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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 받는 성도의 4대 의식 |

by 【고동엽】 2021. 12. 20.

쓰임 받는 성도의 4대 의식
마태복음 21장 1-11절

< 쓰임 받지 못할 인생은 없습니다 >

한 미술가가 숱한 고난 끝에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명성을 얻고 나니 곧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슬픔과 절망을 견딜 수 없어 술로 지내다가 어느 날 친구의 전도를 받고 새 삶을 시작했는데, 그가 바로 렘브란트입니다. 나중에 한 미술학도가 렘브란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습니까?” 그때 렘브란트는 대답했습니다. “지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되네.”

성공의 비결은 간단합니다. 지금부터 좋은 일을 시작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면 지금부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면 됩니다. 낙심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면 지금부터 다시 새롭고 찬란한 꿈을 꾸면 됩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지금 좋은 일에 나서는 사람은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 멋있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힘들면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하면 먼저 우리가 변화됩니다. 그 다음에는 환경이 변화되고, 문제가 신기하게 풀립니다. 때로 문제가 풀리지 않아도 그 문제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환경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고 믿음의 문제입니다.

왜 미군이 압도적인 무기를 가지고도 월남전에서 패배했습니까? 월맹군과의 심리전에서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군은 역선전을 했습니다. “따이한에게 붙잡히면 사시미가 된다!” 그래서 따이한이란 말만 들어도 월맹군들이 두려움에 떨었다고 합니다.

살면서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때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마음이 문제이고 믿음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단에게 단호하게 역선전을 해야 합니다. “사단아! 네가 우리 가정, 우리 자녀, 우리 교회를 건드리면 너는 사시미가 된다!” 우리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고, 심리적인 패배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보리는 밟힐수록 더 뿌리를 깊이 박고 새 봄엔 더 힘차게 자랍니다. 그처럼 어려운 때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곧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어둠을 바라보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배경과 자본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배경과 자본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앞에서 멋지게 쓰임 받지 못할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 성도들이 가져야 할 4가지 기본 의식 >


오늘은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첫째 날로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은 유대인의 최대명절인 유월절을 며칠 앞둔 날이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는 때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다는 뜻에서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이 장면을 통해 성도들이 가져야 할 4가지 기본 의식을 도전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인생이 되려면 이 4가지 의식이 탁월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사명 의식

종려 주일에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약 3.4킬로 떨어진 벳바게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주님은 두 제자를 건너편 마을로 보내며 말했습니다. “건너편 마을로 가면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있을 테니 풀어서 내게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왜 나귀를 끌고 가느냐고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라 그러면 보낼 것이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까 볼품없는 당나귀도 주님 앞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볼품없는 존재라도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쓰임 받는 사명적인 인생은 결코 볼품없는 인생이 아닙니다. 물론 사명을 따라 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내가 하나님께 선택받고, 하나님의 일에 선택받았다는 것처럼 복된 일은 없습니다.

부부가 언제 가장 애정이 생깁니까? 아내나 남편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애정이 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이 언제 가장 깊어집니까?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생각을 하면 신앙이 깊어집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했다고 하면 기초가 부실한 신앙이 되어 고난 중에 쉽게 흔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다고 하면 기초가 든든한 신앙이 되어 고난 중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특별히 사명감은 부담스러운 일도 기꺼이 하게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두 제자는 나귀를 예약한 것도 아닌데 주님께서 그냥 나귀를 가지고 오라고 하니까 가기 싫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말이 무엇입니까? “돈 빌려달라는 말입니다.”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죽기보다 더 듣기 싫은 말이 “어디 가서 돈 빌려오라!”고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제자들도 아마 똑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이런 곤란한 일만 우리에게 시키나?” 그러나 본문 6절 말씀을 보면 두 제자는 주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정말로 주인이 나귀를 순순히 내어주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내키지 않는 일을 할 때, 하나님은 더 큰 은혜의 체험을 주실 것입니다. 때로는 믿음의 부담도 지고 믿음의 모험을 해야 체험도 있게 되고, 영혼도 강건하게 될 것입니다.

요새 성도들이 가장 꺼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도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배, 기도, 제자훈련, 봉사 등을 다 잘해도 전도만은 잘 못합니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피할 때 오히려 전도에 힘쓰면 다리도 튼튼해지지만 내 영혼도 튼튼해지고 싱싱하게 됩니다. 미국의 경우에 해안에서 내륙 깊은 곳으로 물고기를 싱싱하게 운송하려면 수족관에 문어를 몇 마리 넣는다고 합니다. 그래야 물고기들이 문어를 피해 달아나느라고 계속 움직여서 싱싱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영혼이 죽을 때까지 싱싱했던 것은 마치 편안함을 피해 다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복음을 전하려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편할 날이 별로 없었고 가끔 감옥에도 갔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조금 쉬라고 감옥에 보내셨다”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이 가장 편안했던 때는 감옥에 있을 때였을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가끔 우리를 쉬게 하려고 고난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그처럼 사도 바울은 고난을 결코 비극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고난의 길로 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골 1:24).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서라면 어떤 시련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성도에게는 그런 사명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2. 겸손 의식

보통 개선장군들은 말을 타고 입성합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 말 대신 나귀를 타셨을까요? 말은 힘과 전쟁을 상징하지만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귀 중에서도 새끼 나귀를 타셨을까요? 허세와 허영을 버리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겸손해서 나귀 새끼를 타셨고, 그래서 겸손한 사람을 쓰십니다. 우리가 겸손하면 연약한 존재도 주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지만 교만하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주님이 쓰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처럼 나귀가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사람들이 환호하며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맞아주었습니다. 그때 나귀도 함께 영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귀가 주님을 내려드린 후에는 아무도 나귀를 거들떠보지 않고 한적한 마구간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주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성취해도 그 모든 영광을 철저히 주님께 돌리는 겸손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겸손한 사람일까요? 물질이 있는 사람은 다 교만하고, 물질이 없는 사람은 다 겸손한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물질이 있는 사람 중에서도 겸손한 사람이 많고, 물질이 없는 사람 중에서도 교만한 사람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성공한 사람은 다 교만한 사람이고, 실패한 사람은 다 겸손한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공한 사람 중에서도 겸손한 사람이 많고, 실패한 사람 중에서도 교만한 사람이 많습니다.

외적인 면으로는 겸손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겸손은 주님과의 거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과 가까운 사람은 겸손하고, 주님과 먼 사람은 교만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실한 성도에게는 반드시 겸손함이 있습니다.

특별히 겸손함을 보여주는 한 가지 뚜렷한 열매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안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첫 번째 복을 말씀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겸손한 심령을 가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마음의 천국이 펼쳐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나보다 누가 앞서도 시기 질투하지 않습니다. 나도 최선을 다하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난이 있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때는 곧 끝나고 축복의 때가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누가 나를 따돌려도 속이 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도할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아이들 노는 것을 보면 어쩌다 누군가 소외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우리 주일학교 학생들을 볼 때에도 어떤 때에는 예원이가 소외되고, 어떤 때는 하늘이가 소외되고, 어떤 때는 예람이가 소외되고, 어떤 때는 한나가 소외됩니다. 한 아이만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소외되면 그 아이를 왕따라고 합니다. 그 경우에는 어른이 개입해서 왕따 시키는 주동자를 야단을 칩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 번갈아가며 소외 되는 경우에 현명한 부모는 모른 척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소외감이 아이들의 공동체 생활의 적응과 정신적인 성숙을 위해서 오히려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도 당해봐야 남을 생각하는 법, 나를 배려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처럼 소외당하는 상황도 인생 성숙을 위해 필요하지만 그래도 그 소외당하는 순간만은 아이들이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의 아이들도 그런 경우를 당할 때 가끔 속상한 모습을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에게 말해줍니다. “얘들아! 때로는 혼자 있는 것이 좋을 때가 많아! 그때 예수님과 더욱 가까이 갈 수 있잖아! 앞으로 너는 누군가 홀로 된 친구가 있으면 꼭 그 친구 손을 잡아주려고 해라.” 그러면 아이들이 금방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살면서 고통이 있어도 겸손한 사람은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때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세미한 기회로 활용합니다. “주님! 이 고통을 통해 제가 많이 배우게 하소서!” 그러면 하나님은 주시는 신비한 평안이 우리 안에 깃들게 됩니다. 그처럼 우리가 겸손함을 잃지 않을 때 하나님은 곧 크게 하실 것이고, 크게 된 후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을 때 주님은 그 사람을 끝까지 크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3. 청지기 의식

본문에서 나귀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는 단 한 마디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제자들이 나귀를 가지고 가도록 허락했습니다. 당시 나귀는 어린 나귀라도 아주 돈을 많이 주어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나귀 주인이 어떻게 자기의 비싼 나귀를 내어드릴 수 있었습니까? 내가 가진 것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는 청지기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물질, 지위, 명예, 권력, 지식 등 모든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내어드릴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소중한 것을 드릴 줄 아는 사람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 사명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결국 보면 헌신의 차이가 나중에는 열매의 차이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내놓을 때 내가 낸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돌려드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처럼 내 물질, 시간, 자녀, 소유를 내 것인 줄 알고 내 마음대로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고통과 함께 그것들을 빼앗아 가시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 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기를 힘쓰면 하나님은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벳바게 건너편 마을로 간 두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나귀를 드린 주인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큰 헌신을 했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했습니다.

우리 요삼일육선교회의 뿌리가 되는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 선교 연맹(CMA)의 매년 선교 예산은 3천만 불(300억) 정도 됩니다. 그 재정으로 전 세계에 나가 있는 1200명의 선교사를 돕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 선교사 가정도 8가정(15명)이 있습니다. 매년 그 많은 예산을 확보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매년 그 예산이 기도 중에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채워지는 이유는 이름 없는 헌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요삼일육선교회도 지금은 한국인 선교사 가정들만 돕고 있지만 앞으로는 돕는 범위를 조금씩 확대하고, 선교사의 생활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선교사의 사역을 위해서도 보다 많이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매달 구별해서 소리 나지 않게 보태는 선교헌금이 선교사역에 얼마나 큰 보탬이 되는지 모릅니다.

겉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선교사역을 위해 정기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데에는 엄청난 기도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매달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보내지 않으면 선교사들은 생활할 수 없습니다. 후원을 하다가 끊어버리면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가서 졸지에 거지처럼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비는 최우선으로 예산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예산에 비해 수입은 항상 적습니다. 그래도 나중에 보면 예산대로 다 채워지는 이유는 가끔 혜성처럼 등장하는 헌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선교사역에서 본문의 나귀 주인과 같은 이름 없는 헌신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이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해보십시오. 그렇게 조용히 헌신해도 나중에 보면 그 헌신이 저절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처럼 헌신이 숨겨져 있다가 저절로 알려지면 더욱 큰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자신이 헌신을 드러내면 그 감동이 반감됩니다.

사실 헌신의 영적 가치와 축복의 열매는 군중의 시선 집중과 반비례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일관적으로 은밀한 선행을 장려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의 칭찬이 적을수록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은 커질 것입니다. 사실 숨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그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됩니다. 교회에서도 큰일을 하면서도 조용히 숨어 있는 사람이 많아질 때 그 교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4. 십자가 의식

제자들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왔을 때 주님은 본문 5절 말씀대로 어미 나귀를 타지 않고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주님의 신장은 약 190센티 정도 된다는 말이 있는데 새끼 나귀는 장신의 주님을 태우고 갈 때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새끼 나귀는 묵묵히 예루살렘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때로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 무거운 짐을 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짐을 축복의 십자가로 알고 기쁘게 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누구보다 필요한 사람은 십자가를 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진짜 제자는 몇 단계 성경공부를 하면서 제자훈련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군중들은 기들의 겉옷을 벗고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을 맞이할 때 그런 식으로 환영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환영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에 관한 소식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능력을 통해 정치적인 독립을 이루고 축복 받겠다는 기대 심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체포되자 그들의 기대는 증오로 변해 “호산나!”하는 소리가 5일도 되지 않아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로 변했습니다. 심지어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해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모습이 기복주의자들의 모습입니다. 기복주의자들은 축복이 있다고 하면 예수님을 환영하다가 축복이 없으면 예수님을 멀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군중을 신뢰하지도 말고 군중이 되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군중들과 함께 일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소수의 제자를 통해서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군중과 제자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군중은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하고 제자는 십자가를 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져야 할 때 기쁘게 지는 소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도 결코 없을 것입니다(No Cross, No Crown).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당시 군중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조롱했지만 주님은 그때는 그냥 십자가에 달려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기적은 진정한 믿음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기적이 사라지는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멀리하는 것은 축복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이 있어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 결국 승리하는 길입니다.

< 십자가를 기쁘게 지십시오 >

결론적으로 누가 진짜 성도입니까?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짜 친구이듯이 고난 중에 십자가를 함께 지는 사람이 진짜 성도입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복음을 전파하다가 사도들이 붙잡혀 매를 맞고 공회를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사도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능욕 받는 일은 마땅한 일이라고 여기고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습니다(행 5:41).

사도들은 죽음의 매를 맞으면서 예수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가까워졌습니다. 그 순간부터 믿음은 단순한 고백과 관념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운명을 나누는 체험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거니까 외적으로는 고통이 찾아왔지만 내적으로는 기쁨과 평안과 자유가 찾아왔습니다. 그처럼 주님과의 고통의 연대를 통해 영적 자유를 맛본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작은 어려움 앞에서 쩔쩔매지 않을 것입니다.

옛말에 대사일번 사후소생(大死一番 事後蘇生)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번 크게 죽고 나면 다음에는 사는 일만 남는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쁘게 십자가를 지고 나면 곧 하나님의 큰 축복과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결혼 초부터 지키는 철칙이 있습니다. 가정 밖에서 생기는 힘든 일을 가정 안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밖에서 힘들다고 집에서 짜증을 내면 무엇이 돌아옵니까? 그때 좋은 것이 돌아오는 경우는 한번도 없습니다. “목회가 이렇게 힘들다!”는 내색을 하면 “살림도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나는 목회와 살림 두 가지를 다 해야 된다”는 소리만 나올 것입니다. 짜증이 나가면 영락없이 짜증이 돌아옵니다.

그런 원리를 이해하니까 아무리 밖에서 힘든 일을 당해도 집에서는 항상 평상시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다가 평소의 대화나 다른 어떤 경로를 통해서 제가 힘든 일이 있어도 아무 내색도 하지 않은 사실을 아내가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무엇이 있습니까? 아내의 따뜻한 위로와 더불어서 대개 안마가 뒤따라옵니다. 그 안마를 받으면 몸도 시원해지지만 무엇보다 주님이 참고 인내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의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그처럼 우리가 조용히 참고 인내하면서 고난의 십자가 앞에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행복한 모습을 보이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손길로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놀라운 축복을 우리 앞에 예비해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일은 힘든 일이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 알고 기쁘게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가장 축복된 자리로 올려주실 것입니다. 그런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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