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더욱 바라보자! (빌 1:1-11)
시편 강해설교를 잠시 미루고, 신약 성경 빌립보서 강해를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시편의 은혜를 더 깊이 받는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증거는 열매를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열매가 사랑입니다. 그 다음에 기쁨입니다. "야, 저 사람은 진짜 크리스천이다"라고 할 때, 기쁨이 있는 사람인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족이나 친구를 전도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 믿어서 좋은 것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는 기쁨으로 가득한 편지입니다. 기쁨이란 표현이 무려 열여덟 번 나옵니다. 이번 빌립보서 강해를 통하여 저와 여러분이 예수믿어 받는 가장 복인 기쁨을 회복했으면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지난 성지순례 때, 사도 바울의 순교 자리에 세워진 세 분수 성당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성당 안의 그림은 참혹했습니다. 바울 사도의 머리를 도끼로 내려치는 그림, 사도 바울의 머리가 떨어져 나가며 세 번 튕겨 나가는 그림, 잔인하였습니다. 그 머리가 튈 때마다 물줄기가 분수처럼 솟아나왔다고 하여 세 분수 성당이 세워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순교를 앞두고 감옥에 갇혀 있는 처지인데 기쁨이 가득한 편지를 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기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빌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기쁨의 비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 안에 있기만 하다면 부러울 것도, 불평하고 두려울 것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빌 3:7-9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 만에 거하면 우리도 늘 기뻐하며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6절에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6절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어려운 일이 닥쳐도, 실망스런 일이 생겨도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확신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기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혔지만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감옥에 갇힌 것 자체가 주님의 응답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빠졌을 때,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행 23: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 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증거하여야하리라”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다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다 죽게 되었을 때도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행 27:23-24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니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혔으면서도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단 하나 염려는 감옥 밖에 있는 교인들이 낙심하고 시험들까 하는 것인데, 빌립보 교인들의 소식을 듣고 그런 염려도 사라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빌립보 교인들은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3-5절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7절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여러분, 어려울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은 참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빌립보 교인들은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는 기가막힌 현실 앞에서도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을까요?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에 교회가 세워진 내력이 기록되어 있는데,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 와서 전도하다가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바울과 실라가 밤 중에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하였는데, 지진이 일어나며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간수는 모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자결하려다 바울의 만류로 목숨을 건지고 회심하고 온 집안이 세례를 받아 빌립보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니 빌립보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순간 걱정도 했겠지만 주님은 어떤 마음을 주셨을까요? ‘로마에서도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구나!’ 그들은 빌립보에서 함께 하신 예수님께서 로마에서도 사도 바울과 함께 하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생기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영성일기 한 부분입니다.
“오늘은 아침 회의 시간에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하여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부목사 모임에서 세심하고 철저하지 못한 듯한 몇 건의 보고로 잔소리 같은 말이 길어졌다. 말의 표현이 점점 강하여졌다. 내게는 되어지는 일들이 답답함을 지나 걱정스러워 보였다. 한번 감정이 뒤틀리니 좀처럼 감정 조절이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 나의 마음에 기쁨이 없음이 깨달아졌다. 영적으로 정상이 아님을 알았다. 비로서 회의할 때, 주님을 바라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로 인하여 다들 힘들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도 하루 일정이 많이 남았음을 생각하면서 말 한 마디도 주님을 바라보며 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상담을 온 사역자와 만났을 때, 여러 가지로 미진함이 느껴져 걱정스러웠으나 주님의 마음으로 말하고 격려하려고 애를 썼다. 중요한 집회를 앞두고 어느 목사님과 의논할 때, 나도 모르게 이런 저런 부정적인 말을 하다가 주님을 바라보는 중, 말 한 마디라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말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깨닫고 나니“주님을 믿고 한번 해 봅시다!”긍정적인 판단으로 돌아섰다. 그렇게 순간 바뀐 나 자신에 대하여 나도 놀랐다.
내가 관여한 중요한 단체의 임시 이사회를 향하는 마음은 무거웠다. 솔직히 골치 아픈 회의였다. 핵심 리더들 사이의 갈등을 풀어야 하는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지 않아도 할 일이 많은데, 내가 왜 이런 시간 낭비를 해야 하나?’탄식이 나왔다. 회의에 참석하다가 해결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그만 두고 나오자.’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회의 장소에 도착하여 걸어가는 중에‘부정적인 마음이나 비판적인 생각을 버리고, 즐거움으로 섬기라, 일절 사랑으로 대하라.’는 마음이 들었다. 주님의 말씀인 것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일절 말 조심해야 하겠다. 주님이 말하라고 하는대로 말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회의에 참석했는데, 예상한대로 회의는 장시간 계속되었고 해결책은 없었다. 주님이 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중간에“전 그만 두겠습니다.”하고 일어났을 것이지만 주님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믿어지지 않는 반전이 일어났다. 상상도 못할 해결의 길이 열리고, 모두들 너무나 기뻐하면서“정말 주님이 하셨습니다!”고 고백하며, 뜨겁게 악수하였다. 주님을 믿고 순종하였더니 주님은 정말 역사하셨다.”
안된다, 힘들다,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확신이 생기고 기쁨이 옵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사랑 고백입니다. 연애편지 같습니다.
3-7절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8절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의 심장으로 사랑한다"는 말은 단순히 사랑의 감정을 강조하는 낭만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정말 말 그대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사랑이 ‘사도 바울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심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루어진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다 예수님의 심장을 가진 자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
사랑, 성격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 문제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느냐 아니냐 문제입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살아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빌립보 교인들도 사도 바울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지역으로 갔을 때 빌립보 교인들은 선물을 보냈고, 고린도 지역으로 갔을 때도 정성을 담아 보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일하면서 복음 전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지만, 빌립보 교인들이 도와주는 것을 기뻐하고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로디도를 보내 바울을 시중 들게 했습니다.
그러면 도데체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어디가 그렇게 사랑스러웠을까요? 교회를 개척해 주어서 그랬을까요? 사도 바울의 인물이 잘 생겨서 그랬을까요? 학문이 훌륭해서 그랬을까요? 고향이 같아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진정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사람이고, 예수님과 하나된 사람이고, 예수님의 종임을 빌립보 교인들이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사랑스럽게 여겨지게 됩니다.
지난 수요일 박성호목사님께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습니다. 서로 원수였어야 할 다윗과 요나단이 생명을 줄 정도로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어려서 같이 자란 것도 아닙니다. 학교를 같이 다닌 것도 아닙니다. 군 생활을 같이 한 것도 아닙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담대히 고백한 말을 요나단이 들은 것입니다.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 18: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믿음에 서로 반한 것입니다.
남성 부흥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모입시다. 사명의 동지들로 일어서기 바랍니다.
어느 남자 성도가 자신은 교회 밖에는 친한 친구가 많은데, 교회 안에는 친한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학생부, 청년부 시절 회의만 하면 우리는 사랑이 없다 우리는 사랑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이가 되려고 열심히 오락회를 했습니다. 그래도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교인들끼리 사랑하고 친해지는 길이 밥같이 먹는 것 밖에 생각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친해지는데 도음이 되지만 정답이 아닙니다.
성도 간의 사랑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 개척 멤버는 세 사람이었습니다. 첫 교인은 자주 장수 루디아입니다. 두번째 교인은 귀신들려 점을 치던 여인이었습니다. 세번째 교인은 빌립의 간수장입니다. 루디아는 아시아인이고, 점하는 여종은 헬라인이고, 간수장은 로마인이었습니다. 루디아는 부유한 상인이고, 소녀는 노예였고, 간수는 로마의 관리였습니다. 이들은 결코 하나될 수 없는 신분이요, 상종도 하지 않았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한 교인이 된 것은 그들이 다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님으로 사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했습니다.
무엇이 선한목자교회 교인으로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까? 교회 건물입니까? 목사의 설교입니까? 제자훈련입니까? 교인들이 친절해서 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생전 알지도 보지도 못했던 우리를 이처럼 하나되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까?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죽으시고 지금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한 몸이 되어 주시는 예수님, 그 분에 대한 믿음과 사랑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분을 만나면 너무 좋습니다. 한번 만나도 평생 알던 사람처럼 친근함을 느낍니다. 제게 항상 기억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이들입니다. 선교사님이든 교우이든 목사님이든 그들이 그립습니다.
저는 다정다감한 편이 아니라 악수도 쉽지 않지만 그런 사람들을 보면 끌어안게 됩니다.
진젠도르프는“나에게는 오직 하나의 열망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분, 오직 예수님뿐이다.”라는 고백을 하였답니다. 그래서 저는 진젠도르프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시대를 뛰어 넘어 사로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사는 것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큰 복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기쁘게 사십니까? 예수님을 더욱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매 맺는 성도가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9-11절 “내가 기도하노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우리도 이렇게 기도합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를 힘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매로 맺어지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자신을 위하여, 서로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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