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 주제에 있어서, 누가 맞고, 누가 틀리다.. 의 싸움으로 가면 곤란합니다.
<칭의 받은 성도는 성화되어야 한다>는 큰 주제는 모두 다 일치합니다.
다만 <인간의 의지로 성화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칭의가 그렇듯이, 성화도..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되어진다>는 주장이 서로 다르죠.
-부모가 은혜로 애를 다 키워준다.. 는 말도 맞고
-애가 자기가 잘 크려고, 자기 의지로 애를 써야 한다..는 말도 맞는 것입니다.
다만, 아래의 ‘개혁주의 성화론’에 감사한 것은,
성화에 있어서, 보통 신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해 주었다는 점입니다. /편.
▶성화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앞 시간(7강)에 이야기한 것 같이,
그것도 은혜위에 서 있으며,
하나님의 열심이, 이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것까지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는 분명히 책임을 강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 ‘성화를 인간의 책임으로 강조한다’라는 말을
‘성화가 내 조건, 내 근거 위에 서 있다’라는 의미에서 ‘책임’이라고 하지 않고,
성화의 내용이, ‘나’를 떠나서,
어디 제 3의 허공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우리는 이것을 ‘책임’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되,
나라는 존재를 바꾸는, 나라는 인격을 완성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이 나의 실존과, 나의 성격을 바꿔나가는 일이라서
우리 경험 속에서는 이 성화라는 것이
내 소원이 되고, 내 각오가 되고, 내 몸부림이 되기 때문에
‘책임’이라는 단어보다 더 적절한 단어를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책임’이라고 이야기 한다고 해서
이 승리와 실패가 또는 그 이유와 조건이
내 손안에 있다 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1:3~9절 입니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신의 성품으로까지’ 이게 성화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하셨으니’
그다음이 다 명령형이고, 책임적으로 분명히 나오죠.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이 전체 내용은, 지금 우리가 읽은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의 성품으로 목적하고 계시고,
우리에게 신의 성품의 완성을 위하여 어떤 관계, 어떤 과정,
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이런 내용들이 우리에게 요구되면서,
우리의 소원이 된다는 거죠.
우리의 소원이 돼서 이걸 우리가 바라고, 원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하는 일로써
‘성화’라는 일이 현실적인 과정을 가집니다.
그리하여 끝 절, 11절에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라는 표현을 쓰죠.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장소와 환경적 보상으로써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의 완성이라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완성의 목표다
하는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보시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어떤 형편, 어떤 환경, 어떤 조건 속에 있던지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고 계시다(하나님의 주권이다?)는 사실을 내가 먼저 확인해야 됩니다.
▶우리가 봉사를 하든, 우리가 시련을 당하든, 남에게 도움을 주든, 도움을 받든,
윗사람이 되든, 아랫사람이 되든,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다루고 있다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 기독교신앙에서 기복신앙이 좀 더 성경적으로 될 줄을 믿습니다.
기복신앙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복 받자고 예수 믿는 것이 그 틀린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신 것도 성경적인 약속입니다. 뭐가 복이냐가 문제죠.
뭐가 복이냐 그러니까 우리가 이야기하는 복은 세상적인 복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비하신,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만의 주실 수 있는 것들을 말한다는 차원에서 그렇죠.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사실 하나님이 어느 한순간도 우리를 놓아두신 적이 없고,
우리의 어떠한 형편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고 계시고, 기르고 계시고,
완성시켜 나간다는 사실로,
모든 성도들의 신앙 현실에 경험하는 삶의 모든 정험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신앙적인 시각을 갖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너희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라’ 라는 명령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완성하기 위하여 일하고 계시니까,
‘순종하라’ 하나님의 목표하심을 잊지 말고, 힘써 따라 가라하는 권면이죠.
우리에게 모든 “책임”을 지라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아직도 남아있는 구원의 복된 승리와 영광된 자리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얼마나 기도할 때, 우리의 소원들을 아룁니까?
세상적인 것만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우선적으로,
일반 성도들이 더 많은 신앙의 승리와 주를 닮은 신앙의 인격을 요구하는,
이런 것들이 이미 우리의 소원과 기쁨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참 귀한 것이죠. 앞 시간에도 이야기한 봐와 같이
그것이 우리가 소원하고, 갈구하는 대도 불구하고 단번에 응답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많이들 당황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런 소원과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을 격려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지금 정당한 신앙의 완성을 향하여 옳은 길을 가고 있다
라는 이해와 그 확인이 사실은 더 많이 주어져야 옳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성화의 내용 속에서, 우리가 책임으로 인식하는 성화의 내용들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시고, 그리고 그 내용들이 우리에게 소원이 되며,
기쁨이 되며, 그래서 책임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이 확인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에도 어려움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이 우리의 소원과 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대만큼 결과가 속히 나오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뜻밖에 오류를 범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무속신앙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가 여기에 틈을 노릴 수 있습니다.
내가 더 많이, 더 많이, 노력하면 결과가 속히 이뤄질까라 생각합니다.
세상적인 차원에선 옳은 것이고, 성경에도 사실 그런 법칙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렇게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하나 오해하는 건 뭐냐 하면
우리는 신앙의 승리가 죄를 이기는 것, 실패하지 않는 것,
단순한 기준을 갖고 보통 성도들이 신앙 싸움을 하는데,
성경은 뜻밖에 그런 아주 단순한 윤리적이고, 도덕적 차원에서의 승리를 목적하지 않고,
보다 깊은 신앙적인 승리, 보다 본질적인 싸움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우리 나중에 후반부에 가면 이 부분을 집중할 것입니다만,
말하자면 자기 의를 뽑는 싸움을 시킵니다.
우리가 근거가 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우리로 하여금 평생에 걸쳐서 아주 치를 떨게 만듭니다.
◑내가 근거가, 우리 대표적인 예로, 욥을 보십시오.
욥기를 보시면 욥에 대한 서두의 묘사를 성경이 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욥은 신앙도 그렇고, 아무 흠이 없는 자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이제 시련을 당하게 되고, 세 친구가, 가까운 세 친구가 찾아와서 욕을 하고 가죠?
‘너, 왜 죄짓고 회개하지 않느냐?’ ‘난, 죄 지은 거 없다.’
‘네가 죄짓지 않았는데 천벌이 내렸단 말이냐?’ 이것이 크게 논쟁거리가 된 것이죠.
욥이 ‘나도 그것이 궁금하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이런 벌을 받아야 되는지 나도 궁금하다.
하나님하고 맞대면해서 물어보고 싶다.’ 친구들이 뭐라 그래요?
‘말을 그 따위로 하는 것만 봐도 잘못됐다.’
욥이 거기에 길게 대꾸를 합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난 잘못한 거 없다.
난 남의 것을 훔친 적도 없고, 탐을 낸 적도 없고, 거짓말을 한 적도 없고,
실수한 적도 없다. 나는 흠이 없는 자다. 그런데, 이 일을 당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중에 판정하러 나타나서 세 친구가 틀렸다는 거죠.
욥은 틀린 게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 왜 그 일이 있어야 되죠?
불로 연단하여 정금을 만들기 위하여, 거기서 불로 연단하여 태워버리고,
정금만 남기기 위하여 태웠어야 하는 게 뭐냐 하면 바로 그것,
욥이 잘못한 거 없으면 다다, 이것이 깨어져야 하는 거죠.
‘잘못하지 않으면 다’인 것은 기독교가 아니고 윤리고, 도덕이고, 군자의 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를 윤리 도덕적 기준에서 무흠한 자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영적인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녀, 큰 그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의 자녀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닮고, 그리스도를 닮고, 성령이 거하실 전이 되고,
이렇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해가 우리에게 깊이 이해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요구하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하여
무속신앙적인 발상을 해서 더 많은 진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죠.
드디어 하나님을 감동시키기를 작정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 많은 열심을 내는 일들을 보십시오. 철야하고, 금식하고, 통성기도하고,
산기도하고, 이 모든 것이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죠.
왜 그것이 가치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배우고가 아니라,
내가 목표한 것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감동시키겠다고 들어가는 것은
성경하고는 사실 동떨어진 사상인 것입니다. 성경이 이런 요구를 하죠.
◑사무엘상 15장에 나옵니다.
사무엘상 15장은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울에게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하여
아말렉을 진멸하고 오라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사울이 좋은 전리품을 남겨온 바로 그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꾸중이 나오는 데입니다.
17절부터 보죠.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중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 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 유명한 사건의 핵심은 뭐입니까?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해를 돕자면, 그 뜻에 있어서는,
그 내용에 있어서는, 그 방향에 있어서는, 그 목표에 있어서는,
그 기준에 있어서는 하나님만이 인간의 모든 필요와 복된 것의 근거시다를 말하는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말을 듣는 것이죠. 따라 가는 것이죠.
순종이라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스스로 만들 수도 없고, 세상에서 대체물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빙자하여, 혹은 신앙을 빙자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힘을 불러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상이 됩니다.
‘탐심을 곧 우상숭배니라’ 나오죠.
그러니까, 내가 목표를 두고, 내가 가치를 결정하고 신에게는 명령만을 빌려오는 것,
이것이 우상입니다.
우상을 왜 만듭니까?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신의 초월적 능력을 빌리기 위해서, 우상을 만드는 거죠.
그렇게 가는 것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우린 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 된 마음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이 좋다는 것, 내가 하나님을 위한 다는 진실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바꿔놓는 그런 룰을 범할 수 있다는 것, 기억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이 뭐냐 하면,
제사가 그런 의미에서 나의 정성을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정성을 바치는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보듬으셔야 하는, 이 관계가 오해 되서는 안 된다는 거죠.
거역하면 어떻게 하죠, 거역하는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기독교 신앙에서는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오, 복이시오, 시편에 그렇게 나오죠.
하나님은 우리의 상급이시오, 방패시오, 산성이시오, 피난처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이시오, 우리의 소원이시오, 소요리 문답 1번이지요,
인간의 제일 되는 본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영원토록 그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 15장
그래서 같은 사상이 요한복음 15장에 예수님이 가르침 속에 이렇게 제현 됩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부터입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 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유명한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포도나무 비유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지는 줄기가 맺는 열매가 달리는 장소일 뿐입니다.
또 우리가 줄기에 붙어 있어야만 생명도 얻고, 과실도 얻습니다.
우리가 노력하여 과실을 맺어 줄기를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본 나무의 당연한 결실이 거기 붙어 있는 가지 끝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4절에 있는바와 같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다.”
얼마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과실을 맺어 포도나무에 갖다가 치장을 하는 식의 사고방식으로
얼마든지 전환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붙어있어야 됩니다. 붙어있는 것, 하나님으로부터만 뭐든지 나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 그것이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사울왕의 실패와 일맥상통하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사울의 실패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그가 아말렉에 가서 진멸하라는 적진 속에서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한 소와 양을 남겨온 것입니다.
그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는 가지가 포도나무를 치장하려고,
시장에 가서 감이랑 배랑 사다가 나무에 갖다 붙인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건 기독교신앙은 하나님만이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이요, 홀로 충만하시며, 홀로 주인이십니다.
홀로 은혜를 베푸시며 홀로 우리에게 기쁨이 되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 거하는 법이 뭐냐? 이 나무에 붙는 법이 뭐냐?
하는 대목이 재미있습니다.
9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그럽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에 붙어있는 방법인데,
“내가 아버지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을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럽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예수 안에 거하는 것,
포도나무에 붙는 법이 되느냐 하는 것이죠.
계명이란 내용을 떠나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지시, 하나님의 뜻입니다.
거기에 나를 맞춤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목적하시고, 의도하시는 일에
내가 수용이 되는 것,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복 주심과 하나님의 일하심에
내가 붙는 유일한 방법이 됩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예수 믿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죠.
지금 신앙장애문제를 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백성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나를 어떻게, 어떻게 붙들어 매느냐는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듭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 계명을 지킴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에 나를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수족이 되는 것이죠. 붙어있는 꼴이 됩니다.
그럼 나에게 하나님이 이루시는 그 결과들이 나에게 달리게 되죠.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식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줄기에 붙음으로써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가지에 달린단 말이죠.
이 개념이 다른 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이런 것을 좋아하실 것이라는 것을 긁어모으는,
싸우는 식의 방식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께 붙어 줄기가 결실할 일이 하나님이 일하심이 하나님이 결실하고,
나타나고, 형성되는 일, 이것이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며,
주 안에 있는 법이며, 이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훈련해야할 내용인 것입니다.
만들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붙어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죠.
◑갈라디아서 5장에 가면,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 나오지 않습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충성과 절제라는
사랑의 열매가 거기선 어떻게 등장하고 있냐하면,
사랑의 열매를 맺자가 아니라, 물론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갈라디아서 5장 16절부터 시작하여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중이냐 하면
‘너희는 성령을 쫓아 행하라’ ‘성령을 쫓아 행하라’ 같은 이야기입니다.
‘주 안에 거하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찢겨 불에 던지움이니라.’
세례 요한의 경고였습니다. 그렇죠?
열매를 맺으라가 아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
즉 아름다운 나무가 아니면 찍히는 것입니다. 존재에 관한 싸움입니다.
존재에 관한 싸움 이예요. 포도나무에서 엉겅퀴를 따지 않습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습니다. 그 이야기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누구냐라는 것을 뭐로 나오냐면
기독교 신자에 있어서 내가 누구냐는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만이 만들어내시는 결실이 달리는 존재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좋은 나무,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서 5장에서 논하는 것도 육체에는 현존하니
이러이러한 것들이랴, 거기 뭐 많이 나옵니다만은,
다툼과 허영과 당 짓는 것, 분리하는 것. 열매나무가 나오는가 봐라 말이죠.
왜요?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만들어 내신 열매를 만들 수 없거든요.
그러니까 성령이 열매의 등장도 뭐냐 하면
성령을 쫒고 있으면 이 열매가 맺힌다는 거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충성과 절제는
하나님만이 만들어주시는 것이요, 세상은 이것을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성령의 열매를 맺자라는 식이라 하면
우리는 자꾸 가지들끼리 모여서 주주총회를 하는 거죠.
가지들끼리 모여서 뭘 하자는 것이죠. 뭘 하자. 이것이 아니고
가지더러 어떻게 하라고? 포도나무에 붙어있으라는 거예요.
어떻게 붙느냐고요?
하나님이 시키는 걸해라. 내 계명을 지키라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인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요, 우리의 답이요, 우리의 상급이요, 우리의 방법이요,
우리의 기쁨이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희한하게도 우리의 인간적인 본성을
우리가 무엇을 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라는, 그래서 정성,
그다음엔 능력이라는 것이 더 큰 신앙적인 요소가 되고,
순종이 그것보다 뒤에 쳐져 있는 것입니다.
순종이 먼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말의 표현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합시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사랑합시다.’ 그러나 그 ‘사랑합시다’는 본질로 들어가면
‘성령을 따라 행합시다, 신앙대로 삽시다.’ 이죠.
사랑, 희락 이런 것들의 가치 때문에 이것이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이런 가치인 것을 만들어 내실 수 있고,
이런 것이 결실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그것을 결실하실 때뿐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결실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붙어있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뭐냐’하면 신앙이란 결국 순종이죠, 순종이죠, 신앙은 순종입니다.
무슨 순종입니까?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인식하고, 이해하고, 소원하고, 항복하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라는 명령을 따르는 이유는 방법이 아니고, 조건이 아니면,
그것이 우리에 기쁨이요,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말하자면 성화가 책임으로 표현되되
책임이 아니고 은혜이며, 믿음인 이유가 있습니다.
▶아니 이게 조금은 묘하게 넘어오죠. 우리가 은혜를 강조하면,
예외 없이 아무것도 안 해도 결과가 생깁니다라는 방임주의를 떠올립니다.
우리가 할 것이 없다고. 그런데 앞에서도 강조했다시피 은혜가 목적하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구원이 목적하는 것은,
나라는 인격적 존재의 완성이라는 말입니다.
이 인격적 존재의 완성을 신의 성품으로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신의 성품으로. 의요, 진리요, 거룩이라고요!
◑에베소서 4장에서는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의 성품이 참여가, 하나님이 목적하신 구원이 내 인격이고, 내 성품이고,
내 기질이고, 내 취향이고, 내 자랑이고, 내 감성이 되어야하는 일이니까,
우리 안에 이런 일들이 이뤄질 때,
우리가 그런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일들에 대한 감각, 감격, 확인, 의심, 갈등
이런 것들이 일어나고, 그 속에서 우리는 이것을 나의 것으로 취하려는 소원과
그래서 열심들이 나타나게 되고,
우리는 그것이 내 의지, 내 결단으로 이해된다 말입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렇게 함으로써 나로부터,
내 올바른 결단이나 헌신의 보상으로 이런 일들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음에 만드실 때부터,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복 주신 그때부터, 창조의 목표와 목적과 복 주심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그의 자녀 삼으시는 구원의 은혜와 목표 속에서
하나님이 이것을 목적하고 계시고, 작정하고 계셔서, 우리를 간섭하시고,
다루시기 때문에 일어난 형상들이요, 과정이라는 걸,
나중에 돌아보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이 뭐냐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을 항복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라 이야기 할 수 있고,
그런 차원에서 순종이 신앙의 최고의 본질입니다.
순종이, 순종이란 굴복이 아닙니다. 굴종이 아닙니다.
억압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말 행복한 항복입니다.
우리가 죄라는 것이 하나님과의 분리요,
하나님을 외면하고 거스르는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죄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려 자기 마음대로 하던 것이 죄였고,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없이는 세상적, 윤리도덕에서 가장 의로운 것으로 할 때,
가장 보람된 일을 할 때마저도 죄인이고, 죄만 짓는 것이라는 걸 이해하십니까?
누가 이런 걸 비유를 했죠.
‘하나님 없는 사람의 선행이란 해적이 부상당한 해적을 구해주는 것이다.’
이런 비유를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죠?
해적가문에서 오셔가지고 감동이 없으시나 봅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의란 없고, 선도 없고, 당연히 생명도 없고,
진리도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그러니깐, 죄란 하나님과의 화목을, 하나님하고 우리가 전쟁을 하지 말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자가 하나님과 묶여지고,
원래 창조와 구원의 목적이었던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과 구원의 완성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운명 지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신앙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요, 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요,
이 하나님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린 전인격의 관한 것이므로
삶의 모든 정황에 적용이 됩니다.
신자의 삶에 그 특별함은 하나님의 온 천하 만물의 주인이시고,
모든 인류의 주인이시고, 구원받은 우리의 하나님이신,
이 사실이 우리의 전 인격에 영향을 미치며 통치권을 가지시며, 주권을 가지시며,
그래서 우리가 겪는 삶의 모든 정황에 우리가 반응해야 될 거 아닙니까?
이 반응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의 이름으로,
우리가 반응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곧, 성도들의 신앙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꾸 특색화하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벤트성을 가지거나
또는 운동으로 자꾸 종교적인 특별한 상황으로만 끌고 가면 안 됩니다.
꼭 필요합니다. 필요에 의해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일을? 부흥회를 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위한 구국기도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해야 됩니다.
필요하다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키우는 삶에 실제적인,
보편적인 방법을 보면 조금 전에 말씀드린 거와 같이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항복, 하나님을 우리에 모든 필요와
기쁨과 감사와 목적으로 삼는 우리의 인격적 항복이
우리에게 허락된 삶의 모든 정황에서 이 하나님을 의지한 자의 반응,
마땅한 반응을 요구하는 것을 인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걸 가르쳐야 됩니다.
한국교회는 그런 면에서 보면 너무, 조금만 새겨 들어주십시오. 선동적입니다.
특색화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계기를 만들고, 분발케 하는 당연히 써야하는
교회와 교인들의 유익을 위한 방법들입니다.
그러나 그것 말고 일상생활은 무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들, 어떤 이벤트 속에서는,
아주 신자들의 태도나 책임이나 몫이 분명한데,
그걸 벗어나서 일상 속에 오면 몸 떠난 부모같이 쪽을 못 씁니다.
다른데서는 그렇게 키우시면 안 됩니다.
전 우주를 다스리시는, 전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 인류의, 전인격에 발언하시는 그 하나님의 자녀들,
그런 수준, 안목, 분별, 실력을 갖추도록
우리가 성경을 가르치고, 신자들을 훈련시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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