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 (빌 2:1-11)
오늘 말씀에 제가 꿈꾸는 교회 생활이 나옵니다.
2절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주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주십시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이와 같이 하여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하였는데, 사도 바울만 그렇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라면 저도 기쁘고 여러분도 기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데도 이런 교회가 되기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 통하여 이 말씀하신 것을 보면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교회 일에 열심이고 전도도 열심히 하였지만 다툼과 허영으로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게 되고, 교만하여 자기만 잘 났다고 하고 서로 자기 일만 할 뿐 서로 돕지 않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잘 알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고, 전도까지 하여도 삶이 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도 바울은 여기서 중요한 영적 원리 하나를 제시합니다. 봉사를 해도, 교인들을 섬겨도, 복음을 전해도, 반드시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5절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 곧 우리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별로 좋은 마음이 아닙니다. 병든 마음입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죠크 중에 인생삼락(人生三樂)이 있습니다.
차를 몰고 갈 때 자기가 가는 길은 훤히 뚫려서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데 비해 반대 차선이 꽉 막혀서 주차장처럼 차들이 밀려 있으면 배나 더 기분이 좋답니다.
골프를 치기로 약속한 날 무슨 일이 있어 못 갔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필드에 나간 사람들이 헛걸음하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골프를 친 것보다 더 기분이 좋답니다.
자기는 승진했는데 가까운 동료가 승진하지 못했거나 자기 아이는 명문대학에 합격했는데 가까운 친구의 아이가 낙방했을 때는 기쁨이 배나 크다는 것이 인생 삼락이랍니다.
죠크이지만 인간의 잘못된 심보를 엿보게 하는 농담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알고 성경 말씀을 많이 안다고 반드시 마음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첫째,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6절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둘째, 종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셋째,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8절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리라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옳은 일인데도 예수님이 계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뜻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옳으냐 그르냐 이기 보다 자기 권리도 포기하고 종이 되어 남을 섬기며 죽기까지 순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같은 생각,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 마음이 되고,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 일만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아무리 옳은 일을 한다고 하여도 인간적인 냄새가 나게 마련입니다. 교만과 판단, 다툼과 갈등이 생깁니다.
바로 살려고 애를 쓰는데도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 시험이 많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 고 하신 말씀은 정말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기독교는 마음을 비우는 종교가 아닙니다. 마음은 결코 비워질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사람입니다.
미네소타대학교 연구진들이 오래 전에 402쌍의 쌍둥이들을 관찰한 후 재미있는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1919년부터 몇 쌍둥이를 몇 십년 동안 서로 알지 못하는 다른 지역에서 자라게 하였습니다. 그 중에 짐 루이스(Jim Lewis)와 짐 스프링거(Jim Springer) 쌍둥이 형제의 경우, 나면서 떨어져서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만났습니다. 40년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둘 다 교통법규 위반 교육을 받았습니다. 둘 다 취미로 설계, 제도, 목공예를 하고 있었습니다. 루이스는 세 번 결혼을 했고, 스프링거는 두 번 결혼을 했습니다. 둘 다 첫 번째 부인의 이름이 린다였고, 두 번째 부인 이름도 모두 베티였습니다. 둘 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제임스 알렌(James Allen)이었습니다. 둘 다 개를 길렀는데 개의 이름을 토이라고 지었습니다. 이 쌍둥이 형제는 멀리 떨어져 살았는데 생김새만 같은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들이 매우 흡사한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유전인자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발견케 하는 탐구였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영적 유전인자가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답게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안다고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박사가 되었다고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기에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지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으면서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 번 그러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서도 마음껏 기뻐하고 감사하고,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분은 우리 안에 오신 주 예수님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 뿐입니다. 걱정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기뻐하고 찬송하고 감사만 할 뿐입니다. 진정 사랑만 하며 사는 것입니다.
심정 장로님이 지난 주간 영성수련회 중에 음주운전자에 의한 교통사고로 끔찍한 전신 화상을 당한 딸 지선이를 간호했던 간증을 하였습니다.
중환자실에 있을 때, 면회 시간에 지선이를 보러 들어가면 지선이는 시종일관 엄마의 눈을 보았답니다. 자신의 상황을 엄마의 눈빛으로 알기 원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심정 장로님은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재미있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모든 게 별 일 아니라는 듯이 태연히 행동을 하며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있다가 나온답니다. 그러나 중환자실 밖으로 나오는 즉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답니다. 중환자실에서는 초인적인 힘으로 버텼지만 나오면 설 힘이 없더랍니다.
엄마의 마음입니다. 엄마의 마음은 그렇게 강하고 놀랍습니다.
그러나 지선이가 일반병실에 오면서 상황은 또 달라졌답니다. 전에는 하루 세 번, 면회시간 30분씩만 담대하면 됐는데, 이제는 일반병실에서 하루종일 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생활해야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답니다.
그런 상황은 엄마의 마음만 가지고 감당할 수 없었답니다.
그 때 심정 장로님을 이기게 한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보기도해 주었고 장로님도 낮에는 병실에 있고 밤에는 교회 가서 울면서 주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도 계속되는 어려움으로 마음의 낙심과 절망으로 주체할 수 없었을 때, 주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루에 한 가지씩 감사할 것을 찾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처음 찾은 감사제목은 그래도 발은 다치지 않아서 발을 씻을 수 있어서 감사했고, 하나 남은 엄지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어서 감사했고, 눈으로 사람들과 마주 볼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외형적인 생활은 조금도 변한 게 없으면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결국 고통과 절망이 계속 덮쳐 왔지만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 하나 붙들고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며 달려오다 보니 사고의 가해자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별로 없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가해자에게 분하고 억울해서 날마다 땅을 치고 원통해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내가 다 안다.’라는 한 마디에 모든 걸 맡기고 믿음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예쁜 딸을 봐도 전혀 부럽지 않고 지선이도 예쁜 친구들을 봐도 전혀 기죽지 않고 살아갑니다. 지선이는 지금도 간증할 때 이 말을 합니다. 사고 나기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는가? 라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선이는 지금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선이의 외적인 모습이 더 이상 걸림돌도 아니고 장애물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가야 할 과정일 뿐이며 주님과 더 가까워지기 위한 흔적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이기지 못할 시험이 없고 품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못하고, 열등감을 가지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여러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여러분 안에 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이것을 말면 구태여 다른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판단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자기자신 처럼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는 복을 받도록 도와주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번은 지방회에서 감리사님으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화가 너무 났지만 순간 주님께서 일체 입을 다물고 감리사인 그에게 순종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때는 이유를 알지 못하였지만 얼마 뒤 그 감리사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일이 있었고, 그 사모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야 왜 주님이 그 날 감리사님에게 시시비비를 따지지 말라고 하셨는지 깨달았습니다.
이번 영성수렴회에 두 아들을 둔 이혼남과 결혼한 집사님의 간증이 있었습니다. 엄마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사람과의 결혼이라면 마땅히 자식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두 아들의 엄마가 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나 게임과 돈에 집착했던 큰 아들로 인해 고난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였지만 아들의 세상적인 관심은 점점 커져만 갔고 그것을 충족시키고자 돈에 대한 끝없는 집착을 보이며 해서는 안될 악행을 저질러 소년원으로 가야만 하는 폭력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아들은 1년이라는 세월을 소년원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표현할 수 없이 밉지만 엄마라는 자리에 있기에 뒷일을 수습하려고 좇아다니면서 제 영혼은 피폐해졌고 급기야 남편에게 " 더 이상 나는 여기저기 불려다니고 싶지 않으니 당신이 해결해. 내가 낳은 자식도 아닌데 왜 내게 뒷수습을 다 맡기는 거야." 라고 소리치며 대들었습니다. 남편도 그 상황에서 어찌할 수 없어서인지 오히려 소리를 지르는 상황에 이르러 왜 제 삶을 이렇게 이끄시냐며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주님이 계시다면 벼랑 끝으로 나를 이렇게까지 몰 수는 없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신 목사님의 권고로 수련회에 갔지만 도무지 마음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자기 같이 힘든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찬양을 부르는데 <나의 길, 오직 주님만이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아가리라.>는 복음송 가사가 마음에 박히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나의 길, 오직 주님만이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아가리라!.> 실패한 것만 같은 결혼 생활로 인해, 아내로서, 엄마로서, 자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열심을 내어도 늘 한치 앞이 두려웠던 것이 저를 단련시키는 것이며 정금같이 나아가게 하려 하심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목숨을 내어 놓을 만큼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사랑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결단하고 노력해도 사랑하고 용서하고 헌신하는 것이 힘들더니 주님의 마음을 품으니 저절로 되어지더라고 했습니다
결국 마음입니다. 마음이 바뀌면 모든 것이 다 바뀝니다.
우리의 가장 큰 숙제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왕이 되시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의 왕이 되시면 문제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려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분명히 고백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이 간단한 일이 정말 어려운 것은 마귀가 우리 마음을 혼미케 하여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우리 안에 계신데도 예수님이 함께 계심이 믿어지지 않는 것은 마귀가 우리 마음을 이미 혼미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이 열쇠임을 잘 압니다. 그래서 계속 우리 마음을 공격합니다. 우리는 쉽게 속습니다. 마귀가 주는 마음이 더 솔깃합니다. 우리 자아를 더 만족시키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마음대로 해봐.’ 하고 속삭입니다. 너무나 매력적이지만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마음대로 살아서 잘 산 사람이 없습니다. 마음대로 하여 잘 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었습니다.” 분명히 고백하면 마귀가 혼미케 하던 것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이 선명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영성일기를 써 보시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루 종일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 조차 힘듭니다. 그러나 꾸준히 써 보면 예수님께서 마음에 계신 것이 일기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마귀가 주는 마음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성도의 교제의 축복도 영성일기를 나눌 때 옵니다.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그러나 서로 “속을 모르겠다”고 합니다.
영성일기를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 조차 나누는 관계가 됩니다. 교회가 천국임을 비로서 알게 됩니다. 교인들이 한 몸임이 믿어집니다.
열쇠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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