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행함. 균형
롬 3:27-28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
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오늘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488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488년 전 기독교는 참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했습니다. 독교는 예수님 사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는 유대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섭리하셨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의 종교이고 구약의 종교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이 땅에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신약교회인 기독교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참 신선했고 참신했고 영적으로 뜨거웠습니다. 영적으로 얼마나 뜨거웠는가 하면 복음이 전파된 지 300여년 만에 그 거대하던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일 정도로 커져 갔습니다. 그리고 이 기독교가 중세기쯤에 와서는 기독교의 교황권이 황제의 권한을 정지시킬 만한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이쯤 되니까 세속화되기 시작하여 그 내부로부터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나 커지고 조직화 되다 보면 인간적인 냄새가 나타나고 참신성이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그 결과 마침내 기독교 안에서 명예와 성직이 돈으로 팔리고 거래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면죄부까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면죄부라는 것은 죄는 하나님만이 사하시고 용서하시는 것인데 죄를 사하는 사면장을 교황청에서 만들어 돈을 받고 팔았고 그 면죄부를 사면 천국에 간다고 속여 매매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줄지어 교회에 가서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사 가지고 오면서 천국에 가는 입장권을 사 온 것처럼 좋아했습니다. 그러니 그때 그 종교가 얼마나 타락했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수도원에서 수도하던 마틴 루터가 당시 황제까지 폐위시킬 만큼 막강하던 교황권에 맞서서 위험을 무릅쓰고 종교개혁을 부르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구원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면죄부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하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타락이 극에 달해있는 모습을 보고도 교황권이 워낙 강해서 숨을 죽이고 바라만 보고 개탄만 하고 있던 성직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마침내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금년으로 488주년이 됩니다.
오늘은 그 때를 생각해 보면서 오늘 우리의 신앙을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얼마나 건강한가, 얼마나 참신한가,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조화와 균형이 잘 이루어진 건강한 신앙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구원 얻는 삶”입니다. 그리고 은총을 입는 생활입니다. 이 구원을 얻는 삶의 목표가 없으면 구태여 복잡한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당히 일 년에 한두 번 가서 수양이나 하고 나도 신앙인이다 하고 생각하고 살면 됩니다. 신앙이 세속화되면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신앙이 아주 건강하고 균형이 잘 잡힌 신앙인으로 살려고 하면 다음의 세 가지 요소를 가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3요소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신앙생활을 아주 원활하게 하는 요소입니다.
“믿음”
믿음은 구원받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나는 그 어느 것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주어집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습니까.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는데 먼저 이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중세시대 때 기독교에서는 한때 이상한 신앙형태가 나타나 뭇 신앙인들을 현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이 수도원생활입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도를 닦고 수양하고 수도를 했습니다. 기독교는 수양종교가 아니고 삶의 종교이고 세상을 구원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고행으로 구원받는다고 해서 고행을 덕목으로 강조되기도 했습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목욕재개를 하고 겨울에는 얼음을 깨고 목욕하면서 고행하고 수고하고 도를 닦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행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 봉사하고 나눔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 이미 은혜가 주어지고 부활이 주어졌는데도 율법으로 구원받는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고 일주일에는 2일씩 금식을 했고 11조를 철저하게 드리고 하루 3시 기도를 드리고 안식일을 아주 숨이 막힐 정도로 철두철미 하게 지켰습니다. 그런 풍조 속에 기독교가 중세기에 들어가면서 극에 달할 만큼 양적으로 행창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세속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온갖 타락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면죄부를 팔고 성직을 매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신앙이 얼마나 타락했고 인간주의로 흘렀겠습니까. 신앙이 타락하게 되면 이렇게 궤도를 이탈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를 선두로 해서 “그것이 아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만 주어진다”고 항변하고 나섰습니다. 그때는 루터는 분명 이단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도 가톨릭에서는 루터를 이단자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양심적인 가톨릭 신학자들은 그때 이 루터의 주장이 옳았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산속으로 들어가 산속에서 도나 닦고 앉아있는 것이 기독교는 아닙니다. 선행은 분명 좋은 것이지만 선행만으로 하나님과의 불화를 회복시키기에 불충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 28절을 보면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하고 말씀합니다.
만일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예수님의 고난, 십자가, 부활, 복음, 믿음은 모두 헛수고일 것입니다. 그리고 행함이 전부일 것입니다. 구원은 행위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선행을 많이 베풀었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영혼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입니다“하는 이 고백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믿음이 성립될 수가 있습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평상시에는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다가 어느 날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면 그때 한계에 부딪치게 되고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묻게 되는 것이 “내가 그동안 무엇을 믿었던가”하는 신앙과 믿음의 허와 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는 믿음은 간데없고 절망감과 그동안 내가 무엇을 믿었는가 하는 자탄과 자괴감만 남게 되고 마음이 사뭇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주님과 함께 죽겠다던 제자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니까 다 흔들리고 부인하고 마침내는 모두 도망을 갔습니다. 그때 도망가서 숨어있던 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제자들은 숨어서 자신을 무섭게 질책했을 것입니다. 너무 쉽게 무너져버린 자신들의 모습에 너무 허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고 믿음의 중심을 세운 후에 얼마나 자신만만하게 사람들 앞에 나서서 증거하고 전도를 했습니까.
그렇게 자신 있게 말씀을 증거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자신들이 바라볼 때 또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그들은 그때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 순간 제자들은 “지금 하나님은 내편이시다”라는 믿음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자신들을 보장하고 계시며 지금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때에 그들에게 얼마나 큰 확신과 소망이 솟아났을 것입니까. 내가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확신한다면 거기서 이 무서운 힘이 솟아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8절을 보면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의 삶에는 3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첫째 조건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집을 짓는데 뼈대를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뼈대를 잘 세우면 그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집을 짓다가 도중에 무너지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그 원인이 반드시 이 뼈대를 소홀히 한 경우입니다. 신앙에서 이 뼈대는 바로 믿음입니다.
“행함”
신앙생활에서 이 행함은 참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세상에서 행함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이 행함이 부족할 때 세상으로부터 도전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행함은 구원받는 일에 필수적인 요건은 아닙니다. 행함은 믿음의 결과일 뿐입니다. 땅에 한 알의 밀알을 땅에 심으면 싹이 돋아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으면 그 새싹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립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일입니다.
그렇듯이 내가 믿음을 가지게 되면 자연적으로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열매가 바로 행함의 열매입니다. 믿음을 가지게 되면 사람으로 하여금 반드시 내적으로, 삶으로, 생각으로, 뜻으로 변화를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그 변화 이후에는 반드시 변화의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 열매가 곧 행함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에서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했고 로마서에서 바울은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성경이 서로 상충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음을 개탄하고 행함을 강조한 것이고 바울은 믿음이 있으면 행함은 자연스럽게 열매로서 나타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죽은 씨를 심으면 절대로 싹이나 열매가 맺히질 않습니다. 반드시 살아있는 씨를 심어야 싹도 나오고 열매도 맺히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정말 살아있다면 그리고 내속에 진정한 성령의 감화가 주어져 있다면 내 삶 속에서 변화를 이루고 감격이 주어지고 행함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자꾸만 헌신하고 봉사하고 행하라고 강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인가 하고 싶고 베풀고 나누고 무엇인가 도와주고 싶습니다. 이렇게 행함은 믿음의 열매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활이 바쁘고 분주하시지요. 그렇게 바쁘고 분주할 때가 좋은 때입니다. 그 삶을 즐기십시오. 그 삶을 행복으로 여기십시오. 그 삶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삶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을 위해서 더 많이 일 하십시오. 그리고 행하십시오. 그리고 더 바쁘게 살아가십시오. 한가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습니다. 늘 분주하고 바쁜 사람이 일을 합니다. 그때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이 더 뜨거워지고 행복해지고 은혜를 입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골프선수 최경주 선수가 시합이 있는 주간에는 한 시간이라도 더 쉬고 준비하고 연습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바쁘고 긴장되는 시간에도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가는 것, 그것은 그에게 그만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한 믿음이 있으니까 그런 행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쁜 사람이 더 일하는 것입니다. 바쁜 사람의 믿음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 일하는 분들을 보면 바쁜 사람들이 두 가지 세 가지씩 일을 맡아서 봉사를 합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열매로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균형”
신앙의 삶에는 균형있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 믿음이 견고해집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실 때 아주 지극히 균형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자세히 살펴보면 얼마나 조화가 잘 맞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자연계를 보십시오. 얼마나 균형이 잘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우선 농사에 흉년이 들면 그해 산속의 열매들은 풍년을 이룹니다. 산 아래에 먹을 것이 부족하면 산위에 풍년을 이루게 해서 인간과 동물들의 삶에 균형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또 어느 마을에 이리떼가 자꾸 내려와 동네 닭을 다 잡아갔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이리떼를 잡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내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주간에 1500마리를 다 잡았습니다. 그리고 안심했는데 몇 달 후 이번에는 온 동네에 쥐들이 난리를 떨었습니다. 쥐의 천적인 이리떼가 없어지니까 이번에는 쥐들 세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동네에 쥐가 많아지니까 이번에는 산속에 있던 뱀들이 모두 동네로 몰려들었습니다. 뱀들이 쥐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동네에서 닭을 지키는데 는 성공했는데 뱀을 막을 방법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균형을 이루신 섭리의 묘수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질서를 생각 없이 자꾸만 망쳐놓고 있는 것입니다.
또 네팔에는 깊은 숲 속에서 사는 코뿔소가 있는데 이 코뿔소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트레비아라는 나무 열매라고 합니다. 이 코뿔소가 그 나무를 발견하게 되면 포식을 하고서야 그곳을 떠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코뿔소에 들어간 이 트레비아 열매는 뱃속에서 모두 소화되고 씨는 배설물로 나오게 되는데 그 배설물에서 싹이 나고 또 나무로 자란다고 합니다. 그 트레비아 나무는 그 방법이 아니면 싹이 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묘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주 묘한 하나님의 자연을 움직이시는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신묘막측합니다. 때로 계절에 따라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물이 넘치고 해일이 일고 눈이 내리고 가뭄이 오고 추위가 옵니다. 그 자체만을 볼 때는 불필요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것이 또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연에 섭리하시고 우주에 섭리하시고 자연의 질서를 균형 있게 유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도 균형이 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균형이 믿음과 행함입니다. 신앙의 삶에는 믿음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그 믿음의 열매로서 행함이 뒤따라야 합니다. 행함은 믿음의 꽃이고 열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을 설명할 때 “나무는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의 신앙내용을 한번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신앙이 지금 얼마나 내용이 있으며 영적으로 말씀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나의 신앙은 얼마나 참신한가, 그리고 나의 신앙은 중심이 얼마나 든든히 서 있는가”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살펴보아서 바로잡고 새로 세우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가는 신앙의 삶이 갱신하는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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