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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참된 화해를 위하여 / 창세기 45:1-8

by 【고동엽】 2021. 12. 24.

민족의 참된 화해를 위하여

창세기 45:1-8


여러분, 우리 한국 민족이 민족성에 있어서 평화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어느 정도는 상당히 호전적인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양론이 있다고 합니다. 흰옷을 사랑하는 백의민족의 어떤 전통, 또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받았을지언정 우리가 별로 이웃 나라들을 침략하지 않았다는 어떤 그런 전통에서부터 평화적인 민족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조시대의 무서운 사색당파 싸움들, 그 피 묻은 보복의 역사, 아직도 지구상에서 최후의 분단국가로 남아서 남북 사이에 대결을 지속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 민족성이 의외로 상당히 호전적이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그렇지 힘만 있었더라면 열방을 향한 침략도 얼마든지 가능한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저는 이 두 가지 이중성이 함께 우리 민족성 안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학을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은 이런 이중성이 우리의 국가가 위치하고 있는 특별한 그 공간성과 지리적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열강 사이에 샌드위치로 끼어서 계속적인 고통의 역사를 해왔다는 것 또 하나는 공간이 너무나 좁은 공간이라는 것. 여러분 좁은 공간에서 오래 살다 보면 계속 우리가 소위 스킨쉽, 피부를 맞대고 살다 보면 굉장히 가까워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든 것을 공유하고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지만 또 이렇게 맞대고 살다 보면 의외로 상처를 쉽게 받고 상처를 주다 보면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한순간 원수로 돌아설 수 있는 그런 이중적 역설의 성격이 우리 안에 조성된 어떤 원인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넓은 대륙에서 비교적 살아가는 민족들의 민족성과 비교하면 극명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좀 더 넓은 공간에서 사는 대륙성을 가진 민족들을 보면 좀 다투는 일이 있어도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라고 나는 내 길을 가겠다고 축복하며 서로 헤어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 그들에게 있음에 반해서 우리는 그런 여유를 갖지 못한 민족인 것을 솔직히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보다 넓은 공간을 점유하고 산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그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신데렐라와 콩쥐 팥쥐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내용은 아주 비슷하지요. 계모와 그 딸에게 다른 딸이 구박을 받고 살아간다는 그 내용은 뭐 외국에서 만들어진 신데렐라의 이야기나 콩쥐 팥쥐의 이야기나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비슷합니다. 그런데 결론이 달라요. 마지막 결론이 상당히 다릅니다. 신데렐라는 주인공이 왕자의 아내가 되는 일종의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콩쥐 팥쥐는 그렇지 못합니다. 콩쥐 팥쥐의 마지막 결론 부분에 관해서 한 가지 얘기가 아니고 몇 개의 버전이 다른 스토리가 있는 것을 제가 발견을 했습니다. 한 스토리에 보면 마지막에 팥쥐를 향한 콩쥐의 처절한 피묻은 복수의 극, 심지어는 양쪽 마차에 양손을 잡아서 찢어서 죽이는 것으로 끝나는 피 묻은 처절한 보복의 엔딩을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발견합니다.

이런 우리 민족의 독특한 심리적 특성이 바로 지나간 50년 동안에 남북 대결에 어떤 긴장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한 일이 있습니다. 지나간 6.15선언을 통해서 남북한에는 새로운 화해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처럼 이것이 단순한 선언적 의미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남북의 진정한 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우리들의 의식의 전환이라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우리 남북한이 새로운 화해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 민족 가운데 요청되는 새로운 의식, 그 의식은 어떤 의식이어야 할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잘 아시는대로 요셉이라는 사람이 자기 형님들에게 구박을 받고 핍박을 받고 시련과 고통을 경험하고 심지어는 음해당하고 죽음의 위기까지 넘겨야 했었던 요셉이 그 어느 날 형제들과 화해하고 있는 이 장면 속에서 오늘 우리는 그 대답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남북한 민족의 진정한 화해를 위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의식, 어떤 의식일까요?

저는 첫째로 그 의식을 형제의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형제의식.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요셉은 자기 형제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처지였습니다. 그들의 음모로 생명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죽음의 자리에 넘겨졌고 노예로 외국에 인신매매까지 당한 입장이 요셉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실은 요셉은 자기를 그렇게 핍박하고 증오했고 그리고 자기의 인생을 무참하게 짓밟았던 그 형님들을 여전히 변함없이 형제로 의식하고 있었다 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4절을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4절 같이 한 번 읽겠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우리가 본문이 시작되는 1절에 보면 요셉이 자기 형님들인 것을 알아차리자 마자 그는 통곡을 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4절에서 말하기를 형들에게 가까이 오세요. 잘 보십시오. 제가 당신들의 아우가 아닙니까? 아우가 아닙니까? 저 같으면 도저히 못 할 것 같아요. 요셉은 여전히 이렇게 자기에게 공격적인 상처를 남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그들을 여전히 그의 형님이라고 부르며 내가 당신들의 아우가 아닙니까 라고 접근하고 있는 요셉의 형제의식을 우리는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런 형제의식이야말로 요셉이 그의 형제들과 더불어 화해가 가능할 수 있었던 요셉의 의식,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의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간 50년 동안 남북한 사이에는 이러한 삶을 우리는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우리 사이에 있었던 높은 불신의 벽, 이 벽을 쌓아놓고 남북한이 주고 받았던 회색의 언어들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불러왔습니까? 형제들이어야 할 그들을 향해서 불러야 할 명칭 하나, 이 언어의 명칭만 생각해보아도 우리는 남북한의 긴장을 다시 한 번 회고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북한 사람들에게 사용했던 언어들이 어떤 언어들이었습니까? 괴뢰, 빨갱이, 웬수, 오랑캐......우리가 이런 단어들을 거침없이 사용해 오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것은 입장을 바꾸어서 말해도 북측에서는 남측을 향해서 동일한 아니 그 보다 더 심한 언어들을 동시에 그들이 사용해 왔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두 차례 걸쳐서 북한 땅을 방문해 본 일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북한의 평양 땅을 밟았을 때 그리고 고려 호텔에서 북녘 땅에서 첫날 밤을 지낼 때 호텔 방을 들어가자 마자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텔레비전의 채널을 틀었습니다. 도대체 여기 테레비에서는 뭐가 나오나? 탁 틀었어요. 드라마가 나오더라구요. 연속극이었습니다 일종의. 아, 여기도 드라마도 있구나. 어떤 드라마인가 호기심을 가지고 좀 지켜 봤어요. 뜻밖에도 그 내용은 북한이 외교관 하나가 유럽에 외교관으로 나갔다가 남한의 안기부 요원에게 납치되는 그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어요. 제가 어디선가 많이 봤던 비슷한 이야기. 그러나 거꾸로 그 상황을 역전시킨 스토리가 그 드라마 속에 나타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남북 분단의 비극의 현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극복이란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의 의식 또 그리스도인의 전망, 성서적 입장에서 볼 때 저도 도무지 공산주의 라는 이데올로기를 수용하지 못 할 것입니다. 아니 수용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수용할 수 없는 공산주의 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 포기하지 않은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과 분리시켜서 우리는 그들을 동시에 또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공산주의 라는 이론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은 여전히 우리의 사랑이요 여전히 우리의 복음 선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안목이 우리에게 요청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보통 전도할 대 우리가 기독교 안에서 교회 안에서 자주 쓰는 말 가운데 우리가 이런 말을 써오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죄는 밉지만 죄인은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죄를 범하는 사람들, 그들을 우리는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 죄는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은 여전히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에요.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납할 수 없어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는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면 우리는 앞으로 남북한 화해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 우리에게 전환된 이런 의식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원수가 아니라 그들을 이제는 형제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처럼 동일하게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동일한 인간이란 사실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안목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더군다나 그들이 대부분이 지금은 예수 모르고 복음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만약 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되고 그렇다면 나와 동일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는 형제들일 수가 있다.

선교학에서는 이런 것을 표현하는 독특한 그런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가능성의 형제의식 이렇게 부릅니다. 가능성의 형제의식, potential brotherhood 이렇게 부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하나님 모르니까 넓은 의미에서 형제라는 단어를 쓸 수 있겠지만 복음적인 좁은 의미에서는 하나님 아직 모르니까 하나님 없이 살고 있으니까 형제라고 할 수가 없죠. 그래도 그들을 형제라는 안목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라는 얘기입니다. 저들도 복음을 듣기만 하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기만 하면 나와 꼭 같이 저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다. 이것을 가능성의 형제, 이 호칭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가끔씩 남편이 교회도 안 나오시고 믿지 않는 남편과 더불어 사시는 아내들이 속상하죠. 신앙을 공유하지 못하니까 얼마나 속상해요. 어떤 때는 또 아내의 신앙을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남편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아내들이 쓰는 말 가운데는 자기 남편을 지칭하면서 우리 집사람은 마귀예요. 마귀. 이런 표현을 심히 쓰잖아요. 마귀라고. 저는 이런 호칭이 남편의 마음을 바꾸고 또 하나님이 역사하는 일에 별로 도움이 될 수가 없다고 생각을 해요. 지금은 내 남편이 하나님 모르지만 복음을 듣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남편도 입술이 열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날이 올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꼭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의식을 가지고 내 남편을 대할 수가 있다면 복음 전도의 시기는 훨씬 더 앞당겨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능성의 형제의식이에요. Potential brotherhood.

그렇습니다. 남북한의 50년 분단을 극복하고 화해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형제의식이라고 생각을 해요. 형제의식, 주께서 우리 남북한, 이땅에 살고 있는 모든 동포들에게 다시 한 번 진정한 이 형제의식이 회복을 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형제의식.

두 번째로 저는 남북한이 민족의 새로운 화해를 위해서 필요한 의식이 있다면 두 번째는 그것을 섭리의식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자, 요셉이 자기 형제들과 화해가 가능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겪어왔던 상황, 그가 당했던 상황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요셉이 늘 이런 생각 가운데 살았다고 한 번 가정을 해보세요. 내가 억울하게 당했어, 형님들이 그럴 수가 있나, 내가 이 웬수 갚을거야. 좀처럼 이 의식에서 해방될 수가 없었다면 요셉은 오늘 이 본문에서 형들과 얼싸안고 화해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 계절을 가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억울했겠지만 아팠지만 상처는 고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환경을 하나님이 허용하셨다. 이것이 요셉이 가질 수 있었던 상황에 대한 섭리적 안목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습니다.

자, 본문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십시오. 5절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5절입니다. 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우리 7절도 읽어 볼까요? 7절 시작.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이 5절과 7절에서 강조된 주어, 이 문장의 주어가 어떤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죠. 하나님.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당신들 앞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7절에도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나를 먼저 보낸 것입니다. 지금 팔레스타인 땅에는 기근이 들었어요. 형님들은 양식을 구걸하기 위해서 애굽 땅에 온 것입니다. 이집트에 왔습니다. 그 당시의 제국이었던 강대국이었던 이집트 땅에 와보니 뜻밖에도 그들이 팔았던 그리고 아마도 죽었을 것이라고 간주했던 자기의 동생이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어 앉아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요셉 편에서 볼 때는 이제 절묘한 더 좋을 수 없는 보복의 타이밍, 자기에게 주어진 칼과 힘을 가지고 한 번 멋지게 자기를 밟았던 그 사람들을 향해서 그 칼을 휘두를 수가 있었던 시간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뜻밖에 요셉의 입술에서 터져나오는 이 고백을 다시 한 번 들어보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형님.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이런 시대 우리 가족 구원하고 우리 민족 양식 문제 해결하기 위해서 주께서 앞서서 나를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

요셉은 분명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모든 해프닝,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믿은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신앙,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 이 신앙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여러분! 이것은 국가적으로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괴로운 일을 당할 때 아픈 일을 당할 때 누가 나를 아프게 만들었는가? 우리가 그 초점을 상대방에게 계속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한 우리의 마음은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지나간 해에 저도 개인적으로 좀 고통스러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도 알고 있는 분이 계시지만. 그러나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날 때 저를 지배하고 있었던 그리고 이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이 이 사건을 내게 허용하셨다면 나는 여기서 렛슨을 받겠다. 하나님 어떤 의미에서 이 일을 허용하셨습니까? 이랬을 때 그 고통을 가한 사람들을 저는 용납할 수가 있었습니다. 용서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손을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아마도 요한복음3장16절 못지않게 우리가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축복과 용기가 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가 로마서8장28절 이하에 바울 사도의 고백이라고 아마 생각합니다. 잘 아시는 말씀이죠. 하나님을 뭐예요?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뭡니까?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이 모든 것, 이 고통스러운 것, 우리가 상처를 받고 있는 것, 이 아프고 괴로운 상황, 이 모든 것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그 하나님이 선이라면 역사 속에 내 개인의 삶의 행진 속에 일어나는 가슴 아픈 사건까지도 하나님은 이 모든 악을 변하여 선케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갖고 있다. 나는 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 이것이 바로 섭리 신앙 혹은 섭리 의식, 하나님의 섭리를 의식하는 믿음입니다.

민족의 드라마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끝에 가서 봐야 돼요. 끝이 아름다우면 모든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쩌면 50년의 분단의 비극이 우리 민족사에 더 유익한 플러스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달리 고난의 삶을 살아왔던 이 민족, 그리고 미움을 마침내 극복하고 화해의 새 시대를 창출할 수가 있다면 여기 민족사에서 경험하는 놀라운 에너지는 저는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민족의 새로운 시너지로 이 파워가 엄청난 내일을 향한 새로운 가능성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그 넓은 포용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민족의 진정한 화해, 갈라진 남과 북의 화해를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할 또 하나의 의식이 있다면 세 번째로 저는 그것을 섬김의 의식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섬김의 의식. 지금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만은 한 수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스포츠 이벤트가 벌어질 때 우리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다른 어떤 게임보다도 제일 흥분하는 것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게임에서 제일 흥분합니까? 대표적인 것이 한일전, 일본하고만 붙었다 하면 이건 절대로 질 수 없는 게임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흥분합니까? 지난 번 한일전에서 이기니까 우리가 얼마나 통쾌했습니까? 우리 교회 기도제목에 올라왔었어요. 한일전에 이기게 해달라고. 드디어 하석주가 한 골 차 넣었습니다. 그 하석주의 누님이 우리 교회 나오시거든요. 기도의 응답으로 아마 이긴 것 같아요. 그러나 이 한일전 못지않게 우리가 결코 질 수 없는 또 하나의 게임, 북한과 붙으면 우리가 일본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남북한의 게임에서도 우리가 유달리 민감했고 이것만은 꼭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을 가족으로 생각했더라면 형제로 생각했더라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저의 둘째 아들이 만16살이 되었을 때 집에서 생일 파티를 열어주었습니다. 자기 친구들을 초청했어요. 그래서 집 안에 가득히 제가 미국 살 땐데 둘째 아들 친구들이 저희 집에 가득히 이렇게 모였습니다. 생일 파티가 한참 무르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얘기도 하고 피자도 먹고 케익도 먹다가 갑자기 우리 둘째 아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저한테 아빠 Daddy 나하고 팔씨름하자. 팔씨름하자. 팔씨름 저한테 도전을 했어요. 그래서 자기 친구들이 보는 만장한 관중 앞에서 우리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팔씨름을 시작했습니다. 이겼을까요 졌을까요 제가? 졌습니다. 기분 나빴을까요 기분 좋았을까요? 좋았습니다. 어떻게 아세요? 저는 게임에 지고도 너무 너무 행복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아, 이제 내 아들이 이제는 컸구나. 그래서 팔씨름을 나한테 이길 만큼 이렇게 성숙했구나. 내 아들의 성숙을 확인하고 바라보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팔씨름을 할 때부터 내 속에는 제가 패배하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이 제 속에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행복한 패배였습니다. 그것이 가족이에요. 그것이 가족입니다. 그것이 형제입니다.

우리가 이런 형제의식을 가질 수 있다면 저는 남북관계는 굉장히 달라질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부터 서로 미워하지 않는다. 저는 이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인 화해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서로를 섬길 수가 있어야 합니다. 아니 도울 수가 있어야 합니다. 아니 이 도움은 어디서부터 먼저 시작이 될까요? 저는 강한 자가 먼저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강한 자가 먼저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제가 여성들을 아주 존경합니다. 마누라를 필두로 해서. 저는 여성들에 대한 무한한 외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성경에 보시면 창세기에 그 아내를 표현할 때 하나님이 아담을 위해서 아내인 하와를 지으면서 저를 무엇으로 지었다구요? 돕는 배필로 지었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여성들이 돕는 자. 어떤 여성분들은 스스로 싫어하더라구요. 왜 우리만 돕는 자냐? Helper 라는 단어, 돕는 자. 이 단어를 연구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이 돕는 자란 단어가 제일 많이 적용된 것이 하나님이에요. 시편에 보시면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요. 하나님이 약자예요?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도우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성을 강하게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성이 남성을 도울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돕습니까? 오늘 아침에도 오늘 아침에는 밥 좀 시원찮게 해줬지만 밥 해주고 빨래 해주고 아기 낳아주고 도와 주고......강한 자가 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도울 수가 있어야 새로운 문화가 새로운 역사가 창출될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기쁘게 국무총리로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곳간을 열어 자기 형제들을 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침내 자기 형제들로 하여금 이집트에 데려와 같이 살도록 배려하지 않습니까? 70명이 처음에 내려와요. 그러나 나중에 애굽 땅을 다시 떠나 시온을 향할 때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인구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200만 이상 아마도 약 300만 가까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그 당시 이집트는 세계의 강자이었는데 강대국의 허락을 받아 이집트 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했던 델타의 삼각주 근처에 있는 고센 땅, 거기에 이스라엘 민족들이 거했는데 거기서 이집트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들은 국력을 키웠습니다. 그래서 이 고센 땅은 이스라엘 민족사에 새로운 인큐베이터였다 라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요셉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은 다시 국력을 키워 가나안 땅으로 돌아갑니다. 섭리를 받아들였고 그리고 섭리의 자리에서 요셉은 할 수 있는대로 형제들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민족은 새로워질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독일의 통일에서 배울 수 있는 렛슨이 바로 그게 아닙니까? 서독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먼저 도왔어요. 강한 자가 도왔습니다. 얼어 붙었던 동독이 차츰 차츰 그들의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독일의 통일사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보다 이 서독의 교회가 동독을 도우는 일에 앞장설 수가 있었다는 사실.

제가 두 번째 북한을 방문했을 때 저는 한 북녘 땅의 당원과의 대화를 잊을 수가 없어요. 사람들 여러 사람 있으면 정치적인 이야기하고 별로 솔직히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일대일로 거리에 남겨지게 되면 상당히 자기 진심을 마음을 열고 얘기하더라구요. 그런데 한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우리도 알아요. 기독교인들이 참 좋은 분들이란 것을 우리도 알아요. 우리는 기독교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바꾸고 있습니다. 조국이 어려울 때 북한을 얘기한 거죠, 조국이 어려울 때 누구보다도 달려와서 사심없이 도우려고 하는 분들은 다 기독교인들이거든요. 실제로 보이지 않는 과거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지금처럼 이 교류가 활성화되기 그 이전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도 혹은 흩어진 우리 한민족 가운데 북녘 땅의 문을 노크하고 상당히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돕는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북녘 땅이 서서히 그들의 마음이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교류가 좀 더 넓어져가는 이 시각과 이 시점에서 저는 우리 교회의 시각에서 한국 교회의 시각에서 우리가 먼저 앞장서서 북녘 땅을 돕는 일에 좀 더 적극적일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 선교부에서 앞으로 이 북방선교에 대한 좀 더 진지한 연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작은 노력이 어느 날 마침내 그 벽을 헐고 진정한 화해의 한 마당을 가져올 수 있는 그 역사가 오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남북한 진정한 화해를 위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의식, 이 섬김의 의식.

저는 오늘 이 설교의 메시지를 콩쥐팥쥐 라는 한국의 민화에 대한 얘기로 처음부분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결론지으면서 마지막 대목에서 전래되어 온 또 하나의 민화를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얘기. 추수가 끝난 후에 형님과 아우 두 형제는 양곡을 사이좋게 갈라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형이 생각합니다. 우리 아우가 최근에 장가들었고 새로 살림을 차렸는데 나는 그동안 축적해 놓은 것이 있지만 그러나 내 동생은 앞으로 살림 살기가 곤란할 거야. 그래서 한밤 중에 형님은 양곡 볏단을 짊어지고 아우 집으로 내려가서 아우의 마당에다가 볏단을 몇 개를 내려놓고 다시 돌아갑니다. 그 이튿날 아우가 보니까 더 와 있거든요 볏단이. 어디서 누가 보냈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다가 아, 우리 형님이 이렇게 반을 갈라주셨지만 우리 형님은 식구들도 많고 더 필요한 것이 많을 텐데 아무래도 이 더 들어온 볏단 몇 개를 형님에게 돌려드려야겠다. 한밤중에 이 아우는 볏단을 짊어지고 형님 집으로 향해 형님 집 앞 마당에다 내려놓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잖아요. 몇 일을 두고 반복되잖아요. 그리고 한 날밤에 드디어 거의 동시에 한밤에 출발했던 형님과 아우는 길 도상에서 함께 만납니다. 볏단을 짊어지고 오다가 만납니다. 그리고 모든 경위를 알게 되었습니다. 형과 아우는 함께 붙들고 통곡을 하면서 함께 포옹을 합니다. 한국의 민화가 가져온 아름다운 전통의 이야기.

저는 이 이야기 속에서 민족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어떤 대목을 발견할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만일 만일 우리가 이런 형제의식을 회복할 수가 있다면 그리고 지나간 역사의 상처를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가 있다면 그리고 서로를 향한 진정한 섬김의 의식이 회복될 수가 있다면 저는 믿습니다. 민족의 참된 화해는 멀지 않았다고 그리고 통일의 그 날도 멀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진정한 화해, 이 화해를 위해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면 십자가의 심볼, 십자가의 상징, 그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리고 선포하시기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해가 가능할 수 있다고 선포하신 예수. 우리가 그 예수의 제자라면 우리는 민족의 화해의 새로운 시대를 어떤 의식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의 응답 여하에 따라서 우리의 민족사는 매우 달라질 것입니다. 화해의 시대를 위해서 주님이 오늘 성경에서 보여주신 새로운 의식, 진정한 형제됨의 의식, 그리고 지나가는 역사의 상처를 섭리로 받아들일 줄 아는 안목,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섬김의 의식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북녘 땅의 동포들을 향해서 사랑의 가슴으로 나아갈 때 저는 민족의 새로운 역사와 평화의 새로운 역사가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잠시 조용히 기도할 때 50년 전 분단의 이땅은 포화가 가득했습니다. 전쟁의 연기로 가득차 있고 저도 어렸을 때 6살, 7살 불타던 수원역전의 모습, 논두렁에서 포탄을 피해서 아버지의 품안을 파고들던 어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50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바로 2 주전 우리는 남북의 정상이 처음으로 손을 잡는 그 광경 속에서 감격을 가누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입니다. 그 시작이 진정한 평화로운 통일로 이 땅에 찾아오기 위해서는 우리 백성 모두의 전환된 새로운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형제됨의 의식을 주시고 그리고 지나간 역사의 상처를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안목을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 가까운 곳에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서 내가 사랑하는 형제들을 섬길 수 있는 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이기심을 초월해서 우리가 정말 북녘 땅의 동포들을 돕기를 시작한다면 우리를 통해서 평화의 새 역사는 지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그렇게 도와주시고 어서 빨리 이 땅에 상처가 아물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가 평양에 가서 전도하고 복음화 대회를 열고 남북한의 합쳐진 에너지를 가지고 만주 선교하고 북방 선교하고 세계 선교할 수 있는 선교 한국의 새 날, 통일 한국, 성서 한국의 새 날이 찾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다같이 우리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받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갖고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함께 해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역사가 이 고통과 상처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평화로운 통일 한국의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미래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주시고 역사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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