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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신 주님(요 16:28-33) / 이수영 목사

by 【고동엽】 2021. 12. 1.

<세상을 이기신 주님> 요16:28-33
새문안교회 부활주일 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의 제일 끝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의 싸움이, 그의 삶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야말로 진정 고통스럽고 피흘리는 마지막 승부가 시작될 시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승리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누가 보아도 예수님의 완전한 참패라고 할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그는 세상을 이겼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앞당겨 승리를 선언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목격한 군중들의 열광적인 환호에 도취되어 착각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들이 곧 돌아서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함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배신하고 자신을 팔아넘길 것도 알고 계셨고(마26:21-25), 본문 30절에서 보듯, 주께서 모든 것을 아는 분이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분이시라고 이제야말로 믿는다고 장담하던 제자들도 곧 다 자신을 버리고 흩어질 것임도 알고 계셨으며, 심지어는 수제자 베드로마저도 세 번씩이나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마26:33-35).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 연달아 닥친 일들이 무엇이었습니까? 제자의 배신, 체포, 구금, 심문, 폭행, 조롱, 모함, 무고, 흑색선전, 단죄, 그리고 처형이었습니다. 힘 가진 자들의 대규모 여론몰이와 속전속결식 공세 앞에 한 차례의 저항도 없이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짧은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셨겠습니까? 다 알고 계셨습니다. 다 알고 있다는 것은 피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에 관해 말씀을 드렸는데, 사실 그 일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의 뇌관에 불을 붙인 사건이었습니다. 원래 넓은 의미의 예루살렘 성전에 포함된 감람산에는 제사에 바쳐질 짐승들과 기타 제물들을 파는 시장이 네 군데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방인의 뜰이라 불리우는 성전 안에도 제물시장이 생긴 것은 고위층의 이권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방인의 뜰 안의 제물시장은 그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와 그 장인 안나스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강도짓과도 같은 폭리와 속임수로 벌어들인 돈들은 고스란히 그들의 손에 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시장을 단 번에 없애버렸으니 가야바와 안나스가 가만있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냥 모른 척 눈감고 지나며 앙심 살 일을 하지 말고, 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자극했던 말들을 다 취소하거나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잘 하듯이 본의와 다르게 언론이 왜곡시킨 것이었다고 말바꾸기를 하셨더라면 살아남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가룟 유다가 체포조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그 자리에 가지 마시고 숨어 계시던가 아예 갈릴리로 도피해 버리셨다면 잡히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요18:1-4에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다 아시면서도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서셨을 때도 마지막 살아남으실 기회는 있었습니다. 빌라도 자신은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믿고 있었고 어떻게 하든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썼습니다. 따라서 그 때 빌라도가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하시고 좋은 인상을 주시거나 감동적인 언변으로 당신의 무죄를 적극 주장하셨더라면 풀려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어조로 짤막하게 답하시고는 침묵해 버리셨습니다.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신 것입니다.






이 모든 기회를 놓치셨더라도 하려고만 하셨다면 폭풍을 가라앉히고 귀신을 내쫓으며 병든 이 죽은 이도 살리는 그의 신적 능력으로 옥문을 부수시거나 병사들의 눈을 멀게 하시거나 베드로가 한 번 칼을 휘두를 때마다 한 천 명씩 쓰러지게 하시며 물 위도 걸어가는 초능력을 발휘해서 바람처럼 사라질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또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5병2어의 이적을 행하던 그 능력을 발휘해서 대제사장들이 뿌린 돈보다 더 많은 이익을 예루살렘 전 거민에게 안겨줌으로써 민심을 다시 예수님 편으로 180도 돌려놓을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풀려나고 살아남기 위한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라고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꼭같은 인간으로서 예수님 또한 순간순간 극심한 두려움과 번민에 사로잡히곤 하셨습니다. 막14:33-34에 따르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하시며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며 깨어 있어달라고 당부하시기까지 했고,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14:36)라고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눅22:44는 그 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절규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뻔히 알고 계셨던 그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피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담당하셨으며, 또 어떻게 그 고통과 치욕과 죽음을 내다보시며 오히려 승리를 선언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두 가지 답을 우리는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일은 해야 한다는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32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예수님께는 사람들로부터 혼자 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만으로 족했던 것입니다. 그 확신이 마지막 결정적인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승리를 선언할 수 있었던 이유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을 원하고 계십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십자가를 피하지 않게 하고 그 어떤 처지에서도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힘인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그의 일생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일만을 하며 사셨고, 또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온전히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하실 정도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며 그의 일만을 행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직후에 나오는 긴 기도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7:4). 가룟 유다의 안내를 받아 예수님을 잡으려 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했을 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더러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0-11)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가 무엇인지,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아시면서도 그것을 피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임을 알고 계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만이 그가 이기는 것이라 믿고 계셨기에 그는 십자가를 지시고 거기서 죽는 것을 그의 승리라고 제자들에게 밝히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행하는 것 자체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결과와 상관없이 그 자체가 이미 승리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과정과 방법을 바로 하며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인간적인 수단과 세상적인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하거나 세상적 승리를 바라거나 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승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이기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셨는데 그야말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온 세상과 맞서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중들과, 고위성직자들과 지도층과, 로마정권과 그 군대와 맞서셨습니다. 그나마 3년간 그를 밤낮으로 따르던 열두 명의 제자들도 다 그를 버리고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진짜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의 승리는 그 엄청난 세상과 직접 맞붙어 싸워 쓰러뜨린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고, 그 자신에 대한 승리가 곧 세상을 이기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대면하는 적수와 이 세상이 아무리 무섭고 커 보여도 승리의 열쇠는 우리 자신에게 달린 것입니다. "피하거라, 타협하거라, 모른 척 하거라, 부인하거라, 기억나지 않는다 하거라, 아부하거라, 너도 돈을 뿌리고 뇌물도 쓰거라, 사서 고생하지 말거라, 도망가거라" 등등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유혹과 시험을 물리치는 싸움에서의 승리가 곧 세상을 쓰러뜨리는 승리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바로 믿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만 행하면 그것으로 승리는 이미 확정된 것입니다. 그 자체를 승리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인시켜준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부활은 오늘 본문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하신 예수님의 승리선언이 허풍이나 오기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말씀이 괜한 말씀이 아님을 증명해주신 것입니다. 부활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완성과 성공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그를 믿고 따르며 그와 함께 십자가 지고 그와 함께 죽는 삶이 곧 참된 승리를 거두며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누리는 길이라는 주님의 약속이 진실됨을 확증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힘이 없으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힘이 없으면 십자가를 지지 못합니다. 힘 없는 사람은 금방 항복하고 어떤 비굴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십자가를 피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힘이 있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아시면서도 그것을 피하지 않으시고 당당히 지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바로 믿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질 때 그것이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당하고 패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는 진정 강한 사람만이 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 강함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신뢰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을 온전히 행하는 순종입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도리요 곧 승리인 줄 확신하며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을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환난을 앞두시고 승리를 선언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를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게 하심으로써 그의 승리를 확증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말씀대로 우리의 믿음의 여정 속에서 만날 그 어떤 환난 앞에서도 담대하며 흔들리지 않으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믿음의 삶과 행동이 바위에 부딪쳐 부숴지는 계란 같아 보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것이 주님께서 지워주시는 십자가라면 물러서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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