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Άλλα σε προετοιμασία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 시91:1~16, 막9:23

by 【고동엽】 2021. 12. 9.

본문 시편 91편은,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그의 자녀들을 지키시고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시고 만족케 하시겠다는 약속이며

그 약속을 가진 자들의 신앙고백이며 찬송입니다.

 

우리 모든 예수를 믿는 기독교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바로 이 하나님께서 이 일을

우리의 일생동안에 우리와 함께 그 약속을 이루시는 줄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확실한 증거는,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를 통한 구원과 십자가와 부활로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 신자 된 인생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진정 나를 지키시고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시고 만족케 하시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실감하지 못합니다. ←문제 재기

 

안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순진하게 믿는 사람들도 드뭅니다.

그거 믿고 살다간 하루아침에 쪽박 차기 좋다는 것을.. 현실 속에서 압니다.

 

신자들을 만나면 괴이한 표정과 철학과 심리상태를 보이곤 합니다.

명분을 논하고 우리의 신앙에 내용을 논할 때는

꼭 그럴 수 없이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 세계 속에서는 안 믿는 사람보다 훨씬 더 치열한 ‘현실적 제자’로 사는 것을 봅니다.

 

갑자기 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요? 저도 그래봤으니깐 잘 아는 것이지요.

 

이런 모든 일들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새해를 맞으면 누구나 다시 한 번 신년에는 좀 더 멋진 인생을 살자,

그리고 예수를 믿는 성도로서는 당연히 믿음생활을 제대로 해보자 라는 각오를

해보기를 마련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대부분의 경우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현실사이에 그 간격을 도무지 메꿀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 믿는 것은 아니지만, 믿고만 살수는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런 약속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기쁜 질문을 사실은 하도록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도대체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

-(시91편 같은 말씀들이) 말로만 그렇다는 말인가? 정말 그리하신다는 말인가?

-정말 그리하신다면 도대체 내 인생은 왜 영화롭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은가?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조건을 제시해야 유효한 것인가?

이런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아는, 기도 많이 하시는 목사님이, 한번은 이런 경험을 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고

그 사역에 있어서나, 목사로서의 인생이 너무 고난해서 참고 참다가

드디어 속을 확 쏟은 날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더 이상은 저도 못 기다리겠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하시지도 않고, 인생은 어렵기만 하고, 사역은 꼬이고,

도대체 하나님이 제 기도를 듣기나 하신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정말로 그 분께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아무개야 내가 너의 기도를 늘 들었느니라.

네가 그렇게 간절히 소원하고 기도를 하니,

오늘은 내가 네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마.’

 

목사님이 놀라서 물었답니다. ‘정말이요? 다요?’

‘그래 다다. 그러니 이제 네가 원하는 기도들을 내 앞에서 다 해 보아라.’

 

그러자 그 목사님은, 마음을 가다듬고, 여러분 흥분되지 않습니까?

오늘 다 들어주기로 했으니깐 물 샐틈 없이 나의 소원을 나열해야 할 것 아닙니까?

정신을 가다듬고 시작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 우선 믿음을 주시옵소서, 성령 충만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제 마음에 평안을 주시옵소서.

모든 만나는 사람들 앞에 신자답게 하여 주시옵소서.’

 

‘좋다 더 있느냐?’

‘그리고 건강도 주시옵소서.

남한테 꾸러 다녀서 치사해지지 않도록 재정적인 것도 채워 주시옵소서.’

 

‘좋다 더 있느냐?’

‘저희 애들이 믿음으로 크고 남부럽지 않게 잘 자라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좋다 더 있느냐?’

‘하나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좋은 사회 만들고 좋은 나라 만들어서

우리나라가 정말 밝고 깨끗한 나라가 되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게 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좋다, 그거야 내가 못 들어 주겠느냐?’

계속해서 목사님은, 평화로운 남북통일과 세계평화와 세계경제안정까지 다

기도로 하나님께 요구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 들어주시겠다고..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그만하면 됐습니다. 하나님, 정말 다 들어주시는 것입니까?’

‘물론이다 오늘 다 들어주마. 그런데 그 대신에 너는 다시는 나를 볼 수 없다.’

 

‘아니 하나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기도에, 나를 본다(만난다)는 것은 없지 않았는가?

네가 기도한 것을 모두 포기하고 나를 선택할래?

아니면 나를 버리고, 네가 기도한 모든 응답을 받을래?

 

그 목사님은, 여태까지 고민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위 대화는 우리를 매우 놀라게 합니다.

우리의 응답이 왜 응답이 안 되는지, 우리가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거기에 대하여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골로새서 3장을 보실까요.

골로새서 3장 5절에 이런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탐심이 가장 나쁜 죄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 이니까요.

 

우리가 어떤 다른 죄 도덕적인 죄 다른 어떤 죄보다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에서 최고의 죄입니다.

 

탐심이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탐심은 무엇이죠?

끝없는 욕심?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탐심이 우상 숭배로 지목되는 이유는

탐심이란 우리의 필요와 우리가 우리의 가치와 우리의 목적을

우리가 (내가) 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요구하느냐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라는 존재와 인생과 운명에 대하여 결정권자인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기도의 형태로 나타날지라도, 하나님은 수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지 않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주인이 될 때

그것을 우상 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예를 든 그 모든 기도들은, 내용상 옳습니다.

내용상 옳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바로 구하는 그것 조건들과 환경들을 구하고, 필요를 구하여,

우리가 좋은 세상을 좋은 인생을 자신의 판단 속에서, 자신의 이해 속에서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탐심입니다. 우상 숭배입니다.

 

힘이 모자라지.. 이해와 판단이 잘못된 것이 아닌 것이지요.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을 믿는다’ 라는 말은, 하나님께 이 주권을 넘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앞에 그의 통치와 보호를 요청하며, 그것을 누리는 자가 되는 것을

기도라고 하고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 자신을 목적으로 하여 기도하고

하나님 자신으로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시편 91편에 나타난바와 같이, 하나님은 왜 느닷없이 아무 조건 없이

누구시길래, 그건 다른 뭐길래,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시고 만족케 하신다는 것일까요 이런 어떤 공약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빌 공자 空約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시고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원하기를 바라신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무속신앙이나 범신론과 다른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긴다 그런 개념보다 더 깊이

하나님 앞에서 받는 것들은 보상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말 같이, 정성을 바쳐서 얻는 보상을 누리는 것도 아니며

도를 깨우쳐 어떤 경지에 가면, 그런 도와 종교와 윤리와 이상의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가지는 뜻은,

예수라는 인성을 입으신 이름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찾아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와 당신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당신의 자녀가 되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죽으실 수도 있다 라고 한 십자가 사건을 핵심으로 하는

그래서 기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한문식 표현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말이 가지는 것은

하나님은 구약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시고 그랬던 것 같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지라.’

 

그런 약속 하신대로 목적하시고 이루고 계시고

예수 안에서 이루셨다는 것을 종합하여

한 단어로 묘사하자면, ‘예수 신자들은 예수를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어떤 것을 보상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 신앙에 목적이요, 내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가보시면 9절 말씀에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 안에 거하여, 예수께서 가졌던 기쁨을 우리로 누리게 하는 것,

그 일을 위하여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어떻게 예수 안에 거하느냐, 예수께서 아버지 계명을 지키는 것 같이

우리도 그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여기가 자주 틀리는 장소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어떤 법을 지키듯이 어떤 양심을 지키듯이

지키는 것으로 보상을 받는 조건으로 여기 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명명자가 아버지시다 라는 그런 말입니다.

 

아버지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주권자가 아버지고 우리는 그 주권자의 그늘아래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그의 통치와 보호와 약속과 목적 속에 있음으로써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보상을 요구하지 마시고, 보상을 요구함으로서,

나의 행복을 위하여 운명을 위하여 조건들을 만족시키려 하려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의 그늘에 거하십시오.

 

우리가 자식을 길러보면, 바로 이문제가 생기지요.

자녀들과 부모간의 싸움은 늘 이것입니다.

 

부모가 알고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길, 복 받는 길과

철없을 때 자녀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길은 서로 다릅니다.

 

부모는 자식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이 말을 자주 반복합니다.

너를 위해서라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 죽을 수도 있는 엄마가

왜 이거 하나 사달라는 걸 안 사줘? 늘 여기서 부딪히는 거지요.

 

그 사달라는 것이 곤란한 거 아닙니까? 뭘 사달라는데요? 오토바이입니다.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되죠? 잘 넘어지거든요.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꼭 부러집니다.

부러지면요 평생을 고생을 합니다.

 

자식이 이 사소한 문제로 뭘 의심하느냐면

‘엄마가 내 친엄마가 맞아?’ 이렇게 되지요

 

내가 너를 위하여 이렇게 했는데도 내 사랑을 모르겠다는 말이냐?

거기서 분노하죠.

너 같은 자식은 본적이 없다. 딴 데서도 다 보셨어요?

자식들의 분노는 이렇게 표현됩니다.

 

자식들의 분노를 볼까요?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어?’

그것이 우리 기도지요.

 

아까 예를 든 목사님이 하나님을 만나게 된 최후의 발언이었습니다.

하나님 내 기도들어주신 것이 뭐있습니까? 하나님이 할 수 없이 오셨죠.

 

‘그래 오늘은 결판을 내자. 내가 다 들어주마.’

우리는 늘 이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뭐지요? 오토바이죠?

왜 그걸 사달라는 것이죠? 철없는 사람처럼 왜요?

그 당시에는, 그게 최고이거든요. 그게 행복이에요. 그게 만족이고 그게 영광이고

그게 자랑이고 그게 의미고 보람이고 인생입니다. 오토바이 말입니다.

 

인생은 그렇게 탄탄치 않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값싼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부모가 되어도 자식이 해달라는 것을 다 해줄 수 없습니다.

부모는 당연히 내가 너를 지키고 너를 높이고 너를 영화롭게 하고

너를 만족케 하는 네 부모란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은 믿지 않지요. 그건 다 겪었죠.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면 똑같이 굽니다.

 

이 말씀을 두고 읽으면서 하나님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오토바이 내 놓으십시오.’

오늘 설교의 부제목은 ‘오토바이’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차원에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를 가족으로 요구하십니다.

 

가족으로 남남의 조건에서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 옳은 사람이 되는 거,

유능한 사람이 되는 거, 위대한 사람이 뒤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요구하십니다. 우리를 기뻐하시며 우리를 위하십니다.

우리의 사소함 우리의 평범함 그 속에 있는 진심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명해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유명해지려고 합니다.

세상 앞에 확인받으려고 합니다.

스스로가 정한 접대위에서 자신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이런 약속들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큰 약속인지 귀에 들어오지 않지요.

오늘 성경에 하나님께 그들의 자녀에게 준 약속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 3개만

기억하기로 합시다.

 

①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입니다.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 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보다 더 큰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②혹시 모르니깐 자책감이나 열등감에 시달리는 분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12장 말씀을 예로 들죠. 사도바울은 주를 위한 헌신과 열정이 넘치는데

그 몸에 어떤 병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주를 위한 헌신과 또 기독교를 증거하는 일에 너무나 큰 장애물이 되는 것 같아

사단의 가시를 빼어줄 것을 요구 합니다.

‘내가 주께 세 번 이일로 간구하였더니 주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지니라.

그러므로 내가 네 모든 악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하리니

이는 네가 약할 때 곧 강함이니라.’

 

뭐가 불만이십니까? 여러분 잘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위대해져서 하나님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거절하고 스스로 독립하여

자신을 증명하여 부모에게 돌아와 자랑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가져야할 사랑은 하나도 경험하지 못하고

세상이 알아주는 어떤 명예들을 가져와 부모께 자랑하는 짓은 몹쓸 짓입니다.

그것은 성공도 아니며 그것은 최소한의 인간된 윤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③그래도 그것으로 다 답이 되지 않습니까 더한 경우의 약속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것을 유진 피터슨이 풀어쓴 메시지란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잘못되었을 때도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만들기 위하여 함께 하신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잘못할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곤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때도 그곳에서도 그 족과 환경 그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선한 결과를 이루기 위하여

함께 하시고 능력을 발휘하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서두의 예를 든 기도와 같이

거룩하고 정의롭고 옳고 바르고 겸손하고 충성되고 능력 있고

이런 것들보다 우선하는 것을 위하여

내가 필요한 조건들을 간구하고, 응답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만족과 내가 만든 행복을 위한 조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신 앞에 엎드려 그의 통치를 누릴 줄 아는 자리로 가야만

기독교 신앙은 드디어 힘을 발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인생이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닙니다.

인생이란 신자에게 있어서 탐험해야할 신비입니다. 여행을 가는 것 같습니다.

 

그 여행을 나 혼자 가는 것이라면, 두렵고 떨림으로 낯선 곳에 가야겠지만

하나님과 함께 가는 여행이기에

기대를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이미 모든 필요한 것이 함께하는 하나님 손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넉넉한 마음으로 걸어갈 수 있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4절에는 예수님께서 어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부탁을 받아

그 아들을 고쳐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아버지가 예수님께 이렇게 요청을 합니다.

‘주여 무슨 일을 할 수 있거든 우리 아이를 고쳐주옵소서!’

 

주께서 답하시기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9:23

이 답을 외우고 있는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가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오늘의 설교를 듣고 옳으신 말씀인데 믿어지지가 않아요. 되지가 않아요.

현실이 그렇거든요.

 

그 부분을 이 사건에서 성경이 증언을 합니다.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롬8:28, 고후12장 등, 위에서 예로 든 말씀이, 현실에서 믿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렇게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 무슨 이 무슨 앞뒤가 안 맞는 이런 말이 있습니까?

다른 어떤 종교에도 없는 말이지요.

 

믿든가 말든가, 동으로 가든가 서로 가든가,

잘라서 결과를 보상하는 것이 다른 모든 종교지요.

 

그러나 기독교만은 다릅니다. 믿습니다.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믿는데 충분치 않습니다.

믿는 것으로 나를 온전히 주 앞에 항복시키지 못한 현실입니다.

 

믿고 싶습니다. 더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 이게 우리의 가능한 기도입니다.

 

자식이 그렇게 부모에게 ‘어머니 지금은 오토바이 때문에 공부가 안 돼요.

저 정신 차리게 3대만 때려주세요’ 이렇게 기도 해야죠!

 

새해를 맞을 때 마다 결심입니다.

올해만은 신자답게 살자 그러니 이 기도를 하십시오.

이 신비의 기도 이것이 허락되는 우리의 신학

‘주여 믿습니다. 나의 믿음을 도와주시옵소서!’

그런 복된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