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들의 성탄절
누가복음 2:15-20
축복 받은 출생이 있는가 하면 저주 받은 출생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늘의 천사들과 동방박사와 목자들이 축하했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 같은 사람은 마태복음 26:24을 보면 "차라리 나지 아니했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그런 평가를 받게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스승을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방세계에서 통용되던 노예제도에 의하면 주인은 종을 팔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주인이신 스승을 팔았습니다. 그것은 배신 행위였습니다.
잘 알려진 우화가 생각납니다. 친한 친구 두 사람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기로 혈맹을 맺은 사이였습니다. 깊은 산길을 기다가 갑자기 큰 곰을 만났습니다. 행동이 재빠른 친구는 쏜살같이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행동이 굼뜬 친구는 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이 친구는 곰은 죽은 시체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라 땅바닥에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곰이 다가와 코로 냄새를 맡아보고, 앞발로 건드려도 꼼짝하지 않은 채 엎드려 있자 곰은 슬금슬금 떠나버렸습니다.
나무에서 내려온 친구가 "여보게, 내가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니 곰이 자네 귀에 대고 뭐라고 소곤거리는 것 같았는데 뭐라고 하던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너 같은 놈하고는 상종도 하지 말라고 소곤거리고 떠났다"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가르쳐 주신 선생님을 배신했습니다.
작은 은혜를 받고도 크게 감사하는 사람이 있고, 큰 은혜를 받고도 그 은혜를 버리고 배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신은 정상적 인격을 가진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부모님의 은혜, 교회의 은혜, 이웃 형제 친구의 은혜를 배신하지 맙시다.
둘째, 스승을 팔았습니다.
사람은 인격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마치 물건처럼 팔았습니다. 이런 현상을 「비인간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건 취급하던 노예는 돈을 받고 파는 제도가 있었습니다만 어떻게 제자가 스승을 팔 수 있단 말입니까?
문제는 신판 가롯 유다가 많다는 것입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양심도, 신앙도, 가치도, 윤리도, 도덕도 팔아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도 팔아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들이 있었기에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뻔 했다"는 평을 받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2:1-20은 천사들과 목자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드린 기사입니다. 특히 목자들의 축하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1. 그들은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8절을 보면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그 당시 천대받던 직업이었습니다.
미국은 노예제도로 노예를 천대했고, 우리나라는 반상(反常)제도로 양반이 상민을 천대했고, 인도는 카스트라는 신분제도로 사람을 계급화 했습니다.
브라만(Brahman)은 사제계급이고, 크샤트리아(Kshatrya)는 무사계급, 바이샤(Vaishya)는 농민, 상인, 그리고 수드라(Sudra)는 노예입니다. 중요한 것은 Sudra는 영원히 수드라일뿐 절대로 무사나 사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급의 선을 넘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목자라는 직업은 왕족, 귀족, 종교인 등으로 구성된 상류계층에는 얼씬거리지도 못하는 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성탄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직업과 예수님이 하시려는 일이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11에서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시인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노래했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이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베들레헴 목자들은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켰습니다.
팔레스타인의 12월 밤은 춥습니다. 외롭고 추운 겨울밤, 잠들지 않고 양떼를 지키고 있던 그들에게 목자이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전해진 것은 뜻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유대나라 벌판이나 계곡에 가면 베드윈 족들이 양을 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누더기를 걸치고, 천막을 치고, 땅바닥에 깔개를 깔고 살면서 양을 칩니다. 그들은 수저나 젓가락도 쓰지 않고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다. 그러면서 오로지 양을 지키고 키우는데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맡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해준 것입니다.
이태리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안토니오는 음악을 좋아하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노래도, 악기도 연주하는 재주가 없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바이얼린을 만드는 아마티라는 노인을 찾아가 자기가 나무로 깎아 만든 조각품들을 보여주며 바이얼린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소년은 아마티 노인 밑에서 최선을 다해 바이얼린 만드는 일을 배웠습니다. 그는 일평생 천 개가 넘는 바이얼린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 바이얼린이 저 유명한 스트라디바리인 것입니다.
그는 손으로 깎고, 다듬고,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의 장인혼을 넣어 바이얼린을 만들었기 때문에 최고를 자랑하는 명기가 태어난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됩시다.
2. 아기를 찾아갔습니다.
15절을 보면 "가서....보자"고 했고, 16절을 보면 "빨리 가서"라고 했습니다. 천사들이 전해준 소식을 듣자마자 그들은 곧바로 행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나쁜 일은 천천히, 좋은 일은 빨리 결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좋은 일은 천천히, 나쁜 일은 재빨리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두를 일이 있고, 서둘러서 안될 일이 있습니다. 좋은 일은 서두르고, 나쁜 일은 서둘지 않아야 합니다. 목자들은 서둘러 아기를 찾아가 경배했습니다.
저는 세례 문답할 때 그 자리에서 결단하도록 묻는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일조를 하느냐"와 "술, 담배를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세례 문답할 때 이미 90∼95%는 십일조를 하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아직 못하고 있다는 사람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십일조를 하시겠습니까?" "예, 하겠습니다."
"언제부터 하시겠습니까?" "다음주일부터, 다음달부터 하겠습니다."
"술, 담배를 하십니까?" "예, 조금씩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끊겠습니다."
"언제부터 끊겠습니까?" "천천히, 차차,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안됩니다.
"당장 끊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이유는 십일조나 술, 담배 끊는 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에 주저하고 미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빨리 찾아가 아기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 점을 배워야 합니다.
3. 일허로 돌아갔습니다.
20절을 보면 "듣고 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영광과 찬송을 드리고, 그리고 베들레헴 일터로 돌아가며 찬송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그 현장에 머문 것이 아니라 일터로 돌아가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1-12을 보면 고침 받은 중풍병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2:10)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자는 양과 함께 있어야 행복하고, 직장인은 직장에, 사업가는 현장에, 예술가는 무대에 있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 있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이 목자들에게 전해진 것은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한국교회사를 살펴보면 선교사들의 선교대상은 양반이나 귀족으로 구성된 상류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보통사람들이 선교대상의 주체였습니다.
전라북도 금산에 가면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1904년 선교사 테이트(Tate) 목사가 금산리에 교회를 세우기로 마음을 정하고 1905년부터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금산교회에는 이자익 목사님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은 이자익은 살길을 찾아 경상도 진주를 떠나 남원 땅까지 왔고, 다시 곡창지대인 김제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금산리까지 왔을 때 삼거리 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왼편으로 갈까, 오른편으로 갈까 망설이다가 오른편 길로 들어서 걸어갔습니다. 놀라운 것은 왼편으로 가면 15분 거리에 금산사가 있었고, 오른편으로 가면 10분 거리에 조덕삼이라는 사람네 부잣집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집에 머슴으로 들어갔습니다.
1905년 조덕삼 씨네 사랑채에서 예배가 시작됐을 때 머슴인 이자익도 함께 참석을 했습니다. 교인이 100명 정도로 성장하자 장로 한 사람을 뽑기로 하고 투표를 했는데 주인 조덕삼을 제치고, 머슴 이자익이 뽑혔습니다.
주인은 평교인, 머슴은 장로가 되었지만 조덕삼 씨는 흔연스레 장로를 받들며 교회를 섬겼고, 훗날 그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유학 가도록 주선하여 보냈고, 졸업 후 다시 돌아와 금산교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자익 목사님은 총회에서 세 차례나 총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머슴이었던 이자익 소년의 성공기도 아름답지만 반상의 벽을 허물고 자기 집 머슴을 장로로 떠받들고, 담임목사로 모신 조덕삼 장로 이야기는 더욱 빛나는 보석과 같습니다. 바로 이러한 정신과 사랑이 예수님의 정신이고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념도, 국경도, 사상도 뛰어넘게 해주셨습니다.
사랑은 국경이 없다고 합니다만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것을 초월하게 해주셨습니다.
20절을 보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듣고 보았다는 것은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천사를 보았고 천사들이 전해준 말을 들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 예수를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영광과 찬송을 드렸습니다.
우리도 들었습니다. 보았습니다.
그 사실을 전하고 말합시다. 그리고 영광돌리고 찬양합시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으면 그대로 됩니다. (막11:20~25) (0) | 2022.01.01 |
---|---|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에9:3~6) (0) | 2022.01.01 |
루디아의 가정 신앙 (행16:11~15) (0) | 2022.01.01 |
뜻대로 구하는 사람들 (요일5:13~17) (0) | 2022.01.01 |
하루살이 메뚜기 개구리 사람 (0) | 2021.12.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