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 더하기! <사랑>
오늘 본문의 중요한 요절은 이것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5-7)
신의 성품은 7가지입니다. 그 중에 제일은 덕입니다. 믿음에 가장 먼저 더하여야 할 것은 덕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덕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에 더 하여야 할 신의 성품은 지식입니다. 지식 다음에 더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절제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 인내를 더 하여야 참된 믿음이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경건을 더 하고 여섯 번째로는 형제 우애를 더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더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믿음이 시작이라면 사랑은 끝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종교입니다. 형제 우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의 범위를 더 넓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뿐만 아니라 불의한 이에게도 태양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한 이뿐 만 아니라 악한 이에게까지도 비를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똑같이 남에게 보여줌으로 끝내야 합니다. 여기에서 사랑이란 아카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카페 사랑이란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상식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야기 하나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일본에 있는 김 병열 목사님이 우리 기도원에서 성막 쎄미나를 공부하고 나서 돌아 간 후 내 이메일에 성경적 유우머를 가끔 보내 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이런 이야기가 들어 왔습니다. 천국에서는 하도 성경 많이 읽은 사람들뿐이라 섣불리 성경 이야기를 하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잘못 말하면 챙피를 당하기 일수였기 때문입니다.
보통 100번 정도 읽은 이들은 수두룩 하였습니다. 200번 정도 읽었다고 하면 천사들이 말했습니다. "성경을 공부시키면 알아들을 만하구먼" 300번 정도 읽은 이가 천사와 성경 이름 알아 마치기를 하다가 챙피만 당하였습니다.
600번 성경을 읽었다고 하는 이에게 성경을 암송하라고 시켰다가 틀리니까 천사에게 혼이 났습니다. 그 때 천사가 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 하나를 앞에 놓고 성경을 너무나 잘 안다고 칭찬이 자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예수님! 저 어린 아이가 성경을 잘 안다고 그렇게 칭찬하는 것을 보니 성경을 1,000번 쯤 읽었나 보지요?" 그러나 알고 보니 그 어린 아이는 중국 연변에 살던 아이였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하여 바로 몇 일전에 천국에 왔습니다. 성경을 겨우 한번 읽은 아이였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 성경에 대하여 말해 보아라" 예수님의 명령에 이 어린아이는 대답하였습니다. "성경은 그저 사랑입네다." 이런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이 어린아이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천국이 진동할 정도로 칭찬하신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영수증입니다. 복음은 사랑의 그릇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차원의 아카페 사랑 차원이 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사랑하는 것이 아카페 사랑일가요?
1. 지극히 적은 소자 하나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31-46)
위의 말씀 중에서 두 귀절에 관심을 집중시켜 보아야 합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주변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들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에게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꿈에 주님께서 나타셔서 내일 너를 찾아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튿날 프란시스는 하루 종일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추운 겨울 밖으로 나간 프란시스는 예수님을 찾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지가 추운 데 옷도 입지 못 하고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추워 보였습니다. 프란시스는 순간적으로 달려가서 자기 외투를 벗어 입혀 주었습니다.
그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지나갔습니다. 날이 저물어 버렸습니다. 프란시스는 집으로 들어와서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 오늘 나에게 오신다고 하시더니 왜 오시지 않았습니까? 온 종일 나는 주님만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갔었다> 프란시스는 놀라서 <언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나에게 외투를 벗어 주었지 않니? 네 앞으로 지나간 거지에게 외투를 벗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준 것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하늘에서 천사들이 나타나서 찬양을 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민들에게 소망과 자유를 진실되게 노래하였던 미국의 윌트 위트먼(1819-1892)은 인생 최고의 가치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 사실을 의사를 통하여 확인하였습니다. 어느 날 한 의사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 의사가 된 지 30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처방을 많이 하였습니다. 아픈 사람에게 가장 좋은 처방 약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휘트먼도 크게 공감하면서 물었습니다. <만일 사랑이라는 약을 투약하여도 잘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요?> 의사가 말했습니다. <그 때 두 배로 사랑하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최고의 치료제입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카페 사랑입니다.
사랑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영국 미들랜드 지방에는 이상한 두 개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 무덤 앞에는 오른 손이 없는 여인 동상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이 동상 이야기 때문에 이 동상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이 연인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이 오른 손이 없는 여인 동상 이야기가 있습니다. 회교도들이 성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군이 출동하여 회교도들과 치열하게 싸울 때였습니다. 십자군병중에 한 병사가 회교도 정복자 살라딘(1138-1193)에게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런데 그 병사에게는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습니다. 약혼까지 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담대하게 회교도 장군을 찾아가서 자기 애인을 석방시켜 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이었습니다.
지쳐버린 여인은 일단 집에 가서 기다려 보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라딘은 그 여인이 얼마나 자기 애인을 사랑하는 가 시험하여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의 진심어린 사랑에 감동을 느낍니다.`당신의 간청을 듣고 생각한 결과 당신의 오른손을 잘라 보내면 당신의 애인은 당신 품으로 무사히 돌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편지를 읽고 그 여인은 당장 오른 손을 잘라 종이에 싸서 정복자 사라딘에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 병사는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의 묘는 나란히 있게 되었고 오른 손없는 동상이 서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오른 손을 주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카페 사랑입니다.
어느 몹시 추운 날이었습니다. 길거리에 고아 소년 한 명이 손을 호호 불며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나무가 쌓여 있습니다. 종이가 그 밑에 있습니다. 성냥이 꼭 한 개 있습니다. 불을 피워 얼은 몸을 녹이려고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성냥에 불을 켜는 순간 갑자기 불어 닥친 바람으로 불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얼어 죽을지 모르는 운명이었습니다. 그 때 한 신사가 지나가며 성냥과 초 한 자루를 주었습니다. 그 것은 그 소년에게 그 날 밤 생명이었습니다.
사실 그 신사는 그 소년을 데려다가 자기 집에서 따뜻하게 보내게 할 수 있는 재력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의존하는 인생을 기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이면 초와 성냥을 들고 길거리를 돌면서 얼어 죽을 것 같은 고아 아이들에게 성냥과 초를 한 자루씩 나누어 주면서 전도하는 이였습니다. 수많은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이였습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이란 예수님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가요? 성경은 구체적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교회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일가요? 바울의 말을 들어 보십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2-25)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바로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초대 선교사 최 치량 장로는 어느 비오는 날 교회에 갔을 때 비에 새는 교회를 보았습니다. 그는 당장 자기 집으로 달려가서 자기 집 기왓장을 떼어 교회로 날랐습니다. 자기 집은 새도 좋으나 하나님의 집이 새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초기 한국 기독교 장로의 수준이었습니다. 어느 장로님인지 이름을 잊었습니다. 그 장로님을 하루에 교회 한 바퀴를 돌지 않으면 자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분들입니다. 이 지구상에 많은 건물이 있고 많은 단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들림 받는 기관은 오직 교회 하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에 존재하는 기관도 교회뿐입니다. 천국에는 결혼도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조직은 오직 교회 조직 하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3. 목사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을 가요?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주의 종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10;40)
이 본문에서 <너희>는 바로 사도 즉 목회자를 의미합니다. 주의 종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주의 종인 자기를 사랑한 것이나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나 같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 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갈4;14-15)
주의 종인 목사를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카페 사랑입니다.
4.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카페 사랑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일가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부모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2-15)
주님의 계명대로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의롭게 여기셨음을 이렇게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그러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니까 행위는 필요 없는 것 일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켰음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법도를 지켰음이라>(창26;5)
진정 율법적인 사람은 진정 복음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복음적인 사람은 진정으로 율법적인 사람이 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됩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마침이 된다고 바울은 말해 주었습니다. 사랑은 면역 기능을 강화시켜 준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증명하는 말이 있습니다. 버클리 대학 연구팀은 세 종류의 흰 쥐들에게 먹이를 주어 보았습니다. 먼저 한 종류의 한 마리의 쥐에게는 외롭게 하며 먹이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종류의 쥐 다섯 마리에게는 어울려 놀게 하면서 먹이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종류의 쥐에게는 사람이 사랑을 주면서 직접 먹이를 주었습니다.그 결과를 연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종류의 쥐는 세포 활동이 둔화된 작은 뇌를 남긴 채 600일 살고 죽었습니다. 두번째 종류의 쥐는 약간 뇌가 무겁게 성장하였고 700일 살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세번째 종류의 쥐는 무거운 뇌세포를 형성하고 950일을 살고 죽었습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출발이자 완성입니다. 자살한 젊은이가 옥황상제 앞에 끌려 왔습니다. 옥황상제가 물었습니다. <너는 아직 때가 되지 아니 하였는데 어째서 벌써 왔느냐?>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네 저는 가난하지만 욕심이 없습니다. 뜰 앞에 시냇물 흐르고 뒷동산에 뻐꾸기 우는 곳에 초가삼간을 짓고 착한 아내와 아들 딸 낳고 오순도순 사는 것이 고작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것이 안 되어 더 살고 싶지 않아 자살하고 이곳에 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옥황상제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했습니다. <예끼! 이 놈! 그런 데가 있으면 내가 가서 살겠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비쳐(H.W.Beecher)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자기 자녀나 하일이나 이웃들보다도 천사들과 천사장과 더 잘 지내며 사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신앙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어떤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많은 축하객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랑 신부는 참으로 행복한 모습이었다. 모든 식순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랑 신부의 모습들을 지켜보는 하객들도 모두 즐겁고 기쁜 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축하객들 중의 한 부부가 데리고 온 꼬마 아이가 그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불쑥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결혼이 뭐죠?" 그 엄마는 어린 아이가 결혼에 대해서 묻는 것이 조금은 의외였지만 웃는 얼굴로 대답하였다.
"결혼이라는 것은 여자와 남자가 서로 사랑을 하게 되어서 하는 거란다.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되면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잘못에 대해 감싸주고, 또 모든 힘든 일을 나누어서 도와주게 되지." 그러자 그 꼬마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 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엄마 아빠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면 엄마 아빠는 결혼한 것이 아니구나." 이 정도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5-7)
그렇습니다. 믿음은 더하기입니다.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의 성품은 7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1 더하기 덕 제2 더하기 지식 제3 더하기 절제 제4 더하기 인내 제5 더하기 경건 제6 더하기 형제우애 제7 더하기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 없으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흘러간 유행가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노란 샤쓰 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 어쩐 지 맘에 들어. 어쩐지 나는 좋아. 미남은 아니지만 씩씩한 생김생김 어쩐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그 사람이 마음에 들까요?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좋아 하는 것이 있습니다. 1. 노란 색을 좋아 합니다. 2. 말없는 것을 좋아 합니다. 3. 씩씩한 것을 좋아 합니다.
자기가 좋아 하는 요소가 그 사람 속에 들어 있기에 그 사람을 좋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 하실까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은 좋아 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에 성품에 참예하는 사람을 좋아 하십니다. 하나님이 좋아 하시는 성품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은 좋아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4)
<신에 성품에 참예하는 자>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 옵니다. 신에 성품은 어떤 것일까요? 기본적인 믿음에 7가 성품을 닮아 가는 것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은행에 가면 돈을 얼마 저금할 것인지 얼마나 찾을 것인지만 묻습니다. 학력을 묻지 않습니다. 나이도 관계없습니다. 남녀도 구별이 없습니다. 건강 유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돈만 얼마 저금할 것인지 묻습니다.
우리가 천국 문에 들어서면 하나님은 꼭 한 가지만 물으십니다. "너 예수님이 너의 죄를 사하여 주신 구세주인 것을 믿느냐?" <어느 대학 나왔느냐?> 묻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직업이 무엇이었느냐?> 묻지 않습니다. <몇 살 살다가 왔느냐?> 묻지 않습니다. <건강이 어떠냐?> 묻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살다 왔느냐? 묻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런데 이 믿음에는 7가지를 잘 더하여야 신에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됩니다. 믿음에는 더 하기를 잘 하여야 합니다.
어느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갔습니다. 아들은 앞에 있는 십자가를 보더니 소리를 질렀습니다. "엄마! 저기 더하기표가 있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더하기입니다. 믿음은 더하기입니다.
다음과 같은 7가지가 신의 성품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5-7)
무지개는 7가지 색갈이 합하여 무지개가 됩니다. 도 래 미 파 솔 라 시 7음이 합하여 음악이 됩니다. 신의 성품은 다음 7가지 요소가 합하여야 합니다. 신의 성품을 하나 하나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에 더 하여야 할 것이 7가지입니다. 제1 더하기 덕 제2 더하기 지식 제3 더하기 절제 제4 더하기 인내 제5 더하기 경건 제6 더하기 형제우애 제7 더하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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