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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9:25-33
제목: 믿음 대신 행위를 의지하는 이스라엘의 대실패
오늘 본문은 어, 이사야서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면서 사도 바울이 놀라운 현상을 설명합니다. 왜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일부만 믿고 또 다른 나머지 일부 대다수는 믿지 않는지? 왜 하나님의 종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일부 이스라엘은 믿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믿지 않는지? 그것을 설명합니다. 또, 또 하나는 왜 이스라엘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렇게 냉담한데 저렇게 이방인들 바울이 가는 이방 지역의 선교할 때는 어떻게 저렇게 많은 이방인들이 몰려들었는가? 이방인들은 떼로 몰려들고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배척하는 이 기이한 현상을 광범위하게 이사야를 인용함으로 이것을 해명하고 있습니다. 자, 이사야가 왜 중요하냐 하면은 이사야는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배척하고 극소수의 남은 자만 자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을 최초로 발견하고 남은 자 사상이라는 놀라운 신학적인 사상을 낸 사람입니다. 이사야가. 이사야는 누구냐 하냐면은 자신의 메시지를 하나님의 정당한 메시지를 절대 다수의 청중이 배반하고 소수의 남은 자들만이 자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서 이사야가 놀랜 거죠. 그래서 이사야는 ‘남은 자만 돌아온다! 남은 자만 구원 받는다. 남은 자가 이스라엘의 희망이다’라는 말을 이제 했습니다. 이사야가요. 그래서 이 말은 이사야가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 모래 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라 그 다음에 보라 내가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거치는 바위란 말은 뭐냐 하냐면은 이스라엘이 전통적으로 알고 있던 그런 하나님 이외에 비하면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전통적으로 알고 있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넘어지고 쓰러지는 겁니다. 왜?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들에 대해서 엄청 관대하시는 예수님! 그러니까 전통적인 이스라엘 종교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만 좋아하고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을 거룩한 불꽃으로 태워버리는 이런 굉장히 거룩에, 거룩함과 거룩하지 않음에 집착하는 그런 일종의 쉽게 말해서 인간의 공로를 우주적으로 계측하여 나노-밀리미터까지 인간의 선과 악을 나누어 보는 아주 이런 하나님 이해를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차별 하나님의 사랑과 보편적 사랑을 가르치기 보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거룩과 비거룩으로 한 없이 까다롭게 인간의 행동을 달아보시고 계측하는 이런 아주 우주적 컴퓨터적 계측 하나님, 뭔가, 뭔가 측량하고 재고 포인트를 이렇게 계속 매기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 대다수는 우상숭배에 빠져있기 때문에 구원의 가능성이 없었거나, 개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바울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은 인간의 거룩함과 인간의 도덕적 의를 가지고 도토리 키 재기 하는 이런 데 관심이 있었다기 보다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목말라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애타하는 그 애타하는 열정이 많은 사람들이 먼저 구원받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아픈 사람을 고치러 왔지, 건강한 사람을 돌보러 오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의 그 교만하고 자기의로 가득 찬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렇게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자마자 실족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어디에 해당 되냐 하면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 이것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었더니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전부 다 그 바위에 걸려 박살났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진짜 하나님을 목말라 하는 사람들은 구원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일련의 지식을 가지고 자기 자랑을 하거나 자기 의에 가득 찬 사람들은 쓰러트리고 실족시키고 쓰러 넘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이런 점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목이 타는 갈증을 가졌던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예수님이 알려주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예수님이 알려주는 하나님의 복음, 예수님이 가르쳐주는 계시하는 하나님 아버지 것으로 많이 돌아왔습니다. 이방인들은. 그런데 이방인들은 돌아왔는데 정작 하나님의 본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이 오랫동안 누려왔던 특권적 지위, 선민으로서의 특권적 지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히 보편적이고, 무한히 평균적이고, 무한히 평등케 되는 이런 구원을 보자마자 이 유대인들은 그냥 실족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기이한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첫 째는 왜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대다수는 메시아를 배척하고 일부 사람만 메시아를 영접하는가? 두 번째로 왜 이방인들은 저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열광적으로 환영을 하고 영접을 하는데 이스라엘은 저렇게 냉담하고 배척을 하고 쓰러지고 실족하고 마는가? 그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를 사랑하는 자라 부르리라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했던 이방인들에게 가서 이방인들을 하나님 지금 내 아들이라고 영접합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했던 그 비선민 이방인들은 하나님 백성으로 영접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바다 모래같이 많은 자손 중에도 극히 돌아오는 남은 자만이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래서 어, 사도 바울은 이사야 1장을 인용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돔과 고모라처럼 다 멸절 시켜서 한 명도 남겨놓지 않고 우리 모두를 다 멸망시키실 수 있다. 있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멸망시키지 않고 일부를 남겨두셨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매우 수가 적었다는 말이죠. 자, 그럼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됐는가? 이스라엘이 이렇게 대실패를 한 이유는 뭔가? 중요합니다. 30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자, 이 믿음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신실함에서 이런 뜻입니다. 요 믿음도 우리 믿음 아닙니다. 하나님의, 하나님과의 언약적 신실함을 추구하지 않던 이스라엘 하나님에 대해서 언약적 관계 안에 들어있지 않던 이방인들이 갑자기 하나님과의 언약적 신실성을 얻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이 박혀 죽고 예수님이 배척받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전부 다 추방 됩니다. 그런데 에베소, 고린도, 로마, 데살로니가, 빌립보 등 모든 이방인의 도시에는 예수님 이름이 열광적으로 수용되고 있고, 환영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실함이 금방 효과를 나타내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냐면은 이방인입니다. 여러분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자신이 의롭게 살려다가 분투한 사람이거나, 분투했다가 좌절당한 사람이거나, 자신이 너무 더럽게 살아서, 인생이 더러워서, 자기 인생은 이생망이라고 폭망했다고 이제 내 인생에 남은 희망은 아무 것도 없다고 믿었던 세리와 창녀 같은 사람들과 하루에 두 번씩 금식 기도하고 십일조하고 모든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율법사회에서 누가 예수님의 은혜를 빨리, 빨리 이해하겠습니까? 누가? 누가? 누가 예수님을 목말라 하면서 애타게 찾겠습니까? 자기의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너덜너덜해진 이방인과 세리와 창녀와 이런 죄인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금방 내 구세주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립니다. 예수님 내 구세주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것은 구약성경 하나도 몰라도 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알려주기만 하면은 내 구세주인 것을 금방 압니다. 이것은 모든 선교지에서 다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을 하나도 몰라도 예수님이 내 죄를 지고 가다가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었고 부활했다. 이것을 알려주면은 왜 이 간단한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놀랄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사영리라고 그래서 이렇게 간단하게 복음 전하면은 예수를 영접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의 때가 임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간단하게 예수님을 소개해도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이, 그래서 1740년대에요. 1730년대, 1740년대 요 때가 어떤 사람이 전도를 했냐 하면은요, 그 미국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뉴욕 주에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라는 한 젊은 선교사가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했거든요. 그런데 뉴저지 크램베리라고 하는 곳 워싱, 저기 뉴욕 주, 그 인디언들이 사는 곳에 가서 인디언 말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인디언들이 그 부족사회를 이루었던 인디언들이 복잡한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회가 아주 간단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투명하게 공개적으로 사는 부족, 일종의 집단적인 부족생활이니까 사생활이라는 게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징벌 받고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었습니다’라고 괴로운, 예수님의 그 괴로움을 감정적으로 표현하니까 인디언들이 인디언 말로 완전히 대성통곡을 하면서 자기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인디언들은 오늘 날 우리처럼 자기만 아는 사생활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거의 없습니다. 수렵, 채집 경제를 했고 부족 공동체 생활을 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었다고 믿어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죄를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인디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간략한 설명을 듣고 반응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10분밖에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예레미야 당연히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실존적인 처지! 그들이 구원을 그토록 목말라하는 지점에 가니까 그 구원을 목말라하는 그 시점에서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의 아들을 딱 들이대니까 내 구원주! 내 구세주! 나의 주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고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그게 바로 이방인들의 마음입니다. 이방인들은 구약성경 몰라도 바울이 전하는 그 간략한 복음을 듣고도 쇄도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구약성경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구원에 목이 마르도록 만들어 주는 책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지 못해서 내 영혼이 너덜너덜 해졌구나! 내 영혼이 정말 형편없이 망가졌구나!’ 그것을 구약성경이 깨닫게 해줍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읽은 사람하고 똑 같은 효과가 어떤 마음이냐 하면은 79년에 제가 구약성경을 몰랐는데 예수님을 영접을 했습니다. 구약을 거의 몰랐는데 79년에 제가 영접을 했을 때는 제가 그 미국 뉴저지 주에 있는 인디언과 똑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내 인생이 죄로 말미암아 너무나, 너무나 크게 낭패가 찾아왔다고 믿는 그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입니다. 마무리합니다. 이중예정, 선택교리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중예정, 선택 이 모든 것들도 무한한 사랑, 하나님의 무한히 크신 사랑을 인류에게 맛보게 하려는 목적 때문에 그런 장치를 가지고 그런 전략을 씁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예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인간의 우발적 선택, 인간의 우발적 회개가 하나님의 예정을 취소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진노의 그릇으로 예정했다 하더라도 그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 꿇고, 자복하고 손 들고 나아가면 그만 하나님의 예정은 취소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에 의존하지 않고 행위에 의존했습니다. 이 행위가 뭐냐 하냐면 한 번 할례를 받는 것이 할례 받는 행위를 구원의 마법이 있다고 믿는 이것을 행위라고 그럽니다. 이때 행위는 율법을 준수하는 개별적 행위 아닙니다. 요 본문 32절에 나오는 행위는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그 행위입니다. 할례입니다. 할례. 이방인들은 할례 받았다고 자신이 아브라함 자손이 되었다고 하는 그런 유대인과 달리 자신은 할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영혼은 이생망이고 폭망했고, 정말 너덜너덜 더러워졌다고 믿는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자기는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아브라함 자손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율법을 지켜서 아브라함 자손의 행동답게 살기 때문에 내 죄를 대신 누군가가 사해줄 필요 없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여러분 그래서 이때 행위가 율법을 지키는 개별적인 실천 행위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때 행위는 갈라디아서 그 논쟁에서 말하듯이 할례를 가리킵니다. 할례 한 번 받으면은 율법의 요구를 다 지킨 것처럼 또는 지킬 것처럼 자신을 생각하는 것, 이것이 율법의 행위입니다. 이 율법의 행위 즉 할례를 가지고는 예수님의 의를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자, 우리 오늘 10장에서 약간 더 다뤄지니까 오늘 요정도 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크신 사랑은 예정과 선택을 통해서 중간 전략을 취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 우리 영혼이 너덜너덜해지고 우리 영혼이 이 생에서 망했다고 느낄 만큼 엉망진창으로 굴러 떨어진 우리 인생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우리에게 소생의 기회를 주시고 Second Chance 두 번째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과 동행하여 남은 생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복 내려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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