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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 것과 얻은 것! (빌 3:1-9)

by 【고동엽】 2022. 1. 13.

버린 것과 얻은 것! (빌 3:1-9)

 

 

끝으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내가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쓰는 것이 나에게는 번거롭지도 않고, 여러분에게는 안전합니다.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살을 잘라내는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우리들이야말로,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입니다.

하기야, 나는 육신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신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5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감사했습니다.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이 본문은 설교하기에 가장 부담스러웠던 성경 말씀 중 하나였습니다.

7-8절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정말 돈, 명예, 권세 등을 이렇게 다 버려야 하는가? 배설물처럼 버려야 하다니! 너무나 부담스러웠고, 상담을 해 보면 이 성경 구절 때문에 고민하는 이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어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있는 그대로 읽어 보면 그저 버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버린 것만 있습니까? 얻은 것도 있습니다.

7-9절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로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 모든 유익한 것을 배설물 처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아느냐에 따라 본문에서 받은 은혜가 다릅니다.

예수님을 성자의 한 사람으로 알거나, 2,000년 전에 사셨던 분,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알고 있는 사람은 이 말씀이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버리는 것은 현실이고 얻는 것은 막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게 되는지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자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랬더니 그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진정으로 그리스도이심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하늘의 보화가 무엇인지 알고서 그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사람은 전혀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교환에 대하여 괴로와하거나 부담스러워하거나 아까워하거나, 억울해 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갈망했고 기뻐했고 감사했습니다. 그는 수지맞은 사람 처럼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집에 모시고 하루를 지난 후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사도 바울과 같이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말씀을 깨닫기 원하면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있습니다.

3절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우리들이야말로,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성령님에 의하여 “셋째 하늘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과 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이것을 정말 알게 된다면 얼마나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유대인 공동체에 남아 있었다면 평생 편안하게 대접받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안 사도 바울은 유대인 공동체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유대 사회에서 대접받고 살 모든 유익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고난의 길인 이방인 전도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님들도 다 20대 청년이고 신혼이었을 때, 이 말씀 하나로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해주어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도전이 주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잘 살고 있습니까? 이대로 가면 마지막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후회없이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만 바라보면 답이 안 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만 아니라, 우리도 버려야 할 것과 얻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분별하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예수님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정녕 복되구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크리스천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 : 훌륭하고 옳은 대답이다. 그러나 너는 불행하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그것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면 이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조차 정답 찾기 식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곧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야 진정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된다면 세상에서 선망하던 것을 배설물 처럼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설물 처럼 버려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을 개라고 표현했습니다.

2절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살을 잘라내는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개라고 한 것은 물고 늘어지는 특징때문인데, 자기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4절-6절까지 자신을 소개하기를 ‘나는 8일 만에 할례받았다` `이스라엘 족속이다` `베냐민 지파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다.` 라고 했는데, 이 말은 율법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도 바울에게 기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점점 무서운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그는 교회를 무섭게 박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개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을 물어 뜯어 죽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에 보면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고 싶다면 인터넷의 악성 댓글을 보면 됩니다. 정말 물어뜯는 개같은 자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면 이런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비로서 이런 율법주의자의 삶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세상의 유익한 것들을 다 배설물 처럼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까?

아직 진정 귀한 것을 보는 눈이 뜨이지 않아서 그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오히려 다른 것에 마음이 깔릴까 걱정하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없이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가 예수님 없이 운영되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 말고 다른 것에 마음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앤서니 드 멜로가 [수도사들의 방심]이라는 책을 썼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의 어느 수도원에 신앙의 초보자들을 영적인 삶으로 이끌어갈 지혜롭고 거룩한 수도사가 한 사람 필요하여 교단 본부에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 요청을 받고 본부에서는 다섯 명의 수도사를 보내었습니다. 수도사들은 왜 다섯 명이나 보내는지 의아했습니다.

다섯 명의 수도사들이 길을 떠났는데, 어느 마을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말하였습니다.“우리 마을에 사제가 돌아가셨어요. 사제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해요.”그 마을은 경치도 좋았고 풍요했습니다. 다섯 명의 수도사 중 한 사람이“내가 마약 이 사람들의 사제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뿌리친다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실거야.”하고 남기로 했습니다.

며칠 후 네 명의 수도사가 한 왕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왕은 수도사 중 한 사람이 마음에 들어 사위를 삼고 싶어했습니다. 그 수도사는“한 나라를 올바르게 잘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하고 그 왕궁에 남기로 했습니다. 남은 세 수도사가 길을 가다가 아름다운 여인이 사는 외딴 오두막에 이르렀습니다. 그 여인은 수도사들을 잘 대접하며 그들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녀의 부모님은 산적들에게 살해 당했고, 혼자 남아 두려움 속에 살아왔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한 수도사가“나는 이 여인과 함께 이곳에 머물겠소, 만약 내가 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결코 주의 종이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소.”그 후 남은 두 수도사가 이교도 마을에 들어가 자게 되었는데, 이교도들의 무서운 핍박으로 그 마을의 모든 신자들이 배교하였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안 수도사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나는 여기 머물면서 이 사람들을 다시 참된 믿음 안으로 회복시키는 일에 나의 소명이 있는 것 같소.”그래서 결국 한 명만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살 때, 얼마나 많은 유혹이 우리 길을 가로막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것은 분명히 음흉한 유혹입니다. 그러나 그리 음흉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유혹들도 있습니다.

다섯 수도사들은 분명히 초보 신자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일에 훈련받았고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섯 수사들은 가장 좋은 것 대신에 그저 좋은 것을 택하였습니다. 분명히 한 마을의 사제가 되는 일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수도사는 그 사명을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좋아 보이는 일도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왕의 총애를 받고 왕의 사위가 되고 장차 그 왕국을 다스리는 일도 거룩한 사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에게 주신 소명 보다 왕이 되는 일과 왕의 사위가 되는 일에 더 마음이 갔기에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나 의심스럽습니다. 결국 그가 정말 존경받는 왕이 되었을까 걱정됩니다.

혼자 외롭게 사는 여인과 함께 하기로 한 결정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로 포장될 수 있습니다.

선교사의 열정과 부담감을 가진 네번째 수도사는 상당히 존경스럽습니다. 이교도로부터 마을을 구한다!

그러나 그가 진정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결정한 것인지, 자신의 욕망을 합리화한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도 주임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나선 것이라면 과연 그가 하는 일에 열매가 있었을까요? 선교 사명이 열정만 가지고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일에 이처럼 유혹이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살기는 열심히 살지만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선가 주님을 놓친 것입니다.

주님은 저에게 계속 버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외에 필요없는 것들을 다 정리하려고 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인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해주시려는 것입니다. 온갖 것들이 나에게 들러 붙어서 결국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제자훈련 세미나 중 절박한 형편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과 대화하면서 제가 새롭게 결단해야 할 것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정말 나는 죽고 예수로 살라!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하는 메세지를 전할 자격이 되는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선한목자교회는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좋으신 장로님들과 부교역자들이 많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들을 의지합니다. 건물도 재정도 교인수도 은근히 내가 의지하는 대상이 됩니다. 서서히 예수님 만 갈망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위기인지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장로님들과 부교역자와 교인들, 건물과 재정이 없어도 진정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한가? 이 점을 항상 분명히 하고 가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의 비교 대상은 개척교회 목회자다! 북한 지하 교회 지도자다. 아무런 지원도 없이 선교지에 나간 선교사다!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모든 목사님과 전도사님도 이와 같은 마음이면 좋겠습니다. 장로님들을 비롯하여 모든 교인들이 예수님만 바라고 예수님만으로 만족하고 예수님이 친히 쓰시는 사람들이 되기 원합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교회 모든 행사를 재점검하기로 하였습니다, 모든 재정 지출을 재점검하기로 하였습니다. 재정도 편안한 시설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교우 여러분도 항상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덧, 편안하고 편리하고, 보기 좋은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 친한 사람, 잘해주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주 예수님을 놓치고 사는 지도 모릅니다.

부자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는 무서운 책망을 받았습니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알고 더 깊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라면 불편함도 힘든 것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라면 찬 바람 부는 빈들에 혼자 나가 설 수 있습니까?

모든 관계, 모든 소유, 다 버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이 버리라고 하시면 버려야 하지만 그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도 교회에서 섬기고 사역하지만 사람과 건물과 재정을 의지하지 않으려 합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더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무엇 보다도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사모해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예수님과의 친밀한 삶을 훈련해야 합니다! 급할 때 예수님을 찾으니 함께 계셔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2개월 특별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훈련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찬식을 위한 기도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됨을 회복하기를 기도합시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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