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자를 동국으로 보내라! (창 25;1-11)
아브라함은 175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긴 생애동안에 세 아내와 함께 살았습니다. 사라, 하갈 그리고 그두라였습니다. 세 아내를 통하여 8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사라는 이삭 한 명을 낳았습니다. 하갈은 이스마엘 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아내인 그두라는 6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86세에 하갈에게서 이스라마엘을 낳았습니다(창16;16)
그리고 100살에 사라에게서 이삭을 낳았습니다(창17;17)
그리고 137세에 그두라를 아내로 맞이 하여 무려 6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25;2)
아브라함은 자기의 생명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인생을 정리할 때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정리는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본문을 통하여 역역히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 가나안 땅을 주시면서 이 땅이 내게 네 후손에게 줄 약속의 땅이요 여기에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과 같이 번성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주시면서 다른 자녀들이 많아도 꼭 이삭이 약속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하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아들을 못 낳으니까 여종 하갈과 함께 지내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줄 알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17;18)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
그래서 아브라함은 8명의 자녀들이 자기가 죽고 나면 땅과 재산을 가지고 분쟁을 일으킬 것을 알았기에 죽음준비를 하나님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서자들 7명을 모두 다른 나라로 보내고 이삭만 이 땅에 남겨 놓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그렇게 처리하는 장면이 본문입니다.
이미 이스마엘은 어머니 하갈과 함께 바란 땅으로 보냈습니다. 그 곳에서 이스마엘은 사냥군이 되어 정착하고 살았습니다. 애급 여자와 결혼하였습니다(창21;20-21)
이제 그두라의 아들들 6명을 이 땅에서 보내야 합니다. 그냥 두게 되면 사라도 이미 죽었고 그들의 세력이 너무나 크기에 이삭은 약속의 아들인데 견디지 못 하고 오히려 이삭이 도망가야 할 지경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두라와 6명의 아들들과 그 식구들을 모두 동국으로 보냈습니다.
아브라함은 신본주의로 살려고 모두를 정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서자들을 모두 동국으로 보냈습니다. 하나님 말씀주의, 하나님 계획주의, 하나님 중심주의로 인생을 정리하는 아브라함의 고귀한 믿음을 우리는 또 발견하며 깊은 감명을 받게 됩니다.
모든 정리를 다 마치고 곧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6절에서 정리가 끝나고 7절 8절에서 하나님앞으로 가는 아브라함을 발견하면서 인생을 너무나 잘 정리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돋보이게 됩니다.
1. 사랑하지만
아브라함은 세 명의 아내 중에 누구를 가장 사랑하였을 가요? 하갈일가요? 사라일가요? 어쩌면 그두라인지모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라와 하갈은 아들을 한 명 낳았는 데 그두라는 6 명이나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말년은 외로웠습니다. 사라는 이미 세상을 따나고 하갈은 애급 광야로 도망하였습니다. 이제 137세에 그두라를 아내로 맞아 175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너무나 다정하게 산 것 같습니다. 그두라라는 말은 <향기>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두라는 향기가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히브리인은 모든 것이 이름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두라와 그가 낳은 서자들을 모두 동국으로 보냈습니다. 이유는 딱 하나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삭의 땅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동국으로 보내는 하나님의 중심주의 믿음의 아브라함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모두 놀라게 됩니다.
더구나 사람은 늙을 수록 부부애가 깊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식들은 자식들이고 부부밖에 없어지는 법인 데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 데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을 멀리 동국으로 보냈다는 것은 놀라운 결단입니다. 하나님 중심주의 믿음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사실상 아브라함이 8명의 아들 중에 가장 사랑한 아들은 누구였을 가요?
이삭이었을 가요?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아브라함은 이삭보다도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을 더 사랑하였던 것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기 전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께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17;18)
아마도 부모님은 첫 아들 장자에 대하여 더 애착이 가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5형제가 살아도 닭을 잡으면 큰 아들에게 다리 하나를 주고 나머지를 4아들이 나누어 먹도록 하였습니다. 8명의 아들중에 첫번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래서 첫 아들과 같이 살고 싶어 하는 심정을 하나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고 이스마엘은 첫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하면서 사랑하는 아내도 보내고 사랑하는 아들도 보내고 이제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준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지만 보내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시 보게 됩니다. 아무리 내가 사랑하는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방해가 되면 보낼 줄 아는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나에게 지금 성경을 가르쳐 주고 있는 유대인 해리스는 늘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은 내가 좋아지게 하여 주옵시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나도 미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지만 버려야 하는 것-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얼마 전에 나는 국방대학원에서 목회하시다가 은퇴하신 김 홍태 목사님과 아침 식사를 하였습니다. 국군 중앙교회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6.25때 공산당에게 끌려 가면서 <한번만 살려 주시면 결혼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만 하겠습니다>라고 서원하였습니다. 그 서원을 지금까지 지키시고 70 평생 혼자 사시다가 은퇴하신 분이십니다.
평생을 혼자 살면서 외롭지 않으셨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나도 건강한 남자인데...여인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두 세 번 있었지. 한번은 주안 모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데 담임목사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결혼하고 사모와 같이 목회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면서 한 여자를 소개하여 주었어. 강대상에서 내려다 보는 그 여자는 정말 사모감이었지. 정말 사랑스러웠지. 서원을 파괴하고 싶었지. 그 다음 날부터 새벽기도하려고 엎드리면 예수님이 안 떠오르고 그 여자가 떠올랐지. 그러나 나는 그 여자를 사랑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내 생명 살려주신 그 은혜를 갚고 싶어서 평생 결혼하지 않았지. 그 생각을 지우려고 몸부림쳤지. 강대상에 자면서 결사적으로 기도하였지>
그의 눈은 아직도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버리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2. 필요하지만
지금 아브라함은 향년이 다하여 가고 있습니다.
죽기 바로 직전입니다. 가장 아내가 필요할 때입니다. 가족들이 모두 그리워질 때입니다. 멀리 가있는 가족도 불러 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반대로 모두를 깨끗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가장 필요할 때 가장 필요한 사람을 곁에서 떠나가게 하는 아브라함의 결단을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내게 필요하여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보내야 합니다. 내게 꼭 필요한 것이라도 하나님의 원이라면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피난처>의 작가 고리 텐 붐 여사가 어렸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아버지는 작은 시계점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불경기가 오래 계속 되면서 몇 일 동안 시계가 한 개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생계가 위협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몇 일만에 아버지는 시계 한 개를 모처럼 팔면서 너무나 기뻐하는 모습을 고리 텐 붐은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시계를 산 사람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사서 쓰던 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산 집에 가서 고쳐 달라고 하였더니 고칠 수 없는 고장이라고 말하여 새로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시계를 보여 달라고 말했습니다. 시계를 보더니 고칠 수 있다면서 고쳐 주고는 산 시계를 도로 받고 돈도 물러 주었습니다.
고리는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거냥 팔지 왜 돈을 돌려 줘요?>
아버지가 대답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란다. 부당한 이익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포기하여야 해! 우리 가정에 돈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지만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은 가져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은 고리 여사의 일생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필요하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불필요한 것이면 보내야 합니다.
윌리암 피더라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길을 가다가 5달라를 주웠습니다. 공짜 돈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 아이는 땅만 보고 다녔습니다. 목을 숙이고 몸을 꾸부리고 밑만 보았습니다. 일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단추 29,516개를 주웠습니다. 바늘 54,172개를 주웠습니다. 돈 12전을 주웠습니다. 그의 몸은 일생 구부리고 다녀서 허리가 굽고 엎드리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돈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이요 건강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이 말년에 절실히 필요하였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다 동국으로 보냈습니다.
내게 정말로 필요하지만 동국으로 보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 때 덮개는 물개가죽으로 덮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 때문에 광야로 물개가죽을 가지고 나온 것일가요?
이유가 분명합니다.
애급인들은 소를 숭상하여 소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400년 이상을 애급에서 노예로 산 이스라엘 백성들도 소가죽으로 신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물개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소를 숭상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적이 있었습니다.
광야를 걸어갈 때에 신발이 해지게 되면 만들어 신으려고 하였던 물개가죽을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하실 때에 바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자세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40년 광야 생활동안에 옷이 해어지지 않고 신발이 닳지 않는 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해달의 가죽은 그 후 복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주께서 사십년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헤어지지 아니 하였으며>(신29;5)
하나님은 해달의 가죽 헌신자에게 40년동안을 기적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내가 필요하여도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할 때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믿음을 하나님은 축복하셨습니다.
필요하지만 보내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3. 아깝지만
아브라함은 부동산 땅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소유의 재산은 다 서자들에게 준 것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국으로 가게 하였더라>(5-6)
이삭에게는 모든 소유를 주었습니다. 서자들에게는 재물을 주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삭에게는 부동산을 주고, 서자들에게는 동산을 모두 다 준 것같습니다.
두 단어가 돋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전에>라는 말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준비를 다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으면 재산 다툼이 납니다. 그리고 이삭보다 서자들이 더 번성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1;6의 비율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단어는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삭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목표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두가 이삭을 떠나고 이삭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이루고 메시야가 이 땅에 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죽기 전에 생전에 이삭주변을 말끔히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떠나 보낼 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여 빈 손들고 보내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모두 주었습니다. 안 가려고 발버둥치지 않았습니다. 서운한 마음을 가지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법은 서자에게는 재산을 하나도 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람의 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두라 자손들은 말없이 떠났습니다. 충분히 보상을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보기에는 아까운 사람들입니다. 가족입니다. 아까운 물질들입니다. 그러나 아까워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는 다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만 가지게 되면 나머지는 다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이 채워주시리란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있었습니다. 믿고 나가면 다 그리고 또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시카코는 가장 도시 계획이 잘 된 도시중에 하나입니다.
그렇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황소 한 마리가 전신주를 받아 전신주가 쓰러지면서 불이 났습니다. 시카코 전체를 태워 버리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화재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설계하여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 때에 있었던 일화입니다.
지금의 무디 신학교와 무디 교회도 그 때 모두 불타버리고 새롭게 지은 건물입니다. 그 안에는 무디 박물관까지 있었습니다. 물론 무디 방송국까지 지어져 있는 곳을 방문하여 본 적이 있습니다. 화재당시 미국 전역에서 기자들이 취재경쟁을 하면서 몰려 들었습니다. 무디 교회가 불타는 모습을 보면서 기자들이 무디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설교 하실 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원하기만 하면 이루어 주신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자기 집이 불타고 있는 데 꺼주시지 않고 가만히 계실 가요? 그리고 목사님은 기도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계신가요?>
기자들이 빈정거리며 묻자 무디 목사님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나의 하나님께 저 불타고 있는 예배당보다 더 큰 예배당을 지어 달라고 기도해 왔소. 바로 그 기도 응답으로 저 예배당이 불타고 있는 것이라오. 큰 예배당을 지으려면 저 건물 철거 비용이 엄청나게 들 텐데 하나님께서 모두 불태워 주시니 그 비용이 안 들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소>
기자들은 말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한 밤중에 화재로 잠옷바람에 나와서 겨우 목숨만 건진 상태에서 한 말입니다.
<그럼 큰 예배당을 지을 돈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이 때 무디 목사님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성경을 가르키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수표와 돈은 가지고 나오지 못 하였지만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 하나님의 금고 이 성경을 가지고 나왔소. 그러므로 여러분은 얼마 안 있어서 불탄 예배당보다 더 큰 웅장한 예배당이 지어진 모습을 볼 것입니다>
정말 얼마 안 가서 그 자리에는 놀라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다 없어져도 하나님이 주시면 다시 받게 됩니다. 더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다 주고 이삭은 다시 살게 만들었습니다.
상계동 설렁탕 집 이야기입니다.
설렁탕 집을 인수받았습니다. 권리금을 주고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주방장까지 인수받았습니다. 내일이면 이제 설렁탕 집을 운영하게 되는 집사님이 오늘 밤 교회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 집에 오시는 손님을 예수님을 대접하듯이 하게 하여 주세요>
다음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첫 출근을 하였습니다. 주방장은 언제나 그렇듯이 하루 종일 팔 설렁탕 국물을 산더미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고기 국물처럼 보이게 하려고 커피 후림을 약간 타서 뽀얕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커피 후림을 탄 설렁탕 국물로 대접하냐?>
그리고 그 국물을 아깝지만 다 쏟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문앞에 이렇게 써붙였습니다.
<금일 휴업>
설렁탕을 먹으러 온 손님들이 왜 휴업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정 이야기를 그대로 솔직하게 다 하였습니다. 그 주변에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 설렁탕 집은 고기국물만 사용한다>
사람들이 바글바글 끓어서 최고로 잘 되는 설렁탕 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깝지만 버려야 합니다. 아깝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다른 측면의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죽기 직전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는 이삭만 남기고 모든 다른 가족들을 정리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1. 사랑하지만 보내야 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2. 필요하지만 없애야 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3. 아깝지만 주어야 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제 성도님들에게 묻습니다.
신본주의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성도님이 동국으로 보내야 할 서자는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프리드리히 왕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 지조차 모르고 방탕하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6>이라는 글자를 보여주고 사라졌습니다.
왕은 <내 생명이 6시간밖에 안 남았나 보다>라는 신호로 알고 회개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모든 것을 당장 버렸습니다. 술도 버렸습니다. 악행도 버렸습니다. 국민을 짧은 시간이나마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6시간을 울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6시간이 지나도 죽지 않았습니다.
<아! 6시간이 아니라 6일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면서 회개하며 경건하게 그렇게 살았습니다. 6일 생명 남은 이가 죄를 지을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6일이 지났는 데도 죽지 않았습니다.
왕은 6주간이라고 생각하며 6주간을 정말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또 죽지 않자 6개월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6년일 것이라고 여기고 정성스럽게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선왕이 되었고 국민들이 존경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남는 왕이 되었습니다.
오늘 신본주의를 위하여 서자를 동국으로 보내야 합니다.
성도님이 동국으로 보낼 서자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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