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남자 예수
막 11:15-19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
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아무나 물
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아
니하시니.
오늘은 남성상에 대해서 말씀을
남성상 하면 언뜻 생각나는 것은 씩씩하고 우람하고 용기 있고 박력 있는 것을 생각하게
옛날부터 남자는 그래야 한다고 말해왔다.
쩨쩨하고 시시하면 남자도 아니다. 그런 한국의 남성상에 문제가 있다.
한국의 남성상 하면 연상되는 것이 폭탄주, 호령, 명령, 권위적인 것이 먼저 생각된다.
이것은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남성상이다.
진정한 남성상은 그런 만용의 자세가 아니고 의지 있는 모습이다.
이제 한국의 남성상도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은 진정한 남성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왜 갑자기 남성상을 들고 나오느냐 하고 생각할 분이 있을 것
그것은 예수님의 3년 공생애 모습을 생각하다 보니까 예수님이야 말로 남자 중의 남자다 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생애를 자세히 연구하다 보니까 예수님이야 말로 남자 중의 남자였다.
적어도 남자가 되려면 예수님이 가지셨던 몇 가지 자질이 있어야 남자라고 생각된다.
이 요소를 여러분 자신과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일이 끝나면 밤늦게까지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년 공생애가 얼마나 바빴나. 매일같이 찾아오는 병자들과 씨름을 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찾아온 사람 한사람도 그냥 돌려보낸 적이 없다.
피곤하고 지쳐서 좀 쉬려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면 사람들이 그곳까지 모여들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을 한사람도 그냥 돌려보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일이 끝나면 하나님과 영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산으로 가서 기도했다.
기도하면서 자신을 살피고 사명을 다시 세우고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다음날 또 사람들을 고치고 가르치셨다. 그러니 얼마나 분주한 삶을 살았습니까.
남자는 바빠야 한다. 정신없이 바쁘게 일해야 한다.
남자는 집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 한가해도 안 된다.
자기 일에 몰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바쁘게 일해도 동시에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일이다.
이것이 참 중요하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이 일의 노예가 된다.
그러면 자기수정이 안된다. 오늘 일의 노예 가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가정도, 몸도, 건강도 잃어버린 사람이 많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분주하고 바쁘게 살았으면서도 저녁에는 꼭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이것이 남자다. 바쁘기 때문에 묵상의 시간을 갖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배운다.
두 번째는 “예수님은 끊임없이 유혹을 받았지만 그렇지만 결코 시험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유혹이 많았겠나. 우선 그도 남자이니 이성적인 유혹이 있었을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쓴 “최후의 유혹“이라는 책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참 집요하게 유혹했다고 했다. 이성적인 유혹이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계급 자들과 타협하는 유혹도 있었을 것이다.
유대교로부터 얼마나 집요하게 유혹해 왔겠나.
또 동족에 대한 유혹도 있었다.
당시 동족은 로마로부터 지독하게 압제를 받고 미래 희망도 잃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 나타난 예수님에게 동족은 모두가 기대를 걸고 희망을 걸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백성들이 얼마나 뜨겁게 환호를 했는가.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그때 예수님이 사인만 보냈으면 금방 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면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로부터 민족을 구원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남자인데 유다처럼 야망의 유혹이 컷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수많은 유혹들을 모두 끝까지 이겨냈다.
그리고 고난 받아야 할 때 주저하지 않고 고난의 자리로 갔다.
죽어야 할 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죽음의 자리로 갔다.
조금도 주저하거나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게 끝까지 유혹을 이겨냈다.
남자들에게는 이것이 마음대로 잘 안된다.
그래서 때로 남자들이 앉을 때, 일어설 때, 떠날 때의 기회를 놓치고 남자로서 스타일을 구길 때가 많다. 남자들은 야망에 대한 기대 때문에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나지를 못한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고 뭉개고 있다가 다 잃어버린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 이것이 남자들의 고집이고 착각이다.
모두 유혹이다. 그것을 떨쳐버리지 못해서 스타일을 구기는 것이다.
예수님에게도 숫한 유혹이 있었지만 끝까지 초연했다.
그래서 성공했다. 누가 뭐래도 예수님은 남자 중의 남자다.
유혹 앞에서 단호하게 자리를 들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남자다운 남자가 할 일이다.
세 번째는 “때로 눈물을 흘렸지만 좌절하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옛날의 남성상은 용기도 있고 울지도 않아야 했다.
그래서 남자가 눈물을 보이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은 옛날의 남성상이다. 오늘의 남성상은 지극히 감성적이어야 한다.
연속극을 보고 울 수 있는 남자,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가 주는 남자
이것이 오늘의 남성상이다. 이제는 남자도 눈물을 흘릴 때는 흘릴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런 점에서 남자 중의 남자다.
예수님은 아무 때나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고 아주 결정적일 때 눈물을 흘렸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렸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하나는 인성 때문에 흘린 눈물이고
또 하나는 민족의 앞날을 염려하면서 흘린 눈물이다.
남자는 때로 인정의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남자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은 남자도 아니다.
여자가 조국의 앞날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면 어울리지 않는다.
이것은 여자를 무시해서가 아니고 느낌이 그렇다.
남자는 자주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지만
그렇지만 정말 인정에 넘치는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하고
내 조국의 고난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사나이가 흘릴 수 있는 눈물이다. 그래서 나는 신학자 본훼퍼를 좋아한다.
독일이 히틀러에 의해서 망가져갈 때 미국에서 평안히 공부하던 본훼퍼는 모든 사람의 만류를 뿌리치고 단신 귀국한다. 이 히틀러를 죽여야만 내 조국 독일이 안정된다고 사지로 자진해서 들어간다. 이것이 남자다.
예수님은 조국의 앞날이 불투명하고 백성들은 무지하고 정치인들은 타락했고 로마압제는 더해갔습니다. 그때 뜻있는 백성들은 모두 탄식했다.
예수님은 며칠 후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그때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 그래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립니다.
성경은 점잖게 표현했지만 그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통곡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남자 중의 남자인 것이다.
적어도 이것이 남자가 가지고 있어야 할 살아있는 가슴이다.
오늘 이런 가슴을 가진 남자들이 얼마나 있는가.
모두 자기사업에 매여서 눈에 다른 것이 보이질 않는다.
모두 자신의 입신에 빠져서 다른 일에는 관심도 없다.
그러고도 권위적이고. 호령하기를 좋아하고, 폭탄주나 마시고, 빳빳한 돈 넣고 다니며 거드름 떨며 헤프게 팁이나 주는 것이 남자다운 남자로 오해한다면 너무나 큰 오산이다.
진정한 남성상은 이런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의 조국, 이 민족에 대해서 뜨거운 가슴을 지닌 사람, 이런 사람이 남자 중의 남자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네 번째는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가 있었지만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자기를 버리는 모습”이다.
예수님에게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권위가 있었다.
풍랑을 잔잔케 하는 권위도 있었다. 귀신을 쫓아내는 권위도 있었다.
그 권위는 신적인 권위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셨다.
얼마나 만큼 낮추셨는가 하면 세리 삭개오를 찾아가셨다.
삭개오가 죄인 취급받아 친구가 없을 때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 친구가 되어주셨다.
그는 위대한 스승이었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발을 씻기신 것이다.
멋있는 모습 아닌가.
예수님의 가슴에는 눈물도 있었고, 용기도 있었고, 민족애도 있었고, 겸손함도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남자 중의 남자다.
남자는 조금 자리가 높아지면 거드름을 떨고 목에 힘이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하려고 해서가 아니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그래서 성공했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목에 힘이 들어가 있다.
그것이 남자의 속성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목소리가 크다.
아무 일도 아닌데 큰소리를 친다.
큰소리치는 이유는 나는 약한 사람이다 그런 뜻이 들어 있다.
호랑이가 싸움할 때 실력 없는 호랑이일수록 싸움 전에 우렁차게 소리를 낸다고 한다.
정말 실력 있는 호랑이는 말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싸울 때 큰소리치며 대드는 사람은 진다.
오늘 세상에서 남자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오늘 세상에서는 객기를 부리고 만용을 부리는 것을 남자답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이 그것을 지적했다.
자신이 한참 방탕했을 때 용기 있게 타락한 행동을 하면 부하들이 보스의 용감하고 남자다운 모습에 박수를 보냈다고 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럴 때 마다 자신이 남자답고 영웅같이 느껴졌다고 회고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남성상이다. 그러니 여기 예수님의 모습과 비교하면 얼마나 동떨어진 모습인가.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신다. 제자의 발을 씻기셨다. 죄인의 친구가 되셨다.
이것이 얼마나 큰 용기입니까. 이것이 남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남자다운 겸손함과 진정한 용기를 보게 된다.
다섯 번째는 “불의에 대해서 분노하시는 모습”이다.
이것이 남자의 모습이다. 남자는 때로 분노하기도 하고 의분을 일으키기도 해야 한다.
혈기가 아니고 사적인 분이 아니고 공적인 분이다.
안중근의사, 일본에 대해서 분노가 가슴을 채웠을 때 그는 단신 고난의 길을 가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
윤봉길의사, 일본에 대해서 분노가 가슴을 채울 때 그도 단신 고난의 길을 걷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
이준 열사, 그도 일본에 의해서 분노가 채워져 올라올 때 조국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배를 가르고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것이 남자가 가져야 할 용기다.
오늘 이 분노에 대해서 용기 있게 나서는 사람이 어디 있나.
모두 타협하고, 적당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낙을 누리려고만 한다.
예수님이 성전에 가시니 장사꾼들이 가득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어떻게 성전마당에 장사꾼들이 좌판을 내놓고 장사를 하고 짐승을 팔고 사는가.
그것은 제사장들이 뇌물을 받고 허락해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 모습을 볼 때 눈에서 불이 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채찍을 들고 장사꾼들을 몰아내고 좌판을 뒤집어엎고 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호령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사장이 파송한 사람들이 꼼짝도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이것은 혈기가 아니다. 그것은 공적인 분노, 말 그대로 공분이다.
그 모습을 전해들은 제사장들이 그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하고 의논했다고 했다.
오늘 읽은 본문 18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고 했다.
예수는 남자 중의 남자다. 호령해야 할 때 호령하고, 눈물 흘려야 할 때 눈물 흘리고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해야 하고,
가장 낮은 소외계급의 사람이 당하는 아픔을 이해하시고 친구 되어 주고
하루 종일 일하고서도 저녁이면 영적 충전을 위해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고
결정적인 유혹이 왔을 때는 무심하게 넘겨버리고 포기할 줄 아는 용기
이것이 진정한 남자가 가지는 조건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남자 중의 남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남성성의 요소다. 오늘 사람들이 말하는 남자답다는 것이 얼마나 유치한 것인가.
이 사순절에 이런 우리 주님의 모습을 묵상했으면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생각하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생각했으면 한다.
그래서 우리의 가슴에 이 예수님이 가지셨던 고민을 가지고
예수님이 가지셨던 용기를 가지고
예수님이 표현하셨던 겸손함 가질 수 있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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