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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변화되었다! (행 15:1-11)

by 【고동엽】 2022. 1. 6.

교회가 변화되었다! (행 15:1-11)

 

 

제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이 있다면 ‘교회가 변화되어 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한 개인이 변화되는 것도 감격스럽지만, 교회가 변화되는 것을 놀라운 일입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제게 있어 교회의 추억은 고통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편이 많고 용서하지 못하고 싸우는지. 신학생 때 요한일서 4장 7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는 말씀을 읽고 그렇게 눈물이 났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인데.’ 하는 생각에 정말 서럽게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이 말씀이 제게 비전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 보았던 교회가 다가 아니구나! 성경적 교회는 이런 교회이구나!’ 저는 신학교 들어갈 때만 해도 팔자가 목사라서 신학교에 갔다는 생각을 하는 그런 정도였습니다. 아버지가 신학교 가라고 하니까 그냥 간 정도였지, 목사가 되어서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마음이 교회에 대하여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정말 서로 사랑하는 교인들이 세워지는 교회가 가능하겠구나.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되어질 수 있는 것이구나.’ 그래서 목회의 꿈이 생기고 저에게 목사가 되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비전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변화시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0년쯤 전에 김동호목사 [생사를 건 교회 개혁]이란 책을 쓰셨습니다.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생사를 걸 것 까지 있나?’ 하는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교회가 변화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가 변화되기 어려운 것은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어쩔 수 없이 보수적인 성향을 갖게 되고 변화의 속도가 늦게 마련입니다. 한 사람이 바뀌는 일은 본인이 결단하므로 되지만, 교회는 여러 사람이 모인 공동체인 까닭에 한 사람의 마음이 바뀐다고 쉽게 교회 전체가 바뀌지 않습니다. 정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고 또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많은 시험과 고비를 만나게 됩니다.


전에 시무하던 교회에서 주일 예배 때 찬송가만 아니라 찬양곡을 사용하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던 적이 있습니다. 찬양곡을 사용하는데 반대하는 분들이 제기하는 이유는 찬양곡은 예배용이 아니다! 한 마디로 경건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찬양의 역사를 살펴보면 회중들이 찬송을 부른 것이 종교개혁 이후에나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미소년들만으로 구성된 성가대만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죄가 많아서 아예 안되고 남자들이 불러야 되는데 그것도 탁한 목소리가 된 때는 하나님께 찬송드릴 자격이 없고 변성기 전 미소년들만 준비해서 찬송을 드렸던 예배 시정리 오래 있었습니다.
한동안 예배 때 드럼을 치는 것에 경악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악기라고 여기는 올갠을 처음 예배 때 도입할 때도 피아노를 처음 도입할 때도 마찬가지로 경건 논란이 있었음을 아십니까? 피아노는 일반 세상 음악이나 연주하던 악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성가대도 처음에는 남성들만의 성가대였습니다. 여성이 성가대에 선 것은 1774년 미국에서 최초였습니다. 최초로 4성부로 성가를 불렀을 때. 회중들이 괴상한 소리(?)라고 못마땅해 했다고 합니다. 불경건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생각이 완고하고 전통에 매어있는 굉장히 보수적인 경향을 항상 갖게 됩니다. 과연 이런 교회가 변화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변화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선교에 앞장섰던 안디옥 교회에 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몇몇 교인들이 왔는데, 이방인들이 많은 것을 보고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주장에 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부인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주신 구원은 완전한 것이 못되어 인간이 행위로 그것을 완성해야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 문제로 극심히 논쟁하던 안디옥 교회는 굉장히 지혜로운 결정을 내립니다. 대표자들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어 이 문제의 답을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가르침이 정말 예루살렘 교회의 가르침인지 확인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길 때 이따금 의견이 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화를 내고 비난하고, 가르치려 하고, 싸우면 결코 교회 변화는 일어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갈등이 생길수록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의지해야 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더욱 기도하면서 하나 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다 해결해 주십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교회가 변화되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드시는 일이 있다면 정말 십자가를 붙잡아야 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를 붙잡는 마음으로 서로 의견을 내고 같이 기도하고 분별 받으면 반드시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바뀝니다. 성령님이 그 역사를 이루십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교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큰 다툼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큰 소리를 지르고 주먹 다짐이 벌어지기 일보직전까지 갔었습니다. 저는 제 목회가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 일이 마귀의 역사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갑자기 눈이 뜨이는 것 같았습니다. 영적 분별이 되고 나니 문제 해결은 너무 간단하였습니다. 저는 혼자 소리처럼 말했습니다. 하나님, 아무리 괴로워도 마귀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겠습니다!
마귀는 무엇을 원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비난하고 담임목사는 사표 쓰고, 결국 교회가 갈라지는 것이 뻔한 순서임이 보였습니다.
그 다음 날 몇몇 교인들이 찾아왔습니다. 저를 격려하면서 문제가 된 교인을 내 보내야 됩니다. 뒤로 물러가지 말고 싸우세요. 교인들 대부분은 목사님 편입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이 없었다면 저는 용기 백배 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 말 속에도 나를 위하는 것 같지만, 또 하나의 무서운 마귀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분노와 미움, 분열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교회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목회를 하다 보니 성도들 사이에 의견이 서로 안맞고 또 변화해가는 속도도 달라서 일어난 갈등이 결국은 마귀가 부추기게 된 것임을 알았고, 그 때 무엇보다 먼저 할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아무 일을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 체질을 바꾸어 왔던 것들을 다 원 위치로 환원시켰습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는 길은 이 길 밖에 없었습니다.
당황해 하는 교인들에게 요청했습니다. 모든 미움이 사랑으로 바뀔 때까지는 기도하고 기다려 주십시오. 아무리 목적이 옳아도 방법이 틀리면 속은 것입니다! 그 후 오직 한 가지 기도만 했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장로님들과 온 교인들의 마음이 하나 되게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3개월 쯤 지난 후에, 교인들의 마음에서도 미움과 원망이 떠나갔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극적 반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하여 성령님 안에서 일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보 맨 앞에 제시된 우리 교회가 나아갈 일곱 가지 기본 방향이 그 때 결정된 것입니다.
그 다음 주에 눈물과 감격으로 [일치의 성찬식]을 했습니다. 그 동안에는 성찬식을 못했습니다. 마음이 갈라진 성도들끼리 어떻게 성찬식을 할 수 있습니까? 성찬식을 하면서 많은 교우들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장벽이 무너지는 느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결국 성령의 인도를 받았고 상처없이 교회가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이후 교회는 급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정말 조심할 것은 그때 큰 소리내고 그리고 몇몇 사람이 독단적으로 교회를 이끌어가는 일입니다. 싸우는 것, 남 비난하는 글을 교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리는 것은 정말 마귀가 원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성령님으로 하나 되어 변화되는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와서 이방인들이 주님께 돌아온 보고를 하였더니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행15:5) 하였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실망하였겠습니까? 이것이 솔직히 당시 예루살렘 교회 분위기였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상당히 진행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어머니 교회 격인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이처럼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의 장벽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의 질문에 대하여 답을 하기 위하여 지도자들이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교회는 이런 방법으로 문제를 처리해야 합니다. 한 두 사람의 독단적인 의사결정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도 우리에게 ‘교회는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위원회로 모이든 국에서 모이든 선교회로 모이든 몇몇 사람의 주장으로 모임을 끌어가면 안됩니다. 항상 모인 사람들의 의견을 깊이 서로 경청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하나 되게 하심이 있는지를 살펴야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해야 하느냐 아니냐로 의견이 분분할 때 베드로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고넬료 집에서 경험한 이방인들의 구원의 역사를 다시 한번 간증하였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이 할례와 상관없이 믿음과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의 간증을 들을 때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바울과 바나바가 일어나 소 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난 이방인들의 구원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간증했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은 전부 우리를 돌로 치고 배척하는데, 이방인들은 우리를 뜨겁게 맞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고 할례 안받았는데도 다 성령님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보고를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과 모든 성도들은 바나바와 바울의 간증과 보고에 귀를 기울이며 깊은 은혜를 받으면서 그렇게 보수적이고 배타적이었던 이방인들에 대한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이방인들에게 너무 굳은 마음, 협된 마음 고집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구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가 베드로와 바나바와 사울의 간증을 듣고 자기의 생각을 말하였습니다.
19절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을 바울과 바나바와 유다와 실라 편에 안디옥 교회와 이방인 교회들에게 전달하기로 가결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런 순간인지 모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변화된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16장부터 선교 역사의 새로운 장이 전개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변화되고 나니까 세상이 다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새롭게 전개됩니다. 이러한 선교 역사의 배후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우리 교회와 한국 교회를 생각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예루살렘 교회도 변화되는데 우리 한국 교회도 굉장히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도 한국 교회도 변화될 약속을 하나님이 주시는군요.’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전통은 한국 교회 안에도 너무나 강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종 문제도 없고 뿌리 깊은 신분의 차이도 없으면서도, 교회 안에 싫고 좋은 사람이 너무 뚜렷합니다. 감리교 개혁을 하다 보니 심각한 문제는 같은 기독교인이고 같은 감리교인이고 같은 목회자인데도 같은 자리에 앉기 싫어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성령님에게 복종하려고 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 안에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이러한 교회로는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오직 마음으로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했습니다.
교회는 한번 변화를 받은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항상 계속해서 변화해야 합니다.

저는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을 향하여 마음이 열린 것을 보고 우리 교회가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가 되는 비전을 더욱 분명히 가졌습니다.
사랑이 진정한 신앙이고 진정한 교회이고 진정한 개혁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했다면 우리 교회는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지난 주에 교역자 퇴수회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우리 부교역자, 사모님들에게 숙제를 내드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이디어를 하나씩 생각해 보고 오십시오.’ 그런데 어느 사모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가 되기 위하여 기도하다가 너무나 간단한 답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각자 사랑으로 소문만 사람이 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보수적인 사고를 깨뜨리고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교회가 변하기 전에 핵심 리더였던 베드로와 바울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무지 변화될 수 없는 사람을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도무지 변화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도무지 변화될 수 없는 사람이란 자기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가이사랴의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가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지시에 세 번이나 반항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행10:14).
그런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온 가족에게 성령님이 임하는 것을 보고 ‘이방인을 하나님이 받으시는구나!’ 깨닫고 생각이 꺾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더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히브리 전통과 바리새주의 전통에서 벗어나 죄인들의 친구였던 예수를 그리스도라 전하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고 계속해서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의 제자들을 잡아오려고 다메섹으로 달려갔던 사람입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행동에 확신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도무지 변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들이 변화된 것입니다. 이방인에 대하여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가 변화된 것입니다. 교회가 변화되기 전에 먼저 항상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교회 지도자들이 변화된 것입니다.

미국 인디언들에 대한 미국 교회의 부정적인 사고를 깨뜨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데이빗브레이너드와 요나단에드워즈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셨습니다. 미국 교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독일과 프랑스 교회의 부정적인 사고를 깨뜨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알버트슈바이쳐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유럽 교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나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한국 교회의 부정적인 사고를 깨뜨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손양원 목사님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던 나환자촌에 가서 목회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양자로 삼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일대기는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소문나려면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랑으로 소문난 사람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으로 소문난 사람입니까? 사랑으로 소문난 장로입니까? 사랑으로 소문난 권사입니까? 사랑으로 소문난 집입니까?
그러면 반드시 “목사님은 사랑으로 소문난 목사입니까?” 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게 교인들이 물어보기 전에 스스로가 깨닫게 하시는 경험을 지난 주간에 하셨습니다.


지난 주간 교역자들이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를 주제로 퇴수회를 다녀왔습니다. 퇴수회를 통하여 교역자들에게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마음을 확고하게 심어주고 와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는 “너나 잘하세요.” 였습니다.
내려가는 차 중에서 교역자들이 “내가 담임목사라면?” 제목으로 하는 발표를 했습니다. 저는 죽는 줄 알았습니다. 듣는 것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담임목사인 제가 우리 교회에서 가장 문제아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숙소에 들어가 보니 장로님 한 분이 쓰신 편지가 있었습니다. 사랑의 편지, 격려의 편지였습니다. 그러나 한 구절이 마음에 꽂혔습니다. ‘목사님은 성격으로나 태생적으로나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라는 인상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교회 부흥, 교회 안정, 교회 성장에는 제가 어느 정도 공로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에 초점을 맞추어 보니 한 순간에 가장 문제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음 날 새벽. 잠이 오지 않아서 일어나 기도하였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평생 모범생으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늦게서야 문제아임이 드러났습니다.
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 찍힌 사람의 심정을 알 것 같았습니다.
저 나름대로 사랑하며 목회하려고 애를 썼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은 시큰둥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까? 절벽 앞에 선 것 같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라는 명령,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라는 명령, 홍해를 가르라는 명령이 차라리 쉽겠더라구요.
3박4일을 어떻게 보내나? 인도할 자신도 없고 도망도 못 가겠고. 눈물만 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네가 온유한 자가 되었다.’
금요 성령집회 설교가 “온유한 자가 임한 축복”이었습니다. 저는 이 때 온유한 자란 할 말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임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저는 담임목사라 가르치는 자고 바로 잡아 주는 자고 이끌고 나가야 할 자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를 이루는데는 아무 할 말이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침 큐티 시간에 빌립보서 2장 3절을 보았습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 말씀이 너무 당연한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부목사님도 전도사님도 사모님들도 장로님들과 모든 교인이 다 나보다 나은 사람들로 여겨지니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주님은 저를 낙심에서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조용히 십자가만 바라보는 중에 낙심 조차 죽음으로 처리되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사랑의 사람이 될 것을 믿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나는 죽었습니다.” 하고 나갈 뿐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사랑으로 소문 난다면 우리 교회가 사랑으로 소문나는 것은 시간 문제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절망이 기쁨이 되게 하셨습니다.
금요일이 지나고 제가 둘째 딸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전하고 달라요. 아빠, 참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저는 우리 교우들도 그렇게 말할 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교회에 대하여 실망을 하거나 상처를 가진 분이 있습니까? 지금 세상은 난리도 아닙니다. 한국 교회를 이러쿵 저러쿵 말도 많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예루살렘 교회도 변화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변화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도 변화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 변화! 만들려고 노력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부터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 되면 이 교회를 쓰실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자신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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