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의 능력 (2)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으로 너희를 권 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
릴 영적 예배니라.
지난 주일에는 “성결의 복음”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성결”은 그 단어 자체가 주는 그 의미가 참 좋습니다. 장로교회, 감리교회도 좋지만 “성결교회”가 얼마나 좋습니까. 이 단어 속에 그 시대에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성결”은 깨끗함, 맑음, 청결, 거룩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성결한 삶을 살아가기가 아주 어려운 시대입니다. 오늘은 불결의 시대입니다. 공기도 불결해지고 물도 자연도 세상도 온통 불결해진 시대입니다. 거기에 사람들의 몸도 불결해지고 마음도 불결해지고 정신도 불결해지고 생각도 모두 불결해졌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오직 인간적인 것들과 탐욕적인 것들로 물들여져서 이 시대에 성결이라는 말이 더욱 성스럽고 돋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 “성결의 삶”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여기 “너희 몸”을 드리라는 말씀은 “너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산 제물”이라는 말은 “너희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성결하게 드리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성결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성결의 삶”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성결의 삶일 것입니다. 이 탁한 세상을 성결한 삶으로 살아갈 때 그 삶이 그 시대의 나실인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나실인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에 보내신 사역자였습니다. 성결의 삶은 한마디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말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을 말하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성결의 신앙이 주는 능력과 용기와 힘과 영적인 지혜를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이 “영적 예배의 삶”이고 이 영적 예배의 삶이 곧 “성결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결의 삶에는 두 가지로 나타나는 신앙유형이 있습니다.
소극적인 면
성결의 삶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 매일 털고 닦아내야 합니다. 내가 성결하고 그 성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때로 자기를 부정하기도 해야 하고 회피하고 포기해야 하고 멀리 해야 합니다. 이 점이 때로 신앙상의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털고 닦다 보면 소극적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깨끗한 사람은 매사를 피하고 털고 회피하고 도망 다니고 포기하고 버리기 때문에 소극적이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교제의 폭도 좁혀지고 활동의 폭도 좁아지고 동시에 생각의 폭도 좁아져서 마침내는 소극적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 성결교회가 그래서 신앙의 의식과 신학과 교리의 바탕이 소극적이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 성결교회가 그런 아주 소극적인 오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우리 성결교회가 민족 앞에 적극적이지를 못했습니다. 일제 때 신앙유지를 위해서 고집도 부렸고 고난도 극복하였고 때로 순교도 하였지만 그 신앙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민족 앞에 턱 나서서 용기 있게 싸우고 선도하고 앞장서고 민족의 해방을 외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성결교회의 약점입니다. 그리고 7-80년대 이 땅에서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뒤에서 바라만 보았습니다. 사회봉사에도, 교육 사업에도, 의료사업에도 그리고 현실에도 너무 소극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큰 인물을 배출도 하지 못하였고 사회 공헌자도 양성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 좋은 성결신앙을 가지고도 너무 소극적으로 자신의 신앙유지에만 초점을 두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성결은 나 혼자만 고고하게 청결함만을 유지하려고 하면 이 세상에 파급이 안 되고 전파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세상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신앙이 소극적이 되면 이렇게 좁아지고 양향이 축소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땅에 떨어진 밀알이 썩어서 100배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처럼 늘 혼자의 신앙으로 멈추게 되기 쉽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직무유기이고 회피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소극적인 성결신앙의 일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면
그런데 원래 성결신학은 대단한 행동하는 신학입니다. 개혁신학입니다. 성결은 개인의 변화에 가장 우선 점을 둡니다. 먼저 나 개인이 변화하고 개조되고 성령을 받아서 성숙한 신앙을 유지하는 신앙형태입니다. 그리고 그 성숙함이 곧 바로 너에게도 이웃에게로 마침내는 이 세상의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이고 그것이 원래 성결의 신앙입니다. 역사를 보면 그런 적극적인 사례들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개인적으로 은혜를 체험하였고 영적은혜를 입어서 마침내 성결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결이 자신 혼자에게만 머물지 않고 그 성결의 힘으로 18-9세기 영국에서 성결운동을 펼쳐서 사회변화를 선도하였습니다. 속에 내재한 성결의 은혜가 내재적으로 속에서만 안주하지 않고 밖으로 표출되고 흘러넘쳤던 것입니다. 속에서 뜨거운 성령의 은혜가 밖으로 나타나게 되니까 마침내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세상의 변화와 개혁을 위해서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적극적인 성결신앙의 행동입니까.
18세기 영국사회에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도시에 공장들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시마다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어 마침내는 죄의 온상이 되고 타락이 가속화되어 갔습니다. 그때 웨슬리는 “이 타락한 영국사회를 구원하는 길은 성결뿐이다”하고 그때부터 성결의 메시지를 전하고 다님으로 마침내 영국 사회를 구원하기에 이릅니다. 개인의 영적체험이나 성결체험은 혼자만의 신앙으로 끝나면 그 신앙이 내재적 신앙으로 축소되어 마침내 그 신앙은 소극적 신앙으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성결신앙은 나 혼자의 성결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 성결신앙은 나의 변화에서 너의 변화로 이어지고 그것이 가정의 변화로 발전하고 그 신앙이 다시 사회변화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앙으로 변화해 나가야 합니다. 그 신앙이 가장 잘 성숙한 성결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 한사람의 영적변화는 곧 바로 사회변화로 이어졌고 마침내 그 신앙은 세상에 영향을 주는 신앙으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웨슬리의 성결신앙은 영국 사회에 영적변화를 이룬 것 뿐 아니고 대서양을 건너서 미국에 까지 영향을 주어 마침내 미국 내에서 성결운동의 결과로 자유감리교회가 탄생하였고 웨슬리안 감리교회가 탄생되었고 필그림 성결교회가 탄생되었고 나사렛교회와 구세군 교회가 생겨났고 마침내 그 영향을 받은 일단의 선교사들이 태평양을 건너서 일본으로 건너가 선교를 하다가 마침내 한국으로 넘어가 한국의 성결교회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우리 성결교회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결신앙은 개인적 차원의 신앙측면이 강한 이유도 있습니다. 그래서 술, 담배, 도덕 등 개인적인 윤리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미국에서 19세기 성결운동이 한창일 때 술과 담배를 죄로 규정했습니다. 술과 담배를 가정과 사회를 망치는 죄의 원인으로 본 것입니다. 그때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 대부분이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술과 담배부터 금하게 하였습니다. 그 선교사들이 모두 그 성결신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래야 합니다. 성결신앙을 유지하려면 금연과 금주가 필수일 것입니다. 그것도 성결한 삶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성결신앙이 거기에만 머물면 그 신앙은 개인차원의 신앙에 머물게 되고 내재적 신앙에 머물게 됩니다. 그것은 아주 소극적 차원의 신앙입니다. 성결신앙이 금연하고 금주하는 것만 강조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아니고 폭을 좀 넓히면 그 성결신앙은 마침내 세상을 변화시키고 개혁하는 행동하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19세기 일어난 미국의 성결운동
그렇게 행동하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면 마침내 그 신앙은 사회를 개혁하고 그 개혁을 선도하는 무서운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때 성결운동으로 나타났던 사회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인종문제의 해결”
19세기 미국의 문제는 노예제도였습니다. 이 문제로 미국교회가 마침내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북쪽은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고 성결신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성결신앙인들이 노예제도를 바라볼 때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보았으며 그래서 마침내 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쪽은 그때 노예들로 하여금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쪽의 교회들은 노예제도의 유지를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노예는 상당한 부를 안겨주는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남쪽에서는 그 노예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노예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죄였습니다. 노예들로 하여금 일을 시키기 위해서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 무서운 죄를 저질렀습니다. 때로 신앙이 삶의 편의주의에 따라 해석되고 이용될 때 이렇게 무서운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1835년 성결운동을 주창하던 뵈뵈 팔머같은 성결운동가는 노예폐지운동을 주도하면서 “신앙양심으로 바라볼 때 결코 노예를 부릴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성결한 인성의 눈으로 노예들을 바라볼 때 아무리 노예들이 경제적인 이득을 안겨준다 할지라도 인간이 인간을 짐승처럼 부릴 수 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며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데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대담하게 폐지운동을 펼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앙의 눈을 가진 성결신앙인들을 중심으로 과감하게 이 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결국 1860년 남북의 의견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되면서 마침내 남북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미국의 남북 전쟁은 교회의 노예제도에 따른 의견 차 때문에 발생한 전쟁입니다. 결국 이 전쟁은 북측의 승리로 끝나서 노예 해방을 이루어 냈습니다. 이 노예 제도의 폐지운동은 성결신앙운동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때 성결운동가들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종의 차별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성결은 모든 사람 즉 국적이나 피부색 그리고 환경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을 형제로 사랑할 때까지 인간의 본성을 심화시키고 부드럽게 만들며 폭을 넓힌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결운동의 결과입니다.
“여성해방운동”
19세기 성결운동을 주도했던 팔머는 “성결을 체험한 사람은 성별의 구별 없이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당시는 하나님을 위한 사역이 남성 위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성결운동이 마침내는 노예제도 폐지 운동의 일환으로 윤락여성 해방운동으로까지 나타났습니다. 당시 성결운동가들은 윤락행위는 남성의 여성지배와 노예로 보았던 것입니다. 성결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여성차별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간 곳에는 의례히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나고 노예해방이 나타납니다. 성결인들의 눈에는 여성이 차별받는 것을 노예제도라고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도시빈민 구제”
18세기 영국이 산업화되어 가면서 공장이 생기고 노동자들이 모두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부자들도 출현하였지만 마침내 소외계층이 나타나고 홈리스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영국 국교인 성공회에서는 무관심하였고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웨슬리가 나서서 그들에게 관심을 보였고 그들을 먹이기 시작하였습니다. 1887년 영국 테임즈 강을 건너 집으로 가던 윌리엄 부스가 그 홈리스들이 북적대는 모습을 목격하고 마음속에 다짐하기를 이제부터 나는 이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자 하고 평생을 몸 바칠 각오를 하게 됩니다. 그 결심이 마침내 결실을 맺어 1890년 구세군을 조직하여 매일 15,000명을 먹이고 820명을 재우는 일을 시작함으로서 오늘 이 땅에 구세군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나 개인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은 성령의 은혜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뜨거워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나 한사람에 국한된 변화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신앙은 소극적인 신앙으로 한 알 밀알이 썩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나의 변화와 성결함은 반드시 너에게로 이어져야 하고 가정의 변화로 이어져야 하고 그것은 또 마침내 우리의 이웃과 세상의 변화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그 신앙이 세상의 소금이고 빛 되는 신앙입니다. 그 삶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신앙의 삶이고 그것이 성결신앙의 진실한 가치이고 장점이고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성결한 삶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려라, 그리고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시대를 성결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삶에서 비로소 영적 힘이 주어지고 소망이 주어지고 능력이 주어지고 성결의 삶이 세상에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힘과 용기가 마침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결의 신앙인 것입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윗의 신앙고백 /시 106:1-5 (0) | 2022.01.10 |
---|---|
우리를 위협하는 골리앗 /삼상 17:45-49 (0) | 2022.01.10 |
성결의 복음 (1)/디도 3:5-7 (0) | 2022.01.10 |
사도바울의 심장롬 9:1-5 (0) | 2022.01.10 |
세상에 충격 주는 삶 /계 1:2-3 (0) | 2022.01.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