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이웃을 사랑하지 못 하는 죄/누가복음 10:30-37

by 【고동엽】 2021. 12. 3.
이웃을 사랑하지 못 하는 죄
누가복음 10:30-37


우리가 추석절과 같은 명절은 자 연스럽게 가족을 생각하고 또 가족 들과 함께하는 그런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계절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 합니다. 이번 추석 특집 KBS 프로 그램 가운데 이야기 좌담, 토크 쇼 로서 한국인이 모르는 한국인의 멋 이라는 그런 좌담을 잠시 청취한 적 이 있습니다. 이때 출연한 러시아 사람 교수에게 사회자가 이런 질문 을 했습니다. 당신이 한국에 살고 한국 사람을 접촉하고 한국을 연구 하면서 한국인에게 단점과 장점이 있겠지만 한국인의 장점, 저력을 하 나 들자면 뭐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러니까 이분이 서슴없이 상당히 유창한 한국말로 그것은 가족주의라 고 생각을 합니다라고 대답을 하더 라구요. 가족주의 그것은 가족을 특 별히 귀하게 생각하고 가족의 견고 한 유대감 이것이야말로 IMF 나 한 국이 역사적으로 고난과 역경을 헤 치고 나온 저력이다. 저는 그분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 객관적인 외국 인의 시각에 비친 그 견해로서 타당 하다는 것을 저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제 마 음 속에는 한국인이 견고한 가족주 의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국인의 가족관은 때때로 그 범주가 범위가 너무 좁다는 생각을 저는 했 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한국 사 람들이 자기 집안에서는 그 집안의 물건을 아끼고 집안 사람들을 소중 히 여기고 하지만 일단 집 밖으로 나갈 때는 공공 건물이나 공적으로 쓰는 기물 같은 것은 우리가 소홀히 하고 또 쉽게 쓰레기를 방기하는 이런 모습들, 이것은 흔히 의식의 밑바탕에 이것은 여기는 우리집이 아니니까 라는 의식이 우리를 지배 하고 있다는 말이죠. 또는 가족들 을 유달리 아끼고 사랑하고 또 조심 성스럽게 가족에 대한 우리들의 애 정을 표현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대 해서는 때때로 아주 거칠고 무례한 모습들을 보이는 겅우들이 있습니 다. 이런 의식의 밑바탕에는 우리 식구가 아니니까, 내 사람이 아니니 까라는 의식이 지배합니다. 저는 한 국이 21세기의 새로운 지평선을 향 해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국인이 가족관이, 가족의 개념이 좀더 넓어 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공동체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의식 의 전환, 공동체를 커다란 우리의 가족과 우리의 집, 우리의 사회로 볼 수 있는 이런 안목, 그래서 이웃 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우리의 가족 과 우리의 이웃으로 이웃을 발견하 려는 그런 노력이 어느때 보다도 아 쉬운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21세기를 향해서 나아가는 이 시점 에서 한국교회, 한국 사회앞에 주 어진 과제 중에 하나가 바로 이웃 사랑의 과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 리는 지금까지 죄에 대한 여러 가지 시리즈의 메시지를 말씀을 함께 나 누었습니다. 우리는 죄하면 하지말 아야 할 것을 한 것을 먼저 떠오르 게 됩니다. 살인하지 말라. 그런데 우리는 살인했고, 간음하지 말라. 그 런데 우리는 간음했다. 그것은 죄다. 그것은 아주 실감있게 느껴져 옵니 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마땅이 해야할 것을 하지 못한 것. 그것도 죄라는 이런 인식은 상당히 빈약한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성경에 야고보서 4장 17절에 보시면 '사람 이 선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다 '. 그것도 죄라고 분명히 말씀하셨 어요. 영어로는 하지말아야 할 것을 한 것을 'sins of commission' 'commission' 이라는 단어를 씁니 다. 반대로 마땅히 해야 할 줄로 알 면서 하지 않은 죄를 말할 때는 'commission'에서 'c' 자를 빼고 'omission' 이라고 말합니다. 'sins if omission' 마땅히 해야할 줄 알면 서도 행하지 않은 것 그것도 죄입니 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줄 알면 서도 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것 그 것은 바로 이웃 사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지 못 한 것 그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왜 죄인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것이 어떤 죄악인가를 우리가 대답을 얻 기 위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 한 누가복음 10장 본문에 나타난 선 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한번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웃을 사 랑하지 못한 것 그것이 어떤 죄일까 요? 첫째로 그것은 주님의 가장 커 다란 계명을 불순종한 범죄다. 이렇 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의 비 유를 주께서 말씀하신 그 배경이 도 대체 뭡니까? 그 배경은 25절부터 시작이 됩니다. 누가 복음 10장 25 절 부터 읽어 보시면 '어떤 율법사 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예수께서 이르 시되 율법을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여 목슴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 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 과 같이 사랑하라' 그랬더니 29절 에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렇게 다시 주님께 반문을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굽니까? 그래서 시작되 는 이야기,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야 기가 바로 오늘 본문 30절 이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같 은 말씀이 마태복음 22장에도 기록 이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22장에는 어떤 율법사의 질문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 어떤 계명이 가장 커다란 계명입니까? 어떤 계명이 가 장 중요한 계명입니까? 가장 큰 계 명입니까? 네 마음을 다, 목슴을 다, 뜻을 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 하라 그랬더니 다시 율법사가 반문 하기를 내 이웃이 누굽니까? 이렇 게 질문을 대답을 주고 받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 결론부터 말씀드 리면 예수님의 대답은 뭐예요? 네 이웃이 누구냐? 네 이웃은 옆 집에 사는 사람, 우리 아파트 바로 앞동 에 바로 앞에 사는 사람만이 내 이 웃이 아니라는 거예요. 물론 그 사 람이 내 이웃이지만, 내 가족 내가 늘 어울리는 친지 친구들만이 내 이 웃이 아니라 내가 걸어가는 인생길 여리고 길처럼 내가 걸어가는 인생 길에 내가 발견하게 된 피흘려 쓰러 져 누워 있는 사람, 나의 사랑을 요 구하고 내 관심을 요구하고 또 내 주목을 요구하고 내 앞에 누워있는 사람, 그는 누구이든 내 이웃일 수 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도윱과 사랑을 요청하는 모든 사람을 내 이 웃으로 바라볼 줄 아는 안목, 그것 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이 말 하는 이웃에 대한 관점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절 대로 나누어 질 수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가장 커다란 계명 안에 이 두가지를 함께 말씀하신 것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 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가지의 계명은 왜 나누어질 수 없을 까요? 여러분, 성경에서 가장 위대 한 사랑의 장 그러면 어떤 장이 생 각나세요? 고린도 전서 13장이겠 죠? 그러나 아닙니다. 성경에서 가 장 위대한 사랑의 장은 사실상 고린 도 전서 13장이 아니예요. 사실 고 린도 전서 13장은 그전에 있는 12, 13, 그다음 14장 까지 합해서 그것 이 영적 은사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 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영적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은사를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 때 진정한 유익을 가져올 수가 있느냐?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들을 사랑 으로 사용할 때 사랑의 태도로 내 은사와 재능을 발휘할 때 그것이 공 동체 유익을 준다. 사실은 은사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다가 샌드위치 처럼 잠간 끼어들어간 것이 13장입 니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장 이 있다면 그것은 요한 일서 4장입 니다. 아니 요한 일서 4장에 무슨 말씀이 나타나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위대한 말씀.
"God is love.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러나 그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 나님은 사랑이실 뿐만 아니라 그 하 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바 되 었으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 재물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어디에서 제일 잘 나타났다구요? 십자가에서. 누구를 통해서? 십자가 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 를 넘어서는 사랑. 조건이 없는 사 랑. 초월적인 사랑. 정말 희생적인 아가페의 사랑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난 진정한 사랑이 시사된 자리 그것은 십자가입니다.누구를 통해 서? 예수님을 통해서 그 사랑이 나 타났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4장의 사랑의 교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 요. 계속 읽어 보시면 성령으로 말 미암아,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마암아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가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 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한바 되었 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 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끝나지 않아 요. 요한일서 4장의 정점이라고 그 럴까요? 클라이막스는 뭐냐하면 요 한일서 4장 20절입니다. 같이 한번 따라서 읽어보시죠. '누구든지 하나 님을 사랑한다하고 그 형제를 미워 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요.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 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 니라'. 그리고 마지막 절은 하나님 을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런 말씀으로 요한 일서 4장이 끝나요. 다시 정리해 볼 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 데 이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에서 제 일 잘 나타나 있습니까? 십자가에 서. 누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 조 건이없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 아가 페의 사랑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위 한 사랑임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습 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바 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 게 되었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여 러분과 제 안에 거하시게 되었습니 다. 이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 험했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거한다면 이제 마지막 결정적 사랑 의 테스트는 이것입니다. 내가 사랑 을 체험한 사람, 그리고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다면 내 옆에 내 곁에 보이는 구체적인 형제를 내가 사랑 할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사랑할 수가 있느냐? 때로는 그 형제가 거 북하고 좀 까다로운 형제라 할지라 도. 때로는 나의 희생을 요구하면서 내게 다가오는 형제와 자매라고 할 지라도 그를 사랑할 수가 있느냐? 여기 사랑의 테스트가 있습니다. 주 님은 이것을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 십니다. 큰 계명, 가장 중요한 계명, 이것을 큰 계명이라고 붙이신 이유 는 그것은 주님의 가장 커다란 기대 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가장 커다 란 기대를 깨뜨리고 이웃을 사랑하 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이것은 마 땅히 하나님의 가장 큰 기대를 깨뜨 린 죄악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의 큰 계명에 대한 불순종의 범죄인 것입니다.
자,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것 그 것이 어떤 죄인가? 두 번째로, 그것 은 인간을 수단화 또는 인간을 도구 화 시키는 범죄라고 할 수가 있습니 다. 자, 예수님의 비유가 시작됩니 다. 30절 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 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 을 버리고 갔더라"
이 얘기는 강도 의 이야기로 시작이 됩니다. 자, 그 러면 먼저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이 강도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강도를 생각해 보세요. 한번 이 강도에게 이 스토리 드라마 의 주인공 중에 한 사람이 이 강도 에게 당신은 왜 강도질을 했습니 까? 라고 질문을 한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어떤 대답을 할까요? 제 가 여기서 멀지 않은 수원의 교도소 에서 제가 도사 시절에 제가 오늘 이렇게 옷을 입고 나오니까 제가 도 사가 된 기분인데요. 도사란 말은 전도사의 줄인 말입니다. 제가 전 도사 시절에 수원 교도소에 자주 가 서 설교도 하고 때로는 상담도 하고 이렇게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들어오면서 제가 느낀 것이 하 나있어요. 죄를 짓고 정말 여기 내 가 들어와서 마땅하다고 느끼는 사 람은 한 사람도 제가 만나 본 적이 없어요. 다 억울하게 들어오셨더라 구요. 다 이유가 있어요. 거기에 들 어 올 수밖에 없었떤 어떤 이유를 다 갖고 있어요. 명분이 있드라구요. 저는 본문의 이 이야기 속에 나타난 이 강도에게도 당신은 왜 강도질을 했습니까? 강도질을 하고 싶어 했습 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이렇게 대 답하지 않을 거라구요. 어떻게 대답 할까요? 틀림없이 네 저는 제 가족 을 위해서 할 수 없이 이 일을 했습 니다. 제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었습니다 저 에게는 이 길밖에 없었습니다. 저에 게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제 게 마지막 인생의 수단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대답을 할것이라고 생 각해요. 저마다 자기 대답이 있어요. 그러나 설령 자기의 목적과 명분이 정당해 보이고 올바르게 보인다 할 지라도 그러나 지나가는 애매한 이 나그네를 희생자로 삼아서 그를 패 고 그를 죽게 만들은 사건. 이것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요? 기독교 역 사에서는 기독교 윤리를 말할 때 기독교 윤리의 가장 중요한 베이직, 그 기초적인 것으로 늘 이것을 강조 해 왔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목적 은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우리가 좋은 목적을 갖고 있다면 수단도 좋아야하고 수단도 건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명분이 좋아도 잘못 된 수단, 잘못된 방법으로 그 목적 을 성취해 갈 수는 없는것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어떨까요? 우 리는 이 강도를 비난 할 수가 있습 니다. 이 강도를 규탄할 수가 있습 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의 인생의 행로 속에서 때로는 나의 목적 성취 를 위해서 내 목적 실현을 위해서 내 주변의 이웃들을 너무나 쉽게 상 처를 주고 이웃들을 이용해 버린 그 런 경험들이 없었는지요?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이 강도 야. 바로 내가 이 강도일 수가 있 다. 만약 어떤 사람을 목적으로 인 격으로 다루지 못하고 그를 이용하 려는 의도가 내 속에 있었다면 그래 서 그를 피 흘리게 만들었다면 우리 는 이 강도가 바로 우리 자신 일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서야합니다. 자, 다시 본문에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십시 다.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사랑하십니까?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뭐예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아마 어 떤 분들은 말하기를 저는 그래서 하 나님을 예배합니다. 맞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자리에 와 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 에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합니 다. 그러나 제가 더 나아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왜 하나님을 예배하 십니까? 예배의 목적이 뭐예요? 아마 좀 성경 공부를 하신 분들은 이렇게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 님은 나에게서 예배와 사랑과 찬양 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입니 다. 혹은 다른 말로 그 하나님은 나 에게 예배를 받으실 만한 가치가 있 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이해 할 때 가장 중요한 단어는 가치라 는 단어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가치. 우리가 예배를 영어로는 worship 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worth 라는 단어에서부터 나왔습니다. w o r t h, worthy 그러면 가치 있다. 가치 있는, 가치. 왜 예배를 드려요? 하나 님은 예배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창조자이신 하나 님, 구속자이신 하나님, 섭리자이신 하나님, 그분은 우리에게서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고 예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라고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우 리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만드는 것 이예요. 그리고 그 예배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자, 우리가 이웃을 사랑 한다면 어떻게 그 사랑은 또 표현 되어야 할까요?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까지 할 수는 없어요. 인간은 예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 을 예배해서도 안되고 예배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웃을 존중 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 로 이웃 사랑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웃을 존중하는 것, 왜 존중하십니까? 다시 한번 그것은 이웃에 대한 가치를 인식했을 때, 여러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때 로는 그 사람들이 사람같은 사람으 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 도 하나님은 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 하실까요? 성경이 보는 인간의 가 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 다. 믿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형 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 하나님의 작품, 너무나 소중한 대상,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그를 구 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대신 죽을 수밖에 없었던 고귀한 사람의 대상 인 인간. 그것이 인간의 가치예요.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인간의 가치 입니다. 이런 이웃들의 가치를 인식 한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내가 이 웃을 어떻게 존중히 여기지 않을 수 가 있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도 이웃을 회손하고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희생하는 것은 죄일 수밖에 없 습니다. 저는 요즘 매스컴의 보도를 지켜 보면서 좀 안타가운 사건이 하 나가 있어요. 소위 권희로사건입니 다. 저는 우리 민족이 일본 사람에 게 차별당한 그 심정적 동조 때문에 이 사람을 동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영웅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 각을 합니다. 자기 자신도 그것을 쑥스럽게 여겼는지 나는 영웅이 아 니라는 대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매스컴은 계속 그를 영웅으 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 어떤 의미에서도 그가 사람을 죽인 것, 민족차별에 항의하기 위해서라 는 고상한 명분이 있다고 해도 사람 을 죽인 그 행위 그 자체는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여전 히 죄인입니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이 권희로를 향해서 돌을 던질 수가 있느냐? 제가 이런 생각을 해봤어 요. 나도 나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 내가 주변의 사람들을 다소나마 이 용하려는 그런 경향이 내 안에 있었 고, 그리고 내 이웃들에게 상처를 준 사실이 있었더라면 나는 권희로 를 향해서 돌을 던질 자격이 없다. 나도 죄인이다. 이것이 이 사건 앞 에서 내가 느끼는 솔직한 소감이었 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웃을 사랑하 지 못한 것 그것은 이웃을 도구화 시키는 죄악인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웃을 사랑 하지 못하는 것이 왜 죄일까요? 그 것은 성도의 존재 이유를 거부하는 범죄인것입니다. 셋째로 이웃을 사 랑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성도의 나 라는 존재의 존재의 이유를 포기하 는 혹은 존재의 이유를 거부하는 범 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 우리 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지 금 이 자리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 하고자 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예배로 나타났습니다. 그런 데 예배에 대해서 연구하시는 분들 이 예배에 대해서 글을 쓰는 분들이 기독교 저서에 보면 종종 이런 표 현들이 나옵니다 인간은 예배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이 말은 옳습니까? 틀립니까? 틀릴까봐 대답을 안해요. 네, 맞습니다. 옳은 얘기예요. 인간 은 예배하도록 지음을 받았어요. 우 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이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는 것 그것은 예배하도록 지음받은 인간의 고상한 아주 중요한 존재 이 유 가운데 하나라고 말 할 수가 있 습니다.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서 지 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이 존재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 별 로 안 중요한 이유가 아니예요. 굉 장히 중요한 거예요. 내가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린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 어떻게요? 그 구체 적인 방법 중에 하나가 예배라면 나 는 예배하기 위해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을 표현하고 그 하나 님 앞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존재 한다 맞죠. 인간의 고상한 존재의 이유이고,존재의 목적입니다. 자, 이 웃을 예배할 수는 없다고 했어요. 그러나 이웃을 존중히 여기는 것 이 것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 못 지않게 소중한 우리의 존재의 목적 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 사랑하 기 때문에 이웃의 가치를 존중하고 그를 귀히 여기는 것. 이것은 내가 인생에서 해야할 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 내가 여기 살아있는, 내가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하나라는 사 실입니다. 가장 중요한 부르심이예 요. 그런데 내가 그것을 거부한다. 내 존재 이유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을 읽을 때마다 늘 이 제 사장과 레위인이 나오면 그냥 제 눈 이 걸려요. 내가 꼭 이 제사장 같아 서.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31 절, 32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저는 이 본문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늘 이런 질문이 저 자신에게 돌아옵니 다. 네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던 제 사장이라면 너는 어떻게 했겠는가? 그때마다 제 안에서 돌아오는 대답 이 있어요. 틀림없이 나도 아마 그 냥 지나갔을 것이다. 이것이 솔직한 대답이예요. 나도 그냥 지나갔을 지 모른다. 예를 들어서 오늘 아침에 제가 교회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 집에서 교회로 오다가 중간에 교통 사고가 나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 을 보았다고 합시다. 내가 그 자리 에 머물렀을까? 아니면 교회로 왔을 까? 그때마다 제 대답은 나는 틀림 없이 교회로 왔을 것이다. 그때 내 변명이 뭘까요? 이 제사장의 변명이 뭐였다고 생각하세요? 제사장은 지 금 아마도 제사드리러 가는 길이었 을 것입니다. 아마도 저처럼 예배를 인도하러 가는 길, 지금 우리 교회 에 천명, 이천명이, 삼천명이, 오천 명이 내 설교를 듣기 위해서 그리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 는데 내가 여기서 머물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틀림없이 그 자리를 빗 겨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나타난 제사장이 바로 나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 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하고 아주 똑같은 사건은 아니지만 비슷한 사 건에 있어서 조금 제가 진보된 모습 을 보이는 제 모습을 한가지 발견한 것이 있어요. 제가 젊었을 때 물론 지금도 젊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마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을 때 그 때는 토요일 날 설교 준비를 할 때 제일 신경질 나는 것이 뭐냐하면 토요일날 전화하는 교인들, 그리고 토요일 날 신방해 달라고 하시는 분. 참 신경질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이렇게 목사를 모르나? 툐요일이 어 떤 날인데? 말씀 준비하고 기도하고 묵상해야 되는 날인데 나를 만나자 고 하다니. 그래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어요. 나가긴 나가서 겉으로는 싹 웃어도 속으로는 아휴 하필이면 이런 날 날 불러내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부글부글 끓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부글부글 끓지는 않아요. 요 즘도 아,토요일 날 불러주셔서 감사 합니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그 러나 옛날보다 나아진 것이 하나있 어요. 어느 날 제가 생각을 바꾸었 어요. 어떻게 생각을 바꾸었나하면 내가 설교 준비를 왜해? 이런 질문 이 생겼어요. 내가 설교준비를 왜하 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말씀 을 증거해서 어쩌자구요? 이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이 폭풍우 같은 세상에서 삶이 견고해 지고 그리고 인생의 전선에서 그들 이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돕고 섬 기기 위해서 내가 말씀을 전한다면 지금 이 사람과 앉아서 이 사람을 돕고 얘기를 들어주고 기도하는 일 이것은 바로 설교의 목적이 아니냐 는 말이예요. 설교의 목적이 아니냔 말이예요. 그 생각을 하니까. 요즘은 훨씬 마음의 여유가 생겼어요. 토요 일 날 어쩔 수 없이 불려나가는 경 우에도 그러나 옛날처럼 끓지는 않 아요. 아, 그러시겠군요. 이것도 설 교 준비의 일환이다. 내가 이분을 섬길 수가, 세울 수가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내 mission, 내 소명 이기 때문에. 나의 미션만이 아니예 요. 여러분 모두가 존재하는 목적, 우리가 이땅에서 살아있는 목적. 하 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리스도 인으로 호흡을 가지고 이 땅에 살 게하는 중요한 목적 중에 하나가 이 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여기서 피흘리고 상처받고 어려워하 는 이웃과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이 것은 부르심이예요. 소명이예요. 이 것을 거부하는 것 이것은 나의 존재 이유를 거부하고 포기하는 죄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마 지막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 리는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 는 이 죄를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이웃을 정말 좀 사 랑해 볼 수가 있을까요? 저는 본문 에서 두가지 대답을 찾습니다. 첫째 대답은 이것입니다. 발견된 이웃을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랑해보자라 는 것입니다. 발견된 이웃을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랑해 봅시다. 말이 좀 어려워요? 발견된 이웃을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해 보자는 것 입니다. 이웃을 사랑합시다. 사랑을 실천합시다. 여러분, 이런 말을 들을 때 그 실천을 거부하는 내 속에서 올라오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변명 이 있다면 그 변명이 어떤 변명입니 까? 우리 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아요? 아니 이 세상에 불쌍한 사 람이 한 두 사람이야? 이 세상에 불 쌍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야? 도와 야 할 사람이 한 두 사람이야? 또 내가 비록 한 사람을 돕는 다고하자 그렇다고해서 세상이 달라집니까? 또 나는 내 코도 석자인데 내 인생 에서 내가 경험하고 있는 아픔과 좌 절이 많은데 나는 다른 사람까지 도 울 수 있는 에너지가 내 속에는 없 다. 이런 변명이 있지 않습니까? 자, 저는 그래서 이 세상은 점점 더 어 두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 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책임지라 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걸어가는 인생의 길에서 나에게 발견된 이웃, 내 발부리에 채인 사람, 지금 여기 피흘려 누워있는 이 사람, 내 눈에 발견된 이 사람 이 사람만이라도 책 임지라는 말이예요. 할 수 없는 것 가지고 도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느냐? 네가 할 수 있는 자원 가지 고 할 수 있는 시간 가지고 할수 있 는 것을 가지고 사랑해 보지 않겠 니? 저는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라 고 생각울 해요. 다시 읽어보세요. 본문의 33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 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뭔저 중요한 단어는 그를 보고, 그 를 보고 하는 단어예요. 보고, 안 볼 수도 있었어요. 아니 안 보는 척 할 수가 있었어요. 못 본척하고, 우리는 시선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대 로 지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성경은 말하기는 이 어떤 사마 리아인은 그를 보았습니다. 보았습 니다. 피하지 말라는 거예요. 보라 는 거예요. 이것이 발견된 이웃을 향해서 가져야 할 태도예요. 보고, 쳐다 보고 그 다음에 어떻게 했습니 까? 34절에 가까이 가서, 이것이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쟎아요? 할 수 있 는 일이쟎아요.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할 수 있 는 일이쟎아요. 할 수 없는 것 가지 고 하라는 것이 아니예요. 네게 있 는 것 가지고, 네게 있는 기름, 네게 있는 그 포도주를 가지고 그 상처 에 부어라.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 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 짐 승,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가지고 할 수 있을 때 한 것이예요. 그렇게 할 수가 있느냔 말이예요? 발견된 이웃을 향해서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한번 사랑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 나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아 직도 이런 변명이 계속 우리를 붙들 고 있습니다. 그래봤자 세상은 달라 지지 않을 것이다. 너 혼자 구세주 인 척, 성자인 척 그렇게 해 봐야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 서 세상이 안 달라지는 지도 몰라 요.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는 이런 얘기를 묵상할 때마다 늘 떠오 르는 만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고, 지금은 차라 리 썰렁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늘 저에게 생각나게 만들어 주어요. 어느날 지구촌에 살고 있 는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결정을 했습니다. 우리가 모월 모일, 모시, 모분, 모초에 일제히 지구상에서 한 순간에 와하고 한번 소리를 질러보 자. 거대하게 폭발하는 지구의 함성 은 금성이나 화성 다른 곳에 생물체 가 있다면 우리의 함성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존재를 알릴 수 있 도록 한번 소리를 쳐보자. 그래서 지구인들이 합의가 되었습니다. 드 디어 그 시각이 가까워집니다. 모월, 모일, 모시, 모분, 모초 일제히 와하 고 소리를 지르려는 시각이었어요. 그때 꼭 한 사람이 이런 생각을 했 어요. 꼭 한 사람이 야, 굉장한 소리 나겠다. 나 혼자 소리를 질러 봤자 그게뭐 거기 보태주는게 있겠느냐? 나는 좀 들어보자. 나 하나만은 들 어보자. 드디어 모월, 모일, 모시, 모 분, 모초가 왔습니다. 얼마나 큰 소 리가 났을 것 같아요? 사상 최대의 정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데요. 왜 그럴까요? 다 들어보기로 했어 요. 다 똑같은 발상을 했어요. 다 똑 닽은 발상, 나 혼자 소리쳐 봤자 그 것이 소리가 얼마나 되겠느냐? 다 른 사람이 다 소리치겠지 뭐. 누군 가 하겠지? 다른 사람이 하겠지? 그래서 세상은 아직도 여리고 길이 예요. 아직도 여리고 길입니다. 발견 된 이웃을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 랑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번째로 이 웃이 처한 고통의 환경을 개선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을 해보자는 것입 니다. 자, 본문의 사건은 주로 강도 만난 이 사람을 치료하는 일, 그를 회복시키는 일에 초점이 모아져 있 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꼭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저는 본문의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이런 질문이 생겨요.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만약 여리고 길에서 계속 강도를 만난다 면 지난 달에도, 지지난 달에도 여 기서 사고를 만났어요. 다음 달에 도, 그 다음달에도 또 계속해서 사 고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계속 앰브 란스를 보내고 간호사를 보내고 그 래서 이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 거기 에만 집중을 할까요? 아니면 한번쯤 은 이런 생각을 해야 옳지 않습니 까? 강도를 만나지 않도록 길을 좀 바꿔보면 어때요? 전보산대 세우고 밝게 만들어보고 경찰에 부탁해서 순찰대가 좀 왔다갔다 하고 가급적 이면 파출소도 그 옆에 하나 세우고 이렇게 환경을 바꾸어 보면 좀 낫지 않겠어요? 그런 일도 해야된단 말이 예요. 기독교 윤리 학자들은 혹은 기독교 사회학자들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향해서 할 수 있는 책임을 둘로 나누어서 말합니다. 하나는 social service라고 말해요. 사회봉 사. 사회봉사의 책임이 있어요. 이 사람을 치료하고 돌보는 것. 그건 사회봉사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가 있습니다. 'social action'입 니다. 사회행동이예요. 이 길을 바꾸 는 것, 주변의 환경을 바꾸는 것은 사회행동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혼자 할 수가 없 어요. 더불어 같이 해야되요. 그런데 저는 바로 그런 이유를 위해서 하나 님이 교회를 세워 주셨다고 생각을 해요.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다면 우 리는 이길을 어느 정도 바꾸어 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제는 한국 교회가 또 우리 교회도 이런 일에 좀 관심을 가지고 뜻있는 사람 들이 모여서 스타디도 하고 교회 앞 에 제안도 하고 우리 교회가 어떻 게 우리 주변의 사회를 바꾸기 위한 사회 행동에 우리가 건강하게 참여 할 수 있는지, 에를 들어서 환경을 보존하는 운동, 환경 오염을 막는 운동, 선거 때 공명 선거를 실천하 는 운동, 노인이나 장애인들을 이 복지 사역에 우리가 좀더 구체적으 로 참여하는 일 , 그리고 낙태가 많 아지는 이 시대에 낙태의 법이 낙태 를 장려하지 않도록 법을 바꾸어 가 는 일. 함께 해야될 일이예요. 함께 해야될 일. 그러나 아직도 어떤 사 람은 이렇게 말할 지 모릅니다 그렇 다고 해서 세상이 바꾸어 질건가? 나 한사람의 행동이 쉽게 빠르게 세 상을 바꾸지 못할지는 모릅니다. 그 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런 광경 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의 작은 노력, 작은 사랑의 노력,작은 사랑의 참여마저 완전히 사라진 세상을 생 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희망이 없는 세상이죠. 성경은 우리가 다가오는 천국,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가지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땅에서도 천국이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나라이 임하옵시며 'thy kingdom come'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하 나님의 뜻이 이 사회에서도 이루어 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칩니 다. 비록 내 작은 행동이 세상을 당 장에 밝은 세상으로 바꿀 수 없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최근에 제가 카 톨릭 수녀 시인 이해인씨의 시집을 하나 읽다가 이런 아름다운 시를 발 견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시럐 요. 엘리자베스 노벨이라는 사람이 쓴 동시, 어린아이들의 시인데 시의 제목이 'A little' ,'조금' 이 시의 제목이예요. '조금' 설탕을 조금 가 지고도 음식맛이 달게 된다네. 비누 를 조금 가지고도 내 몸이 깨끗하게 된다네. 햇볕을 조금 가지고도 새싹 이 자라난다네. 조금 남은 몽당 연 필로 나는 책 한권을 쓸 수 있다네. 조금 남은 양초, 하늘하늘 춤추는 불꽃 이 불꽃은 여전히 어둠을 밝힌 다네. 그리고 수녀 시인 이해인씨는 자기의 신앙 고백 같은 이런 투명 한 고백을 말합니다. 언제나 조금의 진리를 잊지 않고 조금의 보석이 뿜 어내는 행복의 빛을 잃지 않고 살고 싶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풀잎처 럼 나는 겸허하게 흔들리면서 감사 하면서 그리고 조용히 조금씩 사랑 하면서. 이 사랑에 젖는 이 계절이 기를 소망해 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