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요약/ 홍해를 건넌 후, 즉 칭의 구원을 받은 후에
신자가, 교회 봉사나 전도에 헌신 보다는
성화를 통한 구원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우선순위이며,
칭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성화를 통한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고,
그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내 삶에 동행하시므로
오늘 현실에서, 주님의 주권적 역사로, 성도는 성화로 나아가게 되어있다는.. 주제의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2: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표현은 빌립보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자들이요, 하나님 백성이 된 자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죠.
성경에서 구원을 논할 때는, 언제나 칭의, 성화, 영화를
같은 ‘구원’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기 때문에
문맥을 따라서, 어떤 쪽을 강조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않으면, 오해의 소지가 있죠.
▶에베소서 4:24절에 가시면
‘구원을 이루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엡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 사람을 입으라’ 이 표현은 ‘새사람이 되라’,
아까 빌립보서식으로 하면 ‘구원을 이루라’는 다른 표현인데,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은
헌 사람이 새사람을 입으면 새사람이 된다라는 표현이 아니고,
‘너는 새사람이니까 새사람같이 굴어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엡4:24절은 무슨 얘기냐면,
17절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구원을 얻지 못한 죄인들이
죄악 속에서 사는가를 이야기하면서, 그것과 비교하여
믿는 자들에게 이런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엡4:20~24,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린 (세상 사람과) 다르다, 다른 사람같이,
제대로 내용에 있어서, 실력에 있어서, 반응과 실천에 있어서, 신자다워라’
하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은,
분명히 우리에게 신분을 확보해 주었고, 운명을 고정시켰습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 구원의 실패나 그 구원의 취소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는 신분과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회심, 거듭난 경우에만.. 99%..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은 단번에 십자가 안에서 다 이루어졌고, 완료된 과거입니다.
그러나 지금 성경에서 보시다시피 구원을 이루라하고, 새사람을 입으라하는 것은,
앞서 5강에서 요셉의 생애에서 통해서 확인했다시피 (현재는 6강)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성경은
‘완성을 향하여, 영광의 결과를 향하여 나아가라’고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라’고 했을 때, 생기는 오해는,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가, 받은 구원이 뭔가 ‘불충분’해서, 이루고 완성해 나가라는 뜻은 아니고,
다만 이미 받은 구원이..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 삶에 열매/증거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인 듯합니다.
◑베드로전서 1:6~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신약성경은 얼마나 많이, 이런 성화에 관한,
얻은 구원을 완성하는 과정과 내용에 관한 얘기가 많은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얻은 구원을 완성하는 과정=성화.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여기에 분명하게 나타나죠.
구원을 얻었는데도 시련으로 인하여 정금과 같이 단련되어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영원한 구원을 받게 된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걸 믿음의 결국, 곧 구원을 얻게 되니라 라고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들은 우리가 신약성경에서는,
즉 복음서, 사도행전, 로마서, 목회서신, 공동서신서 속에 가장 첫째가는 주제입니다.
즉,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 보낸 그 편지들의 내용은
하나같이 얻은바 구원, 믿은 바 믿음의 내용을 완성하라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말하자면 그 교인들에게 ‘전도하라’는 내용이 최우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대신에 이미 얻은 구원을, ‘완성하라’는 내용이 최우선입니다.
전도는 교회의 아주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건 예수 믿는 개인이나 교회전체가 져야하는 첫 번째 사명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하는 게 뭐냐 하면,
우리가 얻은바 구원을, 우리의 내용과 실력을 완성하는 게 먼저이고,
그리고 전도나 또는 봉사나 구제는
차제의 일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 설명을 위하여, 로마서로 가 보십시다.
◑로마서 5:9~10절,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의 죽으심으로 얻는 구원이 있고,
예수의 살으심으로 얻는 구원이 있다 그럽니다.
우리는 구원을 논할 때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 사역을 십자가로 자꾸 제한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야 말로, 그의 메시야 사역의 중심이죠.
근데 십자가로 한 게 뭐냐 하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낸 것입니다.
근데 지금 로마서 5:9~10절에 분명히 밝히는 것은
메시야 사역은 그의 죽으심에만 있지 않고, 살으심도 그의 사역이라는 거죠.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냈듯이,
그의 살으심으로, 그의 부활하셔서 하시는,
죽음으로 가지시는 대속사역만 메시야 사역이 아니고,
부활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어, 우리를 그 몸으로 불러,
우리와 당신을 묶어 하시는 사역이 있습니다. 이것도 메시야 사역입니다.
죽으심으로 얻은 구원은 뭐입니까? 신분과 운명입니다. 의화입니다.
살으심으로 얻는 구원은 뭐입니까? 구원을 완성하는 성화와 영화의 완성입니다.
수준의 완성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그는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사역은, 십자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교회론은 상당히 낙후되어 있습니다.
롬5:10절 말씀을, 우리가 한 번 더 확인하죠.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인하여, 우리가 죽음과 사망과 심판에서 벗어난 구원(칭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살으심으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생과 성화와 영화의 완성은
롬6장에 이렇게 더 분명하게 설명이 됩니다.
▶롬6:5~11절.
로마서 6장은, 이제 어떻게 롬5장의 설명들이 가능한가?
어떻게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것인가?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예수 안에서
어떻게 실패할 수 없이 그의 능력과 지혜로 이루셨는가를 증언합니다.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6장 시작이 뭐였냐 하면, 구원에 대한 이런 오해의 답으로 시작을 했죠.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로 시작했습니다.
즉, 구원을 죄와 사망에서 벗어난 것으로만 이해를 해서
우리에게 확보된 구원이 영원하고 완성되었다, 신분과 운명의 차원에서 말이죠.
그럼 우리가 할게 뭐있냐? 거기에 대한 답으로 시작을 했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죄와 사망에서 너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요,
예수님은 그것만 너희에게 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의와 진리로 하나님 안에서 살게 하시려고 부활하사
너희의 머리가 되시고, 너희와 예수님이 하나로 연합되어
이 부활 생명이 너희를 불러내었단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새 생명을 가진 자로,
신자로 이제부터 살아가야 된다.. 라는 얘기를 로마서 6장에서 합니다.
▶로마서 5장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과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들이
뭔가 더 훈련받아야 하고 더 커져야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환란은 인내를, 인내를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라는 설명에서
우리가 이미 봤습니다. 롬5:3~4
그게 어떻게 이뤄질 것인가 할 때,
그것을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에서 이전에 꺼내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너희가 알아서 너희의 신앙생활을 책임져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내신 바로 그 능력, 그 메시야 사역 그대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는 우리를 의와 진리의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서 묶고,
그의 부활과 그의 승리로 우리를 지금 인도하고 계시고, 이루시고야 말 것이다..
이게 복음인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죄와 사망에서 꺼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를 완성시켜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하고야 말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이루셨고(과거/칭의),
지금 이루고 계시고(현재/ 성화)
장차 이루고 마실거다(미래/ 영화)..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머리와 몸은 분리가 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주권적으로 구원을 이끌어 가신다는 설명입니다.
인간 편에서 설명할 땐, 약간 표현이 달라지겠죠.
이게 참 귀한 내용인데,
한국교회를 어떤 면에서 부정하고 비평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십자가로 인한 구원의 감격까지 온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구원 얻은 자의 예수 안에서의 부활, 생명으로의 연합,
예수 안에서 함께 인도하심을 받고, 승리할 수밖에 없는 신자의 현실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 부족해 보입니다.
◑이 부분에는 많은 오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구원을 얻었으니
남은 생애는 주를 위하여 봉사하자라는 식의 오해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구원을 얻은 다음에, 헌신과 봉사보다는,
구원의 완성을, 즉 성화를 먼저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봉사와 헌신은 귀한 것입니다만
마치 자기의 구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남은 일이 없는 것 같이 이해해서
남은 생애는 주를 위해서 봉사한다는 것이.. 또 전도한다는 것이..
구원을 다 이해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구원의 완성>을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까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나머지는 내가, 책임으로, 내 책임, 내 능력으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하는 것도
구원에 대한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완성’까지 주권적으로 이루어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반드시 ‘확실한 중생/칭의’이란 전제가 분명해야 합니다.
바로 이 일 때문에, 로마서 6장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예수께서 죽으실 때, 우리가 그와 연합하여 함께 죽었듯이
예수님의 부활에 우리가 연합하여 함께 부활해서
우리는 그때도 예수 안에 있었고, 십자가에서도 예수 안에 있었고,
부활하여 예수님께서 하늘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거기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요.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갈라디아서 2:19~20절이 있습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위 말씀은, 이런 의미는 아닙니다.
‘구원을 얻은 성도가, 자신의 감격과 헌신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사는 믿음의 생활’
이렇게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게 아니고, 지금 우리 로마서 6장에서 확인했다시피 이 말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같이 주와 연합되었듯이
지금도 연합되어 있다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사신 것이라’는 미완료입니다.
헬라어원문에, 미완료라는 것은, 진행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즉 완료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신 것이다. 계속 살고 계신 것이다.. 그 뜻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했듯이
지금 살아있는 내내 신자의 신앙 현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신 것이다.
왜요?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믿음, 우리 처음부터 계속 따져서 확인했듯이
우리의 의지와 신념, 노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유와 원인과 조건을 묻지 않으시고
결과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이라고 그랬죠?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나의 무슨 진심이나 헌신이나 결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예수 안에 묶여있어서,
나는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나 혼자가 아니다, 내가 있으면 여기 예수님이 있고,
예수님이 있는 곳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은혜를 강조하면, 우리 모두가 당황스럽습니다.
구원에서도 그렇듯이 신앙의 현실에서도 은혜를 강조하면,
우리 모두가 내 몫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방임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좀 더 실천적인 문제에서 다룰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신앙이 어느 곳에서나
우리의 결정이나, 우리의 선택이나, 우리의 의지 위에 서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언제까지나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먼저 작정하시고, 이루시고, 확정하신 일들입니다.
여긴 실패와 여기는 변괴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을 떠받치는 근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구약의 출애굽 사건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사건을 보시면, 그 애굽을 떠나야하는 이유는,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해할 때, 구원을 어디로부터 해방된 것에만 이해를 가지시면 안 됩니다.
자유를 논할 때 보통 그러는데,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유가 있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는 자유를 굉장히 소극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기아로부터의 자유, 무지로부터의 자유,
특별히 억압으로부터의 자유가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이 듭니다.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으면, 소극적/ 부정적인 자유를 얻으면
그 다음엔 뭘 할 건지, 남는 게 방임밖에 없습니다.
‘내 맘대로’ 라는 답밖에 못 얻습니다.
성경이 주장하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판단할 때도 가장 고급한 자유는
말하자면 진리와 의와 영광과 가치 있는 일을 위한 자유, 적극적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논하면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수불가결의 조건으로 애굽에서 나와야 합니다.
출애굽사건에는 이 구원에 관한 내용을 얼마나 잘 이해하기 좋게 되어 있습니다.
................................... 더 읽으실 분 .....................................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을 들어가는 데는 요단강이 없습니다.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서 광야길에 나와서
이제 그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열둘 정탐꾼을 보내는 데가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입니다.
가나안은 국토 모양이
사각으로 길지만, 밑이 약간 더 넓은 사다리꼴 모양의 국토입니다.
가데스 바네아는건,
한반도에 비유하면, 남해도(전남과 경남의 중간)쯤 위치하는 곳입니다.
거기서 가나안을 들어가는 데에는 요단강이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애굽과 가나안을 가르는 경계선을 홍해뿐입니다.
홍해를 건너면 가나안이고, 홍해를 못 건너면 애굽인 것입니다.
▶출애굽사건을 보시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올라갔던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고,
이스라엘백성이 입국을 거절해서 애굽에서 홍해를 건넌 성인들,
20세 이상의 계수된 자들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다 죽이고
그다음에 들어갈 때는 요단으로 들어가죠.
말하자면 신약적인 안목을 가지고 다시 출애굽사건을 돌아보면,
애굽에서 나왔으면, 당연히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죄에서 벗어났으면 당연히 신자요, 신자답게 살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들은 신자다운 삶을 사는 것을 거부했고,
그래서 구원을 얻었으되 신자의 승리를 맛보지 못하고 죽은 자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정처 없이 유량생활을 하다 생을 마친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 세대는 어떻게 해야죠?
요단강을 건너서 이 애굽과 가나안사이에 중간지대가 없다는 것을 그려보여 줍니다.
처음 홍해를 건넌 자들은 애굽으로 건너게 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할일이죠.
그러나 이 사건에는 분명히 애굽과 가나안만 있지 않고
애굽, 광야, 가나안이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는, 수준의 구원을 이해하는데 좋은 그림이 됩니다.
구원을 얻지만 가나안에 들어가는 데는 광야라는 중간과정이,
중간과정이라는 것은 구원에 무슨 과정이 있다,
신분에 과정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수준의 과정이다.
그때는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완벽한 상태의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 천국에 가기까지 광야 같은 세상을 산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도 다시 한 번 강조하냐면,
요단을 건너 들어간 자들, 그 2세대들이,
첫 세대가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통과해서 가나안을 갈 수밖에 없었지만,
2세대는 광야에서 바로 요단을 건넜으니까 지리적으로 그게 없었죠? 중간지대가.
그렇게 들어간 자들은 들어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나안이 묘사되지 않고,
원주민을 몰아내는 전쟁을 해야 되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그렇죠?
▶우리가 구원을 얻고 나면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평화,
우리에게 확보된 구원을 확인한 기쁨, 그 소망, 이런 자랑이 있지만,
동시에 뭐가 있냐하면, 그 원주민을 몰아내는 싸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구원 얻고 나서 맨 처음 걸리는 싸움이 밖에 있습니까? 안에 있습니까?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성품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된 옛 성품, 구습을 쫓는 옛 사람과 싸우는 일이 평생 있습니다.
평생. 천국은 멀리 있습니다.
우리가 당황하죠. 믿음만으로 다 해결하지 않고 구원을 얻은 기쁨이 있는데
옛 성품이 아주 완강한 저항을 하죠.
그래서 신자의 현실은, 사실은, 겉으로 드러난,
그러니까 우리가 열심을 내고 우리가 소원하는 내 모습과
실제로 내 속에서 갈등하고 싸우는 일과의 그 간격 때문에, 사실은 괴로워하는 시간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제일 크게 지금 한국 교회가 이해해야 할게 뭐냐면
이 수준의 실패가, 수준의 완성의 과정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끝없는 시행착오를 하게 돼 있거든요.
구원자체를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일부 구원자체를 의심하는 사람은,
그의 중생이 ‘결단주의/쉬운복음/값싼은혜/4영리식 영접’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확실히 거듭난 사람은, 이 설교가 맞습니다.
▶출애굽사건에서 얼마나 잘 보여지고 있냐하면, 홍해라는 것은 말하자면,
물이라는 것은 건널 수 없는 경계선을 말합니다. 죽어야만 건너는 것입니다.
죽어야만 건너는 거,
그러니까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건너는 것은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다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주인들 입장에서 보면 종들이 죽어 버린 것입니다.
죽으면 종이 없어지는 거지요. 죽었는데도 계속 부릴 순 없잖아요?
그리고 이쪽에서 보면, 홍해로부터 새 인류가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새 인류가, 모세를 대표로 하며, 그래서 우리가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모세와 함께 세례를 받고”라고 묘사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새 종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자면, 신자의 구원이라는 것이
신분과 수준의 분명한 다른, 차이가 있고, 이해가 있고,
그 완성을 위하여 신자 된 현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제 분명하게 이런 문제를 확인해야 됩니다.
▶성화라는 것이, 얼마큼 내 책임인가라고 하는 것이죠.
성화라는 것이 얼마나 내 책임인가라고 할 때,
이 성화가 예수 안에서 허락된 구원으로
즉, 은혜와 믿음위에서 성립이 된다는 것을 절대 놓쳐선 안 됩니다.
이것은 십자가가 그렇듯이, 그래서 우리 신분의 구원이 100% 은혜이듯이,
성화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으로 부름을 받아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이뤄가는
구원의 완성이기 때문에, 100% 은혜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왜 은혜이냐 하면, 우리의 의지가 이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심이, 이 일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아서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 관점에서 보는 설명입니다.
이 일을 여러분, 사실 현실에서 얼마든지 경험하십니다.
여러분이 신앙적인 기준을 세우시고, 거기에 만족을 달성하지 못하면
여러분 스스로가 참을 수 없는 영적인 갈등을 느끼십니다.
잊을 수 없게 하시고,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물리적인 개입도 해오십니다.
아프게도 하시고, 사업도 어렵게 만들어서 생각하게 하십니다. 깨우치십니다.
우리가 5강에서 요셉에서도 봤죠?
그 발이 차꼬에 상하고 쇠사슬이 그 혼을 칭칭 묶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고 하나님’ 하고 와서 엎드리고,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
그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 말씀이 우리를 달련하여 항복시키는 경지에 가고야 말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꼭 이해하고 넘어가야하는 부분이
이것이 ‘믿음 지상주의’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믿으면 다 된다’라는 것은, 믿음을 강조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완성에 대한 소원을 가지는 것은
얼마든지 칭찬해야하고 잘하는 것입니다만..
믿음이 일종의 신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신념(공식, 교조)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뭔지 아시겠습니까?
신념이 되면 ‘자신의 의지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소원을 가진다는 건
이런 열심을 가진 것은 다 하나님께서 내게 작정하시고 보여 주사 가지게 된 소원들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만 소원하게 된다는 것이 신앙의 내용입니다.
신앙의 내용이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열심을 내는 것이, 사랑을 하는 것이죠.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에 항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내 의지와 신념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보통 뭐라고 말하게 되냐 하면 공식화한다말입니다.
‘이렇게 해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해야 되는 표현입니다.
‘기도 많이 해’, ‘더 많이 성경 봐’, 이건 옳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하면 무조건 이것이 결과된다더라’ 하셔서는 안 됩니다.
후략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신자가, 교회 봉사나 전도에 헌신 보다는
성화를 통한 구원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우선순위이며,
칭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성화를 통한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고,
그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내 삶에 동행하시므로
오늘 현실에서, 주님의 주권적 역사로, 성도는 성화로 나아가게 되어있다는.. 주제의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2: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표현은 빌립보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자들이요, 하나님 백성이 된 자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죠.
성경에서 구원을 논할 때는, 언제나 칭의, 성화, 영화를
같은 ‘구원’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기 때문에
문맥을 따라서, 어떤 쪽을 강조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않으면, 오해의 소지가 있죠.
▶에베소서 4:24절에 가시면
‘구원을 이루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엡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 사람을 입으라’ 이 표현은 ‘새사람이 되라’,
아까 빌립보서식으로 하면 ‘구원을 이루라’는 다른 표현인데,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은
헌 사람이 새사람을 입으면 새사람이 된다라는 표현이 아니고,
‘너는 새사람이니까 새사람같이 굴어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엡4:24절은 무슨 얘기냐면,
17절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구원을 얻지 못한 죄인들이
죄악 속에서 사는가를 이야기하면서, 그것과 비교하여
믿는 자들에게 이런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엡4:20~24,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린 (세상 사람과) 다르다, 다른 사람같이,
제대로 내용에 있어서, 실력에 있어서, 반응과 실천에 있어서, 신자다워라’
하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은,
분명히 우리에게 신분을 확보해 주었고, 운명을 고정시켰습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 구원의 실패나 그 구원의 취소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는 신분과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회심, 거듭난 경우에만.. 99%..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은 단번에 십자가 안에서 다 이루어졌고, 완료된 과거입니다.
그러나 지금 성경에서 보시다시피 구원을 이루라하고, 새사람을 입으라하는 것은,
앞서 5강에서 요셉의 생애에서 통해서 확인했다시피 (현재는 6강)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성경은
‘완성을 향하여, 영광의 결과를 향하여 나아가라’고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라’고 했을 때, 생기는 오해는,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가, 받은 구원이 뭔가 ‘불충분’해서, 이루고 완성해 나가라는 뜻은 아니고,
다만 이미 받은 구원이..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 삶에 열매/증거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인 듯합니다.
◑베드로전서 1:6~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신약성경은 얼마나 많이, 이런 성화에 관한,
얻은 구원을 완성하는 과정과 내용에 관한 얘기가 많은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얻은 구원을 완성하는 과정=성화.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여기에 분명하게 나타나죠.
구원을 얻었는데도 시련으로 인하여 정금과 같이 단련되어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영원한 구원을 받게 된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걸 믿음의 결국, 곧 구원을 얻게 되니라 라고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들은 우리가 신약성경에서는,
즉 복음서, 사도행전, 로마서, 목회서신, 공동서신서 속에 가장 첫째가는 주제입니다.
즉,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 보낸 그 편지들의 내용은
하나같이 얻은바 구원, 믿은 바 믿음의 내용을 완성하라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말하자면 그 교인들에게 ‘전도하라’는 내용이 최우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대신에 이미 얻은 구원을, ‘완성하라’는 내용이 최우선입니다.
전도는 교회의 아주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건 예수 믿는 개인이나 교회전체가 져야하는 첫 번째 사명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하는 게 뭐냐 하면,
우리가 얻은바 구원을, 우리의 내용과 실력을 완성하는 게 먼저이고,
그리고 전도나 또는 봉사나 구제는
차제의 일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 설명을 위하여, 로마서로 가 보십시다.
◑로마서 5:9~10절,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의 죽으심으로 얻는 구원이 있고,
예수의 살으심으로 얻는 구원이 있다 그럽니다.
우리는 구원을 논할 때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 사역을 십자가로 자꾸 제한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야 말로, 그의 메시야 사역의 중심이죠.
근데 십자가로 한 게 뭐냐 하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낸 것입니다.
근데 지금 로마서 5:9~10절에 분명히 밝히는 것은
메시야 사역은 그의 죽으심에만 있지 않고, 살으심도 그의 사역이라는 거죠.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냈듯이,
그의 살으심으로, 그의 부활하셔서 하시는,
죽음으로 가지시는 대속사역만 메시야 사역이 아니고,
부활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어, 우리를 그 몸으로 불러,
우리와 당신을 묶어 하시는 사역이 있습니다. 이것도 메시야 사역입니다.
죽으심으로 얻은 구원은 뭐입니까? 신분과 운명입니다. 의화입니다.
살으심으로 얻는 구원은 뭐입니까? 구원을 완성하는 성화와 영화의 완성입니다.
수준의 완성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그는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사역은, 십자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교회론은 상당히 낙후되어 있습니다.
롬5:10절 말씀을, 우리가 한 번 더 확인하죠.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인하여, 우리가 죽음과 사망과 심판에서 벗어난 구원(칭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살으심으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생과 성화와 영화의 완성은
롬6장에 이렇게 더 분명하게 설명이 됩니다.
▶롬6:5~11절.
로마서 6장은, 이제 어떻게 롬5장의 설명들이 가능한가?
어떻게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것인가?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예수 안에서
어떻게 실패할 수 없이 그의 능력과 지혜로 이루셨는가를 증언합니다.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6장 시작이 뭐였냐 하면, 구원에 대한 이런 오해의 답으로 시작을 했죠.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로 시작했습니다.
즉, 구원을 죄와 사망에서 벗어난 것으로만 이해를 해서
우리에게 확보된 구원이 영원하고 완성되었다, 신분과 운명의 차원에서 말이죠.
그럼 우리가 할게 뭐있냐? 거기에 대한 답으로 시작을 했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죄와 사망에서 너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요,
예수님은 그것만 너희에게 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의와 진리로 하나님 안에서 살게 하시려고 부활하사
너희의 머리가 되시고, 너희와 예수님이 하나로 연합되어
이 부활 생명이 너희를 불러내었단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새 생명을 가진 자로,
신자로 이제부터 살아가야 된다.. 라는 얘기를 로마서 6장에서 합니다.
▶로마서 5장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과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들이
뭔가 더 훈련받아야 하고 더 커져야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환란은 인내를, 인내를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라는 설명에서
우리가 이미 봤습니다. 롬5:3~4
그게 어떻게 이뤄질 것인가 할 때,
그것을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에서 이전에 꺼내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너희가 알아서 너희의 신앙생활을 책임져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내신 바로 그 능력, 그 메시야 사역 그대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는 우리를 의와 진리의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서 묶고,
그의 부활과 그의 승리로 우리를 지금 인도하고 계시고, 이루시고야 말 것이다..
이게 복음인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죄와 사망에서 꺼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를 완성시켜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하고야 말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이루셨고(과거/칭의),
지금 이루고 계시고(현재/ 성화)
장차 이루고 마실거다(미래/ 영화)..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머리와 몸은 분리가 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주권적으로 구원을 이끌어 가신다는 설명입니다.
인간 편에서 설명할 땐, 약간 표현이 달라지겠죠.
이게 참 귀한 내용인데,
한국교회를 어떤 면에서 부정하고 비평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십자가로 인한 구원의 감격까지 온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구원 얻은 자의 예수 안에서의 부활, 생명으로의 연합,
예수 안에서 함께 인도하심을 받고, 승리할 수밖에 없는 신자의 현실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 부족해 보입니다.
◑이 부분에는 많은 오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구원을 얻었으니
남은 생애는 주를 위하여 봉사하자라는 식의 오해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구원을 얻은 다음에, 헌신과 봉사보다는,
구원의 완성을, 즉 성화를 먼저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봉사와 헌신은 귀한 것입니다만
마치 자기의 구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남은 일이 없는 것 같이 이해해서
남은 생애는 주를 위해서 봉사한다는 것이.. 또 전도한다는 것이..
구원을 다 이해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구원의 완성>을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까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나머지는 내가, 책임으로, 내 책임, 내 능력으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하는 것도
구원에 대한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완성’까지 주권적으로 이루어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반드시 ‘확실한 중생/칭의’이란 전제가 분명해야 합니다.
바로 이 일 때문에, 로마서 6장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예수께서 죽으실 때, 우리가 그와 연합하여 함께 죽었듯이
예수님의 부활에 우리가 연합하여 함께 부활해서
우리는 그때도 예수 안에 있었고, 십자가에서도 예수 안에 있었고,
부활하여 예수님께서 하늘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거기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요.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갈라디아서 2:19~20절이 있습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위 말씀은, 이런 의미는 아닙니다.
‘구원을 얻은 성도가, 자신의 감격과 헌신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사는 믿음의 생활’
이렇게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게 아니고, 지금 우리 로마서 6장에서 확인했다시피 이 말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같이 주와 연합되었듯이
지금도 연합되어 있다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사신 것이라’는 미완료입니다.
헬라어원문에, 미완료라는 것은, 진행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즉 완료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신 것이다. 계속 살고 계신 것이다.. 그 뜻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했듯이
지금 살아있는 내내 신자의 신앙 현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신 것이다.
왜요?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믿음, 우리 처음부터 계속 따져서 확인했듯이
우리의 의지와 신념, 노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유와 원인과 조건을 묻지 않으시고
결과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이라고 그랬죠?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나의 무슨 진심이나 헌신이나 결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예수 안에 묶여있어서,
나는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나 혼자가 아니다, 내가 있으면 여기 예수님이 있고,
예수님이 있는 곳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은혜를 강조하면, 우리 모두가 당황스럽습니다.
구원에서도 그렇듯이 신앙의 현실에서도 은혜를 강조하면,
우리 모두가 내 몫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방임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좀 더 실천적인 문제에서 다룰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신앙이 어느 곳에서나
우리의 결정이나, 우리의 선택이나, 우리의 의지 위에 서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언제까지나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먼저 작정하시고, 이루시고, 확정하신 일들입니다.
여긴 실패와 여기는 변괴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을 떠받치는 근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구약의 출애굽 사건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사건을 보시면, 그 애굽을 떠나야하는 이유는,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해할 때, 구원을 어디로부터 해방된 것에만 이해를 가지시면 안 됩니다.
자유를 논할 때 보통 그러는데,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유가 있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는 자유를 굉장히 소극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기아로부터의 자유, 무지로부터의 자유,
특별히 억압으로부터의 자유가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이 듭니다.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으면, 소극적/ 부정적인 자유를 얻으면
그 다음엔 뭘 할 건지, 남는 게 방임밖에 없습니다.
‘내 맘대로’ 라는 답밖에 못 얻습니다.
성경이 주장하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판단할 때도 가장 고급한 자유는
말하자면 진리와 의와 영광과 가치 있는 일을 위한 자유, 적극적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논하면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수불가결의 조건으로 애굽에서 나와야 합니다.
출애굽사건에는 이 구원에 관한 내용을 얼마나 잘 이해하기 좋게 되어 있습니다.
................................... 더 읽으실 분 .....................................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을 들어가는 데는 요단강이 없습니다.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서 광야길에 나와서
이제 그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열둘 정탐꾼을 보내는 데가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입니다.
가나안은 국토 모양이
사각으로 길지만, 밑이 약간 더 넓은 사다리꼴 모양의 국토입니다.
가데스 바네아는건,
한반도에 비유하면, 남해도(전남과 경남의 중간)쯤 위치하는 곳입니다.
거기서 가나안을 들어가는 데에는 요단강이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애굽과 가나안을 가르는 경계선을 홍해뿐입니다.
홍해를 건너면 가나안이고, 홍해를 못 건너면 애굽인 것입니다.
▶출애굽사건을 보시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올라갔던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고,
이스라엘백성이 입국을 거절해서 애굽에서 홍해를 건넌 성인들,
20세 이상의 계수된 자들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다 죽이고
그다음에 들어갈 때는 요단으로 들어가죠.
말하자면 신약적인 안목을 가지고 다시 출애굽사건을 돌아보면,
애굽에서 나왔으면, 당연히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죄에서 벗어났으면 당연히 신자요, 신자답게 살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들은 신자다운 삶을 사는 것을 거부했고,
그래서 구원을 얻었으되 신자의 승리를 맛보지 못하고 죽은 자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정처 없이 유량생활을 하다 생을 마친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 세대는 어떻게 해야죠?
요단강을 건너서 이 애굽과 가나안사이에 중간지대가 없다는 것을 그려보여 줍니다.
처음 홍해를 건넌 자들은 애굽으로 건너게 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할일이죠.
그러나 이 사건에는 분명히 애굽과 가나안만 있지 않고
애굽, 광야, 가나안이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는, 수준의 구원을 이해하는데 좋은 그림이 됩니다.
구원을 얻지만 가나안에 들어가는 데는 광야라는 중간과정이,
중간과정이라는 것은 구원에 무슨 과정이 있다,
신분에 과정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수준의 과정이다.
그때는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완벽한 상태의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 천국에 가기까지 광야 같은 세상을 산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도 다시 한 번 강조하냐면,
요단을 건너 들어간 자들, 그 2세대들이,
첫 세대가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통과해서 가나안을 갈 수밖에 없었지만,
2세대는 광야에서 바로 요단을 건넜으니까 지리적으로 그게 없었죠? 중간지대가.
그렇게 들어간 자들은 들어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나안이 묘사되지 않고,
원주민을 몰아내는 전쟁을 해야 되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그렇죠?
▶우리가 구원을 얻고 나면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평화,
우리에게 확보된 구원을 확인한 기쁨, 그 소망, 이런 자랑이 있지만,
동시에 뭐가 있냐하면, 그 원주민을 몰아내는 싸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구원 얻고 나서 맨 처음 걸리는 싸움이 밖에 있습니까? 안에 있습니까?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성품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된 옛 성품, 구습을 쫓는 옛 사람과 싸우는 일이 평생 있습니다.
평생. 천국은 멀리 있습니다.
우리가 당황하죠. 믿음만으로 다 해결하지 않고 구원을 얻은 기쁨이 있는데
옛 성품이 아주 완강한 저항을 하죠.
그래서 신자의 현실은, 사실은, 겉으로 드러난,
그러니까 우리가 열심을 내고 우리가 소원하는 내 모습과
실제로 내 속에서 갈등하고 싸우는 일과의 그 간격 때문에, 사실은 괴로워하는 시간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제일 크게 지금 한국 교회가 이해해야 할게 뭐냐면
이 수준의 실패가, 수준의 완성의 과정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끝없는 시행착오를 하게 돼 있거든요.
구원자체를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일부 구원자체를 의심하는 사람은,
그의 중생이 ‘결단주의/쉬운복음/값싼은혜/4영리식 영접’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확실히 거듭난 사람은, 이 설교가 맞습니다.
▶출애굽사건에서 얼마나 잘 보여지고 있냐하면, 홍해라는 것은 말하자면,
물이라는 것은 건널 수 없는 경계선을 말합니다. 죽어야만 건너는 것입니다.
죽어야만 건너는 거,
그러니까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건너는 것은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다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주인들 입장에서 보면 종들이 죽어 버린 것입니다.
죽으면 종이 없어지는 거지요. 죽었는데도 계속 부릴 순 없잖아요?
그리고 이쪽에서 보면, 홍해로부터 새 인류가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새 인류가, 모세를 대표로 하며, 그래서 우리가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모세와 함께 세례를 받고”라고 묘사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새 종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자면, 신자의 구원이라는 것이
신분과 수준의 분명한 다른, 차이가 있고, 이해가 있고,
그 완성을 위하여 신자 된 현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제 분명하게 이런 문제를 확인해야 됩니다.
▶성화라는 것이, 얼마큼 내 책임인가라고 하는 것이죠.
성화라는 것이 얼마나 내 책임인가라고 할 때,
이 성화가 예수 안에서 허락된 구원으로
즉, 은혜와 믿음위에서 성립이 된다는 것을 절대 놓쳐선 안 됩니다.
이것은 십자가가 그렇듯이, 그래서 우리 신분의 구원이 100% 은혜이듯이,
성화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으로 부름을 받아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이뤄가는
구원의 완성이기 때문에, 100% 은혜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왜 은혜이냐 하면, 우리의 의지가 이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심이, 이 일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아서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 관점에서 보는 설명입니다.
이 일을 여러분, 사실 현실에서 얼마든지 경험하십니다.
여러분이 신앙적인 기준을 세우시고, 거기에 만족을 달성하지 못하면
여러분 스스로가 참을 수 없는 영적인 갈등을 느끼십니다.
잊을 수 없게 하시고,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물리적인 개입도 해오십니다.
아프게도 하시고, 사업도 어렵게 만들어서 생각하게 하십니다. 깨우치십니다.
우리가 5강에서 요셉에서도 봤죠?
그 발이 차꼬에 상하고 쇠사슬이 그 혼을 칭칭 묶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고 하나님’ 하고 와서 엎드리고,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
그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 말씀이 우리를 달련하여 항복시키는 경지에 가고야 말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꼭 이해하고 넘어가야하는 부분이
이것이 ‘믿음 지상주의’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믿으면 다 된다’라는 것은, 믿음을 강조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완성에 대한 소원을 가지는 것은
얼마든지 칭찬해야하고 잘하는 것입니다만..
믿음이 일종의 신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신념(공식, 교조)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뭔지 아시겠습니까?
신념이 되면 ‘자신의 의지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소원을 가진다는 건
이런 열심을 가진 것은 다 하나님께서 내게 작정하시고 보여 주사 가지게 된 소원들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만 소원하게 된다는 것이 신앙의 내용입니다.
신앙의 내용이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열심을 내는 것이, 사랑을 하는 것이죠.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에 항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내 의지와 신념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보통 뭐라고 말하게 되냐 하면 공식화한다말입니다.
‘이렇게 해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해야 되는 표현입니다.
‘기도 많이 해’, ‘더 많이 성경 봐’, 이건 옳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하면 무조건 이것이 결과된다더라’ 하셔서는 안 됩니다.
후략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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