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실패자였기에 대 사도가 되었다! (요 18:19-27)
신학교에 들어가서 김은국씨가 쓴 [순교자]라는 소설을 추천받고 읽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목을 보고 참 은혜로운 소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읽고 난 다음 얼마나 마음이 찜찜했는지 다시는 읽지 않았습니다. 내용은 6.25 당시에 열두 명의 목사님이 공산군에 의하여 순교 당했습니다. 그러나 순전히 홍보 효과를 위하여 이 사실을 조사하던 군 정보 장교에 의하여 순교의 실상이 드러나는데, 순교자라고 여겨졌던 이들의 실상은 너무나 추악했다는 것입니다. 몇몇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른 목사들을 배반하고 어떤 목사님은 "개처럼 죽어 갔음 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소설의 이야기를 부인하고 싶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겨우 마음잡고 나는 훌륭한 목사가 되리라 결심하며 신학교에 갔는데, 겉으로 훌륭해 보이는 이들의 실상은 너무나 실망스럽다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제 삶은 그 소설처럼 훌륭해 보이던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간적인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믿었던 사람에게서 실망합니다. 존경하던 부모님, 선생님, 목회자, 정치 지도자들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좌절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존경하는 대상들로부터 마음의 좌절감을 겪는 것이 우리 인생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정말 우리를 좌절시키고 절망하게 하는 것은 존경했던 어떤 사람들로부터 받는 것이기보다는 우리 자신에 대한 실망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럴 수 있느냐! 실망했다.” 할 것이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결심하였지만 나도 역시 그러한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좌절은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좌절하고 실망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오늘 성경 본문에 보면 정말 우리를 좌절시키고 실망시키는 사람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사랑하던 제자 베드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마음 아픈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대제사장의 종 하나로부터 맞은 일입니다. 예수님을 심문하다가 손으로 예수님을 때렸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머리를 쳤으리라 추측됩니다. 상상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대제사장의 종에게서 손으로 맞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일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서 계시는 대제사장 집 뜰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주님을 욕하고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믿었던 사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 당할 때의 그 고통은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본문을 읽으면서 ‘베드로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가복음 22장 61절에 보면 이 장면을 조금 더 자세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 때 베드로와 예수님의 눈이 마주칩니다. 그 후 베드로는 바깥으로 나아가 통곡하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자기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입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었다는 말입니다.
아마 베드로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차라리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 사건은 베드로 뿐만 아니라 제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자타가 공인하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는 맨 처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장 놀라운 기적들의 목격자였고, 그 자신이 물 위를 걸었고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도 버리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면, ‘만약 같은 환경이 주어졌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나는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싫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지난 설교를 찾아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원인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자유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제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지 못했습니다. 실패의 원인을 따져도 답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이 휴가였는데, 휴가 때 제대로 쉬려면 주일 설교에 대한 방향은 잡아 놓고 가야하겠다고 생각하였지만 떠날 때 까지도 마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과연 내가 베드로의 세 번 예수님 부인 사건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설교할 수 있을지. 오, 주여 제가 어떤 설교를 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런데 휴가지를 향하여 운전을 해 가던 중 갑자기 응답이 왔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베드로에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는 것입니다. 오 그렇습니다! 제 마음에 빛이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이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주여, 그렇습니다. 마치 내 일인 것처럼 기뻤습니다. 제가 그 영감을 놓질까봐 가족들에게 메모하라고 소리쳤습니다. 끝이 아니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순간 베드로를 돌아보신 예수님은 눈으로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야, 베드로! 네가 그럴 수 있어!’ 책망과 분노의 눈이었을까요?
저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그럴 리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장 31-32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께서 이미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다 아시고, 베드로가 낙심하지 아니하고 좌절하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나게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인데, 예수님께서 반석이라는 의미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사건 앞에서 베드로란 이름이 얼마나 우스광스럽습니까? 마귀가 배꼽을 잡고 웃을 일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자기 이름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할 베드로에게 왜 반석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까? 베드로를 조롱하려고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자신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반드시 다시 일어나 반석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인생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으로 끝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너무나 잘 아셨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은 분노가 아니라 베드로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무너질 것을 더 걱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얼마나 의협심이 강하며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입으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는 사실 때문에 베드로가 영원히 예수님을 떠나 버리거나 자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순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용서를 전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여전한 사랑한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베드로야 괜찮다. 내가 이미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해. 베드로 너 다시 일어나야 돼.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해야 돼.
예수님의 그 눈을 쳐다 본 베드로는 밖에 나가 통곡하였던 것입니다.베드로가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자신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은 따뜻했다는 사시을 깨닫고 베드로는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성도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거룩한 백성이라고. 이것 역시 마귀가 배꼽을 잡고 웃을 일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네가 성도라고? 우리가 생활 중에 예수님을 부인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꼭 말로 부인해야 부인한 것입니까?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마귀는 지금 이런 일을 들추어 내며 우리를 조롱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은혜를 받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배반하고 부인하고 심지어 욕을 하고 저주해도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낙심하지 말아라. 너는 성도다! 내가 너를 반드시 성도가 되도록 할 것이다.” 예수님을 부인해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니 어떤 실패가 있었어도 방황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타임 지가 가장 위대한 선교사라고 말했던 스탠리죤스 선교사는 미국 감리교 감독으로 선출되었으나 자신은 선교사 사명이라고 하룻만에 사임하고 인도로 돌아갔던 분입니다. 그가 자서전 [순례자의 고백]에서 인도의 현지인들 속에 결점이 보이더라도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영접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붙들었던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마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예수님은 약한 자들, 비틀거리는 사람들, 죄인들을 다그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들을 패배가 아닌 승리로, 결점이 아닌 완전함으로 이끄시고, 기어이 그렇게 되게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실패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에 대하여 좌절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쁘게 설 자신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쓰실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베드로를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자였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할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면 베드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실패자로 생을 마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로 생애를 마칩니다. 그렇게 죽음이 두렵던 그가 당당하게 순교자의 반열에 섭니다. 베드로의 삶은 영광으로 끝납니다.
그가 스스로 노력하여 회복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베드로도 변화되었다면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되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에 여러분의 삶이 실패라고 느끼고 스스로에 대해 좌절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써 주실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베드로에게 역사하셨던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저 자신에 대한 좌절감 때문에 무너질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은밀한 죄, 도무지 조절이 안되는 감정, 제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노, 욕망, 천성적인 게으름,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생각, 제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러고도 목사가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어 목사를 포기하고 싶은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붙잡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저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좌절하고 낙심하고 방황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쓰실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지금 이 상태에서 우리 인생은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위대한 삶을 살면서 끝나게 되어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승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내 생명이시고 주님이시면 내가 연약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막연하게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으로 그리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실패자였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주시는 것, 그것이 우리를 승리자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느낌입니까?
저에게는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처럼 막연한 말씀이 없었습니다.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언제나 한 가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짜증스러웠습니다. 한 두 번 들었어야지요. 그렇다고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을 속 시원히 제시해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무조건 기도하라! 기다리라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다.” 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것처럼 막연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 권면에 몇 번 마음이 움직였지만 기대하던 성령 충만한 체험은 오지 않았습니다. 기도원에 들어갔던 적도 있고, 부흥회에 사모함으로 참석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모한다고 성령의 역사하심이 제게 임하지는 않았습니다. 포기하게 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난 아닌가 봐! 나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는 것이 아닌가? ’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도 성령 충만에 대하여 막연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이 없었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명확하게 말씀하시지도 않고, 무조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시고는 하늘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120명이 마가 다락방에 모였지만, 어떻게 열흘 동안이나 계속하여 기도하고 있을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괜히 기다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준비를 하고 정하신 날, 오순절인 열흘 뒤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임하기 전까지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루 하루 기도만 하며 기다리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120여명이 그 좁은 다락방에 모여서 하루를 기다리고 이틀을 기다리고 삼일, 오일, 칠일... 과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열흘 동안 기다린다는 것인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누군가 120여 명의 제자들을 끊임없이 격려하고 또 격려하며 마음을 다잡아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반드시 주님은 성령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 격려를 받고 또 기대를 가지고 또 믿음을 회복하고 기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였을까요?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어째서 베드로가 그렇게 하였으리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대 실패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그런 사람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는 마음 먹으면 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결심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부디쳐 보니까 마음이 있어도 안되고 결심해서도 안되고 주님을 사랑해서도 안되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정말 하나님이 주신다는 성령님이 자기에게 임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베드로에게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마음이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결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님을 너무나 잘 알았던 베드로는 성령을 받기까지 열흘이 문제가 아니라 열 달도 기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대 실패가 그를 오직 성령님만 바라게 하였고 갈망하게 하였고 끝까지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게 하였고 결국 주께서 그를 위대한 사도로 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복입니다. 우리 삶의 실패가 내게 있는 좌절이 도무지 내 힘으로는 안되는 그것이 주님을 갈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실패를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실패 때문에 더욱 성령 충만을 사모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봅니다. 주님께 나의 심령과 남은 삶을 맡깁니다!
저는 어려서는 교회 생활이 즐겁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목사가 되는 순간이 죽으러 가는 심정이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으러 가는 것이 정말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가는 것 같았습니다. 초년 목회 때는 자신감 결여, 열등감에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30대 40대 50대가 되면서 저는 영적으로 점점 더 충만해지고 분명해지고, 더 흥분을 느낍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그 점이 분명해 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제게 행복하냐고 물으면 저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보화를 발견하였던 농부 같이 저도 보화를 발견하였습니다. 다 버리고 그 보화를 샀습니다. 정말 다 버리고 보화인 예수 그리스도를 샀습니다. 나 자신까지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이 바뀐 것입니다.
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아니 그 보다 더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놀라우신 예수님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펑범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저는 이 자리에 서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제 안에 계시지 않다면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 안에서 역사하시면 어떤 자리에도 담대합니다.
좌절이 있습니까? 사람에게 실망하고 자신에게 좌절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방황하다가 끝나는 인생이 아닙니다. 좌절하다가 끝나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계획은 너무너 엄청나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 이루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킬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실패자로 인생을 마치지 않게 됩니다. 위대한 사명자로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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