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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대한 불편한 진실

by 【고동엽】 2022. 1. 28.
믿음에 대한 불편한 진실


현대교회 성도들 대부분은 믿음에 대한 잘못된 성경관으로 인하여 믿음에 대한 오해가 참으로 큰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떠한 요구사항을 가지고 기도할 때 그 기도의 응답 받는 비결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들은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큰 믿음이 필요한데, 이때의 큰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요구한 것은 틀림없이 받을 것이라는 확신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뭔가 요구하는 기도를 하였지만, 응답이 될지 안 될지 확신이 덜 가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보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 없음을 한탄해 하며 슬퍼하기도 하고 눈물을 머금기도 하면서 자신의 믿음은 너무나 초라하고 작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믿음에 대한 이러한 오해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지 못한 처사이기도하고, 일부 부흥 강사들의 부추김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작금의 한국적인 상황 속에서 많은 목사들은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너무나 강조하기 때문에 그들을 따르는 많은 신자들은 그렇게 알고 있지만, 사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큰 믿음이 있고 작은 믿음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양의 크기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원리에 입각한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믿어줘서 얻는 것이 아님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사역 속에 담긴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각인의 성도들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만들어 낼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의지로는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도 큰 믿음이나, 작은 믿음이라는 것들을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을까? 라는 의문으로부터 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 각인의 심령 속에 믿음을 주신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뜻대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다고 하는 성도들은 자신의 필요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믿음이라는 방편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는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온 존재가 이제는 하나님 편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 믿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가치관의 변화이며, 옛것을 벗어버린 거듭난 새 생명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옛것을 버렸다는 의미는 단순하게 과거에는 못된 짓만 골라하고 도덕적으로 살지 못했던 자가 이제는 못된 짓 안하고 도덕적으로 살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가치관의 변화에서 오는 삶의 변화를 이야기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치관의 변화 없이 도덕적인 변화만을 가지고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믿고 있는 종교심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도덕적인 변화를 추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치료를 통해서도 도덕적인 변화는 얼마든지 가져 올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서의 믿음의 변화는 세상적 사고방식에서 천상적 가치관의 변화이기 때문에 세상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은 성령께서 귀 있는 자들에게 전하는 말씀을 받지 않고서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강조해서 말하거니와 자신의 의지를 짜내어 아무리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외쳐도 그것은 거짓된 확신이 자신을 올무로 가두어 놓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있어서 믿음이 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 그리고 천상적 가치관을 가진 거듭난 새 생명의 증거는 무엇일까? 물론 이 두 가지의 증거는 동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증거는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우리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피상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속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는 성도들의 특징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신앙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자신이 소유한 환경이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물질, 심지어 자신의 육체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인식 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선용해야할 책임이 있음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자입니다.


성경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마5:3)고 하는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 의미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믿음 있는 신앙인은 오직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기댈 곳은 세상의 물질이나 환경이나 지식이나 자신의 육체가 아니라 오직 주님 밖에 없음을 깨닫고 주님의 선한 뜻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아낌없이 내어 놓는 심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곧 성경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처럼 말입니다. 이 과부는 엽전 두푼을 연보하였으나 주님은 그가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고 말합니다(막12:44, 눅21:4). 이는 단순히 과부가 생활이 구차한 가운데서도 생활비 전부인 엽전 두푼을 드린것을 주님이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과부의 심정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엽전 두푼 마저도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헌신을 받은 것입니다. 만약 이 과부가 엽전 두푼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연보하였다면, 주님은 아무리 그가 생활비 전체를 드렸다고 했을지라도 그를 칭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뭔가 주님께 헌신한 다고 할 때,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겨주신 것임을 항상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것은 개인의 안락한 삶을 위해서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것은 주님을 믿는 더 많은 형제들에게 흘러가야만 합니다. 만약 주님의 것이 어느 한 곳에 머물게 되면,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그것은 부패한 가짜 양심에 의하여 결국은 세상에 남게 되고 썩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환경이나 지식이나 육체까지도 주님의 선한 도구로 남김없이 사용되어 질 때 하나님의 것은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섬긴 아브라함의 믿음이 오늘 날 우리에게 전가 되었듯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믿는 형제들에게 전가 해야하는 책임이 신앙인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웅장한 소리를 내며 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인의 신앙 역사 속에서 소리 없이 흘러가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원치 않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뜻이기도 합니다(요21:18).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나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도들이 자신들의 생명까지도 주인이신 주님을 위해 내어놓은 그들의 삶을 통해서도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은 우리들의 눈에 잠깐 있다가 없어질 세상 것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천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가 원치 않는 일일지라도 기꺼이 주님의 명령에 우리 자신의 생명까지도 주님의 것임을 알고 내어 놓는 삶의 철학을 가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증거로서 두 번째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열심을 자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헌신한다고 할 때 자기 자랑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공동체 안에서 누가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십일조를 잘하고 남을 도와주고 성경지식이 많다고 해서 그것들이 자기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이 주신 것인데, 그것이 자기 자랑으로 나타난다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꼭 알아야 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항상 인식하는 태도를 갖게 되면 신앙인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명령을 다 행한 후에도 무익한 종의 심정을 가지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심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눅17:10). 이러한 깨달음이 있는 성도의 특징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남을 도와주고 성경지식이 많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날마다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을 때 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감히 우리의 열심을 가지고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인 행위를 은근히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세상의 어두움에 갇혀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단순이 세상에서 빈 손들고 떠나는 것이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인간의 죄악 된 실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믿음의 증거로서 세 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구속사 이래로 하나님을 믿는 선진들의 삶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시련과 역경이 와도 하나님의 약속은 꼭 이루어질 것이라는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된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하나님의 위로는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참고 견디어 내면 언젠가는 지금 상태보다는 훨씬 더 나은 보상을 해 줄 것이라는 막막한 기대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나님의 위로는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쉽게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때 부모의 입장으로서는 그 때 마다 도와주고 싶지만 일부러 도와주지 않고 채찍질을 가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울 때마다 무조건 도와주면 자식은 부모의 은혜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뿐더러 저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수고와 땀을 흘려야 된다는 보편적 진리를 외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녀는 자신들의 고난이 머나먼 미래를 위한 유익이었음을 저들이 성숙한 어른이 되어서야 부모의 심정을 깨닫고 부모님께 감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모님의 뜻을 고난당하면서도 미리 깨닫고 인내하면서 수고하며 땀 흘리는 자는 이미 저들은 부모님의 위로를 받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자신들을 위한 부모님의 뜻을 알기에 그 뜻 가운데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위한 도구임을 말씀을 통하여 깨달아 아는 순간부터 저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편 119:71)”는 시편기자의 고백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뜻과 약속의 의미를 아는 것이 하나님의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처럼 말입니다. 요셉은 억울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형들 앞에서의 그의 고백(창45:4~8) 속에 담겨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는 신자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뜻과 심정을 이해하는 것이 곧 위로가 되는 것이며, 이 위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과 맞물려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서에 보면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처녀로서 아들을 수태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듣고 마리아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9)”라고 고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마리아의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천사의 예언대로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수태할 경우 장차 그는 모욕과 수치를 당할 뿐 아니라 율법에 따라 돌로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을 그는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린 것입니다.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한 예언의 성취가 자신의 몸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상적인 어떠한 고통과 역경과 슬픔도 감당해야 된다는 믿음의 발로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실체를 알게 되면, 우리는 믿음을 빙자하여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축복을 얻어내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질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을 양의 척도로 따져서 어떠한 사람은 복음서에 나오는 백부장(마8:10, 눅7:9)과 같이 큰 믿음이 있고, 어떠한 사람은 겨자씨 보다 작은 믿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겨자 씨 만한 작은 믿음 만이이라도 있으면 뽕나무나 산을 명하여 옮길 수 있는 능력(마17:20, 눅17:6)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한 고난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하면, 잠시 고난을 참으면 언젠가는 구약의 욥에게 내리신 물질적인 축복을 우리도 받을 수 있다는 식의 논리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수치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인의 심령 속에 값없이 주신 믿음이라는 선물은 본질에 있어서는 모두가 똑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말씀을 통하여 믿는 성숙면에 있어서는 처음 믿은 자와 말씀을 깊이 깨달은 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은 자일수록 하나님의 뜻과 심정을 이해하고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면서 겸손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능력이라는 것은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놓고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것이 믿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지금까지 읽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믿음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은 구원론과 교회론을 다루어야겠지만 오늘은 이정도로 해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그럼 하루도 주님의 선하신 동행이 동역자들과 믿음의 형제들에게 함께 하시길 소원하며........


----- 더불어사는 교회 김영길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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