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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기도 /시 90:1-12

by 【고동엽】 2022. 1. 12.

모세의 기도

 

 

시 90:1-12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

 

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간이 참 빠릅니다. 벌써 11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21세기가 시작된다고 떠들썩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6년이 지나고 7년째 문턱에 와 있습니다. 오늘은 금년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리고 한해를 결산하는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참 세월도 빠르고 시간도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덧없는 인간의 삶에 대해서, 시간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세월 속에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본 시편은 모세가 기록한 기도문입니다. 모세는 아주 불운한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모세는 민족이 압박받고 나라를 빼앗긴 채 남의 나라에서 살아갈 때 애굽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서 몇 날이 못 되어 강물에 던져지고 마침 강 하류에서 목욕하던 공주가 떠내려 오는 아이를 건져서 길러 모세는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을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실수로 사람을 죽이는 바람에 광야로 도망가 그곳에서 40년 동안 생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그를 불러내셔서 그때부터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는 위업을 달성하고 120세 때 종말을 며칠 남기고 삶을 정리하면서 시를 쓴 것이 오늘 읽은 시편 90편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 90편의 내용은 그만큼 심오하고 인생의 깊은 교훈이 담기고 하나님에 대한 절절한 신앙고백이 담긴 그런 시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인생의 덧없음을 집중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짧음, 하찮음, 보잘 것 없음. 무력함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전능적인 면을 강조하고 인생의 완벽한 피난처는 그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세계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이라는 것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세계관이라는 말은 세상에 살면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 대한 견해나 관점 그리고 생각이 어떠한가를 말하는 것을 세계관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계관은 사람에 따라, 민족에 따라, 생활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에 따라, 비신앙인에 따라, 여성에 따라, 남성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보면서 내가 어떻게 세상을 보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정신을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인생관, 가치관도 세계관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과 만물과 시대와 인생을 평가하는 태도를 가치관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무엇에 더 중점을 두고 사느냐, 무엇에 더 소중한 의미를 두고 사느냐 하는 기준을 갖는 것을 넓게 좁게 아주 좁게 생각하는 것을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이라고 말합니다. 이 같은 세계관, 가치관에다 앞에 한 가지 “기독교“라는 말을 붙이면 ”기독교의 가치관”, ”기독교의 세계관“이라는 말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자연인인 나의 세계관과 인생관은 나 자신의 생각, 의식, 입장에 따라 판단하는 관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세계관은 이 세상을 성경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이 세상의 모든 시간, 인생, 삶, 직업, 취미, 의미, 죽음 등을 성경의 잣대로, 성경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고 해석하고 판단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근거해서 형성된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이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성경적 세계관 즉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형성됩니다. 그 세계관에 입각해서 이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은 우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라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역사의 어느 과정에 인간이 생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인간이 타락하였고 또 어느 순간에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구속의 과정을 거쳐서 지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삶의 흐르는 길과 방향 그리고 하나님의 마지막 뜻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과 때가 완성되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즉 종말로 인해서 완성이 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은 종말론적 세계관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그런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본문에 나와 있는 해답이 우리 기독교의 인생관이고 신앙관이고 세계관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본문 2절을 보면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 이십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세상이 있기 전부터 존재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예배 때 마다 고백하기를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이 기독교의 세계관에 입각해서 드리게 되는 고백입니다. 그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고 나를 지으셨고 너를 지으셨고 우리 모두를 창조하셨습니다. 고로 우리는 이 세상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해야 하고 너를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도 하나님이 지으셨고 너도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관이 고백되면 이렇게 세상을, 나를, 너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떤 인생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형제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형제이고 그래서 형제가 귀한 관계입니다. 이렇듯 우리들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면 기본적으로 이 세상과 이웃과 너와 나는 아주 소중한 존재들임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한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한 형제이고 가장 존귀한 주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인생관과 가치관과 세계관과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3절에 보면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티끌”은 원어로 “아드다카” 그 말을 해석하면 “먼지로” “파멸로”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인간은 결국 소멸하는 존재라는 말이고 사라지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죽음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성경에서 죽는 문제를 가장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3절을 보면 “너희는 티끌로 돌아가고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이 의미를 안다면 어떻게 허송세월하고 경거망동하겠습니까. 이 인생이 무상함을 아는 사람들은 종말을 생각하고 그래서 그 인생이 엄숙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인생은 티끌로 돌아가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본문에서 집중적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 4-6절을 보면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이니 이다, 그들은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 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생의 시간은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천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어제 같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말하는 천년의 시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한 순간 같고 한 경점 같고 점찍은 한 부분 정도이고 찰나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80년 90년을 살면 장수했다고 말합니다. 100살을 살았다고 하면 너무 장수했다고 입을 벌립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시간도 하나님의 시간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비교하면 인간의 시간은 이렇게 초라하고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아주 짧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생은 교만하지 말며 자만 떨지 말며 하나님이 누구냐 하고 거드름을 떨지 말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대화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인간의 10억년이 하나님에게는 1초라면서요?” “그렇지”, “그러면 인간의 10억 원이 하나님에게는 1원이겠네요” “그렇지”, “그러면 저에게 1원만 주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오냐, 알았다, 1초만 기다리라.” 인간의 시간이 짧으면서도 또 빨리 지나가버립니다. 그래서 인생의 덧없음을 9절에서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지나가나이다”하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왜 시간이 이렇게 빠릅니까. 제가 벌써 금년 나이가 중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순식간에 이렇게 와 버렸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시간이 어떻게 빠른지 하루에 2틀씩 겹쳐서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1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한 달이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어떤 때는 참 허무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들조차도 행복한 시간이 아니고 주위를 보아도, 들리는 소리를 들어보아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아도 모두 수고뿐입니다.

 

인생은 겨우 실력이 그 정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곳저곳에서 허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첫머리에서 “헛되고 헛되다”고 했습니다. 2:23에서는 “평생 주어진 것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했습니다. 욥은 14:2에서 인생은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욥 20:8에서는 “꿈”이라고 했고 야 4:14에서는 “안개”라고 했고 시 78:39에서는 “바람”이라고 했고 시 102:3에서는 “연기”라고 했습니다. 또 문인 괴테는 죽을 무렵에 고백하기를 “나는 평생 기뻐한 날은 단 하루도 되지 않는다”고 실토했습니다.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본문을 강해하면서 해석하기를 “인생의 덧없음, 은밀한 죄, 평생의 고뇌는 서로 연결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천년을 살 것처럼 계획을 세우고 욕심을 부리고 다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제 곧 죽어야 합니다. 그때 모세는 지난날의 삶을 회고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그 인생이 덧없음을 알았을 것이고 그래서 그렇게 고백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무슨 거드름을 떨고 자만하며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고 살아갈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알게 되고 무지를 알게 되고 넓은 세상의 오묘한 질서를 알게 되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가

 

 

 

또 여기서 인생의 무능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면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다” 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은밀한 죄를 숨기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두움 깊은 곳에 숨으려고 합니다. 요나도 깊은 곳에 숨으려 했습니다. 아담도 나무숲에 숨으려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숨으면 숨어지는 것입니까, 어린 아이들이 집안에서 혼날까 봐 어머니 낮을 피하여 숨으면 어디로 가서 숨겠습니까. 그렇게 숨는다고 숨어지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인간은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자꾸만 숨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다”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광채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의의 태양이십니다. 그 앞에서 누가 숨길 수가 있습니까. 누가 그 앞에서 죄를 숨기려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숨기려 한다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과 같은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아시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아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아시나이다, 내가 주를 떠나 어디로 가며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며 내가 새벽에 바다 끝에 가서 숨을 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며 내가 어두운 곳에 숨을 지라도 주님은 낮과 같이 비추시나이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기고 날고뛰고 숨어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감히 인간이 하나님을 피하고 숨고 도전하고 대적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되면 본문 8절과 같은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나이다.”

 

모세는 출애굽을 하면서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크고 굵은 절대적인 능력을 절절이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그 거대한 바로가 무력하게 홍해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았고 하나님의 입김으로 무섭게 넘실거리던 홍해가 좍 갈라지면서 길이 훤하게 뚫리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고 광야에서 굶주릴 때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올 때,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나올 때, 하늘에서 불기둥이 내려 밤을 지켜 주셨을 때, 낮에는 시원하게 구름기둥을 세워 보호해 주셨을 때 모세는 절절하게 하나님의 권능과 인간과의 보잘 것 없는 모습을 비교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하였을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도다” 누가 그 앞에서 피하며 숨으며 도망하며 자만하며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이치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적인 인생관이고 세계관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면 그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고 순종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는 것은 물론 죄를 짓고 자신을 숨길 수 있다는 상상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약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본문 12절에서 말씀하기를 그것은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무력한 인간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지혜가 있어야 알고 깨닫고 느끼고 생각하게 됩니다.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인생의 길을 알고 허무를 깨닫고 덧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부터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무지가 죄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관이 분명할수록 중심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관이 불분명하니까 흔들림이 심하고 소신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정치인이 이 관이 불분명하니까 입각하자마자 코드 맞추기에 급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이 관이 불분명하니까 시류에 따라 흔들림이 심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치관, 세계관이 불분명하면 이익에 따라 야합을 서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모두 모양은 있는데 내용이 없어지고 세상은 여전히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한해가 마감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자꾸만 내가 다짐하고 각오하고 결심한 가치관이 흔들리는 시대이고 인생관이 시험받는 시대이고 세계관이 변질되어 현실과 야합하기 쉽고 내 의지를 굽게 하는 일이 많은 때입니다. 이 때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중심을 다시 굳게 회복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곧은 세계관을 펴나가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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