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구원할 성도의 비밀! (행 27:14-26)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 스스로도 믿지 못할 만큼 큰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할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성도들에게 있는 그 능력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모두 여섯 번의 재판을 받은 후, 석방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가이사에게 가서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요구함에 따라 드디어 로마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로마로 갈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고 또 사도 바울도 당대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 꼭 복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로마로 가는 길에 풍랑을 만납니다.
율리오라는 백부장의 호송을 받아 가게 되었는데, 가는 도중에 일행이 탄 배가 유라굴로라는 큰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이미 겨울이 시작되어 더 항해하기 어려운데도 즐길 거리도 없는 조그마한 항구보다는 유흥도시인 큰 항구에서 겨울을 보내고자 무리하게 항해를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항해가 위험함을 경고했지만 그는 죄수의 몸인지라 배는 결국 출항을 하게 되고, 백부장과 선장은 결국 뵈닉스로 가기로 결정하여 배를 출항시켰습니다. 그 결과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14일간이나 해도 달도 보지 못하고 풍랑 속에서 정신없이 헤매면서 둘째 날부터 배에 실은 모든 짐 다 바다에 내버리고 셋째 날에는 기구들 마저 모두 버려야 했고, 그리고도 계속 되는 풍랑에 살 소망마저 잃어버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을 통하여 배 안의 있던 모두가 다 살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담대하게 말합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죽지 않고 다 살게 될 것이라, 반드시 로마로 가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저는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가 한 섬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십시오. 열나흘 동안이나 마음을 조이며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굶어 왔습니다. 이제 여러분들, 음식을 먹고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들 중에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 후에 떡을 들어 하나님께 축사하고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들도 모두 용기를 내어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습니다. 배는 파선되었고 짐짝하나 건지지 못했으나 그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죽은 사람이 없이 멜리데라는 섬에 헤엄쳐 들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믿는 성도의 존재가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 배에 276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로마 군인도, 선원도, 여행객도, 장인도, 죄수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죄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바울은 뭐로 보였겠습니까? 끝난 인생이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풍랑이 일고 보니까 죄수 였던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 배에 탄 모든 사람들 276명의 생명을 구원했습니다. 성도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에게는 세상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지난 주간 3.1절을 보냈습니다. 민족이 위기에 빠졌을 때, 분연히 민족의 자긍심을 일으켰던 것이 다름아닌 성도요 교회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는 사명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타고 있는 배가 직장일 수도 있고 학교일 수도 있고 가정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성도들이 배 전체의 운명을 쥐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해있는 가정 가족, 친척들 여러분의 학교, 직장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나라, 민족이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과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받고 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성도의 존재가 그렇게 놀랍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세상을 구원하는 자다!” 하는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큰 능력이 있는 것인가?” 아마 실감이 나지 않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내 자신의 어려움도 해결하지 못하고 쩔쩔매며 사는데, 나를 통해서 도시, 나라, 세상을 구원하다니, 이것은 너무 허황된 이야기처럼 여겨지고 믿어지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사실이 믿어지고 그렇게 살게 되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이 아마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성도들 안에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지 그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특별히 더 나을 것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도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놀라운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 마음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성도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의 비밀입니다. 여러분이 그 사실을 믿고 여러분 안에 계신 것을 바라보면서 순종하면 여러분은 보잘 것 없는 존재일지 몰라도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여러분을 통하여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 능력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풍랑이는 바다에서 276명의 생명을 구원한 것은 함께 하시는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죄수였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가 담대하게 풍랑으로 14일 동안 고생을 하고 살 소망도 끊어진 그들에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식사하세요. 그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셨지요? 다 드세요.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다 구원해 주실 터이니 마지막 힘을 내세요.” 이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배는 풍랑 가운데 있지만 그곳에 사도 바울이 있고 그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항상 사도 바울에게 말씀해 주시고 옆에 늘 동행해 주시니 두려울 것도 걱정할 것도 없다 그 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사도 바울은 믿었습니다.
여러분이여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니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오늘 그 말씀을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맨 마지막에 사도 바울은 배 안의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게 하였는데, 단순히 식사를 하게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일종의 성찬식이었습니다.
(34~35)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오늘도 우리가 성찬을 하겠습니다만, 성찬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구절이 여기 나옵니다. 성찬식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초대교회 성찬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 배 안에 모든 선원들과 사람들에게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성찬식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구원이 그들 가운데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풍랑을 만나 다 죽게 된 배 안의 사람들에게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이 능력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이 땅을 살아갈 때 보잘 것 없어 보일 때도 많지만 너무나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인 것은 예수님께 마음에 계시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여러분 안에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 하는 사실을 정말 믿고 바라보면 주님이 무엇을 하실까 하는 것이 보입니다. 여러분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지만,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실 분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진짜 믿음을 갖는 것이 열쇠입니다.
러시아가 공산화 되었을 때 모든 교회가 다 폐쇠되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금지되었습니다. 지하교회에서만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러시아의 공산당 혁명 직후 모스크바의 어느 지하교회에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이 잡혔습니다. 비밀 경찰들이 조사를 하는데, 모두 몇 명이라고 해서 한 사람 한 사람 이름과 경력 등을 조사하였는데, 한 사람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확인을 해도 도망간 사람은 없는데 한 사람이 모자라 계속 조사를 해보니 그가 예수 그리스도임이 밝혀졌습니다. 지하교회 성도들이 주님께서“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한 약속을 그대로 믿고, 모인 수자를 말할 때 하나를 더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눈에 보이지는 않으시지만 예수님이 같이 계시니까 항상 예수님 한 분을 더 추가를 한 것입니다. 제가 그 일화를 읽고 마음에 도전을 받았습니다.‘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 우리 가운데 계시다.’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그 사실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분명한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같이 계시다고 믿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예수님이 나와 같이 계시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삽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전혀 경험하고 느끼지 못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같이 계시다는 것은 막연한 믿음이고, 실제로는 전혀 그런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로 들리지도 않고 실제로 느껴지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예수님의 임재를 알 수 있다면 우리도 얼마나 담대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정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너 로마로 분명히 갈 것이다. 한 사람도 죽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좀 주님이 말씀해 주시면 걱정하겠습니까? 어떤 어려운 문제 앞에서도 우리도 담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는 그렇게 역사하시고, 우리에게는 그렇게 역사를 안하시는 것입니까?
저는 최근에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예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알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성령 하나님을 훼방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소멸하면서 산다는 것을 잘 몰랐습니다. 저는 주님이 역사를 안해주시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이지 제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저는 사람의 성격을 분석하는 유형으로 보면 분노가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제게는 기질적으로 마음에 분노가 많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속으로는 분노가 많은 사람입니다. 이것도 못 마땅하고 저것도 마음에 안 드는 그런 기질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화를 낼 때, 제 안에 계신 예수님은 조용히 뒤로 물러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번은 제가 나이 어린 분과 상담을 하는데, 갑자기 그분이 화를 내면서 거친 말을 하는데 너무나 당황하였습니다. 속에서는 화가 났지만 그가 아직 어리고 미성숙하여 그렇지 하는 마음으로 참았습니다. 자존심도 상하고 그분의 행동이 너무 무례하니까 말이 안나와요. 그렇다고 같이 싸울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조용히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겪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제가 제 안에 계신 주님께 그동안 꼭 그렇게 한 것 같았습니다. 말도 안되지만 실제로 그랬습니다. 정말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다는 것을 믿었다면,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습니까? 얼굴을 붉힐 수 있습니까?
화를 내고 나면 실제로 영이 마비됨을 느낍니다. 설교를 할 수도 있고 심방도 기도도 상담도 할 수 있지만, 아무런 성령의 감동도 인도함도 느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아무 역사도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저 혼자 열심히 사역을 하는 것 뿐이지, 주님은 아무 역사를 안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마음에 화내는 것 하나만으로도.
여러분, 정말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산다고 믿는 사람은 화 못 내는 것을 아십니까? 어떻게 화를 냅니까?
만일 우리가 선교여행을 갈 때 회계를 맡았다면 가지고 있는 돈을 조심스럽게 보호할 것입니다. 돈이 든 가방에 대하여 몹시 주의할 것입니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어도 항상 돈이 들어있는 가방에 신경이 쓰이고 어디 구경을 가도 구경하는 것에 제대로 집중이 안될 것입니다. 혹시 돈을 잃어버리면 다 꼼짝도 못하기에. 돈이 그 정도라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은 말할 수 없이 귀중한 보배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놀라운 축복이지만 잘 지켜야 할 보배이기도 합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을 보배가 질그릇에 있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 이것을 마귀도 압니다. 성도들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성도들 안에 예수님이 오신 것 때문에 마귀는 골치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돈을 빼앗고 건강을 빼앗는 것보다,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빼앗아 가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면 그들이 우리를 마음껏 가지고 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충동하여 예수님의 임재를 누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오신 예수님의 놀라우신 임재를 지키지 못하면 마귀에게 완전히 속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의 축복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마귀가 빼앗아 가려고 하니까.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그것을 못했습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 따먹으면서 에덴 동산의 축복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임재하심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 마음 안에 에덴 동산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지킬 줄 알아야 됩니다.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여러분, 예수님 모시고 사는 그 마음을 지켜야 됩니다. 마귀는 우리의 감정을 충동질합니다. 그래서 벌컥 화를 내게 합니다. 여러분이 화를 내고 나면 주님의 임재를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무시해도 보통 무시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여 화를 내거나 불평하거나 음란한 일에 눈길을 주거나 세상 욕심을 품으면 예수님의 임재에 대한 축복은 사라져 버리고 더러움과 혼란스러움과 우울함이나 짜증과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정말 마음을 지켜야 됩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시다는 것을 정말 알고 마음의 감정, 생각 하나까지 정말 조심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완전히 무디어져 버립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도무지 가질 수 없는 마음과 생각을 품고 말과 행동을 해버리면 그 다음부터 성령님은 가만히 계시게 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영적으로 더 무디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세상 문화와 더러움과 흑암의 영들 사이에서 잘 지내는 이가 있습니다. 세상 잡기에 능하고 갈 데 안 갈 데 잘 다니는 분들, 그들의 영이 둔감해졌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더럽고 악하며 둔감한 영적인 상태로 살아가는 이들은 세상의 영들과 접촉을 해도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맑고 밝은 빛의 세계에서 불안감을 느끼며 이질감을 느낍니다. 오히려 교회 오는 것이 조금 더 부담스럽습니다. 교회는 의무감 때문에 오는 것이고, 진짜 마음이 원하는 것은 세상에 나가서 노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어둡고 더럽고 음란한 것에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여러분, 이런 마음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영이 주는 아무런 어떤 느낌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세상의 영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임재에 눈이 뜨이고 나면 절대로 그렇게 못 삽니다. 지옥의 영들과 어둠의 영들의 움직임들을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얼마나 마음에 거부감으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너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전에는 그렇게 좋기만 하던 것이, 전에는 그렇게 편하던 자리가 이제는 너무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린 사람은 세상과 절대로 병행해서 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악한 영들이 너무나 강하게 역사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살 수도 없지만 이 세상에서 더럽고 악하고 흑암의 영들에 대해서 너무 예민하게 느껴지니까 고통스럽습니다. 아무 것이나 못 봅니다. 아무 자리나 못 갑니다. 담배! 돈주고 피라고 해도 싫습니다. 더럽고 음란한 것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십니까? 지옥을 경험하는 것 같으십니까? 그러면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더럽고 어둠의 영들이 별로 그렇게 강하게 내 마음에 고통스럽지 않다면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거의 놓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무디어진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신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과의 전쟁에서 패해서 노예처럼 살게 되는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항상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 (삿 3:7)
사사기 전체에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다는 의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목전이란 어떤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그 어느 곳도 하나님의 눈을 벗어나는 곳은 없으니까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을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눈 앞에서 죄를 짓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그 사실을 알았을까요? 몰랐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항상 지켜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유혹을 받아 밧세바와 간음하고 충신 우리아는 오히려 전쟁터에서 죽게 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살인과 간음을 저질렀습니다. 그 때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삼하 12: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이 말을 들은 다윗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다윗은 순간적인 충동으로 인하여 죄를 저질렀지만 감히 하나님을 무시하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죄를 지은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무시한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한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가되고도 화 내는 것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벌컥벌컥 마음에 품기도 하고 겉으로 드러냈던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부끄러운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예수님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러고도 우리는 주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런 소리를 하고 삽니다.
만일 대통령께서 이 예배당에 들어온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모두 대통령이 함께 예배드린다는 사실을 의식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갖기를 원할 것입니다. 한번 실제 얼굴이라도 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대통령이 우리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다고 자랑을 할 것입니다. 김연아 양이 들어온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배가 시작되지 않았다면 환호성을 지르며 우레와 같이 박수를 칠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야기할 것입니다. 내가 김연아 실물로 보았다고. 우리 교회에서 같이 예배 드렸다고 얘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예배당에 들어오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그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할 것입니다. 대통령이 오시는 것과 김연아 양이 오는 것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경배할 대상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우리는 내 마음에 계신 예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는 살지 않는 것입니까? 어떻게 그렇게 화는 잘 내는 것입니까? 어떻게 그렇게 마음에 생각은 함부로 갖는 것입니까? 말은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하는 것입니까? 농담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나옵니까?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시다는 엄청난 복을 받고도 실제로는 믿지 않으니까 주님은 아무 역사도 못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정말 믿는 사람은 윤리적인 죄 뿐 아니라 화를 내고 불평하고 한 눈 파는 것도 큰 죄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동안 불평도 죄다. 화내는 것도 죄다. 미워하는 것도 죄다. 마음의 음욕도 죄라 하였을 때, 너무 한다고 생각한 것은 마음에 계시는 예수님을 사실상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악한 것을 품으면 주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몹시 고독하고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며 마음 조차 예수님이 원하시는 마음만 품으면 누구나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며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노예로 팔려갔지만 그 때문에 보디발의 장군의 집에 복이 임했습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요셉을 그렇게 쓰신 것입니까? 주인의 아내가 그를 유혹할 때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창 39:9) 요셉이 이런 자세를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위대한 구원자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 한 사람 때문에 애굽이 살았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재미는 끝났네. 세상 낙이 다 사라졌네.’ 이런 수준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분들은 주님이 조용히 물러나십니다. 그러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임재 속에서 사는 것이 싫으냐? 나의 사랑 속에서 살며 나를 섬기는 것이 싫으냐? 그렇다면 악한 세력들에게 지배를 받아 보거라. 네가 원하는대로 한번 살아봐라.’ 내 버려두신다고 로마서 1장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게 되는지 아십니까?
어떤 이가 빛의 영이신 주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는 더러운 영, 세상의 영인 악령의 지배를 받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면서 어떤 이들은 명예를 추구하는 영에 사로잡혀 몇 년이나 몇 십년을 묶여서 삽니다. 어떤 이들은 허탄한 연애의 영에게 사로잡혀 한동안 정신을 잃고 삽니다. 어떤 이들은 물질의 영에 또는 음란한 영에 사로잡혀 한동안 노예처럼 끌려 다닙니다. 그러다가 다 잃어버린 후 두 손들고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정신 차리셔야 됩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위대한 능력자이시지만 우리가 주님을 무시하면 그 분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하십니다. 우리가 그 분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고 예배를 드려도 감동이 없고 주님의 임재하심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그렇게 형식적으로 예수 믿다가 끝나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사라지게 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불러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동이 덤덤한 신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의 임재를 알지 못하는 이들의 비극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이제부터는 화 내는 것도 조심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헛된 상상 하나도 제가 주님이 원하시지 않으면 안할 것입니다. 말 한 마디, 농담 하나 이제부터는 다 조심할 것입니다.” 주님 모시고 사는 것이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이것이 내 능력이고 이것이 가장 큰 복이니까.
우리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주님이 하자는대로 순종하기 시작하면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놀랍게 나타나는 지 모릅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예수님은 반드시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구원받습니다. 가족, 일가 친들, 직장 동료, 학교 친구들이 다 구원받습니다. 교회는 나라를 건지는 교회가 됩니다.
지난 주간 장로수련회를 일본으로 다녀왔습니다. 지난 3월 1일 저녁월요일 저녁에 일본 후지산 자락에 REFRESH 센터에서 형제 교회와 함께 구입한 기도원에서 우리 장로님들과 함께 집회를 했습니다. 장로수련회를 떠날 때 주께서 마음에 ‘내가 강하게 역사하리라.’하는 약속을 이미 주셨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과 내 생각은 다르다.’는 말씀을 주셔서 제가 은혜로운 수련회를 이끌려고 하던 노력 조차 내려놓고 주님만 더욱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장로님 오늘 저녁 집회를 위하여 휴지를 준비해 주세요.”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이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게 필요한지 몰랐습니다. 저녁 집회 때,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자는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자는 도전을 한 다음에 예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기도하지만 영적으로 풀려지지 않는 것을 느꼈습니다.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우리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지 주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아직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긴장되고, 무엇이 문제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때 서로 서로 사이에 막힌 담은 내버려두고 나와의 사이에 장벽만 무너지기를 원하는 것이 합당하냐?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찬양으로 기도를 마무리 하고 마음에 막힌 것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세요! 권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쉽게 움직이지 못하였습니다. 영적으로 풀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선뜻 “섭섭했습니다. 미워했습니다.” 하기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속으로만 묻어두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넘기고 있던 일이었는데, 이제 가서 말하므로 다 드러나면 그것도 불편한 일이지 않아요? 쉬운 일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다섯 번 정도 제가 요청했습니다,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다가 가세요.” 감사하게도 몇 분이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후 “기도합시다.” 했는데, 갑자기 제 가슴에 애통함이 밀려왔습니다. 이것은 어떤 힘이었습니다. 너무너무 마음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 동안 장로님들을 머리로만 말로만 사랑했지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였구나!’ 깨달아지는데, 통곡하게 되어 급히 휴지를 한 웅큼 뽑아 얼굴을 감쌌습니다. 인도자인 제가 절제할 필요가 있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후 개인기도를 하시도록 하였는데, 몇 분 장로님 권사님께서 기도를 받으시겠다고 나오셨습니다. 기도하며 나아가는 중에 뒤에서 누가 제 손을 잡아 끌면서 자신의 머리에 얹으시는 것입니다. 순간 느껴지는 것이 간절함! 이었습니다. 장로님의 주님을 향한 간절함을 느꼈습니다. 그 장로님의 머리에 손을 얹는데, ‘하나님이 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마음과 함께 다시 애통함이 밀려오는데, 주님의 사랑처럼 사랑하지 못하였음을 깨닫고 다시 통곡이 터지는데, 조금 전보다 몇 배나 강하게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손을 그 장로님 머리에 얹은 상태라 터져나오는 애통함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리 소리를 지르며 통곡하며 기도하는데, 이미 제가 아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저를 통하여 기도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불이 임하였습니다. 이렇게 2010년 3월 1일 저녁, 일본 REFRESH 센터에서의 장로수련회 성령의 역사가 임하였습니다. 방언이 터지고 불이 임하고 통곡하고 쓰러지고. 한 시간 정도 그렇게 기도하고 난 다음 모두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다음날 저녁 너무나 솔직한 공개적인 회개, 고백, 결단, 사랑의 포옹, 기쁨의 관계 회복을 보게 하셨습니다. 지난 금요성령집회 때 찬양하라고 할 때 나와서 찬양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그렇게 임한 것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믿음과 작은 순종이 성령의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가장 큰 복은 오직 하나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정말 믿고 마음 조차 주님께 복종하고, 작은 말씀이라도 순종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이제 성찬식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마음에 오신 예수님을 정말 믿고 감사하며, 주님을 마음으로 경외하며 순종하겠다고 약속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이 정말 성찬을 받기 위해 기도하시면서 “예수님, 예수님께서 제 마음에 오신 것을 보배 중에 보배로 여기겠습니다. 보석 잃어버린 것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돈 잃어버린 것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제 마음에 계신 것 제가 이것을 보배 중에 보배로 여기고 이제부터는 화 내는 것 주님 앞에 다스리겠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살겠습니다. 주님께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저를 통해서 주께서 일하시옵소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 보여주시옵소서.”
오늘 이렇게 기도하시고 성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성찬을 받겠습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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