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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새벽기도.설교 (시편 25편)

by 【고동엽】 2021. 12. 1.

새벽기도 (시편 25편)

시편 25편은 모두 22절로 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히브리어 알파벳 22자의 첫 글자로 모든 구절이 시작합니다. 첫 절은 알렙프, A로 시작되고 두 번째 절은 벳트, B로 시작되고, 세 번째 절은 김멜, G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모두 22절로 돼 있습니다. 이 시편을 잘 읽어보면 이 시인이 자기 죄 때문에 이런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아니면 원수대적의 박해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약간 불분명합니다. 그런데 둘 다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나서 한참 후에 그 아들 압살롬이 다윗의 권위에 도전했을 때, 그것은 다윗이 젊었을 때 저질렀던 밧세바의 범죄 사건을 생각나게 만드는 또 하나의 고난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우리나 고난을 당할 때는 내 죄와 관련되지 않았을까, 지금 이렇게 비통한 고난을 당하는 것 보면 내가 뭔가 옛날에 저질렀던 죄와 관련이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기 때문에 중간 중간에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자기가 지금 현재 고난당하는 것은 죄 때문은 아닐지라도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우리가 하나님께 저지른 죄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 상심하는 것보다 우리 죄로 인한 하나님의 그 상처 입은 그 마음을 스스로 완전히 치료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이것은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반드시 선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논리적으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엄청나게 복잡한 로봇을 만든 사람, 그가 지혜롭지만 반드시 선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선하지 않아도 정밀한 기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유명한 그림을 그린 화가가 위대한 예술적 영감을 가지고 그림을 잘 그렸지만 그 사람이 이렇게 지혜롭고 재능 있는 예술가지만 동시에 선해야 할 논리는 없는 거거든요.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참 우발적인 발견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완벽히 우주천체만물을 창조하시고 전능하신 힘으로 그 수억 개의 별들 수억 개의 성단과 성운이 광막한 우주를 이동하더라도 충돌하지 않고 이 세계를 질서 있게 붙드십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그가 도덕적으로도 선해야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은, 인간의 죄가 흉악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가 하나님께 대수롭지 않게 여김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가 하나님을 속상하지 않게 하기 때문에 그걸 쉽게 용서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자녀가 여러분 사무실에 들어와서 중요한 편지에다 잉크를 쏟아서 망쳐놓았습니다. 다시 열 장의 편지를 써야 한다, 여러분이 짜증나는 것이죠? 이런 일들은 용서하기 힘들겠지만 그러나 내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한 종이에 우리 아이가 낙서를 한다하면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죄가 가볍고 사소하기 때문에 쉽게 용서하는 게 아니라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이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보다 더 놀라운 발견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발견한 것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과 똑같은 우발적 발견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는 사람들은 지금 현재 내가 내 모양과 형편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것처럼 느낀다 할지라도, 내 죄 때문에 이런 비통한 고난에 빠졌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 죄를 압도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죄를 짓지도 않은 사람처럼 대할 만큼 하나님은 인자하심과 긍휼이 풍성함으로 하나님은 나를 보고도 싫증 안 냅니다. 나는 하나님께 못 나갑니다.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우리 수준의 양심으로 못 나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 다음날,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할 때는 마치 나를 처음 영접한 것처럼 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정말 크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고난에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Oh my Lord, I lift up my soul to the Lord. 내 영혼을 하나님을 향해서 번쩍 들어 올립니다. 내 영혼을 당신을 향하여 번쩍 들어 올립니다. 이것은 쉬운 태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하루 삶을 잘 분석해보세요. 여러분이 어떤 일이 발생할 때 하나님을 향해서 영혼이 막 쏟아지는 그런 일들이 쉬운지, 하나님을 향해서 초점 잡힌 부르짖음이 쉬운 일인지 생각해보세요.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인은 내 영혼이 주를 향하여 집중되게 들어 올렸습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지금 주만 의지합니다, 시편에서 의지한다, 의존한다, 우러러본다, 이 말은 아주 초점 잡힌 기대를 의미합니다. 한 번 고개 들고 우러러 본다는 것 아닙니다. 주를 우러러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종일 주님만 생각할 때 그야말로 주를 우러러보았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좌절감이 생깁니다. 그러면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주를 우러러보지 않은 셈이다, 그렇습니다. 한 번도 주를 우러러보지 못하고 이 산만한 도시생활에서 실제로 주님께 초점 잡힌 집중의 기도를 못하고 대부분을 산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점 잡힌 기대와 기도가 없기 때문에 능력을 경험하는 일이 매우 드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이게 낫습니다. 한 10년 방탕하게 살다가 1년 뼈 빠지게 탁 초점 잡혀 기도하는 것이 쉽게 말해서 대충대충 20년 신앙생활 하는 것보다 나은 겁니다. 보통 교인들은 신앙의 본질적인 경지에 도달도 하지 못한 채 매우 피곤하고 피상적으로 몇 십 년을 교회를 다닙니다. 이건 어리석은 낭비입니다. 이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겁니다. 차라리 세상에 가서 죄도 좀 짓고 세상이 뭔지 구경 좀 하고 나서 돌이켜서 딱 집중된 기도를 한 번 하는 게 낫지, 깊은 기도의 경지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하나님께 영혼을 쏟아놓는 기도의 법도 터득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그냥 여가선용으로 왔다 갔다 한 사람들은 다닌 만큼 손해라는 겁니다. 왜 다닌 만큼 손해입니까? 귀는 많이 들었기 때문에, 20년 동안 죄 짓고 돌아온 사람들은 모든 하나님 말씀이 세포 마디마디 마다 감동과 전율로 다가오는데 20년 동안 대충 다닌 사람은 듣기는 다 들었기 때문에 하나도 감동을 못 받습니다. 어떤 게 손해입니까? 대충대충 20년 다닌 것은 19년 동안 죄 짓고 20년째에 주님께 돌아온 것보다 더 나쁜 거예요. 신앙은 이렇게 냉혹합니다. 일정한 단계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은, 신앙의 일정한 단계, 여호와를 향해서 집중적인 기도를 해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초점 잡힌 기도를 종일 해보지 못하고 그런 경지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은 성경의 언어가 낯선 외국어입니다. 영어하고 똑같습니다. 결국 종래에 깨닫지 못합니다. 여러분 최소한 신앙인이 되려면 신앙인의 언어, 이 단계에 올라와야 합니다. 이 단계에 올라와야만 진보가 있고 성장이 있는 겁니다. 이 단계에 오지 못하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에 이르지 못해서 거짓 교사들에게 넘어갑니다. 디모데후서에 어리석은 부녀들처럼 된다는 겁니다.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고 거짓교훈의 유혹에 빠져드는 사람과 같다, 그래서 통일교에 빠지고 여호와의 증인에 빠지는 사람들을 대개 보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해서 가정을 방문해서 부녀들을 유혹하는 거짓된 꾐에 빠진다는 거예요.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자기 신앙생활을 내 일생에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을 해보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일주일에 한 번씩 그냥 가는 걸로 생각하지 말고 정말로 나는 신앙인의 이름으로 살아보겠다, 비장한 각오와 결단이 있어야만 한 단계의 중첩된 비약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게 없으면 교회는 뭡니까? 교회당 건물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신앙의 깊이에 들어오지 못했다, 이 사람은 뭡니까?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3절 ‘주를 바라는’ 4절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얼마나 구체적인 언어입니까? 이렇게 구체적인 기도를 여러분 모두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부녀들처럼 되지 마시고 이런 구체적인 기도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개 여러분이 기도하는 제목은 몇 가지에요? 가정 언저리에서만 기도해요. 우리 교우들 기도제목을 보면 가정언저리에서 나오는 기도제목, 직장 언저리에서 나오는 기도제목, 인간관계 언저리에서 나오는 기도제목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것들은 기도응답을 받을만한 구체적인 쟁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구체적인 쟁점을 가지고 한 번은 기도응답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한 번은 그것을 맛을 봐야 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4-9절은 전부 다 인도와 지도에 관한 언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5절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종일 주를 바라는 것이 힘들다면 종일 낮 시간 동안 이렇게 말해보세요. 종일 낮 시간 동안입니다. 잠을 8시간 자고 식사시간 제하고 나면 종일 집중적으로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대개 6시간, 8시간, 우리 주부들은 가장 많은 시간이 8시간입니다. 8시간 동안 종일 주를 바라는 방법은 뭘까요? 가만히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고, 아니면 찬양을 8시간 계속 하는 방법도 있고, 아니면 성경을 쓰는 방법도 있을 수 있고, 아니면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며 글을 기록하는 이런 방식 모두가 주를 바라는 겁니다. 나는 사람을 바라지 않고 주를 바랍니다. 내가 당하는 지금 이 곤경이 내 죄와 관련돼 있다 할지라도, 7절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그 말씀 기억납니까? 이사야 1장 18절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다시는 기억도 나지 않는 겁니다. 히스기야 왕이 이사야 38장에서 자기 중년에 음부, 지옥으로 떨어지는 치명적인 암을 경험하면서, 히스기야가 일종의 피부암에 걸렸다고 보입니다. 히스기야가 드렸던 기도가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내 죄를 망각의 강으로 던지시기 바랍니다.


7절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나를 마치 새 사람 만나듯이 만나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앙망입니다. 그걸 종일 기다리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오늘 하루도 여러분 삶을 산만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제가 늘 강조하는 초점 잡힌 기대, 초점 잡힌 기도, 초점 잡힌 묵상, 산만함에 흐트러지지 말고 한 기도제목, 저는 여러분들이 되도록 구체적으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 구체적으로 기도해야만 기도 결과에 초점이 잡혀서 쳐다보고 계속 기도하게 됩니다. 만일에 이렇게 기도하면 안 됩니다. 우리 자식들 잘 되게 해주십시오, 이러면 안 됩니다. 우리 자식의 어떤 버릇이 고쳐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내가 나의 직장에서 두루 모든 사람과 평안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이 과장과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사업의 곤경을 기도할 때도, 주여 나의 불경기가 끝나게 하시고, 그렇게 기도하지 마시고, 어디 어디서 못 받은 돈도 받게 하시고 또 내가 새로운 공사할 곳이 나오게 하시고, 이런 식으로 기도해야 하나님의 지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구체성과 초점 잡힌 기도가 사라지고 나면 종일 바라고 싶은 마음이 안 일어납니다. 그러면 나에게는 내 인생 주변에는 이렇게 종일 기도할만한 고달픈 기도제목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인생은 너무 형통한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22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이것 보세요. 이 시인이 결국 자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이 시인은 자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기 민족을 이야기한 겁니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 나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자기민족이 당하는 곤경입니다. 자기민족, 자기 교회, 자기 가정 보다 더 큰 공동체가 당하는 고통을 1인칭 단수로 표현한 겁니다. 이런 곤고함과 이런 고달픔과 하나님의 지도를 구하는 것은 자기 민족이 처한 영적곤경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어요. 물론 자기의 영적곤경임과 동시에 자기민족의 영적곤경임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다른 사람 또는 내가 속한 보다 더 큰 공동체의 기도제목도 나를 초점 잡힌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16절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는 전혀 안 괴롭다 이겁니다. 내 괴로운 시절은 다 끝났다, 우리교회에 와서 안 괴롭다, 이렇게 하지 마시고 나는 괄호하고 이스라엘,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도를 잘 보면 분명히 기도한 사람은 다윗인데, 제일 마지막에 보면 이스라엘 회중입니다. 자기 속에 누가 들어 있습니까? 이스라엘 회중의 고통이 들어 있습니다. 17절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곤고와 환난 때문에 잠이 안 들고 초점 잡힌 기도가 된 적이 있죠? 여러분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사시면서 여러분 마음에 근심과 곤고와 환난, 이건 전부 다 다윗자신의 개인의 곤고와 환난이면서도 그가 속한 공동체의 곤고와 환난입니다. 우리교회는 우리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 전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계 교회를 생각해야 하고, 우리교회는 예수님의 우주적인 교회의 지체에 불과합니다. 우리교회가 잘 되고 다른 교회가 잘 안 되면 좋은 게 아닙니다. 우리교회와 다른 교회가 동시에 잘 될 때, 그게 좋은 겁니다.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러분 마음에 이 기도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바로 과부의 기도입니다. 과부는 뭡니까? 도와줄 남편이 없어서 늘 무시당하는 과부, 불의한 재판관 앞에 기각 당하는, 소송 낼 때마다 기각합니다. 영장, 체포해달라고 부탁하면 체포할 이유 없음, 땅 좀 다시 회복해달라고 하면 소유권 시효는 만료되었음, 이런 식으로 계속 나옵니다. 나는 곤고와 환난에 처박혀 있으니, 이 곤고와 환난은 내 죄로 인한 것이라 할지라도 내 죄보다 훨씬 큰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이걸 제발 건져주시기 바랍니다, 19절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이제 보니까 개인의 곤경으로부터 시작한 시편 기도가 공동체의 곤경으로까지,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결론을 얻습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곤고한 기도제목이 많은 사람은 무엇을 위해 준비한 사람일까요? 개인적으로 고달픈 기도제목이 많은 사람은 결국 무엇을 대비해서요? 공동체의 기도제목을 짐 지는 전문가가 되도록, 이해가 됩니까? 지금 우리 두 집사님들은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수호천사가 돼요. 자기 자녀문제 때문에 고달픈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분 저분들은 개인적으로 곤고함을 당했지만 결국 그걸로 엄청난 기도의 연단을 받아서 모든 다른 아이들의 곤고함에 신적인 연민과 동정심을 갖는 사람이 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 하나님 나만 찍습니까? 왜 내 자식만 사고뭉치 아이입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고, 내가 이렇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어요? 내가 이렇게 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곤고함을 짐 지는 영혼의 갈렙, 영적권유, 그것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연단의 세월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개인적으로 당하는 곤고함도 쓸모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만 당하는 곤고함이 쓸모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당하는 곤고함과 외로움이 쓸모 있는 이유는 나와 같은 고난을 당하는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위한 영적인 중보자가 되어 그들의 기도자가 되도록 나의 이런 곤고함을 허락하신 겁니다.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생활 했을 때 드렸던 기도고 바로 이민족의 압제에 시달릴 때 드렸던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이 쓰실 사람을, 그 다음 말 들어보십시오. 시험 들지 마십시오. 당신이 쓰실 사람을 약간 고생을 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sadistic, 남 괴롭히면서 즐거워하는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은 쓰시려고 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가는 평탄한 코스 대신에 다른 코스를 주십니다. 진짜 중요한 아기 낳을 사람은 빨리 못 낳습니다. 25년 기다리다 낳았고 20년 기다리다 낳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남들이 쉽게 가는 것을 우회로를 거쳐 가면서 하게 만들 때는 뜻이 있는데, 그 뜻은 무슨 뜻일까요? 천천히 느리게 가는 하나님의 섭리에 발맞추는 영적인 분별력 지각력 이런 것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런 환난과 곤고함을 주십니다. 환난과 곤고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 동포의 환난과 곤고함까지 같이 품었던 다윗과 같이 여러분 모두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수험생 있으면 다른 수험생까지 기도하는 그런 분이 되기를 바라고, 아픈 분이 있는 사람은 다른 아픈 환우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곤고함과 환난 속에 하나님을 바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14년 동안 요즘 말로 척수암입니다., 척수 카레이스, 라고 하는 암과 같은 뼈가 썩어가는 병에 걸린 미우라 아야꼬가 누워 있었습니다. 여러분 14년 동안 누워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14년 동안 누워 있으면서 미우라 아야꼬가 환자들을 위해서 쓴 글이 너무나 많습니다. 얼마나 주옥같은 글이 많은지, 14년 동안 의사의 진단을 수없이 받았는데 암이라는 진단을 받자마자, 암도 만드신 하나님 찬양합니다, 이렇게 썼습니다. 암과 공존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에 반대하다가 완전히 사회적으로 생매장 당했습니다. 생매장 되었을 때, 일본의 천재와도 같았던 지성인인 우찌무라 간조가 사회적으로 암매장되고 비난받았을 때 썼던 글이 <기독신도의 위로> 이런 수필 글들은 모든 배척당하고 추방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주옥같은 영혼의 산물이 나오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 나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나만,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도 비로소 이 우주적인 화음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고난에 동참하는 구나, 나에게도 악기 하나를 주셨구나, 나는 그동안 방관자였는데 나에게도 우주적인 고난의 고통과 환난의 교향곡 악단에 나도 하나님 부르셨구나, 그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께서 우울증을 이길 수 있고, 죄 때문에 벌 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건 시험에 들게 만듭니다. 죄 때문에 벌 받는다고 생각하면 두 가지 논리적으로 잘못된 겁니다. 첫째 우리가 우리 죄를 벌주려면 지금 이 정도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교통사고 당해서 뼈가 부러져서 전치 3주를 받아서, 주여 내 죄를 치십니까, 이러는데 죗값을 치르려면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합니다. 우리를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습니다. 죄 때문에 이런 고난이 왔다고 1대 1로 대응시키는 일을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설령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내가 지은 죄보다 하나님의 그 본성 안에 있는 무궁무진한 인자와 자비 때문에 내 죄가 갖는 불쾌함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하고 나를 대하기 때문에 이것은 죄에 대한 징벌 이상의 플러스알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기도하십시다. 아픈 교우들 아픈 형제자매들 기도할 사람을 생각하시면서 조용히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이렇게 영혼이 파탄이 나버려서 원수대적들 앞에 매일 조롱받으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난의 진토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이 시인의 울분 앞에 저희가 마음을 엽니다. 주님 우리도 고난이 많지만 초점 잡힌 기도를 드리기 어려울 만큼 산만한 시대에 삽니다. 주님 우리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것이 있고 우리 남편과 배우자를 위해서 기도할 것이 있지만 그 기도제목을 생각하다가 납덩이처럼 무거운 근심에 눌려서 쓰러지고 맙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걸 알지만 하고 싶어도 안 돼서 좌절할 때 하나님 우리는 슬픔이 강물처럼 흘러내립니다. 아버지 오늘 이 시인처럼 우리가 저지른 죄 때문에 이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무궁한 인자와 긍휼을 기억하며 영적으로 사기를 진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오늘도 하루 출근합니다. 우리 가정을 지킵니다. 우리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내 사랑하는 친구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아버지 동역자들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는 하루가 되게 해주시고 내가 고난의 진창에서 부르짖을 때 비로소 나와 같은 고난 속에 이미 오랫동안 진창 속에 빠져서 기도하던 다른 이스라엘 동포들을 발견할 수 있는 기쁨도 주시고 마침내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내 마음의 신적연민도 허락하여 주소서. 하나님 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 중에서 질병의 고통으로 쓰러져가며 고통을 호소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해 이제 외롭게 사그라져 가는 영혼들 있습니까? 기도할 소망이 끊어져버리고 하나님을 부를 힘도 없어져버린 사랑하는 영혼들 그들을 살려주시고 보살펴주소서. 하나님 왜 나만 이런 고난에, 그런 깊은 절망에서 건져주소서.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 시험을 앞둔 자녀들 학교생활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자녀들 모두 기억하여 주시고 하루에 차마 견디기 힘든 가득 찬 고난을 안고 돌아오는 그들을 위로하여 주소서. 성취하지 못하는 일 때문에 어깨가 축 쳐져 돌아오는 사랑하는 남편들도 사랑하는 형제들도 위로하여 주시고 아버지 기도했던 제목이 응답받지 못하고 기도했던 자녀들이 기도한 것과 반대로 되어가는 것을 볼 때 기도할 마음이 끊어져버린 어머니들도 건져주시고, 주를 의지하는 자 수치를 당치 않는다는 이 절대적 원칙 앞에 위로받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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