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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1-35)

by 【고동엽】 2022. 1. 9.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1-35)

 

어느 목사님께서 교인들에게 전도 훈련을 하시는데, 나이가 많이 든 교우들은 도무지 담대하게 예수 믿으세요. 하고 전도를 하지 못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교인들에게는 상가로 데려가셔서, 가게 마다 들어가 한 마디만 하게 하셨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시 인사를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그 말만 하고 돌아온 교인들이 담대하게 전도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예수님 믿는 사람입니다. 하는 고백만 분명해도 전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고 떳떳하게 고백하며 사십니까?
간단할 것 같은 이 고백이 쉽지 않습니다. 성격이 내성적이기 때문에 그럴까요?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 고 고백할 자격이 있는가?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라고 떳떳하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일까요?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 정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다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 나가자, 남은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34-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누가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기준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성도 여러분, 실제로 우리가 사랑하지 못할 때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고 떳떳하게 고백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부부 싸움을 하고 나면 큐티하기도 쑥스럽지 않습니까? 새벽에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러 일어나기 쑥스럽지 않습니까? 배우자가 뒤에서 위선자! 그렇게 싸우고도 큐티를 해? 어휴 가증해. 어제는 싸우고. 새벽 기도만 하면 다야? 그러는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 또. 이웃 집 사람과 다투고 난 뒤 교회에 가는 모습 보여줄 때, 얼마나 쑥스럽습니까? 사람들이 비웃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싸우고 용서하지 못하면 사랑하지 못하면 예수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해외 집회를 갔다가 어느 권사님 한 분이 자기 집에 하루라도 묵고 가라고 간절히 부탁을 하셔서 그 집에서 하루를 지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집이 참 좋았습니다. 30년 이민 생활에 경제적으로는 성공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권사님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는데, 30년 이민 생활 중에 은혜도 많이 받았지만 교회 생활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여러 번 교회를 옮겼 다녔고 지금 교회도 정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중풍으로 고생하는 남편이나 아들, 며느리와 관계도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권사님께서 자신의 이야기를 다 하시고는 목사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고 물으셨습니다. 저도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순간 성령님께서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권사님께 물었습니다. 권사님은 마음에 사랑이 제일이지. 하고 여기고 있습니까? 권사님이 당황하시며 대답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교회 문제 가정 문제 모든 문제의 원인이 사랑이 제일이라. 고 여기지 못하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 권사님은 말씀을 많이 알지만 말씀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으셨습니다. 사랑이 제일이라고 여기면 모든 문제는 그리로 풀려가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 여러분 마음에 사랑이 제일인가요?
예수님은 본문에서 사랑하되, 어느 정도 사랑하라는 것인지 그 기준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제자들이 곧 예수님을 배신하고 부인하고 도망갈 것을 다 아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벌써 예수님을 팔러 나갔고 베드로는 그 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되고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한 같은 경우는 벌거벗은 채 도망을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을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배신자도 사랑하라,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기준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이 어렵습니까? 말씀을 듣고 가슴이 답답하신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다 용서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인가?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용서하라, 사랑하라. 는 말씀은 권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한 번 힘쓰라,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이야. 그런 말씀이 아니고, 준엄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에 구원의 문제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일 3:14-15)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많은 성도들이 [믿기만 하면] 사랑이 없어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정말 믿으면 반드시 원수도 사랑하는 자가 됩니다. 여러분 중에 내가 예수님을 믿었지만 원수도 사랑하게 되지는 않는대요. 그러면 예수님을 진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정말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고,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십자가 복음을 믿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나셨지만 전 세계가 존경하던 인물인 화란의 유명한 성자 코리텐붐 여사는 유대인들을 숨겨두었다가 화근이 되어 독일이 침략했을 때 독일 군인들에게 잡혀서 라벤슨부르크 수용소에서 처참한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여자로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 고통을 이길 수 없었던 언니 베티는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코리는 극적으로 살았지만 독일이란 말만 들어도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독일 국기와 지도만 보아도 온 몸이 아파오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나 어려운 명령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독일인을 사랑하라. 독일을 찾아가 용서의 복음을 선포하라. 독일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얘기해라. 독일인들에게 치유의 복음을 전파해라. 용서의 복음을 전파해라. 도무지 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강권하심 때문에 독일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한 번은 그의 집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의 설교를 듣고 감동 받았던 사람들이 코리 여사의 손등에 키스하기 위하여 줄을 서서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만큼 한 낯익은 얼굴이 있었습니다. 바로 라벤슨부르크 수용소의 그 간수, 자기 몸에 모질게 고문을 가하던 그 간수, 발가벗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주던 바로 그 간수였습니다. 언니가 고통 가운데 죽어가던 그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코리 할머니는 그 당시의 감정을 책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내 피가 거꾸로 용솟음쳐 올랐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외쳤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어요. 그 때 하나님께서도 내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해라. 아니 하나님, 할 수 없어요.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요. 아니다. 코리야 용서해라. 그러는 중에 그 사람은 계속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용서할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용서해라. 이것은 나의 명령이다. 용서해라.
그 순간 나의 힘으로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으나 나는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그 간수가 내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서로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하였는데, 나는 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순종할 힘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용서하는 능력과 함께 깊은 평화, 하나님의 더욱 놀라운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성찬을 받습니다. 평소 성찬식 때는 조심스러워 잘 읽지 않았으나 오늘은 꼭 읽고 싶은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고전 11:29-30)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여러분, 성찬은 우리가 큰 은혜의 복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성찬을 바른 마음으로 받지 못하여 고린도 교회 교인 중에 병들고 죽은 자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성찬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셨기 때문이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의 몸을 분별한다는 말은 성찬이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 6:56-57)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성찬은 예수님을 먹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과 한 몸이 된다는 뜻입니다. 성찬은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복을 받는 시간입니다. 이것을 정말 분별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성찬을 받으면 성찬을 받고 몸이 병들고 죽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 때문에 이 말씀을 하셨느냐 하면 고린도 교회에 성찬식 때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예배를 드리려고 성도들이 모이면 언제나 성찬식을 하였는데 그것이 곧 저녁 식사였습니다. 그런데 항상 늦게 참석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성찬식에 늦습니까? 늦게까지 노동해야 하는 가난한 형제들이나 종인 교인입니다. 종인 교인들은 주인의 식사를 준비해 주고 와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늦게 옵니다. 먼저 와서 여유있게 성찬식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신분이 높거나 자유한 부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부유하고 마음대로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늦게 오는 형제를 배려하지 않고 자신들이 준비한 식사를 마음껏 다 먹어 버려 늦게 온 지체들이 굶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포도주를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취할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부유한 교인들이 주님과 하나되는 성찬을 받으면서도 가난한 형제나 종인 지체들이 배고플 것 하나를 배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과도 한 몸이라는 것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몸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하여 고린도 교회를 책망한 것입니다.
너희들은 성찬이 주님의 몸과 하나가 되는 것을 모르느냐? 성찬이 무엇인지를 아직도 모르느냐? 성찬은 예수님과 우리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난한 형제들에 대한 마음을 안 주시느냐? 늦게 올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종들과 가난한 형제들이 먹을 것을 너희들이 남겨놓지를 못하느냐? 집에 가면 너희들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없느냐? 꼭 성찬 때 와서 그렇게 다 먹어야 되겠느냐?
그것 때문에 고린도 교회 안에 병든 이들과 죽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성찬을 받을 때 내가 예수님과 한 몸이 되었다는 복만 생각하지, 형제들에 대해서 아무런 배려도 없고 관심도 없고 그들과 한 형제된 것 자체를 기뻐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은혜를 먹고 마신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먹고 마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만 좋아하고 교우들 사이에 하나되는 것을 소홀히 하면 성찬은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성찬을 받는 것이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 이도 계실 것입니다. 목사님, 진작 그 말씀을 해주시지, 내가 왜 아팠는가 했더니 그래서였군요. 저는 그저 은혜로운 시간인 줄 알고 덥석덥석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으면서도 마음에는 용서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성찬을 받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아셔야 합니다. 형제를 용서하기 힘들고 사랑하기 힘들어 주님과 하나되는 그 엄청난 복을 포기하는 것이 잘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계획은 성찬을 받게 하시므로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힘을 주시고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려고 하심입니다. 여러분, 성찬에는 엄청난 은혜가 있습니다. 성찬을 바로 받으면 용서할 힘이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사랑으로 서고 교회가 사랑으로 서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힘으로는 배신자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인도에는 요즘도 짐을 싣고 다니는 낙타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낙타의 특징은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낙타는 긴 여행을 아무 말 없이 잘 참고 간다고 합니다. 주인은 낙타가 끄는 짐차 위에 자기도 합니다. 그러나 낙타는 아무 말없이 자기의 길을 갑니다.
그런데 너무 오랜 시간 지겹게 걸으면 낙타도 더 이상 못참고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이상 화가 치밀어 오르면 더 이상 자제하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이빨을 갈면서 덤벼듭니다. 성난 낙타는 정말로 위험하다고 합니다. 낙타를 모는 짐꾼들은 대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낙타의 인내심이 한계에 가까웠다고 느끼면 짐꾼은 자기 모자를 던져줍니다. 그러면 낙타는 자기 주인을 상징하는 주인 모자를 밟고 찢고 물어 뜯습니다. 갈기갈기 찢어 버립니다. 그런 후 속이 후련해지면 낙타는 다시 온순한 동물이 된답니다.


여러분, 사람은 낙타보다 훨씬 더합니다. 낙타는 자기가 고통 당하는 것에 대해서만 참다가 혈기를 부리지만, 사람은 이웃의 잘못에 판단하는 죄가 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합니다. 결국 이웃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판단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인데 어떻게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까?
예수님 사랑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도 십자가를 분명히 통과한 사람이 아니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한 사람은 자기 성질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원수도 배신자조차도 용서하는 사랑을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자가 아니면 원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가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용서와 사랑은 내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하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빌레몬서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도망쳤던 종 오네시모를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라 고 부탁합니다. 그 후 빌레몬이 돌아온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고 형제로 맞이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용서하고, 그를 자유자로 선포했습니다.
이 사건은 소아시아 지역 전역으로 소문이 납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된 곳마다 이런 역사가 계속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성찬식이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도록 변화시킨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용서하지도 사랑할 수도 없는 우리에게 주님은 왜 성찬을 주십니까? 우리의 죄를 심판하기 위하심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용서하고 사랑할 힘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비록 집에서는 노예와 주인의 신분이 달랐지만 교회에 와서는 노예와 주인이 성찬을 받으면서 한 식탁에 앉아서 떡을 떼고 잔을 비웁니다. 예수님과 한 몸이 되었음을 계속 확인하고 교인들이 한 몸인 것을 확인하고 살게 되니 주인이 노예를 해방하기도 했고, 그들 중에 교회의 감독이 된 이도 나왔습니다. 오네시모도 나중에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빌레몬은 그 교회 집사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주인과 종의 관계가 형제의 관계로 바뀔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당시 교회였고,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강한 교회였습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들어와서 하나님의 기적, 진정한 사랑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오셨던 크리스티김 선교사님이 학생 때, 학교에 큰 행사가 있었던 어느 날 기숙사 룸메이트는 많은 형제들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고 꽃다발을 받았는데. 자기에게는 꽃다발을 가져다 주는 형제가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 그 날 혼자 방에서 울었답니다. 주님, 나를 사랑해 주는 자가 한 사람도 없어요. 꽃다발 하나 갖다 주는 형제가 없어요.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창 밖을 보라! 그래서 어느 형제가 온 줄 알았답니다. 그러나 아무도 없더랍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가로수가 보입니다. 이것이 내가 네게 주는 선물이다. 황홀하더랍니다. 이 세상에 가로수를 선물로 받은 사람이 있더냐? 그 때부터 김선교사님은 봄 가을로 황홀하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이 그 분이 그렇게 놀랍게 사역하시는 힘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성찬을 받게 되는데, 여러분 안에 폭포수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체험되기를 축원합니다.
원수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용서하고 사랑할 기적을 제게 주옵소서. 그러나 제 의지로는 이 계명을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약속하신 대로 성령님이 사랑의 눈도 열어 주시고, 사랑의 능력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약속의 그 말씀을 정말 누리기 원합니다. 사랑해야 할 때, 용서해야 할 때를 놓치지 말게 하시옵소서. 아직도 마음에 응어리진 것, 묶인 것이 있다면 풀어주옵소서. 예수님이 저의 주님이시고 저의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의 증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제자로 살기를 원합니다. 사랑의 통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과일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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