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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복음이 전해진 이야기 (사9:1,2, 요12:24,행1:8)

by 【고동엽】 2021.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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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복음이 전해진 이야기   (사9:1,2, 요12:24,행1:8)

지금까지 주일마다 구원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으로, 북쪽으로 그리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전해지다가 마지막에는 로마에까지 전해진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는 하늘로부터 소 아시아 일곱 교회에 전해진 마지막 메시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 담긴 이야기를 전부 다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아주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신약 성경에 담긴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담긴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구원의 복음이 그 당시 땅끝인 조선에 전해진 이야기입니다.

  100여 년 전의 조선은 흑암과 사망이 깃들고 있던 미신과 저주의 땅이었습니다. 영적인 삶뿐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삶의 수준도 매우 어둡고 비참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01년 8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한국에 온 여섯 명 선교사들의 중의 한 사람인 윌리암 블래어 선교사는 그가 도착한 부산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도시에는 오수 처리 시설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오물들이 천천히 흘러서 초록 색깔의 도랑을 이루고 있었다. 소수의 사람들은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러운 흰 옷들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를 더러운 띠로 매고 있었다. 아이들은 벌거벗은 몸으로 거리에서 놀고 있었고 늙은 여인네들은 가죽처럼 탄 쭈그러진 얼굴을 지니고 우리들을 보려고 집으로부터 서둘러 나왔다. 많은 사람들은 겉옷을 입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당시 조선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조선은 가난한 나라였다. 전쟁으로 황폐했을 뿐 아니라 정치가 부패했기 때문이었다. 수 세기 동안 왕들과 지방 관리들은 모두 부패해서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건장한 한국 사람들이 국가적인 불행을 슬퍼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동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고 불행한 나라가 있습니까?' 그들은 지금 가련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게 되었다.” (The Korean Pentecost, pp. 16,24-25).

  100여 년 전의 조선의 상황이 이랬다면 140여 년 전의 상황은 더욱 더 비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인 1866년 9월 5일 흑암과 사망의 땅이었던 조선에 와서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고 성경책을 던져주며 구원의 복음을 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평양 대동강 변에 와서 성경책을 던져주며 구원의 복음을 전하다가 조선 관군에 의해 칼에 찔려 순교를 당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목사였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조선 땅에 구원의 복음을 전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조선에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까?

  첫째,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란 청년의 선교적 헌신으로 조선에 대한 복음 전파의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선교적 헌신은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패트릭의 헌신이 영국의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고 브레이너드의 헌신이 미국의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던 것처럼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의 헌신은 조선의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는 1839년 9월 7일 영국 웨일스 라야더에서 회중교회 목사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트랜드, 웨일스, 아이랜드 네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웨일스는 영국의 서남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우리 나라에 비교하면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이라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웨일스 사람들은 종교성이 풍부하고 시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민요 가운데는 ‘즐거운 나의 집’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웨일스에 영적으로 큰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1866년 평양 대동강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바로 웨일스 출신의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일어난 대 부흥이 1904년 바로 웨일스에서 일어난 부흥의 영향으로 일어났습니다. 한국교회에 깊은 영향을 미친 로이드 존스 박사도 바로 웨일스 출신이었습니다. 제가 2000년 7월 16일 저녁 영국 케직 사경회에 모인 4천여명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사실들을 지적하며 웨일스에 대한 한국교회의 감사를 전했을때 거기 모였던 웨일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뜨거운 박수로 화답을 했습니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는 어릴 때부터 사무엘처럼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 가운데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토마스 목사로부터 선교적 비전과 헌신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교회에서 모든 교인들은 많은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어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고 가르쳤고 런던 선교회에 선교 헌금을 보내곤 했습니다. 토마스는 어릴 때부터 모험을 좋아했고 언어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고 그리고 선교에 대한 비전을 키워갔습니다. 토마스는 17살 때 아버지가 시무하던 하노버 교회에서 첫 설교를 할 정도로 신앙이 성숙했습니다. 노방 전도도 했고 지역 교회의 초청을 받아 설교도 했습니다. 18살 때인 1857년에는 런던 대학교의 뉴 칼레지에 입학하여 학문 연구에 진력한 결과 2년 만에 학사 학위를 받았고 신학부 과정에서는 최고의 장학금을 받기도 했습니다.

  토마스는 한 때 방황을 하기도 했지만 중국에 가서 선교하다가 잠시 돌아온 록하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아 선교사로서의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토마스가 20세 되던 해인 1859년 10월 런던 선교회가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하여 록하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벅찬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지금 세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순교하는 신앙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복음을 듣고 영접하고 구원에 감사하는 영혼들을 볼 때 저는 선교사로 부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순교하는 신앙으로 세계 곳곳에 나아가 복음 전할 사람들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그날 토마스와 몇몇 젊은이들은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며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중국 선교에 대한 소망을 불태우게 된 것이었습니다. 청년 토마스가 선교의 부름에 헌신하게 된 데는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 아버지의 감화와 격려, 스승들의 지도와 가르침 그리고 록하드 선교사의 감화와 도전 등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어지는 데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작용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과 사랑과 기도와 말씀의 부모였습니다.

  1863년은 토마스에게 있어서는 가장 뜻 깊은 해였습니다. 그가 24세 되던 해였습니다. 바로 그 해 중요한 일 6가지가 일어났습니다. 그 해 5월 캐로라인 고드프리라는 아름다운 신앙의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 해 5월 런던 선교회로부터 중국 선교사로 허입이 되었습니다. 그 해 6월 런던 뉴 칼레지 신학부를 졸업했습니다. 그 해 6월 4일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해 7월 런던 선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아내 캐롤라인과 함께 중국행 풀메이스호에 승선했습니다. 풀메이스호에 승선하여 중국으로 향하는 사람들 중에는 토마스 부부를 포함한 네 쌍의 영국인 선교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4개월 반의 긴 항해 끝에 그 해 12월에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습니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토마스 선교사 부부는 선교 사역을 위해 모든 정성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하고 조랑말 타는 연습을 하고 아침을 먹은 후 8시부터 12시까지 상하이 방언을 배우고 그 후 잠시 걷기도 하고 대화도 하다가 점심을 먹고 오후 3시부터 5시까지는 베이징 방언을 배우고 저녁 식사 후 7시부터 10시까지는 선교 모임을 가지고 그리고 책을 읽고 매주 목요일 밤에는 중국어로 설교를 했습니다. 아내 캐롤라인과 함께 지낸 상하이에서의 첫 3개월은 꿈과 같은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내는 임신 중이었고 태어날 아기에 대한 기쁨의 기대는 행복으로 부풀게 만들었습니다.

  둘째,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 부부가 당한 비극적인 불행을 통해 조선에 대한 복음 전파의 사역이 진행되었습니다.
  복음 전파의 길은 그 시초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환난의 길이였고 슬픔과 아픔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이 그 길을 걸었고 그 뒤를 이은 수 많은 선교사들이 그 길을 걸었습니다. 아마 복음 전파와 교회 설립에는 반드시 고난과 환난과 순교의 죽음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 부부가 가는 복음 전파의 길도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임신한 캐롤라인은 입덧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상하이의 환경은 캐롤라인에게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토마스 선교사는 런던 선교회의 선임 선교사인 뮤어헤드와의 불화로 인해 사역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토마스 선교사 부부는 "주님, 저희들에게 이곳 중국에서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주심으로 위로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주어진 중국에서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서로를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토마스 선교사는 아내의 건강에 좋은 곳을 찾아보기 위해서 1864년 3월, 임신한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한구 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캐롤라인은 홀로 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웃에 살며 친하게 지내던 미국 선교사 부인이 갑자기 풍토병으로 죽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캐롤라인은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연유로 캐롤라인은 남편이 없는 가운데 혼자서 태중의 아기가 유산되는 고통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캐롤라인은 유산 후 죽어가면서도 남편에게 마지막 위로와 사랑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아기가 유산되었으나 자신은 괜찮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한구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청천 병력 같은 소식이 담긴 아내의 편지를 받아 들고 허둥지둥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집에 와서 캐롤라인을 소리쳐 불러보았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 캐롤라인이 누워있는 곳에는 핏자국이 여기저기에 뒤엉켜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캐롤라인은 아기가 유산된 후에 심한 하혈과 감염으로 죽어간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으로 토마스 선교사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습니다. 그는 통곡을 하며 쓸어졌습니다. 너무나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선교에 대한 꿈도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하이에서 런던 선교회에 보낸 핀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녀는 소천하기 전에 잠시 의식이 회복되어 ‘주님은 나에게 고귀한 분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제가 느낀 상실감은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저의 가슴은 터질듯 합니다. 제 사랑하는 아내는 받을 수 있는 고난은 모두 받았습니다. 더 이상 편지를 쓸 수가 없습니다. 슬픔이 또 다시 복바쳐 오릅니다. 저는 지금 감당할 수 없는 슬픔으로 인하여 제 마음을 걷잡기가 어렵습니다. 어찌하였든 그녀의 평화롭고 고통 없는 죽음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 1864년 4월 5일 당신의 신실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토마스 선교사는 아내의 시신을 상하이 외국인 묘지에 묻고 비싼 값을 치루면서 정성스럽게 만든 묘비를 세웠습니다. 그 당시 중국에는 200여명의 선교사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 50여명이 각종 질병이나 폭행 등 다른 이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선교지를 철수하지 않고 선교지에 묻히기를 바라면서 선교 사역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토마스 선교사에게 아내의 아버지가 딸이 선교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몇 달 후인 11월 11일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까지 접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삼중적 슬픔과 불행과 비극에 쌓였습니다.

  저는 25세의 토마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그렇게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그렇게도 기다리던 태아를 잃고 그렇게도 의지하던 장인까지 잃는 삼중적 슬픔과 불행을 당한 일이 결코 무의미한 일도 아니었고 결코 우연한 일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삼중적인 슬픔과 아픔과 절망과 불행은 앞으로 그가 조선에 목숨을 걸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게 하는 준비 과정이었고 훈련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상한 힘을 지니게 됩니다. 슬픔과 아픔과 절망을 경험한 사람은 슬픔과 아픔과 절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상한 힘을 지니게 됩니다. 제가 주제 넘게 자주 순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마 제가 아버지의 순교를 경험했고 아들의 죽음을 경험했고 어머니와의 슬픈 이별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가끔 해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그의 상관인 뮤어헤드 선교사와의 선교관의 차이와 불화로 인해 그리고 자기 건강의 악화로 인해 1864년 12월 런던 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통역관의 일자리를 찾아 즈푸로 떠났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토마스 선교사의 성급한 면도 있었으나 뮤어헤드 선교사의 부당한 대우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토마스 선교사가 즈푸 세관의 통역관이 된 데는 중국 사람들과 중국어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토마스 선교사가 편지에 밝혔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런던 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즈푸로 떠난 것이 그의 성급하고 경솔한 실수였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러나 그곳에서 조선 사람들을 만났고 그래서 결국 조선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성급한 실수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사용하신다는 오묘한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토마스는 슬픔 중에서도 즈푸에서의 생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돈도 벌었고 주일이면 중국인 교회에서 설교도 했고 영국인 교회에서도 봉사를 했습니다. 토마스는 매우 이상적인 선교사도 영웅적인 선교사도 아니었습니다. 매우 인간적인 매우 허물이 많은 그러나 매우 진솔한 사람이었습니다. 즈푸로 온지 한 달 만에 뮤어헤드 선임 선교사와 화해를 했고 런던 선교회에 자기의 경솔함을 뉘우치는 사과의 편지도 써서 보냈습니다. "지난 시간에 대하여 이사회에 용서를 빕니다. 저를 다시 받아주실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저급하거나 불순한 동기로 사임했던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성급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지나치게 경솔하고 독단적이었음을 인정하는 바이며 잘못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보다는 허물과 실수가 많은 그러나 진솔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허물과 실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복음과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진 보통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이제 세 번째 이야기를 간단하게 마무리 하겠습니다. 어떻게 조선에 복음 전파가 완성되었습니까?

  셋째,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로 조선에 복음 전파의 사역이 완성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5년 즈푸를 방문한 조선 천주교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조선의 천주교인들이 수난을 당하고 참수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불 붙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죽음과 서로 통하고 슬픔은 슬픔과 서로 통하는 것이 있는지 모릅니다. 조선에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있다는 천주교인의 슬픈 소식이 토마스 선교사의 가슴을 울리고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제부터 나의 선교지는 조선이다. 죽어가는 불쌍한 조선 사람들에게 죽음으로 복음을 전해야겠어! " 토마스 선교사의 마음은 조선에 대한 선교의 열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스코트란드 성서공회에 속한 윌리암슨 선교사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토마스, 계속하여 세관에서 통역하는 일만 할 생각이오? 당신이 아내를 잃은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를 잃은 아픔을 떨쳐버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당신은 중국어와 러시아어, 몽골어 등의 언어에 능통한데 하나님께서 왜 당신에게 이러한 언어의 재능을 주셨을 것 같소. 복음 전하는 것에 사용하도록 함이 아니겠소." "그렇지 않아도 세관에 사표를 내려던 참입니다. 저는 그 동안 제 믿음이 좋아서 이곳 중국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된 줄 알았는데, 캐롤라인의 죽음 앞에서 사정없이 흔들리는 제 약한 모습을 보면서 제가 참으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교는 자식을 무덤에 묻는 아픔 없이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셨던 분들의 이야기가 이제 실감이 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잠시도 제 스스로 설 수 없는 자란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토마스 선교사의 모습은 조선에 복음 전하기 위해 생명을 바치기로 준비된 결연한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 대신 조선으로 가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5년 통역관 자리를 사임하고 다시 런던 선교회에 재 임용을 받은 후 제 1차로 조선 서해안을 잠시 방문하고 돌아온 후 그 이듬해인 1866년 8월 9일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호에 승선하여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이 배는 미국 배로 조선과 무역을 하려고 왔던 배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배가 닫는 곳마다 조선 사람들에게 서툰 조선 말을 하면서 성경책을 전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선을 사랑하십니다. 자 이걸 받으세요. 성경책입니다." 이때 나누어 준 중국어 성경이 500여 권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제너럴셔먼호가 북상하여 평양 만경대까지 다다르자 조선 군과의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조선에서는 그 배가 닿는 곳마다 문정관을 파견하여 목적지와 항해의 목적을 물었습니다. 통역으로 승선한 토마스 선교사는 목적지가 평양이며 통상을 원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조선 군은 경계를 하면서도 아주 적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너럴셔먼호의 미국인 선장은 조선인 이익현을 협상을 하는 것처럼 속여 배로 유인한 다음 그를 억류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토마스 목사는 선장에게 "이러면 안됩니다. 어서 저 사람을 보내주시오." "당신은 상관마시오. 내가 선장이요." "정말 조선과 교역을 원하신다면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두고 보시오 저들은 곧 내 말을 듣고 통상을 요구해 올 것이오." "이건 비겁한 짓입니다. 빨리 저 사람을 보내고 저들에게 잘못을 사과하시오" 그러나 미국인 선장은 토마스 목사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익현의 억류로 화가 난 조선의 군사들은 소극적이던 자세를 버리고 총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대포로 공격을 하던 제너럴셔먼호의 선장은 조선 군사들의 공격이 거세지자 퇴각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홍수로 불어났던 물이 줄어들어 배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배는 모래에 좌초되었습니다. 이 순간을 놓칠 리 없던 조선의 군사들은 일제히 총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이 순간에 토마스 목사는 "예수! 예수! 예수 믿으시오!" 소리치며 배 안에 있던 성경을 군사들에게 던졌습니다. "잠깐, 항복하겠으니 우리를 돌려 보내주시오." 배 안에 있던 선장이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조용한 틈에 조선의 군사들을 향해 대포를 발사했습니다. 선장의 비열한 처사에 화가 난 조선의 군사들이 일제히 횃불을 싣고 제너럴셔먼호에 접근하여 불화살을 쏘아대었습니다. 배에 떨어진 불화살로 제너럴셔먼호는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배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강으로 뛰어내렸고 목숨을 건져 뭍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성난 조선의 군사들에 의하여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동강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습니다.
  배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와중에서도 토마스 선교사는 한 손에 백기를 들고는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면서 성경책을 던졌습니다. 두 팔을 높이 든 토마스 목사는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며 강물에 뛰어내렸습니다. 헤엄을 쳐서 뭍으로 나온 그를 목 베이려고 누군가 칼을 쳐 들었을 때, 부교인 박춘권은 그를 생포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당신은 총 한번 쏘지 않고 책만 던지던데." "저희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오." 평양 감사는 이들에게 국법을 어기고 사교를 전하고 백성들을 살해하였으므로 부교인 박춘권으로 하여금 모두 참수토록 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동강 변에서 국법에 따라 한 사람씩 목을 베는 형벌이 실시되었습니다. 선장과 중국인들이 먼저 목 베임을 당하였습니다.

"다음 영국 야소교 목사 토마스" 하자 북소리가 둥-둥-둥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칼을 잡은 박춘권 부교의 손이 높이 올려진 순간이었다. "잠깐만, 이걸 받아 주십시오. 제가 드리는 마지막 물건입니다." 이 말에 멈칫하고 놀란 박춘권은 토마스 목사가 가슴에서 꺼낸 성경책을 얼떨결에 받아 들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선교사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일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이 열매로 맺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박춘권은 칼을 빼어 토마스 선교를 찔렀습니다. 1866년 9월 3일 27세의 젊은 나이로 웨일스 출신 선교사 토마스 목사는 대동강의 한사정 백사장에서 순교의 피를 뿌렸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라 선교사가 인천항에 상륙하기 19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전해준 성경책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상당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를 찔러 죽였던 박춘권은 나중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던진 성경책으로 어느 여관집 주인이 방안을 온통 성경으로 도배를 했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토마스 목사가 전해준 성경책을 읽은 홍신길은 후에 대동문에 교회를 세웠고 그의 동생도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김영섭은 원래 천도교였으나 동생과 함께 예수를 믿어 장로가 되었고, 황명대는 제너럴셔먼호가 불탈 때 "예수, 예수, 예수" 하는 소리를 듣고 평양 초대교회의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땅에 떨어져서 죽은 한 알의 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교회가 세워지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조선에 구원의 복음이 어떻게 전해졌다고요?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평양 대동강에 와서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며 순교의 제물이 된 토마스 선교사에 의해서 십자가와 구원의 복음이 조선 땅에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순교의 제물이 된 토마스 목사에게 그리고 선교지에서 외롭게 죽어간 그의 아내 캐롤라인 사모님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를 조선 땅에 보낸 그의 부모님과 웨일스 사람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냅니다. 이제 주님께서 하신 말씀 몇 마디를 읽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7-39). “너희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출처/김명혁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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