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장이의 비유 (렘18:1-6)
임 영 수 목사
선지자 예레미아는 주전627년부터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586년 이후 얼마까지 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선지자 입니다.
예레미아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선지자였습니다.
애국자이자 선지자였던 예레미아의 눈물과 애원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조국은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만 갔습니다.
큰 재앙을 피하기 위한 그의 열렬한 노력은 무익하게 끝나 버렸습니다. 예레미아의 마음은 상할대로
상하였습니다.
예레미아의 모든 힘은 소진되었고 그의 앞에는 하나님의 심판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아가 그러한 절망의 상황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소망의 비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아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겠다” 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때 토기장이가 마침 발로 물레를 돌리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그릇을 빚다가 잘 되지 않으면, 그 흙으로 다른 그릇을 빚었습니다.
예레미아가 본 이 “토기장이의 표상”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영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토기장이의 전체 표상”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절망 가운데 있던 예레미아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갔을 때, 그가 본 것은 토기장이의 발로 움직이는 회전용 녹로였습니다.
토기장이는 물 한 동이를 부어서 진흙을 부드럽게 하고 두들겨 펼 수 있게 합니다.
토기장이는 그 진흙으로 그릇을 빚다가 잘 되지 않으면 거의 다된 그 모형을 부수고 그 흙으로 다른 그릇을 빚기도 합니다. 예레미아는 그러한 토기장이의 의도를 알 수 없었습니다. 물론 토기장이는 그 분야에서만은 능숙하고 기술적인 사람입니다.
그때에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아에게 임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절대 적이고 주권적인 권능에 대한 이 말씀은 가혹하게 들립니다.
그 분의 권능은 그 만큼 결정적이고 반면 우리는 그렇게 무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력의 절대 주권자이시지만 그 분은 또한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연약하고 부족한 자녀들을 다루실 때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아를 토기장이 앞에 세워놓고 그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 시킵니다.
예레미아가 일하는 토기장이를 보았을 때, 토기장이는 조형 진흙 덩이를 떠다가 회전 녹로 가운데 던져 놓습니다. 그리고 나서 토기장이의 기술적인 손놀림으로 틀을 잡고 진흙을 매만지면, 토기장이가 생각했던 모양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바깥에서 모양을 만들고 나서 안쪽에서 모양을 만듭니다. 그러면 진흙덩이가 아름다운 모양으로 나옵니다.
토기장이는 경험이 많고 능숙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빚으시는 최고의 토기장이 이십니다.
그분은 실험자가 아닙니다. 그 분은 실수를 안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작품을 못 쓰게 만드는 법이 없습니다. 가끔 우리가 거만하게 토기장이의 역할을 쥐고 자기 인생의 모양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매우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녹로 위에서 그릇이 빚어진다는 것은 일상생활의 환경이 우리의 인격을 빚는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사람마다 환경이 다릅니다. 유전, 기질, 환경은 대개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모양을 만드는데 아주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역경과 번영, 슬픔과 기쁨, 사별 그리고 비극, 시련과 유혹이 그런 것들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점진적으로 참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려고 쓰시는 요소들입니다.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빚으시고자 이 속에 놓으셨으니,
장치를 쓴 것은 당신의 영혼을 굽혀서 바깥으로 뒤집어
확실하게 찍히게 하려고 했을 뿐이네.“
우리 인간의 상징을 진흙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욥10:9)
진흙은 토기장이의 손에 들려지지 않으면 가치가 없습니다. 그 최고의 가치 는 토기장이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간직하는 역량에 있습니다.
드레서(Dresser)는
“진흙에 가치를 더 하는 것은 그 물질자체가 아니라 예술적 솜씨이다.”고 했습니다.
이름 있는 미술품 경매장에 가보면 우리가 보기에는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조그마한 그릇이 고가로 경매에 부쳐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그릇이 그렇게 엄청난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은 그것을 빚은 사람의 손길 때문입니다. 아무 생명력이 없는 진흙덩어리는 그것 자체로서 고유의 가치가 없고 그 상태를 향상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토기장이에 의해서 그 고유의 가치가 부여됩니다.
우리 인간은 진흙과 같이 하늘의 토기장이 되신 분의 손길에 내어드렸을 때 거의 무제한적인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간사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빛을 발하면서 살고 어떤 이들은 어둡게 삽니다. 다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차이는 토기장이가 구상한 아름다운 계획대로 일하시도록 허락한 정도에 있습니다.
진흙의 다양성은 그야말로 무수합니다.
각각 그 결과 다른 특이한 질 때문에 개별적으로 다뤄 주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손길이 저마다 독특하며 다 다릅니다. 하나님의 토기 제조소에는 대량 생산이란 없습니다.
예레미아가 그릇이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것이 무너지더니 망가진 진흙 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토기장이의 온갖 수고가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토기장이의 계획대로 되지 않자 토기장이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그것으로 다른 것을 빚었습니다. 본문에 그것이 잘못된 이유를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토기장이의 손길에 대한 진흙의 반응에서 잘못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의 인생과 일치하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토기가 잘못된 것은 토기장이의 기술이 부족하거나 부주의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예술가도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망가트리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아가 이 장면에서 본 희망의 빛은 토기장이의 의도대로 토기가 되지않자 그것을 쓰레기장에 버리지 않고, 그것으로 다른 토기를 빚은 것입니다.
그릇은 엉망이 되었지만 그 진흙이 아직 “토기장이의 손에”있습니다.
우리는 높은 이상과 희망을 가지고 인생을 출발하거나, 공동체를 시작하지만 인생의 여정에서 패배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그릇은 엉망이 되었으나 그 가운데서도 소망이 있는 것은 그 진흙이 아직 “토기장이의 손에”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막힐 수 있습니다.
가장 흔한 것은 생활 속에서 죄를 묵인하는 일입니다. 드러난 죄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마음속에 품은 죄일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죄든지 그릇을 망가지게 만듭니다.
한편 그릇을 망가지게 만드는 것은 치유되지 않고 있는 내면의 깊은 상처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창조적 작업을 계속 방해 합니다.
그리고 독선과 편견입니다. 신앙에서 절대라는 독선과 편견은 진정한 자신의 형태로 빚어져 가는데 결정적인 방해물입니다. 이러한 것들 모두가 죄의 범주에 속합니다.
예레미아가 본 토기장이는 그 잘못된 그릇을 더미에 던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물로 약간 부드럽게 하여 다시 다른 그릇으로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그릇이 처음에 의도했던 것처럼 아주 아름답지는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여전히 “주인이 쓰기에는 알맞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주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 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42:4)
성서에는 망가진 그릇을 하나님께서 다시 만드신 예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한 사람을 든다면 야곱 일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속이는 자, 강탈하는 자”입니다. 그는 너무 비뚤어져서 나사모양 송곳 뒤에도 숨을 수 있다는 말을 누군가가 했습니다.
인생에서 결정적인 위기를 맞기 전에 그는 20여 년 동안 속이고, 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를 도망갈 곳이 없는 구석으로 몰아치셨습니다.
그 때까지 야곱은 항상 하나님을 거스리고, 속이는 자기 방식을 추구했으나 마침내 패배했습니다.
항복의 검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사기꾼에서 진실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셨습니다.
토기장이는 완성된 그릇을 만들기 위해 녹로뿐만 아니라 가마의 불을 사용하십니다.
가마의 불을 거치지 않는 그릇은 그 모양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불 속에서는 습기와 불순물이 다 타버립니다. 온도가 올라갈수록 진흙은 더 순수해지고 아름다운 색깔의 토기 무늬가 달궈집니다.
토기장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무늬를 그의 토기에 주시기를 원하실까?
사도 바울은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 줍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니라.”(롬8:29)
로버트 키네(Robert Keene)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습니다.
“너의 길에 불시험이 놓여 있을 때
나의 은혜가 족하여 너의 필요 채우리라
불길이 너를 해치지 않으리니
네가 정금같이 되도록
네 안의 찌꺼기를 태울 내 계획일 뿐“
불은 무늬를 영구한 것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시험의 불을 통과할 때 결코 혼자 남지 않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43:1-2)
욥은 그에게 덮친 어마어마한 고통과 시련 후에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이 고백은 그 뒤에도 수많은 성도들이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내용입니다.
작가 미상의 시 한편을 소개해 드립니다.
“잠잠히 누워 계시오
그분께서 그대를 빚으시도록!
오 주님, 내가 자복하오니
능숙한 토기장이 되시고
나를 잠잠한 진흙 되게 하소서
나를 빚으소서 오, 당신의 뜻대로
나를 빚으소서
나는 묵묵히 엎드리며 기다리겠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어 가신다는 사실은 진정 놀라운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을, 그리고 우리 공동체를 빚어 가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인생의 어떤 어려움, 어떤 시험과 유혹 속에서도 다시 설 수 있는 힘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의 품안에 안겨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신자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신들의 헌신과 의가 하나님의 호의를 끌어들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기장이의 표상은 우리의 그러한 왜곡된 신앙을 깨뜨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의 품에, 그의 전능하신 손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표상을 “암탉이 병아리를 품는다“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암탉이 병아리를 품는 것과 같이 우리를 품어 주십니다.
때때로 묵상할 때 우리는 우리자신이 하나님의 품에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품에서 포근함, 따뜻함, 안정, 고요함 희망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공동체를 십 사년간 빚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빚어오셨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어 가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 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엡2: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 우리 교회 공동체는 마귀의 작품이 아닌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시며 사랑이신 토기장이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서 빚어져 가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골방에 숨겨 놓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라는 곳에 내어놓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매우 아끼시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값어치가 있고, 존귀하고, 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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