니다. /안 그렇습니까?/할/ ▶오늘 주제가 원망입니다.
①왜 원망을 합니까? 원망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⑴이스라엘은 과거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을 때 하나님께 울부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해방시켰으며 광야 길에 홍해를 만났을 때, 하나님이 바다를 갈라 육지 같이 건너게 해주셨고,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했고, 목마를 때 반석에서 생수를 터뜨려 주었고, 매일매일 하늘 양식인 맛나를 먹여 주었고, 메추라기를 날려 고기를 주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은혜를 그들은 다 까먹어 버렸습니다.
어느 심리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기억을 관리하는 컴퓨터 즉 기억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기억력 컴퓨터에는 두 가지 프로그램이 있는데 하나는 기억해야 할 것을 담아 두는 의식이라는 프로그램과 다른 하나는 망각해야 할 것을 담아두는 무의식이라는 프로그램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감사해야 할 것과 은혜를 입은 것에 대하여 잊지 말고 의식이라는 프로그램에 입력시켜야 하고 또 섭섭한 일이나 나의 공로를 무의식 속에 입력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 반대로 입력시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잊어야 할 것을 안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면 배운 망덕하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수는 물에 새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반대입니다. 은혜를 물에 새기고 원수를 돌에 새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망각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시에 '유월절을 기억하라, 홍해의 사건을 기억하라'고 구약전체에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할/
⑵이스라엘의 원망은 불 신앙 때문입니다.
원망은 불 신앙의 산물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망은 마귀가 좋아합니다. 이스라엘이 최소한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하나님의 기적과 이적을 보면서 원망했겠는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믿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못합니다. /믿/
⑶그들은 조그만 어려워도 원망했습니다.
민21장 본문이 바로 좋은 예입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직통로가 막혔다는 원망입니다. 우리들도 조그만 어려워도 '왜 내게 하필 이런 일이...'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멘!/
⑷미련하기 때문에 원망했습니다.
잠19:3절의 지혜자의 말을 들어 보세요!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그러니까 이 말씀의 뜻은 잘못은 자기가 저질러 놓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솔로몬은 '미련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할/
옛말에 '안되면 조상 탓, 잘되면 내 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일이 뭔가 안되면 곧바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탓합니다. 원망은 습관이며, 명백한 책임회피입니다. 그리고 원망의 말은 바로 자신을 향해 쏘는 화살과 같습니다.
▶옛날에 작전을 아주 잘 세우는 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군이 세우는 작전은 늘 화창한 날에만 승리할 수 있는 작전이었습니다. 그 날도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싸우기 전부터 승리를 확신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그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하늘을 욕하면서 일제히 하늘을 향해 활을 쏘라고 병사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결국 그 화살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뻔할 뻔 자입니다. /아멘!/
⑸사람들은 욕심 때문에 원망합니다.
▶미국 어떤 마을의 제빵업자가 가까운 농장에서 버터를 사오곤 했는데 버터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루는 그 사온 버터를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농장의 버터 무게가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화가 치민 제빵업자는 그를 고발하게 되었고, 그 버터 공장 주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판사가 '집에서 어떤 저울을 사용하고 있소?'라고 묻자 '우리는 저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버터의 무게를 안다는 거요?' '네 그것은 간단하지요. 1파운드 짜리 빵의 무게와 같게 만듭니다.' '그럼 그 1파운드 짜리 빵은 어디에서 사오는가?'라고 묻자 그 버터 공장 주인은 고소인을 가리키며 '우리는 늘 저 제빵업자 한데서 사다 먹습니다.'
결국 버터의 양이 줄어든 이유는 제빵업자의 빵이 줄었기 때문임이 밝혀졌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원망하기 전에 나 때문이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기 욕심 때문에 남을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빌2:14절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할/
⑹결국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원망합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어도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로하며 말하기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라고 했습니다. 억울하게 옥에 갇혔을 때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도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단6:10).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 갇혔어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감사했습니다. 이렇듯 믿음의 사람들은 환란 중에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는 신앙의 인격을 키워야 합니다. /아멘!/
②왜 원망하면 안됩니까?
⑴하나님이 원망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출16:7절에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그렇습니다. 그 원망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독백이든, 혼자서 고함치는 것이든 다른 사람 앞에서 터뜨린 것이든 하나님이 그 원망을 다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골방에서 단둘이 원망하고 소곤거려도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소리만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민21:5절을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이 말씀은 이해하기 위해서는 출16:31절을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인 만나를 맛보았을 때 '평생의 신비로운 꿀맛이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민11장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의 맛을 '기름 섞은 과자' 맛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민11:8).
'밤낮 이것만 주십니까? 애굽에서는 그래도 마늘과 파도 있었고 여러 종류가 있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면서 꿀맛 같았던 그 맛이 이제 기름 맛 같다고 합니다.
꿀맛이 기름 맛으로 변한 것은 하늘의 만나가 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맛이 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본문 5절에서 이렇게 푸념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무슨 말입니까? 이제 지긋지긋해서 못 먹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그 배부른 원망을 들으시고 조치를 취하시는데 6절을 보면 '불 뱀을 보내어 이스라엘을 물어 죽게 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평을 다 들으십니다. 민14:27절에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⑵원망과 불평은 마귀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성도들로 하여금 온갖 방법을 다 써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욥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욥1장에 보면 사단이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를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고 하면서 욥의 '소 떼, 양 떼 모두 다 도적 맞고 불타 죽고, 자녀 10남매가 대풍에 집이 무너지면서 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믿음의 사람 욥은 그 입으로 원망의 말이나 불평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욥1:21-22절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할/ 우리도 이런 욥의 신앙을 배우라고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아멘!/
⑶원망과 불평은 축복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차라리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애굽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할 때, 그들은 광야에서 고생만 하다가 죽었습니다.
여기 '애굽으로 돌아가면 좋겠다'고 하는 말은 요사이 말로 '마귀의 종노릇하고 죄의 종노릇 할 때가 더 좋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진노하실 말입니까? 기도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의 말, 불평의 말을 다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점치는 귀신을 쫓아낸 것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 매를 맞고 쇠고랑을 찼는데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기쁨으로 찬송하고 기도했더니 쇠고랑이 풀려져 나가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불평할 수밖에 없을 때 오히려 찬송하고 감사하면 더 큰 기적이 일어나고 더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밖에 있는 자유인들에게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당부했습니다. /할/
⑷모세를 향한 원망도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기 때문에 주의 종에게 원망하는 것도 안됩니다.
출16:8절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또 9절과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원망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은 눈에 보이는 모세를 공경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자기들을 애굽에서 끌어냈고 고생을 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지도 능력이 모자라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모세에게 대들고 도전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너희가 나를 향한 원망은 하나님을 향하여 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인간이 누구인가?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사실을 토기장이의 비유로 우리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사64:8절에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요,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그렇습니다. 진흙덩어리가 토기장이를 향해 원망을 퍼붓는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셔버리고 맙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부를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애굽에 보내 이스라엘 이끌어 내게 했습니다. 모세는 순전히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여 평생을 바칠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세를 공격했고, 죽이겠다고 덤볐고, 돌을 던지고 원망과 비난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를 원망한 것이 결국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할/
③원망하면 어떻게 됩니까?
⑴불 뱀이 뭅니다. 민21:5절에서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니까' 6절에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았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원망하면 우리에게 불 뱀이 와서 뭅니다. 불 뱀은 사탄마귀로써 광야 같은 세상에 나그네와 행인 같은 우리를 마구 물어 삼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벧전5:8-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원망은 사탄이 좋아합니다. 원망소리를 듣고 사탄은 우리들에게 실패를 갖다 주고 질병과 고난을 갖다 줍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를 죽이려고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찾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늘 감사해야 하고 찬송해야 하는데 그 입술이 부정적이 되어 남의 험담이나 하고 원망 불평이나 하면, 사탄은 동조세력을 만난 것처럼 기뻐 뛰며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원망하지 맙시다. 원망하면 불 뱀이 와서 뭅니다. /믿/
⑵원망하면 결국 멸망당하고 맙니다.
고전10:10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리고 약5:9절에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원망을 하면 갈수록 그 폭이 넓어집니다. 한 가지를 원망하기 시작하면 열 가지 백가지 그리고 세상만사가 다 원망스러워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원망하지 마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그래요! 하나님은 원망을 싫어합니다. 원망하는 자를 쓰지 않습니다. 원망하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원망하는 자에게 불 뱀을 보내어 물어죽게 만들었습니다. 원망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불 뱀이 나타납니다. 원망하는 가정은 불 뱀이 그 가정을 삼킵니다. 원망하는 백성은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언어문화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부정적인 언어가 아니리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언어로 바꿔야 합니다. 우리 말 가운데 좋은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독교는 말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 말씀을 우리가 들음으로 복이 있고 또 예수를 나의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할/
내 말하는 대로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백대로 역사해 주십니다. '이 일 할 줄로 네가 믿느냐?' '예,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질 줄 믿나이다' '네 믿음대로 되라' 언제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말하는 대로 되라, 네가 말한 그대로 기적이 일어나고 고침을 받고 복을 받고 능력을 받으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멘입니까?/
④원망을 피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⑴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전문의사의 말에 의하면 성인병의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말하는데 그 첫째가 식생활이요, 그 다음에 성격이요, 그 다음이 그 사람의 습관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규칙한 식생활과 자극 있는 음식, 짜고 맵게 먹으면 안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과식, 과음이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급한 성격, 내성적인 성격, 불같은 성격, 이웃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균형을 깨뜨리는 성격'도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들의 잘못된 습관도 성인병을 유발한다고 합니다. '좋은 습관, 건전한 습관, 경건한 습관은 건강의 비결'이 됩니다만, 반대로 '무질서한 습관, 통제가 불가능한 습관, 생활의 리듬을 깨뜨리는 습관'은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습관은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과 삶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 속에는 감사할 일도 있고, 불평 원망할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감사보다 원망이 많습니다. 이것을 너무 잘 알기에 하나님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습관을 가지십시다. 그리고 불평 원망의 습관을 버리십시다. /할/
⑵원망하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합시다. 원망불평만 일삼는 그런 사람들과 친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오염됩니다.
⑶자족하며 삽시다. 주어진 환경 주어진 조건에 감사하며 자족하며 삽시다. 그리하면 불평이 사라집니다.
⑷자기 책임을 인정하는 자가 됩시다.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내 탓으로 돌립시다. 정치인들은 뚝 하면 상대방의 정당이 잘못해서 이 나라 경제가 이렇게 되었다고 서로 책임이 있다고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⑸중요한 것입니다. 원망 불평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삽시다.
민21:9절에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처럼 무서운 뱀에게 물린 사람, 사탄의 독소에 온 피가 멍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이 선포되었습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게 될 것이다'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장대 높이 매달리셨습니다. 내가 죽어야 될 죽음의 자리에 주님이 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바라보고 앙망하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할/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모두 살더라' 믿습니까? /아멘!/
쳐다본 사람은 살았고,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쳐다본 사람들은 따지지 않고 규명하지 않고 약속을 믿고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쳐다보지 않은 사람들은 뱀을 쳐다보면 살 수 있다는 허풍 같은 말은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어리석고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약속을 믿을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쳐다보지 않다가 멸망당했습니다.
요3:14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했고 15절을 보면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구리 뱀을 장대에 매단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산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아멘!/할/
그렇습니다. 민21장의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데 우리가 살길은 갈보리 산상에서 십자가 위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12: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원망대신 믿음으로 삽시다. 원망대신 기도합시다. 원망대신 자신을 돌아봅시다. /할/
⑤구약의 사건이 우리의 거울이 됩니다.
고전10:10-12절을 한번 찾아서 읽겠습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할/
유명한 명작 동화 '백설공주'에 보면, 백설공주의 계모인 마녀가 매일 거울 앞에 자기를 비춰 보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는 질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 마법 거울은 '그야 당신이 세상에서 최고로 예쁘시지요.'라고 대답해 주었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여자가 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백설공주가 자라서 성년이 되었을 즈음 어느 날 그 마녀가 똑같은 질문을 하자, 그 거울은 말을 바꾸어 '백설공주님이 가장 예쁘십니다.'라고 말하는 바람에, 그 마녀는 그 미녀 랭킹 1위 자리를 재탈환하기 위하여 백설공주를 죽이려고 가진 악한 짓을 다 했습니다.
원래가 거울이란 자기 얼굴이 깨끗한지, 화장이 잘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 즉 자신의 흠을 발견해서 그것을 고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이지만, 실제로는 그 마녀의 경우처럼 많은 사람들을 '자기 도취증'에 빠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망한 것을 예로 들어서 우리에게 설명하기를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울'이란 그 원래의 용도 즉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여 고치기 위한'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에서 실패했던 사건들을 오늘날의 신약 시대 성도들이 '자신을 스스로 살펴보고 조심하는 경계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란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만을 품고 여러 차례 원망했던 것을 가리킵니다.
민14:2절과 36절, 16:41-50절 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모세나 아론이 아니라) 멸시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이 단순히 자기네들의 지도자에게 대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도전이었음을 정확하게 진단하신 말씀입니다.
지금은 유리로 거울을 만들기 때문에 투명하고 사물이 잘 보이지만 고대의 거울은 구리를 닦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희미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3:12절에서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라고 한 것입니다.
고전10:6절이 '그런 일들이 우리의 거울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울이란 '예표가 된다, 모범이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수많은 예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꼭 해야할 일과 해선 안 될 일이 무엇인가, 반드시 본받아야할 일과 본받아선 안될 일이 무엇인가를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고 얼굴을 살피고 맵시를 고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지난 잘못을 들여다보면서 고칠 것은 고치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으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지나간 역사는 산 거울입니다. 권력연장, 장기집권, 폭력정치를 일삼던 히틀러, 뭇솔리니, 스탈린은 모두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도 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장기집권, 전쟁도발, 폭력정치를 일삼는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거울을 잘못 본 때문입니다.
돈을 탐하고 부정을 저지르다가 무너진 사람들이 수를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줄줄이 뒤를 이어 부정을 저지르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 역시 거울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호색, 음란, 방탕에 빠져 패가 망신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색을 탐하고 주색을 버리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로 패가 망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역시 거울을 바로 들려다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울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심심풀이로 가지고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거울은 수시로 들여다보고 자신을 고치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신령한 말씀의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들의 모습을 점검하고 고쳐야 합니다. /아멘!/
오늘 우리는 말씀의 거울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원망하지 말라'는 거울입니다. 민21:5절에서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니까' 6절에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전10:10절에서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원망하지 말고, 불평하지 맙시다. 오히려 감사하며 삽시다. 원망은 마귀를 찬양하는 것이고,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시50:14-15절을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할/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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