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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대각성/예수님을 만난 사람(눅 5:1-11) - 베드로

by 【고동엽】 2021. 11. 28.
오늘 본문 속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다면 나도, 우리도 만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요즘 말로 하면 보통 사람입니다. 그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는 어부입니다. 당시는 지방색이 무척 강했던 시대입니다. 갈릴리 지역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그는 천대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성실한 생활인이었습니다. 그는 30대 중반으로 가정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성격은 다소 충동적이었지만 진리에 대하여 갈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내면에 무엇인가를 항상 찾고 있었습니다. 남에게 표는 안 냈지만 갈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깊은 허무를 느꼈습니다. ‘인생은 이것만이 아닌데 ... ’ 하는 진리에 대한 마음의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때는 세례 요한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어 그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어 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베드로는 용단을 가지고 갈릴리에서 요단강까지 먼 길을 가서 그의 제자가 도니 때도 있었습니다. 그는 또 애국자였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 나라에 속국이 되어 있는 조국을 해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민족의 해방은 메시야가 와야 한다고 믿고 그를 기다리는 소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이 베드로와 같은 성격이나 환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떤 극적인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오늘 그 사건이 여러분에게도 나타나게 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1.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시간은 실패한 날 아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만난 극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부들의 생활은 대부분 피곤합니다. 낮에는 그물을 손질하거나 잠을 잡니다. 해질 때 장비들을 갖추어 어둠이 깔리는 바다로 나갑니다. 이게 어부 생활입니다. 남이 일할 때는 잠자고, 남이 잠잘 때는 일을 해야 합니다.
미국 교포 사회의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아갑니다. 이민을 가서 생활이 안정되기까지 5년 내지 10년은 교포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갈릴리 어부들의 생활과 같습니다. 저녁에 일하는 남편은 낮에 자고, 낮에 일하는 아내는 밤에 잡니다. 교대로 잠을 자며 살아가는데 보통 피곤한 삶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삶은 참으로 피곤한 삶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바다에 나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동틀 무렵 맥이 빠진 상태로 돌아와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해가 떠올랐습니다. 저쪽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더니 한 무리가 떼를 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바닷가로 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시더니 “베드로야, 네 배 좀 내가 타자.” 부탁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는 그때가 초면은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다소 안면이 있었는지라 허락해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시고 조금 떨어지게 하시더니 바닷가에 서 있는 많은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①실패한 날 아침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수고했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돌아와 그물을 기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도 베드로와 비슷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밤새도록 땀을 흘리는 생활을 되풀이 하는데 말 못하는 피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 사람들의 대부분입니다. 누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출세한 사람은 출세한 대로 피곤함이 끝이 없고, 따라 가려고 몸부림쳐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의 인생은 또 얼마나 피곤 한지요. 인생길 지쳐서 살아갈 용기가 없을 때 평생의 모든 꿈은 허물어지고 세상의 친구는 다 떠나갑니다. 이와 같은 깊은 허무를 누구나 한번씩은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얼마나 피곤합니까?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해서 시작한 결혼 생활도 왜 이렇게 힘겨운가? 그렇게 큰 꿈을 가지고 키운 자녀가 나에게 얼마나 큰 부담감을 주는가? 건강, 직장 문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문제로 피곤합니다. 이렇게 피곤하고 빈손 들고 돌아온 그날에 예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베드로가 고기 못 잡고 빈 손 들고 돌아온 그 아침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다는 것은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사가 잘되고 배부른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안 찾아가십니다. 멸시받고 쫓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삶이 지치고 곤고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찾아가십니다. 오늘 밤,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마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우려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피곤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 믿고 얼굴이 환한데 나도 예수나 믿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래서 이 저녁에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바로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절대 이 순간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살아 계신 주님이 보이지 않게 찾아오셔서 문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②실패한 날 아침에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에게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피곤할 때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그 앞에 있는 모든 대중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는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의 말씀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인생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피곤함을 느낀 사람은 드디어 영혼의 귀가 열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밤 여러분에게 제 이야기가 들리십니까? 예수님은 저같은 사람 하나를 이 시간에 나팔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자리에 있는 예수님이 여러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자신을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저의 말이 귀에 들어옵니까? 마음에 들어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님에게 귀를 기울인 사람입니다. 왜 귀를 기울일까요?
세상 만사 모든 소리는 들을 때뿐입니다. 돌아서면 텅텅 비는 것을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이제는 뭔가 찾아야 하겠다’ 생각이 있어서 귀를 기울입니다. 언제입니까? 피곤한 날 아침에 ... 여러분은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뭐니뭐니 해도 잘 들어야 합니다. 소위 그래서 기독교는 듣는 데서 출발하는 종교라고 말을 합니다.
불교에 가면 몰라도 하면 됩니다. 계속 절을 하고 탑을 돕니다. 물론 불교에도 법회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들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신이시요 영이시기 때문에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이는 존재라면 믿으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젠가는 그것도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에 안 보이시고 그래서 들으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성경을 기록해 놓았지만 그때는 기록이 없어 항상 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사람들을 앉혀 놓고 한 시간 두 시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잘못 들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합니다. 듣는 사람에게 잡념을 가지게 합니다. 짜증나게 하고 졸립게 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이 졸리면 마귀가 방해하는 것입니다. 눈을 밝히 떠서 귀로 잘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베드로가 귀 담아 듣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③실패한 날 아침에 예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저는 어젯밤에 허탕만 쳤습니다.” 하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는 대화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자기의 사정을 아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물을 가지고 다시 깊은 데로 가지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전지전능하십니다. 베드로의 마음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앞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아무 말 안했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한 허탈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대단한 분이십니다. 이 자리에 옷을 잘 입고 점잖게 앉아 있을 때 그것은 저와 여러분 사이이고, 우리 주님은 옷을 보시지 않습니다. 화장한 얼굴을 보시지도 않습니다. 마음의 생각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십니다.
예수님은 현재의 베드로를 아시듯이 그의 과거를 꿰뚫어 보십니다. 오늘의 실패를 아시듯이 우리의 과거의 실패도 아십니다. 숨은 한숨, 고통, 마음의 진통,을 다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다윗이라는 왕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대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시 44:21)”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족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2-4)”
예수님은 베드로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듯이 우리들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이 내 마음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면 불안하고 부담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아시고 깊은 곳으로 가라. 고기를 잡아 주겠다 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은 책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남 모르는 비리를 캐내려는 것도 아닙니다. 약한 부분을 도와주시고 고통을 아시고 소원을 들어주시겠다는 의미로 아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가운데 처음 나와 계시는 분들,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가 여러분을 얼마나 알고 이해해 줍니까? 마음의 고통은 여러 가지입니다. 안타까운 사정을 이야기할 때 얼마나 잘 들어줍니까? 실망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분만은 예외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들어주십니다.
④실패한 날 아침에 주님은 당신을 도와주려고 와 계십니다.
이것을 알고 들어갑시다. 예수님께서는 도와주시려고 그 말씀을 하셨지만 이것은 순종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명령입니다. 때가 낮 1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입니다. 낮에는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린다고 고기가 잡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상식적으로 알겠지만 그물 따라, 고기 따라 깊이가 다 다릅니다. 그물 치는 것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조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고기 잡는 일이라면 내노라 하는 베드로가 아닙니까? 그 말을 여러분이라면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마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난 변화인 것 같습니다. ‘아, 저분에게는 순종해야 하겠다’ 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 밖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어도 얻은 것이 없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다시 한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
자기 주관이나 생각은 송두리채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고 나가 그물을 던지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제가 믿기는 이 시간 똑같은 명령을 주님은 여러분에게도 하신다고 봅니다. 아마 들으시는 분마다 의미가 다 다를 것입니다. “교만을 꺾어라!” “믿어라!” “죄를 끊어 버려라!” “남은 여생을 가난하게 지낼지라도 불의한 재물은 쌓지 말아라!” 여러분 귀에 어떤 음성이 들립니까? 베드로와 같이 순종한다면 베드로와 같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믿으라고 하십니까? 순종하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⑤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시고 바다로 나갑니다. 지난 밤에는 베드로가 선장이었습니다. 지난 밤에는 예수님이 안 계셨습니다. 밤새도록 그 밤에는 노력했지만 손에 들어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모시고 나갑니다. 예수님께서 그 배의 선장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모든 삶의 권한을 예수님에게 맡겼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배는 갑니다. 그 결과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30년 40년 예수님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 배에는 예수님이 없었고, 그 배의 주인의 여러분이었습니다. 선장이었습니다. 잘된 일도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산 인생을 뒤돌아보면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여러분 손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이 훨씬 솔직한지 모릅니다.
한국의 고위층을 미국에서 만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 없이 사는 분입니다. “요즘 어떠십니까? 사는 것이 보람있나요?” 물었더니 얼굴이 빨개지며 말이 없었습니다. 그의 경력을 보면 엄청납니다. 그러나 막상 50년 이상을 하나님 없이 살다 보니 빈 그물만 남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 믿으세요”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하기에 예수님을 믿고 그 신앙을 회복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가끔 교회에 가서 뒤에 앉았다 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답답하니까 간 것입니다. 지금은 그분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베드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찬란한 햇살이 비치는 바다로 예수님을 선장으로 모시고 나갑니다. 인생길을 다시 출발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축복은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출세 성공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세속적으로 신앙을 타락시키지 않습니다. 돈 가지고 인생을 좌우하고 평가하는 저속한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갈릴리 바다로 나가 보시기 바랍니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 보라는 말이 납득이 되지 않지만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예수님 모시고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돈으로 살 수 없었던 것, 명예와 권세로도 얻을 수 없던 것, 주님의 축복으로 여러분의 배에 가득가득 담아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잔뜩 잡아가지고 와서는 정말 놀랐습니다. 고기를 풀기 전에 베드로는 너무 쇼크를 받았습니다. 잡은 고기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이 분이 누구이기에 이런 기적을 행하시는가?’ 생각하다 자기도 모르게 갑판 위에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가 알기는 베드로가 예수님보다 나이는 몇 살 위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무릎꿇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죄없는 하나님 앞에 가면 인간은 자동적으로 자신이 누군인지 노출이 되고 맙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아주 잘사는 사람 앞에 가면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 보입니다. 아무 권세 없는 사람은 지체가 높은 분 앞에 가면 더 초라해집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죄없는 예수님 앞에 누구든지 가서 1:1로 만나면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구나’ 자기도 모르게 노출이 되어 버립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고 “너는 죄인이다”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죄인임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본인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예수님을 잘 모른다고 해야 맞습니다. 죄없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만큼 이상한 일도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죄 소리만 하면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물며 불신자에게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죄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도 죄의 문제를 깨닫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라 말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도 역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죄 없는 예수님 앞에 나오는 사람만이 이 문제가 대부됩니다. 죄 없는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만이 이 문제가 대두됩니다.
과거에 잘못되었던 마음, 잘못 살았던 인생이 그대로 예수님 앞에 서면 노출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죄인이라고 지적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와 같은 마음이 먼저 생겨 버립니다. 그 마음이 생기는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입니다.
3.죄를 해결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에서 너무 자주 죄에 대하여 말하자 점잖게 생긴 신사 한 분이 찾아와 “목사님, 강단에서 너무 죄! 죄! 그렇게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주 듣기에 거북하고 곤란합니다.” 왜 듣기에 거북할까요? 자꾸 질리기 때문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회개하고 그만 두어야 하는데 매번 반복하니까 계속 찔립니다. 계속 찔리니까 목사가 미워집니다. “목사님, 죄라는 말 말고 고상한 말 있지 않습니까? 약점이라든지, 실수라든지 하는 말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난 목사님은 반문을 했습니다. “독약이 든 병이 있습니다. 독약이라는 말은 누구나 듣기 싫지요. 그래서 독약이라는 상표를 떼고 진통제라는 말을 써 놓으면 어떻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듣기 싫어도 죄는 죄라고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성경을 들춰보면 이 문제가 대두됩니다. 지금 베드로는 정상 코스로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10년을 믿어도 베드로처럼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진지한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다시 믿어야 합니다.
요즘 교인들은 너무 비상합니다. 목사가 A하면 벌써 B합니다. 너무 비상하니까 목사가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빙 돌려서 받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이래서 문제가 생겨지고 교회는 힘을 잃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바른 코스로 가려면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예수님을 만나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자기를 보게 되는데 얼마나 추한 자신인가를 보게 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여러분도 그래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예수님께서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참 죄인으로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러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서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인간은 다 죄인이라고 하나님이 진단하셨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의인은 없습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①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부터가 죄입니다.
육체를 입고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부터가 죄입니다. 인간은 조상 때부터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들입니다. 범죄 했기 때문에 후손 대대로 죄인으로 탄생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성씨 중에 전(全)씨, 옥(玉)씨 등이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원래 고려 왕씨였는데 고려가 멸망하면서 이씨 조선에서 죽음을 면하기 위하여 이름에 갓을 씌우고, 점을 찍었다고 합니다.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일이지만 이들은 이씨 조선에서는 상놈입니다. 그 집안에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이유 없이 상놈입니다. 아무리 총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벼슬을 할 수 없습니다. 타고난 팔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태어난 사람들 중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일생 동안 손발 꽁꽁 묶여 방안에 갇혀서 나쁜 짓 안하고 살았어도, 사람들에게 칭찬만 받으며 의롭게만 살았어도 하나님 앞에는 죄인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 하나님이 왜 야박스럽게 죄인으로 공격하느냐고 하나님을 탓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너무 몰라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인형을 만들었는데 그 인형이 여러분을 탓한다면 그냥 두겠습니까? 불 속에 집어넣어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인간은 태어난 것 자체가 죄인의 운명입니다.
②하나님을 추방한 것이 죄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을 추방한 것이 죄입니다. 오늘까지 살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았다면 하나님 없이 산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입니까? 내가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을 굉장히 나쁘게 보십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아버지를 무시하고 아버지 노릇을 하려 한다면 얼마나 아니꼽겠습니까? 자기가 낳은 자식이라도 가만 두겠습니까?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인데 모든 삶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추방하고 이때까지 내가 하나님으로 행사하며 살았습니다. 이게 죄입니다.
③죄인은 죽습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가면 죽습니다. 그래서 그 심판을 면하도록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구원시키려고 하는 데 흥 - 하고 안 믿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을 죄라고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나는 죄인 아닙니다” 하고 빠져나갈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밤에 여러분의 삶은 배 위에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나는 죄인입니다.” 말한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건져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고백하는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그 비참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왜 그러는지 아십니까? 죄의 삯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영원한 죽음입니다. 영원한 지옥의 멸망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 대신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사함을 얻고 떳떳하게 서기 위해서는 누군가 의로운 피를 흘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다 죄인인데 누구에게서 의로운 피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죄 없는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 위해 의로운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죄의 고해 속에서 신음하며 한 생을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들, 죽음과 파멸의 바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믿어라”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으로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 때까지 짓는 죄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죄까지 모두 씻겨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언제나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서게 해주십니다.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앉아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았습니다.


오늘날 역사상 베드로 만큼 영예로운 이름이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그런 축복을 받기를 예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도 나의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구나 여기서 내가 구원받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내가 믿고 의지하는 길밖에 없다. 이것을 깨달으시면 주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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