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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보니 예수님이 없는 길이었다! (눅 2;41-51)
들은 이야기입니다.
미국 100층 아파트에 살고 있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전기 고장으로 100층을 고생고생하면서 걸어서 올리 갔습니다. 문을 열려고 할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열쇠를 넣어둔 가방을 아래층에 두고 왔습니다. 되돌아 가야 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목사님은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가려고 공항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여권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 와야 했습니다.
죤 번연이 쓴 <천로역정>을 보면 어느 기독도가 고생고생 끝에 천성문에 이르렀을 때 믿음표를 가지고 오지 못 하여 다시 돌아가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가나보니 예수님이 없는 길이었습니다.
설교하다보니 예수님이 없는 설교였습니다.
행사를 하다보니 예수님이 없는 행사였습니다.
찬양을 하다보니 예수님이 없는 찬양이었습니다.
가르치다 보니 예수님이 없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가나보니 예수님이 없는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어렸을 때였습니다. 부모가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돌아 오는 길에 예수를 잃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찾으로 되돌아 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잃어 버리고 가는 길은 되돌아 가야 하는 길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살펴 봅니다.
예수님의 어릴 때 이야기는 오늘 본문 한 하나밖에 없습니다. 12살 때 이야기입니다. 12살 이전에 무슨 일을 하였는 지 모릅니다. 12살부터 30살까지 어떻게 살아 오셨는 지 기록이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본문을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 가지 습관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이면 예루살렘 32km 반경 내에 살고 있는 성인 남자는 모두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남자나 여자, 어른이나 아이,국내외 모든 유대인들이 다 모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일년간 돈을 열심히 모아서 유월절에 한번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나는 몇 년 전에 유월절만 보기 위하여 혼자 이스라엘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밤 2시에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비행기를 독일에서 탔는 데 이방인 나 하나뿐이었습니다. 지금도 유월절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모이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습관을 알아야 이 사건이 이해됩니다.
유대인들은 세 살에 옷단에 술을 달고 알파벳 공부를 하게 됩니다(민15;38-41) 이 때 알파벳을 만든 과자에 꿀을 발라 먹으며 말씀은 꿀과 같이 달다는 사실을 공부합니다.
5살에 쉐마와 시편과 신 6;1-3을 어머니로부터 익혀야 합니다. 10살이면 미쉬나 연구에 들어 갑니다. 13살이 되면 바르 미트바 예식을 거행하여야 합니다. 율법의 아들이라는 예식입니다. 부모가 받은 율법을 자녀가 받는 예식입니다. 그리고 15세에 탈무드 연구를 시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공부하는 백성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헌 책방이 없습니다. 책은 팔지 않는 물건입니다. 옷을 팔아 책을 사는 백성입니다.
12살은 마르 미트바를 연습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3살을 대비하려고 12살에 성전으로 간 것같습니다.
모두가 예루살렘을 갈 때 습관이 있습니다.
카라반(Caravan)이라고 불리우는 여행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 강도나 어떤 위험을 대비하여 여자와 아이들은 떼를 지어 앞에 가고 남자들도 역시 떼를 이루어 뒤에 가는 여행이었습니다. 갈 때 올 때 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은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가서 유월절을 지키고 오는 데 예수님이 앞에 여자들과 아이들 무리속에 당연히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집에 와서 보니 없었습니다. 하루를 걸어 온 먼 길었지만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친척집을 다 돌아 다녔습니다. 갈만 한 곳을 다 가보았습니다. 이틀이 걸렸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은 마지막으로 성전으로 가 보았습니다. 뜻밖에도 예수님은 저명한 율법학자들과 함께 성경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있는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반갑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여 말했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이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가다보니 예수님이 없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가는 길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1. 예수님없이 걷는 길은 근심이 생기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걷는 길은 근심의 길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성경 토론을 하고 있는 예수를 만났을 때 어머니 마리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
몹시 근심하였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걷는 길은 늘 근심이 도사리고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은 평안과 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길은 근심이 사라지는 길입니다.
심지어 죽을 때에도 근심이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31살에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에 와서 좋은 대학에 교수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막 강의를 시작하려고 하는 데 췌장암에 걸려 죽었습니다. 죽으면서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아! 억울하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하는 죽음은 그렇게 평안할 수 없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기억됩니다.
<천사가 나를 데리러 왔구나!>
그리고 안방에서 자다가 옆 방에 가서 자는 것처럼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길은 근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근심하지 말라는 말은 사람은 근심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근심합니다. 그러나 근심하다가도 빨리 근심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100만 장자 아들이 돈 10만원이 없어서 근심하며 잠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있다면 이해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부자 우리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은 못 할 것이 없으신 왕중에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길은 근심이 없어집니다.
파도치지 않는 바다가 어디 있을 가요? 파도 치다가도 바다는 빨리 잔잔하게 됩니다.
춥지 않는 겨울이 어디 있을 가요? 그래도 곧 봅이 옵니다.
병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 가요? 그래도 곧 건강을 찾게 됩니다.
세상에 근심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 가요?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근심하다가도 곧 근심에서 벗어나갸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길은 근심이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곳에서도 근심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1-4)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걷는 이들은 이렇게 찬송할 수 있습니다.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 마음이 늘 평안해.>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있으랴.>
어느 여인이 마더 테레사 수녀를 찾아 와서 말했습니다.
<자살하고 싶은 데 어떻게 하면 좋을 가요?>
테레사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근심 걱정이 하늘처럼 많아 살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테레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살하십시오. 그러나 자살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칼타코에 와서 내 일을 한 달만 도와주고 자살하십시오.>
그 여인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칼타코로 와서 테레사 수녀와 지내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 병든자, 고통받는 자들을 위하여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인은 자기는 그대로 이들에 비하면 너무나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그리고 봉사하는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누구에겐가 필요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살을 포기하고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에는 근심이 사라자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가다 보니 예수님을 잃어 버린 것을 알았습니다. 하룻길을 가다가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으며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틀만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잃어버리고 걸은 길은 하루였지면 근심하며 찾은 것을 이틀이었습니다. 두 배 고생을 하였습니다.
어느 회사 사장이 열심히 일했습니다.
죽을 둥 살 둥 최선을 다 하였기에 회사는 일약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사장실을 노크하였습니다. 비서가 문을 열면서 말했습니다.
<우리 사장님은 일하시는 중에는 예약없이 사람을 만나지 않으십니다. 누구도 나에게 만나지 못 하게 하라고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목사님도 만나지 않을 것입니니다. 돌아 주십시오.>
절대 면회 사절이었습니다. 목사님은 할 수 없이 돌아 왔습니다. 6개월이 지났습니다. 노크도 없이 사장실에 들어간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죽음의 사자였습니다. 사장은 졸지에 죄졸증으로 사장실 의자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죽음은 예약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없이 걷는 길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근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우주인 어윈박사는 병석에서 기도하다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과속하고 있다.>
너무 무리한 것이 병의 원인이었습니다.
예수님보다 앞서 가는 선행(先行)은 신앙적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예수님보다 뒤에 쳐지는 후행(後行)도 안 됩니다. 예수님과 따로 걷는 별행(別行)도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의 뜻을 거스리는 역행(逆行)도 안 됩니다. 예수님과 동행(同行)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가다 보니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걷고 있었습니다. 근심하였습니다. 찾느라고 두 배나 고생하였습니다.
이북이 지금 그런 상황입니다.
쏘련이 그런 상태입니다.
헝거리가 그렇습니다.
모두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사는 나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오늘까지 정신없이 걸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니 예수님이 없는 길을 걸어 왔습니다. 북한은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근심이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예수없이 걸어가는 길은 근심의 길이 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2. 예수님없이 걷는 길은 헛수고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를 잃어버리고 걷는 길은 헛수고의 길이었습니다.
가도 다시 와야 합니다. 걸은 것만큼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더 손해였습니다. 더 헛수고였습니다. 다행히 하룻길 걷다가 예수님이 안 계신 것을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나사렛까지 다 가서 발견하여 3일길을 걸어 오려고 하였으면 더 큰 헛수고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다가 타락한 분에게 권면하며 말했습니다.
<다시 예수님에게로 돌아 오세요.> 그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어요.>
나사렛을 가기 전에, 3일길 가기 전에 어서 돌이켜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다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잃어 버리고 가면 간 것만큼 헛 수고입니다.
예수를 잃어 버리고 돈을 쓰면 쓴 것만큼 헛 물질입니다.
예수를 잃어 버리고 올라가면 올라간 것만큼 헛수고입니다.
예수를 잃어 버리고 주면 준 것만큼 헛수고입니다.
몇 년전에 올림픽에서 100m 벤 존슨이 1등 하였습니다. 그러나 약물을 먹고 뛰었기에 무효 선언이 되었습니다.
어느 국회위원은 당선되었는 100만원 벌금을 받아서 당선이 무효 선언되었습니다.
정 주영이 아무리 위대한 현대를 건설하였어도 예수를 잃어버리고 걸은 길이기에 무효될 것입니다.
박 정희 대통령이 나를 근대화시키고 나를 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크게 일하였다. 그러나 예수없이 걸은 길이기에 무효다.>
예수님없이 걸은 길은 모두 무효입니다. 헛수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걸은 길은 모두가 저축이 되고 수고한 댓가를 받을 것입니다. 이런 유모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나 게으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부지런하게 만들라고 닭과 개와 돼지를 이 땅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닭은 게으른 사람들을 새벽이면 열심히 깨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상으로 벼슬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닭에게는 벼슬이 생겼습니다.
개는 본래 다리가 셋이었습니다. 개는 열심히 도둑을 지켜 주면서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보상으로 다리 하나를 더 주셨습니다. 그 다리는 하나님이 보상으로 주신 다리였습니다. 그래서 개는 오줌을 누려고 하면 하나님이 주신 다리에 더러운 오줌이 묻을가봐 다리를 들고 소변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돼지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잠만 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화가 나서 뾰족하였던 코를 눌르셨습니다. 그래서 돼지 코는 납작하여졌습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일한 사람을 보상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잃어 버리고 가는 길에는 헛수고만 남아 있게 됩니다.
지구상에서 제일 유명하고 영감적인 벽화 그림은 성 베드로 성전 천정위에 그린 그림입니다. 미켈란젤로가 4년 동안 그린 그림입니다. 미켈란젤로는 4년을 천정 밑에 누워서 살아야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허리 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호흡 장애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4년을 천정 밑에 누워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고통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말리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림도 좋지만 건강도 생각하셔야지요.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 때 미켈란젤로가 말했습니다.
<나는 내 이름을 후대에 남기려는 것이 아니네. 내 작품을 역사에 길이 남기려는 것도 아니네. 나는 후대에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 하나밖에 없네.>
그는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였습니다. 오늘 날 최고 명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하는 일에는 헛수고가 없습니다.
그 분만이 우리에게 보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바로 성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살에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이 바로 예수님 중심의 신앙생활입니다.
예배시간마다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루에 세끼 식사를 하여야 육이 사는 것처럼 반복하여 성전을 드나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먹어야 영이 살게 됩니다.
어느 분이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나는 30년을 교회 다녔어도 목사님이 무슨 설교하였는 지 기억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과 이런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결혼한지 얼마나 되었나요?>
<25년입니다.> <그러면 25년 동안 아내가 무슨 음식을 하여 주었는 지 다 기억하나요?>
<기억할 수가 없지요.
<그러나 아내가 만들어 주는 음식을 먹고 25년 살아 온 것만은 사실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30년 동안 무슨 설교를 하였는 지 몰라도 그 영의 양식을 먹고 지금까지 영이 살아 온 것만은 틀림없지요. 콩에 물을 주면 다 빠져 나가는 것같지만 분명히 콩나물은 그 물을 먹고 자라지요.> 그렇습니다.
성전에 오면 늘 예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2살에 당당히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를 잃어 버리고 걸었습니다. 근심의 길이었고 헛수고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오늘 여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을 찾아 같이 가정으로 돌아가시는 예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미국 챨스다운 교회 죠지 하비 목사의 간증입니다.
무선 신호를 발명한 모리스가 그 교회 교인이었습니다. 모리스는 무엇을 하든지 오직 예수를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었습니다. 모리스가 국가에서도 인정을 받아 미국 국회에 가서 상을 받고 돌아 왔습니다. 주일 낮예배시간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 모리스가 무선으로 통신할 수 있게 발명하여 미국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고 귀가하였습니다. 우리 박수로 같이 축하여 드리십시다.> 온 교인들이 열열한 박수를 치려고 할 때 모리스가 일어나더니 말했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배 시간입니다. 예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시간입니다. 나에게 박수를 치지 말고 예수님에게 박수를 치십시오. 그리고 나에게는 예배후 친교시간에 박수를 치십시오.> 그래서 모두가 엄숙하여졌습니다.
오직 예수를 높이는 믿음의 사람이 모리스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통하여 예수님은 큰 발명을 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걷는 길은 근심의 길이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길은 축복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가는 길은 헛수고의 길이요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은 축복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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