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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성령에 대한 구속사적 이해

by 【고동엽】 2022. 1. 23.

성령에 대한 구속사적 이해

이근호 목사(우리교회)Ⅰ. 서론1. 현 교회들에 대한 성령론의 영향은?

성령에 관한 이론들이 대부분 일정한 교리적 틀을 고수하기 위한 변증의 역할을 위해 동원되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현 실정이다. 성령에 대해 교회에 답변을 주기 위한 시도들은 교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다양한 종교적 체험을 모두 긍정적 방향으로 수용해 주고 그것을 성령의 체험으로 인정해 주려는 무리한 시도들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선을 그으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성령론은 교리의 변천 과정에서 거의 핵심이 되지 못하고 부록으로 취급당한데는 그만한 이유도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다양한 체험들을 일일이 옳다 그르다고 판정하기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행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성령론 자체도 자연 포괄적으로 다양성을 수용해 주는 선에서 결론을 맺고 있지 결코 하나를 끄집어내어 이것이 표준이라고 주창하기에는 누구나 교만해 보이고 망령된 마음 자세로 간주될 가능성이 많았다.

 

그러니 자연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는 종교적 체험들이 하나의 새로운 교단으로 형성될 정도로 무질서로 치닫게 되었다. 신비로운 체험이 없는 자는 신비로운 체험을 가졌던 사람들로부터 신앙이 한수 아래인 것처럼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또 목회 지망자들도 가장 손쉽게 목회 성공하는 한 방편으로 자유로운 종교체험의 주입이 무엇보다도 요긴하기에 이 체험을 습득하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그 방면에 전문가에게 자문 또는 흉내내기에 분주하다.

모든 기독교는 성경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개혁 주의 대 원리를 목회 성공이란 눈앞에 보이는 화려한 미래를 위해 단호하게 거기서 눈길을 돌리는 것이 현재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이다. 이 사태를 보다 분명하게 한 문장으로 규정한다면 성경보다 교회를 우위에 두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보다 그것이 교회에 유익이 되느냐를 먼저 생각한다는 말이다. 교회가 하나님을 위한 단체임을 쉽게 잊고서 교회 번창을 위해 하나님이 계시고 활동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있다. 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성령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선언을 일반 교인들의 종교적 체험을 정당화 해 달라는 요구에 밀려 진리를 양보했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그러면 현 성령론의 연구 방법에 무엇이 문제되는가?

 

2.바른 성령론의 접근 방법

현 성령론의 연구 방법은 조직신학적 방법으로 정립되어 왔다. 조직신학의 등장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단 사설의 주장을 일축하고 교회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전수된 진리를 사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연스럽게 사용된다. 현 교회 내에서 일고 있는 각가지 주장들을 비판, 평가해 주고 그들에게 확실한 기준을 제시하기 위해서 연구되는 것이다.

 

진리란 그 진리가 사수될 필요성이 있을 때 더욱 진지하게 논의되곤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반박 거리를 위하여 성경의 진리가 동원되다 보니 성경 자체의 흐름을 무시하고 자기의 입장을 호소력 있게 변호해 줄 구절에 온몸을 맡기기 십상이다. 조직신학은 거의 다 변증적이며 소극적이며 적이 있어야 신바람 나는 신학이다. 좀 더 온건하게 이야기해서 그 시대적 요구와 상황과 처신이 적절하게 구비되어야 등장되는 신학이다.

 

그리고 조직신학적 성령론의 문제는 이렇게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변증적인 것으로 가지고 적극적인 것이 요구되는 곳에서 사용하려는 데서 발생된다. 마치 형사가 사건이 발생되지도 않는 곳에서 일부러 사건을 발생시켜 놓고 수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왜 이런 식으로 하는가? 요즈음 교회도 생존 경쟁 시대가 되어 크게, 살고보자는 욕심이 앞서 새로운 주목을 끄는 새로운 교단을 세우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욕구를 만족하는 교리를 창안했고 그 교리를 뒷받침해 주고자 새로운 조직신학을 만들어낸데 이유가 있다.

 

그런데 이 새로 등장한 교단은 새로운 얼굴을 내미면서 결코 기존의 전통적 기독교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받으면서 동시에 기성 교회보다 한수 더 대중과 친근한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이미지 선전을 위한 사전 포석이 깔려 있다. 그래서 기존의 개혁 주의 교회 교리의 사정권밖에 있는 것에 한없는 융통성을 가져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그것도 비난받을 경우가 생기면 그때는 맞대결도 불사하겠다는 책략이 들어 있다.

이 새로운 교단의 등장은 기존 전통 교회의 허점을 폭로시키는 셈이 되었다. 성령론에 관해서는 사전에 대응할 거리를 마련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없는 밑천으로 새로운 교단의 위험한 비전을 방어 하고자 온갖 공격을 다해 왔다. 예를 들면 그 교주의 사생활도 비난해 본다든지 또는 그 교회의 비리를 폭로해 본다든지 하는 방법을 취해 왔다. 신학적인 궁핍을 다른 면에서 메우기 위해 사회학적인 공격, 정신분석학적인 비평, 목회 방법에 있어 비기독교적인 방법에 대한 추궁 같은 것을 시도하지만 그 대상은 이러한 공격을 공격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윤리적이라 하면 윤리적으로 살면 되고, 교만하다 하면 겸손하게 굴면 되고 헌금 문제로 제기하면 올바른데 아낌없이 돈을 내 놓으면 상대 쪽에서 할말이 없어지고 오히려 새로운 교단에 칭찬이 돌아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단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신학적인 규명인데 새로운 교단은 이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기존의 정통 교단이라고 자처하는 교회와 똑같은 행동을 해 버리면 상대 쪽에서 공격을 할 수 없도록 만든다.

 

결국 자기가 자기보고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셈이 되고 새로운 특정 교단을 할 수 없게 된 전통 교단을 교묘하게 이용하기 위해 그들은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기성 교단과 같이 보수성을 유지, 강조하는 것이다.(예를 들면 반공 단체가 되어 같이 좌경 세력을 공박하는 것)

자,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니 조직 신학자들 간에 전통 교리에 회의를 품고 그 한계성을 타진하게 된다. 심지어 그 동안 우리들이 알지 못했던 사실을 새로운 교단에서 참된 진리를 제공했다고 그쪽에 공을 돌리고 칭찬하는 일까지 서슴없이 하게 된다.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공격을 하다 보니 무기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상을 평가할 만한 실력이 이쪽에 없다는 결론이다.

 

논리와 논리의 사슬은 표현이 다르다 뿐이지 사실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조직신학적 접근 방법의 한계를 성경 신학에서 해 줄 시기가 왔는데 이러한 시도는 단순히 조직 신학자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령은 무엇인가? 에 대한 확실한 이론 정립을 위한 것이다.

 

새로운 교단의 무신학을 반박하기 위한 시도도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교단을 비판할 만큼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심되기 때문이다. 사실로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교단의 무신학이 아니라 기존 한국의 정통 교단의 무신학을 비평하기 위해서이다.

 

 

한국의 정통 교단이 교회 팽창, 교세 확산보다는 진리 찾는 작업에 열중했다면 이단으로부터 무식하다는 모욕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개혁하지도 않으면서, 아니 개혁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면서 이름만 개혁 주의 교회라고 하니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이러한 개혁 주의의 부족은 교회가 하나의 정치 집단이 되어 정당 정치화 속에서 그것도 권력이라고 자기 권세가 무너지는 것을 겁을 내는데 주원인이 있다.

 

교회는 주님이 주인인데 마치 처음 개척한(?) 또는 처음 부흥시킨(?) 자기 소유로 보고 있는 것이 탈이다. 이 모든 것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성경이 우선이 아니라 교회 이익이 우선 이었기에 이런 부조리가 하나 둘 쌓여서 이런 못된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그러면 성경 신학적인 접근 방법으로 성령에 대해 연구하면 어떻게 되는가?

성경 신학은 계시의 발전을 인정한다. 따라서 먼저 계시에서 다음 계시로 발전 될 때, 그렇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와 원인을 찾아내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얻어진 원인을 통해 오늘날 현실의 어떤 문제 때문에 그리스도가 죽었으며 다시와야 하는가를 발견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방식이 성경 신학의 교회에 대한 적용이 된다. 따라서 성경 신학에서 가장 난해하면서 꼭 도전하는 과제는 계시의 결과가 아니라 그러한 계시가 왜 주어져야만 하는가에 대한 인간 세상의 한계와 문제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성령을 주제로 하여 구약에서 신약 끝까지 추적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일은 결코 성경은 성령, 또는 성신 중심으로 쓰여지지 않고 있음을 주지하는 일이다. 성령이 계시의 중심인물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구속 사역의 중심으로 앞장세우고 하는 작업이 과연 옳으냐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성경이 성령을 중심으로 했느냐는 자신이 성령을 중심으로 해 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가정해서,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쯤 성신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때 되었다고 생각되는 곳에 과연 성신에 대한 언급이 있는지를 실제로 성경을 들쳐 보고 확인하는 방법이다. 만약 없으면 자신의 가설에 하자가 있다는 신호이다. 분명한 것은 성경은 전체가 성령을 주제로 하여 쓰여진 책이 아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을 동원하여 뭔가를 이루려고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신, 혹은 직접적으로 성령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성령은 성경의 중심 주제를 위하여 왜 동원되었으며 무엇을 하였느냐를 통해 성령님이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성경의 중심과 성신의 관계를 통해 성령의 본질을 파악하는 이것이 성경 신학적인 올바른 태도라 여겨진다. 그러면 성경의 중심 사상은 무엇이며 성경은 그 중심 사상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Ⅱ. 본론

 

성신 또는 성령이라고 시작되는 정황을 무엇과 연결시켜 주느냐에 따라 핵심은 쉽게 밝혀지리라 본다.1. 언약 시대 이전의 성신의 존재 의의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창세기 초반에서 성신의 등장은(창1:2) 상당히 주목을 받을 만하다. 과연 거기서 성신의 역할은 무엇이었던가? 왜 꼭 성신이 개입되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창조 사역에 있어 성신 아니면 되지 못할 요소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이 무엇인가?

창세기 1:2에서 성신의 역할은 혼돈을 붙잡아서 질서의 세계로 전향시키는데 있다. 즉 무질서로 하여금 무질서 그대로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될 수 없고 그 상태를 새로운 질서의 세계로 나가게 인도하는데 주도적 역할 함을 보여준다. 창조란 성신의 입장에서는 무질서에서 질서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상의 언급은 구속사적 성령론에서 대단히 중요한 언질이 되는데 왜냐하면 창1:2의 성신 사역이 앞으로 진행되는 모든 성령 사역을 규정하는 한계가 되기 때문이다.

 

왜 성신이 구속 사역에 뛰어 들며 보다 적극적인 개입이 어떤 때 발생되는가를 짐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신이 자신이 들어갈 자리를 제대로 찾을 수 있는 분인 것을 감안해 볼 때 그 때의 성신의 활약 동기를 우리가 간파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가 될 것이다. 구속사역의 구심점이 언약이라면 그 언약이 등장하기 전(창 6:18) 성신의 또 어떤 면을 엿볼 수 있을까? 창6:3에 그 해결책이 나와 있다.

 

거기에 보면 다시는 성신께서 사람들과 함께 상종치 않겠다고 하신다. 그 이유는 그들의 생령이 아니라 이미 죄로 말미암아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과 육체의 대비는 그 전 창2:7에 나와 있다. 그런데 생령 상태가 제대로 유지되지 않았다는 것을 빌미로 성신께서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일방적 선언은 창2:7에서도 성신께서 무슨 역할을 한 적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즉 여호와께서 흙으로 만든 육체에 몸소 집어 넣으신 입김과 성신과 무슨 연관이 있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다.

 

 

물론 처음 아담이 만들어 질 때 성신이 그의 흙 몸 안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그 호흡을 불어넣는 작업을 성신이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시편 104:29-30에 여기에 대한 힌트가 보인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의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 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처음 아담 창조때 아담에게 한 것같이 다시 인간이 제조되려면 처음 아담과 같은 방식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뒤 사건의 진행 과정을 파악하여 앞의 사건의 진상을 찾는 수법을 사용해야 한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정체는 구약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령론도 마찬가지이다. 구약 성신의 역할을 알지 못하면 성령 운운은 무의미하다. 거짓이며 더 나아가 그것 자체가 우상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는 사람과 상대하지 않겠다'는 성신의 선언이 결코 여호와의 홍수 심판과 무관하지 않음을 본다. 그러면 창세기 6:3의 약속이 도중 무효화되어 다시 인간이 구제 받을 수 있을까 에 자연 관심이 쏠린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이 한 번 하신 약속은 결코 무력화 될 수가 없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은 과연 끝장 안 것인가?

 

여기에 비로소 언약이라는 것이 등장된다. 언약은 하나님의 심판 행위와 구원 행위 전부를 적법화시켜 주는 장치이다. 멸망 선언과 재창조 선언은 결코 마음 뒤집기도 아니요 상호 모순되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약속을 위배시키는 행위도 아니다. 창세기 6:3의 선언과 창세기 6:18의 언약 선언은 충돌되는 내용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 행위를 재료로 하여 새로운 창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심판의 흔적을 몸에 안고 태어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되며 여기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형상은 원래 아담에게 내려진 '우리의 형상대로'(창1:26) 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완성도를 가졌기에 하나님께 최고의 만족과 안식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 새롭게 태어나는 자들이 처음 인간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려면 그 때 그때마다 심판을 충분히 극복하고도 남음이 있는 은혜의 형상을 소유해야 하는 필수 조건이 수반된다.

 

따라서 성신이 이러한 언약을 통한 갱신에 희망을 갖게 되었다. 결단코 성신께서는 육체 외에는 상종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신과 육체 사이에 누군가 개입하여 인간을 육체로 변하게 한 요인들을 완벽하게 제거했다면 성신을 다시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그 중간에 개입된 것이 무엇인가?

 

성신은 바로 여호와의 언약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신은 성경의 중심 사상인 언약과 연관하면서 사역하기에 우리도 그 관계를 따라 성신의 모습을 정리해야 될 필요성을 느낀다. 하나님의 심판이 만들어 낸 새로운 피조물! 이것이 언약의 공동체이다. 이런 자들만이 무질서에서 질서의 세계로 전환될 수 있다.

 

2. 언약 시대에 있어서의 성신의 역할

 

 

노아의 홍수 심판은 성신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성신께서 접촉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 생령을 어떻게 탄생시키느냐에 초점이 모아진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생령이란 최초의 인간 아담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완벽하게 반영된 인간 존재물을 말한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 이후 이러한 성신의 취지는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만개 하는 종말론적인 모습으로 등장된다. 이점이 성신을 이해하는데 난해하게 만든다.

 

종말이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위기와 위袖?연속, 하늘과 땅 사이의 갈등 도전해 오는 비언약적 요소에 대해 즉각적인 전투 개시, 벼랑 끝에 서 있는 선택한 민족을 극적으로 구출하시는 절묘한 끝처리, 이런 와중에 성신은 부단히 활동해 왔기 때문에 그 흔적을 일정한 틀 속에 담아 보는 것이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하지만 또 꼭 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신약의 성령님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6:3 이후 족장 시대의 기록에는 성신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 그 이유는 먼저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타락 이후 종말론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에게 종말을 느낄 만한 때에 성신은 개입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사 복의 근원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시는데 있어 최대의 위기는 그 아브라함 언약의 자손들이 거룩한 하나님을 직접 뵙게 되는 순간이다. 가장 더러운 존재가 거룩한 분을 만나는 순간만큼 더 큰 위기가 없다. 그것이 곧 죽음이요, 심판이요, 종말이다. 성신이 본격적으로 구속 사역에 뛰어드는 그 때부터 인간은 종말 속에 놓여 있다.

 

출애굽기 31:2에서 성막 제조 기술자 브살렐과 오흘리압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것은 성막과 법궤가 지닌 종말론적인 본질 때문이다. 즉 이 법궤가 이스라엘을 살릴수도 있는 반면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항상 심판 주되시는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고 있으며 그곳에 항상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감히 접근 못하는 하나님,(출19장)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가능해지나? 그 방법은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 속까지 내려오는 방식을 취하면 된다. 이러한 점을 성신께서는 놓칠 리 없다. 여기서 성신의 역할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셔서 무사할 수 있는 방도에 개입하셨다. 그것이 성막개조였다. 성막이란 그 본질이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 뚜껑에 있는데 그 뚜껑의 별명은 속죄소 또는 시온좌이다. 대속의 재물의 피가 하나님의 진노를 삭히고 또 덮혀줄 수 있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최종 방도이다.

 

어쨌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동행하는 것 자체가 위기이며 종말이다. 성신의 성막 제조의 개입은 그들로 하여금 항상 종말 의식과 거룩한 분이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뿐만 아니라 예언자의 등장이 시급하다. 성신은 예언자를 그들 속에 남기는 일을 하셨다. (민 11:17, 25, 26, 29)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인 이스라엘로서는 다른 민족을 위한 복의 근원으로서 사명을 감당키 위해 그만한 신분을 가져도 마땅한 것이다. 그들 전부가 바로 전 인류에게는 종말론적인 국가인 것이다. 하나님이 바로 그들 가운데 있어 운행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의 신이 임한 민족이나 개인은 그렇지 않는 주위의 민족이나 사람들을 현 자신의 모습으로 고발하고 정죄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기능을 갖게 된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법과 상관없이 따로 카리스마적인 성신 충만 자가 그 현장에 등장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현 이스라엘에 대하여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으며 그들이 하는 짓거리를 통해서는 도저히 하나님의 원래 원했던 안식의 상태가 유지될 수 없었기에 기어이 아브라함의 자손은 유지 보존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근거로 긴급으로 누구를 선택하여 자칭 선택받은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시는 것이다. 이 또한 종말이 되었다는 암시이다. 여기에 대한 예는 사사기로부터 시작하여 다윗 때까지 무수하게 나온다.(삿 3:10, 6:34, 11:29, 13:25, 14:6,9, 15:14,19. 삼상 10:6,10, 16:13)

 

이렇듯 하나님의 신이 자주 등장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인간들이 행한 것은 제멋대로 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특히 이 중에서 왕 제도 추구는 성신의 의도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사상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다는 것을 거부하는 셈이 된다. 백성은 그 왕을 닮아야 되고 그 왕이 자기들에게 베풀어 준 구원의 사랑을 그들 공동체 속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새로운 생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구원을 자기네들이 만든 방식으로 해 보려고 하는 것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모습이 누락된 상태에서 약 속의 땅에서의 번영과 유지, 보존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타락된 모습을 그 땅에 심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될 때 이스라엘은 신명기 28장의 제2의 모세 언약에 의해 그들은 들어〉?저주받고 나와도 저주받는 심판의 상대가 된다. 그들이 원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파멸로 치닫게 한다. 여기에서 인간 왕제도에 대한 고발과 그들의 한계를 알려 줄 필요성이 있다.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이미 지적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필요를 느끼고 하나님이 선택한 소년을 건장한 어른 사울 왕과 대비시켜 왕 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한다.

 

다윗 왕을 세우신 것은 결코 인간 왕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인간 왕이 얼마나 무능하고 죄에 쉽게 물드는 것인가를 보여 주기 위해 다윗을 선택한 것이다. 즉 아무리 선택한 다윗이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한 그 어느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삼하 7장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가문을 통해 영원한 왕을 주시되 그 왕은 하나님의 양자의 자격으로 파견됨을 알려준다.

 

그러나 삼하 12장에서 우리야를 죽이는 범죄 이후 삼하7장에 나타나 있는 양자는 내가 아니라 나의 후손으로 오실 하나님인 것을 발견한다. 역시 하나님만이 여전히 이스라엘의 왕 자격이 구비됨을 확인하고 다윗은 삼하22장에 이제는 선지자로 변해 있다. 즉 다윗 언약의 축복은 내가 아니라 나의 후손으로 오실 그 주님과 체결됨을 인정하며(시편 110편) 그 주님이 오실 때 세상 역사가 종결됨을 미리 내다보고 있다. 다윗은 말년에 예언자로서 종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안된다는 것이다.

 

다윗의 다음 왕인 솔로몬 시대에서 다윗 언약은 성전 언약보다 구체화되는데 이는 그 언약의 내용이 '하나님이 영원히 인간들 속에 기거하겠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함께 계시겠다는 것은 광야 때의 이동되는 이스라엘 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모든 것이 만족 상태에 이르렀기에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위한 고정된 기거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 이후의 선지자들은 현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영원히 기거할 자들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제대로 하나님의 은혜 성을 수용하는 남은 자들만이 참된 다윗 언약의 축복을 받고 그들이 바로 진정한 성전이 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선언 그 자체가 그 시대를 향한 종말 선언이요 고발이다. 이러한 다윗의 신학 배후에는 어김없이 하나님의 신이 관여하고 있다. 현 시대에 대한 고발은 인류역사에게 이제는 막 내릴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인류역사에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고 미련조차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에 의하여 다윗 언약대로 성전은 회복되고 그 성전을 이를 첫 열매가 될 새로운 이스라엘을 생산해 낸다.(예레미야 2:3) 그 성전에서 하나님은 약속대로 영원히 기거하실 것이다.(에스겔 48:35)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모세 율법에 의한 성전 구조가 문자의 시대에서 영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차원에 들뜨게 되는데 묵시적으로 역사적 산물인 성전을 이해하도록 성신은 도와준다.

 

그 예로 스가랴 4:1-6에 보게 되면 다시 건립되던 성전이 묵시에 의해서 미리 보여지는데 그 성소 안에 있던 7개의 가지를 가진 촛대가 성신으로 변한다. 그 7 등잔은 이사야 11:1-2에 나와 있는 여호와의 신의 다양성을 두고 말하는데 이러한 성신의 다양성은 영적 성전의 회복에 대해 그 어떠한 방해나 장해도 돌파할 수 있는 그만한 능력과 재능과 융통성이 있음을 두고 표현한 것이다. 즉 실수나 실패가 없이 기어이 해 낸다는 것이다.

과연 에스겔이 하나님의 신에 대하여 예언 한대로 첫열매에 대한 생산에 성신은 돌입한다. 그 일이 시작되는 날이 바로 종말인데 그것이 신약 시대이다.

 

3.신약 시대에 있어 성령의 사역

다윗 언약에 합당한 첫 열매 만들기 작업은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세례줄 때 확실히 확인된다. 그곳에서는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내용이 들려진다. 여기서 말하는 아들이란 바로 다윗 언약이 내다보고 지적한 그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제 무질서에서 질서로 나아가서 창조의 회복 내지는 완성을 종말론적으로 기대한 성신의 소원이 풀릴 조짐이 보인다. 성신에 의해서 그렇게 예언된 그 마지막 예언자로 그 분을 제대로 지적했다.(눅 1:41-45)

 

이제부터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성령 주도형으로 진행된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 종말이었던가! 성령의 힘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고(눅 1:35, 마1:18,20) 세례때에도 성령으로 인정받고(막1:10) 각종 활동을 성령의 힘으로 하시고(막1:12, 마12:28, 눅 4:14,18등등) 십자가 위에서도 성령 안에서 자신을 아버지께 제물로 바치고(히 9:14) 마찬가지로 성령의 힘으로 부활되시고(롬1:4, 8:11)

 

승천하신 후에도 자신의 활동을 성령과 같이 '생명 주시는 영'(고전 15:45)으로 지상에서 실존하신다. 성령의 도움이 아니면 메시야 역할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다윗 언약에 의해 마지막 때의 메시야 활동은 성신에 의해 주도되기 때문이다.(이사야 11:1-2, 61:1-3) 온전한 성신적 존재가 아니면 종말에 나타나는 메시야가 아니다. 극히 성신 의존적이어야 한다.(시편 51:11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그러던 것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 종말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가졌던 똑같은 경험자의 출현이 피어오르는 시기가 되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이 획득한 가치를 메시야적인 나라에서 공동체 전부의 것으로 전달하기 위해 종말의 원리를 도입하는데 종말의 원리란 지상이 진정 종말 되게 하기 위해 구약에서 종말을 유발시켰던 그 요인들을 이제는 나사렛 예수님을 주어로 삼고 그 때 그 사상이 재현되는 상황 앞에다 다시 재현했을 때 비로소 구원받을 자와 심판 받을 자가 확연해지는 원리를 말한다.

 

성령께서 이처럼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나서게 되는 것은 혼돈의 세계를 질서의 세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 근거를 나사렛 예수께서 마련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분만이 구약에서 제시된 모든 언약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성령님의 희망 사항은 그 분이 하신 모든 일에 다 들어 있다. 그래서 성도 뿐 아니라 성령께서도 주께서 다시 오시길 고대한다.(계22:17)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서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자들이 아들의 형상만을 가지기를 소원하고 있다.(롬8:29, 갈4:19) 왜 그런가 하면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기대한 것도 다윗 언약에 의해서(삼하 7:14 ) 참된 아들의 등장이고 그 아들 안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축복이 증여되었기 때문에 메시야 왕국의 백성들?아들의 형상을 입지 않는 한 그 나라를 받지 못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구약에서 이미 확정된 메시야적 삶에 일치되도록 힘을 주신 성령께서는 예수님 승천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것에 성도들을 참여, 적용시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여호와의 영에?이제는 메시야의 영이 되셔서 이 땅에서 메시야적 사역을 수행하고 계신다.

 

택한자를 땅 끝까지 불러모으고(시편 139:7) 그들을 감동, 감화시키시고(미가3;8) 기쁨을 주고(시51:12) 회개케 하고(사 63:10, 4:4) 또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느9:20) 새로운 창조를 위해 부활케 하신다.(시편 104:30, 욥기 33:4)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각종 은사를 주어 봉사케 하신다.(요엘 2:28, 이사야 11:2) 이처럼 성령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교회를 온전케 하는 7영으로서 종말 가운데서 우리를 맞이하고 계신다.(계 1:4,20)

 

메시야 영으로서의 성령의 활동은 다윗 언약의 메시야관에 의해 이 역사를 고발하고 있다.(요16:7-11) 이 역사를 부정하고 그와 동시에 우리의 옛사람을 정죄하여 나사렛 예수님의 사건을 쉬지 않고 우리 속에서 발생시키신다.(고후4:10) 우리의 육체의 정욕을 죽일 때에 한해서 성령의 열매는 맺히도록 되어 있다.(갈5:16-18) 더 나아가서 우리들도 예수님과 동일하게 십자가의 운명을 답습하도록 한다.

 

그런 바른 고난이야말로 성령의 충만한 상태이다.(베전 2:21, 4:14) 오순절 성령 강림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온 천지를 향해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당했던 사건을 오고 오는 역사 속에 재현시켜 모든 역사의 가치를 부정하고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 자신과 똑같은 운명의 사람들을 땅 끝까지 흩어 놓기 위한 종말적 현상이다.

 

Ⅲ. 결론

혼돈 위에서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희구하고 또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이루려고 하신 성령께서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진 세계 속에서 새 창조를 위한 구출을 하기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세상에서 우리들과 관계하고 있다. 성령님의 소원은 단 하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이고 그 형상은 나사렛 예수님의 고난도 함께 수용하는 운명 그 자체를 뜻한다. 종교적, 사업적 욕심을 정당화 해주는 사이비 성령 운동을 보면서 오늘날 성령님은 메시야적인 고난의 심정으로 탄식하고 있음을 아는 그들이 바로 생령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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