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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멜랑히톤의 생애와 사상

by 【고동엽】 2021. 11. 13.
I. 루터의 동역자

로이힐린(Johannes Reuchlin, 1455-1522)과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 참조. 롤란드 베인톤, 박종숙 역, 에라스무스, 현대지성사 1998; A.E. 맥그래스, 박종숙 역, 종교개혁사상입문, 성광문화사 1998, 66-74: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의 영향을 받은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은 하이델베르그(Heidelberg)와 튀빙엔(Tübingen)에서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았다. 그는 외삼춘 로이힐린의 추천으로 21살의 나이로 튀빙엔에서 루터가 있는 비텐베르그(Wittenberg) 대학교의 헬라어 교수로 청빙되었는데(1518. 8월), 종교개혁적 정신에 의해 이루어진 대학개혁과 더불어 비텐베르그에 1518년 봄 헬라어 과목이 신설되었던 것이다. 이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신학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는 멜랑히톤과 루터 사이의 우정은 급진전되었다.



멜랑히톤은 1519년 9월 성경학 학사(Baccalaureus biblicus)를 취득하여, 철학과에서 주로 활동을 하면서 성경과목 강의도 하게 되는데, 그는 금방 대학의 유명인사로 부각되었다. 무엇보다도 멜랑히톤은 루터와 자신과의 관계를 “나는 그로부터 복음을 배웠다”(Ich habe von ihm das Evangelium gelernt)고 1540년 고백하기까지 하였다. 1521년 처음 세상에 선을 보였던 칭의론에 입각한 성경개론인 멜랑히톤의 「로치 콤무네스」(Loci communes rerum theologicarum)은 가장 첫 번째 개신교 교의신학서로서 1535년, 1543년 그리고 1559년 최종판이 나왔는데, 이 저서는 루터와 동행하였으며 동시에 루터의 사상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는 작품이다. 1542년 루터는 이 저서에 대해 “성경 다음으로 이 책 보다 나은 책은 없다”(Es gibt kein besseres Buch nach der Hl. Schrift)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둘 사이에는 늘 사상적 긴장이 상존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종교개혁과 개혁, 기독교와 인문주의, 참고. William R. Estep, Renaissance and Reformation, Grand Rapids 1992; 박건택, “칼뱅의 인문주의와 정치 윤리”, in : 칼뱅작품 선집 (제1권)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서울(총신대출판부) 1998, viii-xxxii; A.E. 맥그래스, 박종숙 역, 종교개혁사상입문, 성광문화사 1998, 53-86: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16세기 인문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17세기 계몽주의 이후 대두되어지는 인본주의와 구별이 되어야 한다. 물론 똑같이 ‘휴멘니즘’(Humanism)으로 표기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계몽주의 이후 나타난 인본주의는 기독교의 신앙과 교회의 폐기를 의미한다면, 16세기 기독교 인문주의는 신앙과 교회의 갱신을 외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16세기의 인문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이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태도는 오늘 우리가 어떻게 당시의 인문주의를 이해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하나의 규범이 될 것이다. 물론 현대인의 불신앙과 당시 16세기 인문주의의 불신앙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의 차이가 있다”는 뤼시앙 페브르(Lucien Febvre) 지적은 타당하다 하겠다.




진리와 전통 사이에서 생각의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루터와 다르게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를 “진리를 규명하는 내용은 아니지만, 형태를 규정하는 외적 요소”(formendes Element, nicht wahrheits- bestimmender Inhalt)로서 이해하였다. 1521년 멜랑히톤은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의 선하신 행위를 인식하는 것이다 ...”고 말하면서, 인식을 실존적으로 “죄, 율법, 은혜”와 관련을 지으면서도, 보다 학적 체계와 방법론으로 이끌었다. 언어학자이며 철학자였던 멜랑히톤은 교육과 가르침을 사명으로 붙들었다. 그의 마지막 추구는 “생을 보다 더 가치있게 하는 것”(vitam emendare - das Leben zu besseren)이었다. 그는 1530년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Augsburger Konfession)을, 1531년 그 신앙고백의 변증(Apologie)을 세상에 내어 놓았다. 그는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구별을 근거로하여 자신의 교의신학을 세워 나갔지만, 철학과 신학를 움직이는 이성과 계시를 연관시켰다. 이성과 율법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실존의 총체적 문제들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Wilfried Härle und Harald Wagner(Hrsg.), Theologenlexikon, Von den Kirchenvätern bis zur Gegenwart, München 1987, 160-162.




루터와 멜랑히톤 사이에 나타나는 이러한 사상적 차이를 주목한 역사가들은 한 세대 후에 나타난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이야말로 멜랑히톤 보다도 더욱 정확히, 보다 선명하게 종교개혁자 루터의 신학사상을 이해하여 계승하였다고 서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은 “루터의 최대의 수제자”라고 불러지기도 한다.


II. 스콜라주의 신학을 반대하는 명제들. Philipp Melanchthon, ꡒThesen gegen die scholastische Theologieꡓ(3.August 1520), in: Heiko A. Obermann, Die Kirche im Zeitalter der Reformation, Neukirchen 1988, 57-58.


멜랑히톤은 1520년 8월 3일 한 주간의 신학토론을 위해서 아래와 같은 18가지 명제들을 제시하게 되었는데, 스콜라주의 신학을 반대하여 당시 루터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비텐베르그 종교개혁의 공동 신학전선을 제시하고 있다 하겠다. 그 원문을 번역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칭의(Rechtfertigung)의 시작과 근거(principium)는 신앙이다.
2. 사랑은 신앙의 한 작품(ein Werk)이다.
3. 사랑 안에서 구체화되는 신앙과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없이 단순한 사실에 대한 신앙 사이의 차이점은 하나의 순전히 환상의 산물(ein reines Phantasieprodukt)이다.
4. 소위 사랑없는 신앙은 신앙일 수 없고, 하나의 속이는 의견(fallax opinio)일 뿐이다.
5. 그러기에 신앙에는 필연적으로 사랑이 동반되어야 한다.
6. 신앙과 사랑은 하나님의 업적들이지, 본성의 작품이 아니다.
7. 만약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이 안식일의 내적 평안과 온전한 자유(absoluta libertas)에 있다면,
8. 속죄의 행위(Satisfactio)는 사죄(poenitentia)의 한 부분이 아니어야 하고,
9. 동시에 기독교에는 다른 외형적 제물이 있을 수 없다.
10. 고로 미사는 제물이 아니다.
11. 미사는 또한 행위 업적이 아니며, 그러한 열매가 이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전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2. 마치 세례가 세례를 받는 본인에게만 유효하듯이, 그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에게만 도움이 될 뿐이다.
13. 세례와 같이 미사도 하나의 성례적 표식인데, 그것을 통하여 죄용서가 은혜로 주어지는 주님의 약속이 확증된다.
14.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의 개념에는 결코 그 어떠한 인간의 업적이 보태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15. 도리어 모든 인간의 행위는 실질적으로 죄일 뿐이다.
16.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이 이신칭의의 열쇠가 주어졌기에 베드로(교황)의 수위권(primat)는 결코 신적 권세로서 주장되어질 수 없다.
17.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과 같은 행복의 아이디어는 기독교 교리에 배치될 뿐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건전한 일반 상식(communis hominum sensus)에도 어긋난다.
18. 그러기에 차라리 행복의 본질에 관하여 약삭빠른 궤변자의 머리를 어리석게 굴리는 것보다, 성경으로부터 원천을 찾아 나서는 것이 훨씬 바람직할 것이다.

해설과 정리

루터의 초기 종교개혁 시대에 나타나는 1520년의 이 단순한 작품을 통하여 우리는 계속적으로 대두되어질 종교개혁적 사상의 성숙을 충분히 그릴 수 있다. 지금 멜랑히톤은 금방 시작된 종교개혁의 횃불을 지피고 있을 뿐이다. 아직 루터의 1520년의 3대 명저도 등장되지 않고 있는 시점이다. 이 3대 명저들을 통하여 루터의 종교개혁적 사상은 확실히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아직은 성급한 기대나 판단은 자제를 요구한다. 우리는 여기서 소위 말하는 ‘스콜라주의 신학’을 반대하는 멜랑히톤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에게 스콜라주의 신학이란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카톨릭 신학을 총칭하는 말임을 깨닫게 된다.



먼저는 루터의 종교개혁적 이신칭의의 신앙에 근거하여 중세 카톨릭 교회의 행위구원적 업적신앙을 반대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랑의 행위는 신앙의 열매이지 신앙의 어머니일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카톨릭의 속죄의 행위는 결코 하나님이 행하시는 사죄의 한 부분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선한 행위로서 드려지는 미사는 허구일 뿐이다. 특히 성도에게 천국의 맛뵈기로 주어진 주일의 안식과 내적 평화를 부숴뜨리는 그 어떠한 행위는 잘못이다. 미사는 단지 세례가 은혜의 수단이듯이 그와 동일한 성례전적 의미를 갖는다. 면죄부를 사고 파는 행위는 죄악스런 행위인데, 인간의 모든 행위는 죄이기 때문이다.


이신칭의의 신앙에는 그 어떠한 인간적인 행위들이 효과가 없고 첨가되어질 수 없다. 이러한 원리에 첨가되어지고 부과되어지는 권위는 인정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이신칭의의 은혜는 동일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졌기에 중간에 끼어드는 교황권은 인정될 수 없고, 이는 하나의 인위적 조작일 뿐이다. 진정한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 안에서 새롭게되어 진정한 행복을 성경에 근거하여 찾고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멜랑히톤이 말하는 성경적 인간론과 행복론이 동시에 제시되고 있다 하겠다.


III. 로치 콤뮤네스(Loci Communes)

종교개혁적 신학일반

멜랑히톤의 「로치 콤뮤네스」는 1521년 초 라틴어로 쓰여지기 시작하여 가을 완료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 출판되었다.. Philipp Melanchthon, Loci Communes 1521. Lateinisch-Deutsch, Übersetzt von Horst Georg Pöhlmann, Gütersloh 1993.




라틴어의 「Loci Communes」는 ‘대화의 광장’, ‘학문의 근본이론’이라는 의미인데, 멜랑히톤이 종교개혁 신학의 근본을 일반적 관점에서 언급하려 하였다는 뜻에서 「신학 일반」으로도 번역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두껍지 않은 로치는 총 11가지 주제, 자유의지, 죄, 율법, 복음, 은혜, 칭의와 신앙, 신구약의 차이, 예표들, 사랑, 권력, 부끄러운 행위들을 당시의 적절한 필요에 따라 쉽게 서술하려 하였다. 당시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1520년 6월 15일 교황의 칙서 “엑세르게 도미네”(Exsurge domine)를 통하여 파문을 경고받게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루터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그 칙서를 공개적으로 불살라 버렸다. 그러자 교황청의 그 경고는 1521년 1월 3일 교황의 “데케트 로마눔 폰티피쳄”(Decet Romanum pontificem)과 함께 결정적인 파문으로 확정되었고,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결국 출교(Excommunication)를 당하였다. 아울러 로마 교황청의 요구는 거세어져 황제는 루터를 국외로 추방하려는 마음을 갖고, 거센 외교적 갈등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루터는 1521년 4월 2일 보름스(Worms) 제국의회에 참석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잘못되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그 어떠한 글도 부인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대적자 사탄이 제국의회를 덥고 있는 기와장 수만큼 많다 할지라도 결코 굽힐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힘과 방패가 되심을 고백하였다. 그 유명한 간절한 기도 “내가 여기 섰나이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소서!”(Hier stehe ich. Gott helfe mir!)를 루터는 바로 이 극적인 순간에 드렸던 것이다. 마치 뵈머의 전종교개혁자 요한 후스(1369?-1415)가 장작불 위에서 죽어가면서 드렸던 기도 “하나님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여 당신을 의지하나이다”와 결코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극한 상황에 처한 루터의 순교자적 심령과 더불어 종교개혁의 엄격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루터의 동역자 멜랑히톤은 펜을 들어 종교개혁의 신학일반을 정리하며, 새롭게 선언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이 「로치 콤뮤네스」와 함께 구체화하였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역사적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전개되었는데, 황제는 루터가 제국의회를 떠나고 난 후 1521년 5월 26일 보름스 칙령(Wormser Edikt)를 통하여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을 국외로 추방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제 루터를 위시한 그들은 어떠한 상황이 더욱 무섭게 전개될지 몰랐고, 죽음의 위험이 늘 루터를 따라다녔다. 여기에 등장되는 인물이 바로 작센(Sachsen) 지방의 성주(城主)이며 탁월한 정치적 지도자이며 루터의 사상적 동역자요, 후원자인 그 유명한 프리드리히 현공(Kurfürst Friedrich der Weise)이었다.



그가 생명의 위험가운데 노출되어 비텐베르그로 돌아오는 루터를 비밀리에 납치하여 바르트부르그(Wartburg) 성으로 안전하게 인도했고, 루터는 약 10개월간의 농부로 변장하고서 바르트부르그 성에서 성경번역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루터는 비텐베르그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 어쩔 수 없이 1522년 3월 6일 비텐베르그로 돌아갔다. “Acht Sermone D. Martin Luthers, von ihm gepredigt zu Wittenberg in der Fastenzeit 9.-16. März 1522”, in: Karin Bornkamm und Gerhard Ebeling(편), Martin Luther Ausgewählte Schriften, Bd.I, Frankfurt am Main 1983(2판), 270-307. 루터는 돌아오자 마자 수난절 금식주간(1522.3.9-16)에 비텐베르그 교회에서 8차례의 설교를 통하여 아무리 종교개혁적 사상이 성경적으로 틀림이 없다 할지라도 마땅히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열매가 맺어짐이 정당하기에 약한 자들을 돌아보아 인내하는 가운데 실수가 없이 너무 성급하지 않는 가운데 종교개혁적 신앙의 확신을 도우면서, 카톨릭 같이 폭력을 쓰지 않으면서 종교개혁을 이루어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 기간 중 종교개혁의 도시 비텐베르그에서 루터의 대변인 역할을 한 사람은 비텐베르그대학의 동역자 24살의 젊은 교수 멜랑히톤이었다. 멜랑히톤이 그러한 상황가운데서 「로치 콤뮤네스」를 저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멜랑히톤과의 관계를 루터 자신은 마치 엘리야와 엘리사로 묘사하기도 했는데, WA BR 2, 413. “Auch wenn ich zugrunde gehe, wird doch nichts vom Evangelium zugrunde gehen. In ihm übertriffst du mich jetzt und folgst als Elisa dem Elias.” 이 비유에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각오한 루터의 비장한 마음이 나타나고 있다. 자신이 죽어간다 할지라도 종교개혁의 사상은 이 멜랑히톤을 통하여 확실히 계속될 것을 믿었던 것이다.

헌정사

멜랑히톤은 「로치 콤뮤네스」를 1521년 당시 종교개혁적 정신에 의해서 새롭게 출발하는 비텐베르그대학교 총장서리로 재직 중이던 “경건하고 학식이 깊은” 틸레만 플레텐너(Tilemann Plettener)에게 헌정하였다. Ph. Melanchthon, Loci Communes, 13. “Dem frommen wie gelehrten Mann D. Tilemann Plettener von Ph. Melanchthon”.




이 헌정사에서 저자는 저술의 목적을 오직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요점들을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잘못된 교리를 배격하면서 간단명료하게(knapp und kurz) 학생들에게 제시함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멜랑히톤은 중세 카톨릭 교회의 오류를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학생들로 하여금 성경을 멀리한 채 어둡고 어려운 논쟁에로 빠져들게 함이 아니라, 가능한한 나는 그들을 성경에로 초대하기를 원합니다. 일반적으로 나는 중세교회의 주석들에게 많은 의미를 두지 않으며, 초대교부들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 참으로 실망스러운 것은 기독교의 원래적 모습을 성경이 아닌 다른 곳에서 가져오려는 시도입니다.” Ibid., 15. “Ich tue das nicht, um die Studenten von der Schrift wegzurufen zu manchen dunklen und schwierigen Disputen, sondern um sie, wenn ich kann, zur Scchrift einzuladen."




그러한 이유를 멜랑히톤은 중세의 주석들이 이성에 의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적 진리와 인간 영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만 의존하는 기독교의 교리를 새로운 의지로 시작되는 비텐베르그대학교의 학생들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

서론

멜랑히톤은 이제 저술이 다루고자 하는 개괄적 주제들을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서론식으로 독자들을 염두에 두며 매우 친절하게 다룬다. 그러면서도 중세교회의 어느 점이 잘못되었는지를 구체적인 실례를 통하여 제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요한 다마센(Johannes Damascenus) 베드로 롬바르드(Petrus Lombardus) 등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저작들이야말로 전혀 활용해서는 안되는 순전히 철학적 산물이어서, 성경의 사상을 전하기 보다는 인간의 생각을 제시하고 있다고 주저없이 비판한다.. Ibid., 19.

멜랑히톤이 제시하는 중요한 교리의 주제들은 23가지인데, 하나님, 유일하신 분(Unus, der Eine), 삼위(Trinus), 창조, 인간 그 인간의 능력, 죄, 죄의 열매와 무거운 짐, 징벌, 율법, 약속들,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워짐, 은혜, 은혜의 열매들, 신앙, 소망, 사랑, 예정, 성례들, 인간의 신분(Hominum status), 권세(Magistratus, die Obrigkeit), 감독들(Episcopi, Bischöfe), 정죄, 행복(Beatitudo)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모든 주제를 간단명료하게 이론만으로 제시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하나님의 비밀들(Mysteria divinitatis)은 연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가 경배해야(adoraverimus)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의 대상으로만 가져온다면 거대한 위험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멜랑히톤은 위에 언급된 주제들을 정리하면서 끊임없는 노력과 함께 거룩한 조심스러움을 잃지 않으려 한다.. Ibid., 21.




중세 카톨릭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주시하며, 저자는 “만약 사람들이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간과하지 않았었더라면, 어리석은 인간들의 어두운 설명으로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선행들을 가리우지 않았을 것인데”라고 말한다.. Ibid., 21. “Man hätte ihre Torheit unbeachtet lassen können, wenn uns nicht unterdessen jene dummen Erörterungen das Evangelium und die Wohltaten Christi verdunkelt hätten.”




특히 많은 주제들 가운데서도 저자는 진정한 성도는 “죄의 권세, 율법, 은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중요한 주제들을 진정 바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이해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Ibid., 25. “Doch sicherlich das Gesetz, die Sünde, die Gnade, von welchen Hauptthemen allein die Erkenntnis Christi abhängt.”




“고로 우리는 주요진리들의 양식들을 묘사할 것입니다. 독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에 접붙이며, 양심을 더욱 강하게 하고, 사탄을 대적하여 정신을 바로 세우게 할 것입니다.”(25) 즉, 철학적 교리서를 저술함이 목적이 아니라, 성도의 신앙과 경건을 북돋우는 성경중심의 기독론적 교리를 서술함에 목적이 있음을 확인한다.




정리를 해보면, 「로치」는 중세 카톨릭의 세미펠라기안적 구속론에 대적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초기 종교개혁적 신학을 독창적으로 제시하며, 아울러 개신교 신학의 근저를 부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하겠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중세 카톨릭의 신학을 인간의 지식으로 신랄하게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중세가 마감되는 이 시점에서 저자 멜랑히톤은 종교개혁적 신학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기초를 세워보려는 선구자적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역사의 현장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참조. Heinz Schreible, "Melanchthon, Philipp(1497-1560)", in: TRE 22, 373(371-410).



내용 들여다 보기

I) 자유의지에 관하여

제 1장에서 저자는 “인간의 능력 - 자유의지”(Die Kräfte des Menschen, insbesondere der freie Wille)를 다루는데, 어거스틴(Augustinus)과 베른하르트 폰 클로폭스(Bernhard von Clairvaux)의 자유의지(de libero arbitrio)를 언급함으로써 시작된다. 특히 어거스틴은 펠라기안주의를 대적한 후기 작품들 가운데서 자신의 사상을 분명히 하고 있는 반면, 베른하르트는 스스로의 모순에 빠졌는데, 무엇보다도 인간의 이성에 충족시키려는 마음 때문에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저자 멜랑히톤은 곧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생각들에 의존하기 보다는 가장 쉽고 명료하게(simplicissime et planissime, einfachste und klarste) 성경에 의지하여 자유의지를 설명하려 한다(24-25).




필자 멜랑히톤은 자유의지에 관한 이해가 교회사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를 간단명료하게 말하는데, 처음에는 자유의지에 관한 이해가 전혀(ganz und gar) 철학과 인간이성에 상관없이 규명되었으나, 점차 철학이 기독교에 들어와서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자유의지 교리가 도입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이해는 전혀 성경과 성령의 판단과는 전혀 낯선(ganz fremd)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예로 필자는 해박한 철학적 이해를 제시하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기독교에 들어와서 그리스도의 위치를 점하기까지 하였다는 것이다(27).




조금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왜 필자는 이 서두의 가장 앞에서 다른 주제가 아닌 ‘자유의지’에 관해서 설명을 해야 했을까? 무엇보다도 종교개혁의 가장 큰 외침이며, 발견이라 할 수 있는 ‘오직 믿음으로’의 이신칭의의 신앙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중세교회는 세미펠라기안적 구원관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내세운 신(神)과 인간의 합작품(coperation)으로서의 다른 구원을 선포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한 종교개혁과 앞선 중세교회와의 갈림길은 바로 여기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하겠다. 그러기에 루터의 동역자 멜랑히톤은 우선적으로 이 주제를 바로 깨우치며 선명히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잘못된 “바리새적 스콜라주의적”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수많은 영혼들을 멸망에로 이끌었는지를 멜랑히톤은 절규하듯이 외친다. “오, 얼마나 수많은 영혼들이 그들 바리새적 자유의지에 관한 잘못된 이해때문에 죽음에로의 괴롭힘을 당해야만 하는지를 그 어리석기 그지 없는 스콜라주의자들이 현실을 바로 직시할 수 있었더라면!”(43-45)




멜랑히톤은 몇 가지로 결론을 이끌어내는데, 인간의 의지란 오직 신적 예정(Vorherbestimmung)이라는 시각에서 이해되어야지, 결코 인간의 내적 또는 외적 행위들 가운데서 나타나는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신적 섭리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다. 만약 외적 행위들의 관점에서 그 의지를 판단한다면 마치 피조물의 판단에 따라 확실한 자유가 주어지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자유를 인간의 감정(Affekte)에 따라 또한 판단한다면, 이것 역시 위에서와 같이 엄격히 볼 때 피조물의 판단으로 행해지는 진정한 자유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멜랑히톤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이해되고 정의되는 진정한 인간의 자유로서 행사되는 의지란 오직 창조자이신 신의 편에서 인정되는 자유의지여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하겠다(45쪽).

II) 죄에 관하여

제 2장에서 저자가 다루는 주제는 “죄”(De Peccato - Die Sünde)로서 지금까지 중세교회의 죄 개념은 “실망스럽게도 죄를 이성과의 관계에서 해명하려 하여, 그리고 죄를 자범죄(Tatsünde)와 원죄로 구별함으로 진정한 개념이 어두워졌다”고 지적하면서, 몇 가지로 나누어서 “죄란 무엇인가?(Quid peccatum)”, “어디에서 원죄가 왔는가?(Unde peccatum originale)”, “죄의 힘과 열매(Vis peccati et fructus)”등을 성경에 입각하여 길지 않게 설명하려 한다(47쪽).




원죄(Peccatum originale). 교회사적으로 볼 때 ‘원죄’(vitium originis)라는 개념을 최초로 가져온 사람은 초대교회의 터툴리안(Tertullian)이었다. 원죄에 대한 이해는 펠라기우스(Pelagius,354-420)를 대적한 초대교회의 어거스틴(Augustine,354-430)과 같은 입장에 있는데, “죄로 향하는 ... 타고난 성향, ... 힘(eine angeborene Neigung, ... eine Kraft)으로서 아담에 의해서 그 모든 후손들에게 대대로 심기어졌다”고 인간의 원죄를 이해한다. 이는 “마치 지남철이 자기 안에 철을 잡아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듯이, 인간 안에 죄를 짓는 타고난 힘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성경은 이것은 원죄며 저것은 자범죄라고 나누지 않는데, 원죄 역시 엄격하게 볼 때, “살아 행동으로 옮겨지는 일종의 완전히 패역한 성향”(eine ganz tätige, verkehrte Begierde)이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교회사에 나타났던 죄에 대한 잘못된 기준에 입각한 설명을 하기 보다는 오직 성경에 입각한 정의를, “죄는 하나님의 법을 대적한 하나의 거꾸로 된(뒤틀린) 성향(Affekt)이며, 하나의 거꾸로된 마음의 행동(Bewegung)이다”라고 내린다(48-49쪽).




그럼 그 “원죄는 어디서 오는가”라고 묻는다. 본래 인간은 죄없이 창조되어 하나님의 영이 늘 인간에게 함께 하여서 사람들은 선으로(zum Guten) 향하는 마음이 불타게 되었었다. 만약 아담이 불순종의 범죄에로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 동일하신 하나님의 영은 늘 함께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이 인간과의 교제를 단절하자 더 이상 성령은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게 되었다. 결과 사람들의 영혼은 하나님이 늘 함께하여 주신 조력의 은혜를 상실한 채 어두어지고 눈멀게 되어 추구하는 바가 육적이고 죄악으로 향하는 비참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육에 속한 인간이 영적인 것들을 사랑함은 불가능하게 되었다(50-51쪽). 여기서 멜랑히톤은 창세기 6장 3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를 인용하며, 로마서 8장을 가지고 “육체”란 하나님의 성령이 없는 상태로서 설명한다. 결국 그 육체의 성향은 하나님를 대적하는 원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죄의 권세와 열매”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필자는 원죄의 살아있는 실체성(Wirklichkeit)에 대해서 말한다. 원죄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어느 때든지 구체적 삶의 결과를 가져오는데, 곧 죄를 가져온다는 것이다(57쪽). 이러한 실체적 원죄를 만약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할 때 교회는 큰 오류를 범하게 되는데, 인간의 이성에 근거를 두는 철학의 관점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보는 관점의 “거대한 차이점”을, “철학은 사람들의 외형적 형태를 주시하지만, 성경은 가장 내면적이고 감지할 수 없는 내면적 성향들을 감찰한다”고 제시한다(63쪽). 그러므로 철학이 본질적으로 인간의 깊은 내면 문제인 죄성을 인식한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고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죄인식 또는 죄를 대적함은 순전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87쪽).



멜랑히톤의 이러한 신본주의적 죄개념을 결론적으로 종합해 보면, “범죄한 인간 본성의 모든 행위들, 모든 욕망들과 인간적 힘에 의한 추구되는 바 모든 것은 죄”로서, 이러한 죄성에 사로잡혀 있는 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진정한 자유란 있을 수 없다(97쪽). 그러기에 조금 다른 면이지만, 저자는 죄의 노예된 인간들이 남을 향한 판단들을 겸허히 중단함이 옳다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99쪽).

III) 율법에 관하여

제 3장은 율법(das Gesetz)에 관하여 다루는데, “율법이 실질적으로 죄를 깨닫게 할 경우, 전 장에서와 같이 죄의 권세와 본질를 폭로함”(99쪽)에 목적이 있음을 제시한다. 저자 멜랑히톤은 이 일을 위해 근거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진리의 원천(Quelle)이 되는 오직 성경에서(aus der Schrift)임을 재차 강조하며, 그 ‘원천’을 어느 시인의 말을 가져와서 “보다 달콤할 뿐 아니라, 보다 정결한 물”(100-101쪽)을 제공하는 신선한 샘물로서 묘사한다. 서론격으로 저자는 율법을 “선한 것을 장려하며, 악한 것은 금하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공의란 그 법에 따라 다루는 전권”으로 이해하며, 3종류의 “자연법, 신(神)법, 인간법”으로 분류한다(101쪽).




자연법은 “모든 이가 동의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공동지식으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심어놓은 기준인데, 그것의 목적에 따라 도덕이 형성되는 것”(101쪽)으로 묘사되어진다. 조금 더 자연법을 설명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함께 하나의 생명공동체(vita societas)를 형성하며 살게 되었기에 누구에게도 해를 끼쳐서는 않되며, 그러한 사람공동체(humana societas)는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들을 함께 나누는 물질공동체(Gütergemeinschaft)를 형성함이 마땅하다”(105쪽)는 것이다.. 참고로 멜랑히톤이 말하는 자연법의 9단계를 말하면, 1. 하나님을 경외하라 2. 생명을 보존하고 번성하라 3. 아이를 낳아야만 한다 4. 혼인하라 5. 후손을 유지하라 6.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말라 7. 물질을 함께 사용하라 8.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물질을 교환하라 9. 다수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악한 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경계선을 그어라. 보라. 멜랑히톤, Loci communes, 104쪽 각주.

이 자연법을 멜랑히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는데, 첫 번째 자연법은 태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광스런 마음(Herrlichkeit)이 사람들의 마음에 심기어졌음을 제시한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현존(Gottes Dasein)을 의미한다. 두 번째 자연법은 함께 사랑하며 살도록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 혼자 살 수없으며 서로에게 삶의 도움(Lebenshilfe)을 주며 살 것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살인하지 말 것, 남의 재산을 훔치지 말 것 등이 해당된다 하겠다. 이를 위해 국가적 강력한 법집행이 요구된다(106-107쪽). 세 번째 자연법는 인간들의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 물질공동체를 언급한다. 이를 통해서 수동적으로는 타인을 해롭게 하지 않을뿐더러, 적극적으로는 공공의 평화(Friede)와 번영(Gemeinwohl)을 추구한다. 진정한 물질공동체를 위해서 사고파는 판매, 임대 또는 소작행위 등을 다룬다. 여기서 우리는 계약의 유래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108쪽).




신법(神法, die göttlichen Gesetze)은 하나님의 경전인 성경을 통하여 이루어진 거룩하고 견고한 규례(heilige und verbrüchliche Ordnung)로서 선포되어진 것이다. 이 신법은 도덕법(Moralgesetze), 판결법(Judizialgesetze), 의식법(Zeremonialgesetze)으로 세분화 되어진다. 도덕법은 십계명에 기록된 것으로서 인간의 도덕과 삶의 규례를 다룬다(112쪽). 이 십계명을 저자는 지금까지의 스콜라주의자들의 해석과는 거리를 두면서 성경에 근거한 해석을 시도한다. 즉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종교개혁적 성경해석방법을 도입하고 있다(Sui ipsius interpres) 하겠다.




여기서 특이하게 저자가 분류하고 언급하는 “충고들”(die Räte)이 있는데,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의 경우이다. 이러한 충고들은 필히 실행에 옮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악을 악으로 갚지말라, 화내지 말라, 이웃을 멸시하지 말라 등이 여기에 속한다. 또한 여기서 수도승의 서원(Mönchsgelübde)이 언급되는데, 당시에 퍼져 있는 수녀와 수도승들의 삶을 간과할 수는 없었을 뿐 아니라, 이 심각한 중세의 문제를 새로운 종교개혁 신학의 관점에서 해결해야 할 당위성을 염두에 두었다 하겠다. 강경한 어조로 이 수도승서원을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성경은 그 어느 곳에도 맹세하는 것을 요구하지도 스스로가 서원하지도 않기”(125쪽)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그 어떠한 서원을 통하여 간주되어진 경건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유의 복음, 성령의 자유는 맹세를 통하여 구속되는 인간의 노예적 상태를 최소한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127쪽).




판결법과 의식법은 함께 묶어 간결하게 언급되는데, 중요한 요지는 복음은 이러한 법들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Ibid., 131. “Die evangelischen Schriften kennen derartige Gesetze nicht, weil sich Rechtsansprüche für das christliche Volk verbieten, ihm Armut und Gütergemeinschaft aufgetragen wurde und ihm Gerichtsverhandlungen untersagt sind ...”




판결법은 유대인들을 위해 주어졌기 때문이다. 의식법은 복음의 비밀을 보여주는 비유(Allegorie)와 그림자(Sinnbilder)로서 이해된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이 두 법은 종결된 법으로 이해된다. 마지막으로 인간법을 언급하는데, 시민법과 특히 교황법 또는 주교법이 여기에 속한다(133,135쪽). 만약 교황이 법을 공포하고 집행한다면 이는 완전히 세상권력일 뿐이다는 주장이다(135쪽). 신앙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교황들, 공회들, 모든 교회들은 그 무언가를 확인하고, 변경하는 그 어떠한 권한을 가지지 못하는데, 단지 가능한 것은 신앙의 규례들이 성경에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137쪽).

IV) 복음에 관하여

저자 멜랑히톤은 인간의 능력으로서의 자유의지, 죄, 율법에 관하여 전제한 후 제 4장에서 이제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한다. 전제된 설명하에서 저자는 앞에서 할애한 세 가지 주제의 분량보다는 상대적으로 축소된 지면으로 복음과 은혜를 서술한다. 성경을 향한 분명한 이분법적 이해가 먼저 제시되면서 이 주제는 시작된다. “전 성경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율법과 복음이다. 율법은 죄를 주목하게 하며, 복음은 은혜를 바라보게 한다. 율법은 병을 가르쳐주며, 복음은 약을 처방하여 준다. 율법은 사망의 종이며, 복음은 생명과 평화의 종이다”(159-161쪽). 가능한한 저자는 바울의 말을 인용하면서 독자들의 복음에 대한 이해를 도우려 한다. 또한 저자는 복음의 내용인 언약들(Verheißungen)은 신구약의 모든 성경에 두루 퍼져있음을 잊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율법시대’ 또는 ‘복음시대’로 구분하는 말을 거부하면서 저자는 인간의 마음에 관련지어 율법의 시간과 복음의 시간을 같은 양상으로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게 되며, 약속 또는 복음을 통하여 은혜가 계시되어질 때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해를 조금 더 보면, “모든 성경은 한 번은 율법, 다른 한 번은 복음이다. 모세의 책들(오경)은 한 번은 율법을, 다른 한 번은 복음을 제시하는데, 복음은 게다가 율법에도 숨어 있다(unter dem Gesetz verborgen)”(167쪽)고 묘사한다. 즉 쉽게 말하듯이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복음이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 복음과 율법의 관계는 대적의 관계로 복음은 율법을, 죄는 은혜를 대적하는데, 특히 로마서의 이해가 그렇다고 제시한다(169쪽). “율법은 경악케하며, 복음은 위로한다. 율법은 성냄과 사망의 목소리이며, 복음은 평화와 생명의 목소리, 곧 신랑과 신부의 목소리이다”(197쪽).




그러면서 저자는 “지성주의에 치우진 하나님 없는 교수들”의 율법과 복음과의 잘못된 상관관계를 제시하며 비판한다. 잘못된 이해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는 모세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새로운 법(ein neues Gesetz)을 우리에게 주었다. 이 새로운 법을 복음이라 칭하는데, 마태복음 5장 6장에서 제시된다.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법의 차이점은 모세의 율법은 단지 외적인 행위를 요구하지만, 그리스도의 법은 마음의 측면(심성)을 요구한다고 한다. 이는 마치 모세의 율법이 위선적이고 바리새적인 공의를 가르치는 것처럼 그렇다는 것이다”(169쪽).




그러나 멜랑히톤에게 있어서는 모세 율법 역시 진정한 마음의 행위를 요청하고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바로 알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공의를 세우게 하는 것이다. 또한 역설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율법없이 은혜를 설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171쪽).




그럼 명확히 복음은 어떻게 정의되어지는가? “마치 율법을 통하여 죄가 밝히 드러나는 것처럼, 복음은 은혜의 약속 또는 하나님의 긍휼이며, 게다가 죄용서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사랑에 대한 확증이다”(163쪽). 이러한 믿음은 비로소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과 죄용서를 믿게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며 하나님 안에 즐거워하며 복음의 능력 안에서 환성을 울리게 한다는 것이다. 성도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 선물이 주어진 마음은 이 땅 위에서의 다른 삶을 이루어 가도록 이끄는 능력을 체험하게 한다. 이러한 모든 믿음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기에 성경의 모든 약속은 예수님께로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저자 멜랑히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언약신학이 여기서 두드러지고 있다. 저자는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를 “구원을 위한 확고한 소망과 칭의를 위한 아담에게 향하신 첫 번째 약속이며(die erste Verheißung), 첫 번째 복음(das erste Evangelium)이다”(163-165쪽)고 말한다. 조금 더 저자의 언약신학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 하자마자(sogleich) 복음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난 후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점점 더 확실하게 그 복음을 드러내셨다”고 서술한다. 그런 후 멜랑히톤은 확신있게, “복음을 ...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진 은혜와 축복 그리고 하나님의 기업를 향하신 하나의 약속”으로 정의한다(165쪽).

V) 은혜에 관하여

은혜에 관하여 다른 주제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가장 짧게 12조항으로 다루고 있는 제 5장은 제 4장에서 언급하는 복음의 정의를 보충한다. 이러한 전개과정은 저자에게서 볼 때 자연스러운 순서로 언급되는데, 그래야만 앞서 언급된 복음의 정의가 더욱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마치 율법이 죄의 인식이듯이, 복음은 은혜와 칭의의 약속이다. 고로 복음은 은혜와 칭의의 말씀으로 일컬어졌다”(201쪽). Ibid., 200. “Sicut lex peccati cognitio est, ita evangelium promissio gratiae et iustitiae.”

저자 멜랑히톤은 어김없이 여기서도 중세의 토마스주의자들(Thomisten)로 불리우는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의 은혜를 향한 잘못된 오용을, “그들은 은혜를 영혼의 본성인 질(質)로서,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을 영혼의 재산들로서 전가시켰다. ... 결과 그러한 무신론주의자들은 단지 자신 스스로를 더럽혀서, 경망스러운 복음의 멸시로 인하여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201쪽). 스콜라주의자들은 은혜란 인간 스스로가 이미 자신 안에 소유하고 있는 본질적 속성으로 인본주의적 이해를 시도하였다는 지적을 하며,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적 망상”으로 비판하였다(203쪽).




여기서 저자의 신본주의적인 성령론적 은혜이해가 두드러진다. Ibid., 201-205.
“그러나 나의 독자들인 당신들이여 정말 부탁하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자신의 복음을 우리들의 마음에 계시하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성령의 말씀이기에 단지 그 성령으로만 가르쳐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201쪽). Ibid., “Tu, mi lector, precare, ut evangelium suum cordibus nostris re velet spiritus dei. Est enim verbum spiritus, quod doceri nisi per spiritum non potest”.




이러한 성령의 가르침에 따라 은혜를 “정말 정확하게”(ganz exakt) 정의하여, “은혜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호의(Gottes Zuneigung) 또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로서 묘사한다. 종합하여 정의하면, “은혜란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그 어떠한 자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그 자체 또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호의를 일컫는 말이다”(203쪽). Ibid., 203. “est gratia, ... nisi dei benevolentia erga nos seu voluntas dei miserta nostri. Non significat ergo gratiae vocabulum qualitatem aliquam in nobis, sed potius ipsam dei voluntatem seu benevolentiam dei erga nos."

이러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린 후, 저자는 은혜(die Gnade:gratia)와 은사(die Gabe:donum)를 바울서신에 근거하여 구별한다. Ibid., 203ff. 물론 은혜와 은사는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다. 은혜란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 은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성도들을 사랑으로 품으셨던 것으로 묘사된다. Ibid., 202: "Gratiam vocat favorem dei, quo ille Christum complexus est et in Christo et propter Christum omnes sanctos."; 203: "Er nennt die Gnade die Gunst Gottes, durch die er Christus und in Christus und um Christi willen alle Heiligen in Liebe umarmt hat."




그러한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호의를 통하여 선물을 주시는데, 다름아닌 “성령 자신으로, 그 성령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의 마음에 부어주신다”(203쪽). Ibid., 202: “Donum vero dei est ipse spiritus sanctus, quem effundit deus in corda suorum.”; 203: “Die Gabe Gottes aber ist der Heilige Geist selbst, den Gott ausgießt in die Herzen der Seinen.”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심겨진 이 성령의 사역이 바로 갈라디아서 5장에 제시되는 성령의 열매들로서 묘사되는 믿음, 평화, 기쁨, 사랑등이다는 것이다(205쪽). 최소한 이러한 이해과정을 통하여서 은혜의 바른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 후 저자는 이제 앞서와는 다르게 구약의 시편 104편 30절과 예레미아 31장 33절, 34절을 인용하면서 은혜에 대한 개념을 종합한다. 그러니까 신약과 구약, 곧 전성경적 이해를 추구하는 종교개혁자 멜랑히톤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은혜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죄용서 또는 죄의 간과(Nachlassung der Sünde)이다. 은혜의 은사란 성령이며, 그 성령이 심령을 거듭나게 하며(wiedergebiert), 거룩하게 한다(heiligt). ... 복음은 은혜와 함께 (그 은혜의) 은사를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205쪽). Ibid., 204: "In summa, non aliud est gratia nisi condonatio seu remissio peccati. Donum est spiritus sanctus regenerans et sanctificans corda. ... Tam gratiam quam donum promittit evangelium."


VI) 의와 신앙에 관하여

저자는 “칭의와 신앙에 관하여”를 234조항으로 본서에서 가장 길게 다루고 있는데, Ibid., 206-287. "De Iustificatio et fide"를 주제로 81쪽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이는 무엇인가 이 주제에 대하여 할 말이 가장 많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이 주제가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시대를 가르는 코페르니쿠스적 종교개혁적 전환이 이 칭의론에 있어서 가장 분명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이 동역자 멜랑히톤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Ibid., 註 630를 참조.




첫 문장은 칭의와 신앙의 관계를 확실히 하려는 종교개혁적 굳은 의지를 실감하게 한다. 이행득의의 신앙을 배격하면서 이신칭의의 신앙을 제시한다.

“율법을 통하여 죽임을 당하였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되었던 생명의 은혜의 말씀을 통하여 또는 죄용서의 복음을 통하여 다시 살게하는 약속을 받았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 안에서 확고히 붙들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며, 그리스도의 화목제가 우리의 화목제가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것이 됨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 선하게 보인다거나 선해지는 그 어떠한 우리들의 행위는 의가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향한 오직 믿음만이 의일 뿐이다. ... 이는 선행의 과시를 통하여 인간이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맏음 안에 있는 의를,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시는 그러한 의를 계시하였다”(207쪽). Ibid., 206. “... Nihil igitur operum nostrorum, quantumvis bona aut videantur aut sint, iustitia sunt, sed sola fides de misericordia et gratia dei in Iesu Christo iustitia est. ... ”

여기서 멜랑히톤은, “믿음이란 신자와 더불어 불신자들도 함께 공유하는 영혼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중립적 자질로서 불신자들도 소유할 수 있다”(209쪽)는 잘못된 신앙이해를 “단지 일종의 죽은 오성의 견해”, Ibid., 220. “Scholastica fides nihil nisi mortua opinio est.” ; 221. “Der scholastische Glaube ist nur eine tote Verstandesmeinung.” 그리고 “하나의 속임수, ... 영혼의 장난” Ibid., 239. “So ist der sophistische Glaube nichts weiter als ein Betrug, nichts weiter als ein Spiel der Seelen, ...”으로 배격하면서, 성경적 신앙개념을 제시한다. Ibid., 208. “Credere ... in anima qualitatem communem impiis cum piis” ; 209. “Auch die Ungerechten würden glauben und der Glaube sei eine neutrale Qualität in der Seele, die die Gottlosen mit den Frommen gemeinsam hätten.”




“하나님의 실존, 하나님의 분노, 하나님의 자비는 영적인 것으로서 육에 의해서는 인식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비쳐주는 성령없이 하나님의 본성에 속한 모든 것들은 단지 하나의 차가운 오성에 근거한 의견일 뿐이지 신앙은 될 수 없고, 또는 단지 허상과 연극일 뿐이다”(211쪽). “신앙이 인간의 본성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거부함은, 이 어리석음, 이 무지, 마음의 이 눈먼 상태를 내 눈 앞에 목격하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육이 인식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거대하며, 보다 확실한 것이다”(213쪽). Ibid., 212. “hanc inspientiam, hanc ignorationem, hanc caecitatem cordis noto, cum nego fidem esse in natura. Maius omnino et certius aliquid fides est, quam quod possit comprehendere caro.”

이제 신앙이 인간의 이 땅 위에서 육신의 행복한 생활을 무시한다거나 전혀 관계를 갖지 않는 형이상학적인가라는 질문에 멜랑히톤은 “육적인 삶에 관계되는 것들이 신앙의 훈련을 위해 무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227쪽)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보라. Ibid., 226ff. 중세의 수도원적 금욕주의에 익숙해 있었던 당시 교회의 가치관을 기억할 때 멜랑히톤의 조심스러움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내가 믿기로는, 단지 의인은 육신적 삶에 필요한 것들을 위한 약속들을 진심으로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은 이러한 육신적인 삶을 향한 약속을 통하여서도 그의 자비를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다음의 결론에 쉽게 이를 수 있는데, 육적인 필요까지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는 더욱 많은 관심으로 채워주신다”(229쪽).



영육간의 균형잡힌 신앙생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제시되고 있다 하겠다. 요약하여 멜랑히톤은 말하는데,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는 모든 것을 소유하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가 바로 의이며, 평화이고, 생명이며, 구원이다. 이러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게 된다.”(245쪽) Ibid., 244. “Omnia habet, omnia potest, qui Christum habet, hic iustitia, pax, vita, salus est. Et in hunc modum vides cohaerere promissiones divinas.” ; 245. “Wer Christus hat, hat alles und kann alles. Der ist die Gerechtigkeit, der Friede, das Leben, das Heil. Und auf diese Weiese siehst du, daß die göttlichen Verheißungen zusammenhängen.”

이러한 칭의와 신앙이해에 입각하여 멜랑히톤은 “신앙의 실제성”(Die Wirksamkeit des Glaubens) Ibid., 258-264. “De fidei efficacia”.과 “사랑과 소망”(Die Liebe und die Hoffnung) Ibid., 264-287. “De caritate et spe”을 더 설명한다. 참 믿음으로 새롭게 된 성도들이 어떻게 실질적 삶을 형성해 가는지를 묘사하려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어떠한 신앙의 열매가 맺혀지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인간이 선행을 통하여 구원과 칭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과 의에 이른 자들이 그 열매로서 보여주는 신앙의 결과를 언급하고자 한다는 말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가 강조되어진다. 겉으로 보기에 번지르한 신앙을 아무리 제시한다 할지라도 신앙의 열매가 결과로 맺혀지지 아니할 때, 죽은 것이다라는 말이다. 신앙과 행위의 상관관계는 결국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다시 언급하며 요약한다. “율법은 행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규명하며,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불가능한 것을 강요한다.” Ibid., 280. “Lex doctrina est, quae facienda et omittenda praescribit. Evangelium est promissio gratiae dei. Lex impossibilia exigit, amorem dei ac proximi”,; 281. “Das Gesetz ist ein Grundsatz, der vorschreibt, was zu tun und zu lassen ist. Das Evangelium ist die Verheißung der Gnade Gottes. Das Gesetz verlangt Unmögliches: die Liebe zu Gott und zum Nächsten”.




“칭의는 율법의 업무는 아니다. 율법의 고유한 업무는 죄의 지적, 곧 양심의 가책이다”는 것이다. Ibid., 282. “non est legis opus iustificare. Sed legis proprium opus est ostendere peccatum adeoque confundere conscientiam.”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복음을 믿는 신앙이다 ... 오직 믿음만이 의롭게 할 뿐이지, 우리의 업적이나, 선행은 결코 고려의 대상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공로일 뿐이다. 이 믿음은 평화와 기쁨을 선물한다. ... 게다가 이 믿음은 ... 다시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한다. 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역시 신앙의 열매이다.” Ibid., 282. “sola fides iustificat, meritorum nostrorum, operum nostrorum nullus plane respectus est, sed solorum meritorum Christi. Ea fides pacificat cor et exhilarat, ... amor dei fructus fidei est.”




마지막으로 이성과 신앙의 대적관계를,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를 믿지도 않는다. 이성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고도 않으며 도리어 하나님을 모욕한다” Ibid., 216. “Humana ratio nec timet deum nec credit ei, sed est prosus ignorans dei et contemptrix,”고 분명히 밝힌다. 그렇다고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는 이성까지를 멜랑히톤이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 언급한 멜랑히톤과 인문주의의 관계를 참고하라. 이성에 관한 한 원칙적인 면에서 멜랑히톤의 입장이 루터와 일치하나 활용의 면에서는 멜랑히톤이 적극적이다.


VII)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 율법의 폐지

멜랑히톤은 “율법과 복음의 역할을 이해함으로써 구약과 신약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문제는 “구약은 단지 외형적 행위를 요청하는 율법이며, 신약은 외형적 행위들 외에 마음의 중심을 요청하는 율법”으로 이해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주의적 “통탄스러운 당황”이 존재하는데, 이로써 “은혜의 거대함과 폭을 오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멜랑히톤은 “구약을 율법의 요구와 상관지어 볼 때 세상적 복에 대한 약속으로 일컫는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의를 요구하고, 그 대가로 상급을 약속하시기 때문이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Ibid., 289. 조금 더 멜랑히톤의 입장을 보면, 신약은 율법과 상관없이, 그리고 우리들의 의에 대한 고려없이 모든 좋은 것(alles Guten)에 대한 약속을 하지만, 구약은 택한 백성들에게 율법이 준수되어질 때 좋은 것(das Gute)을 약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중세 스콜라주의자들에게서 보여지듯, Ibid., 290. 註를 참조하라.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II권에서 구약을 “구율법”(vetus lex)으로 이해하면서, 세 가지로 분류한다. 도덕법(praecepta moralia), 의식법(praecepta caeremonialia) 그리고 형벌법(praecepta iudicialia)을 말한다. 도덕법 안에는 십계명이 들어간다. 그는 롬 7:12의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의 말씀에서 “의로운(iustum: gerecht) 것”은 형벌법으로, “거룩한(heilig: sanctum) 것”은 의식법으로, “선한(gut: bonum) 것”은 도덕법으로 이해한다.



멜랑히톤은 율법을 형벌법, 의식법 그리고 도덕법으로 세 가지로 분류하면서, 그 중에서 형벌법과 의식법은 중단되어지고, 도덕법은 신약에서 다시 갱신되었다는 일반론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중에서 십계명 또는 도덕법을 논한다. 이에 대하여 멜랑히톤, 의인에게는 율법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에 십계명 역시 폐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힌다. Ibid., 293; 301. 십계명이 폐지되었다는 사실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인식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율법을 지키지도 아니하고, 선행을 제시하지도 아니한 채 믿는 자들이 구원에 이르렀다는 사실 때문이다. Ibid., 301.

롬6:14의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를 인용하면서 멜랑히톤은 기독교인이 누려야 할 진정한 자유를 강조한다. “신약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이 자유의 공개적 선언이다.” Ibid., 294. “Nec aliud est novum testamentum nisi huius libertatis promulgatio.” 295. “Das Neue Testament ist nichts anderes als die öffentliche Bekanntmachung dieser Freiheit.”
“복음이란 총체적으로 볼 때, 이 자유에로 부르심이다. 간단히 말해, 기독교는 자유를 뜻한다. 그리스도의 영을 갖지 않는 자유는 결코 율법을 이룰 수 없고, 그들의 행위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을 뿐이다.” Ibid., 295-297.

여기서 멜랑히톤의 주목할만한 성령이해가 두드러진다. “하나님의 뜻은 율법이다. 성령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뜻이며, 그 살아있는 하나님의 뜻이신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우리가 거듭났을 때, 우리는 자진하여 율법이 원하는 것을 실천하는 행위이다.” Ibid., 296. “Nec aliud spiritus sanctus est nisi viva dei voluntas et agitatio, quare ubi spiritu dei, qui viva voluntas dei est, regenerati sumus, iam id ipsum volumus sponte, quod exigebat lex.”




“우리가 믿음에 있는 한, 우리는 자유로워지며, 우리가 불신 가운데 있는 한 우리는 율법 아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멜랑히톤은 루터, 어거스틴 그리고 키프리안 등을 인용하면서 신앙으로 인한 의의 점진성을, “우리는 의롭게 되는 것을 여기서 시작했지만, 아직 온전한 의인을 이루지는 않았다”고 서술한다. Ibid., 300. “Idem non uno loco Augustinus et Cyprianus. Nam iustificari hic coepimus, nondum absolvimus iustificationem.”




멜랑히톤 역시 종교개혁자 루터의 ‘성도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simul iustus et simul peccator)는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이 신앙과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영은 육체에 남은 죄를 죽인다. 율법이 그것을 요청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본성이 육체를 죽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 믿는 자는 구원을 받았는데, 그들은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자유가 아직은 완전히 성숙의 상태는 아니지만, 성령이 보다 충만하고, 육이 죽임을 당하는 한, 성도는 자유하다” Ibid., 313ff.

고 멜랑히톤은 종합하며 정리를 한다.



율법으로 부터의 진정한 자유와 함께 멜랑히톤은 이제 “옛 사람과 새 사람”(der alte und der neue Mensch)을 언급한다. “그 자유는 아직 온전에 이르지는 않았다. 우리 안에 있는 성화 역시 아직 온전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영과 육, 새 사람과 옛 사람,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두 가지 속성을 성도는 소유하고 있다.” 육이란 육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간, 곧 자연인을 말하며, “영이란 바로 성령이며, 우리를 움직이는 추진력(Antriebskraft)을 의미한다. 새 사람, 내적 인간이란 그 영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다. 요한 3장은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영이고, 거듭난 이상, 우리는 거룩하다. 죄는 항상 아직도 육체에, 옛 사람에, 외적 인간에 머문다.” Ibid., 315.




멜랑히톤은 인간을 영, 혼, 육으로 나누는 삼분설을 성급하게 정죄하지는 않되, 조건부로 이해하려 한다. 여기서 말하는 영이 인간 본성의 산물이 아니라, 신적 추진력으로 이해할 때, 영이 없는 인간의 본성은 죄를 아니 지을 수밖에 인간으로 이해할 때는 정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Ibid., 317ff. “Ich verurteile das nicht. Sie mögen mir nur erlauben, ... was Tatsache ist, daß der Geist eigentlich kein Bestandteil der Natur ist, sondern eine göttliche Antriebskraft, daß der Leib und die Seele, d.h. die Natur ohne den Geist nicht nicht-sündigen kann.”


VIII) 성례, 사랑, 권세에 관하여

전 11장으로 이루어진 본서는 제 8장에 이르자 이제 서서히 마감을 서두른다. 제 8장은 중세교회의 잘못된 성례론을 공격한 루터의 1520년 작품 『바벨론적 포로생활』(Die Babylonische Gefangenschaft, 1520년)에 근거를 두고서 종교개혁적 성례(Die Zeichen)론을 제시하며, 보라. Ibid., 331. “Ausführlich hat das Luther in der 》Babylonischen Gefangenschaft《 diskutiert, worauss du dir eine genauere Erörterung 〔der Sache〕 beschaffen wirst.”




9장은 사랑(Die Liebe)을, 10장은 세상 권세(Die Obrigkeit)를, 그리고 끝 11장은 오해(Das Ärgernis)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저자가 교리적이고 이론적인 문제를 다루었다고 한다면, 8장을 시작으로 실질적인 문제와 현실적 성도의 삶의 주제를 언급하고 있다 하겠다. 물론 성례가 꼭 실질적인 문제인가라는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성례에의 의식적 참여라는 관점에서 실질적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멜랑히톤은 중세교회가 사용한 제도교회적 용어 ‘성례’(Sakrament) 참조. 골 1,27; 엡 5,32; 딤전 3,16. 여기서 나오는 ‘성례’(Sakrament)는 한글 개역성경에는 ‘비밀’이라는 말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니까 중세교회는 이 비밀이라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사크라멘트’(Sakrament)라는 용어를 구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용어는 원래적으로 초대교회의 터툴리안에 의해서 출발되고 있다.




보다는 ‘표식’(Zeichen), ‘성례적 표식’(sakramentale Zeichen) 또는 ‘인침’(Siegel)이라는 종교개혁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보다 다른 실질적 의미의 개념을 가져 오면서, 단지 두 가지 ‘성례적 표식’을 인정한다. Ibid., 328. “Quae alii sacramenta, nos signa apellamus aut, si ita libet, signa sacramentalia.” “그리스도에 의해서 복음 가운데서 제정된 단지 두 가지 표식만이 있을 뿐이다: 세례와 성찬에의 참여.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하나님의 은헤의 표식으로서 계승되어온 것이기 때문이며, 우리 인간은 다른 그 어떠한 표식을 하나님의 뜻으로 추가 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 .” Ibid., 330, 331. “Duo sunt autem signa a Christo in evangelio instituta, baptismus et participatio mensae domini. Nos enim signa sacramentalia ea esse iudicamus, quae gratiae dei signa divinitus tradita sunt. ...”(330).




초대교회 교부 어거스틴을 가져와서 성례적 표식에 대한 추가적 언급을 제시한다. “성례들은 실체들(Dingen)과 말씀들(Worten)로 이루어진다. 실체란 표식이고, 말씀들이란 은혜의 약속들이다.” Ibid., 332. “Hinc dictum est a veteribus rebus et verbis constare sacramenta. Res signum est, verba promissio gratiae.”; Ibid., 333. “die Sakramente bestehen aus Dingen und Worten. Das Ding ist das Zeichen, die Worte sind die Verheißung der Gnade.”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는 친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베품을 의미하며, 세례를 받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친히 죄를 용서하실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물 속으로 잠김은 옛 아담의 죄의 몸이 죽고, 새 새명으로 깨어나 중생하였음을 뜻하기에, 바울은 “중생의 목욕”(ein Bad der Wiedergeburt)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니까 침례(Untertauchen)는 육의 죽음을 통과하여 영의 신생을 통한 생명으로 나아감을 보여준다. Ibid., 335. “So ist das ganze christliche Leben eine Tötung des Fleisches und eine Erneuerung des Geistes und das, was die Taufe bedeutet, geschieht solange, bis wir gänzlich von den Toten auferstehen mögen. Die wahre Buße ist eigentlich das, was die Taufe bedeutet, und insofern ist die Taufe das Sakrament Buße, wie wir später sagen werden.”




멜랑히톤은 당시 카톨릭 교회가 성례로 인정했던 사죄의식을, “사죄란 옛사람의 죽고 영이 새로워지는 것으로서, 바로 세례의 의미 그 자체일 뿐이지, 그것이 따로 성례가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 ... 기독교인의 삶 자체가 다른 무엇이 아니라, 곧 이 사죄의 삶이다” Ibid., 343. 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주의 성찬에의 참여는 “가장 확실한 은혜의 표식”(ein handfestes Zeichen der Gnade)으로, “새 언약의 잔”을 마시는 것이다. 성찬은 결코 희생제사가 아니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확고히 하며, 기억을 새롭게 하고, 신앙을 강화시킨다. 카톨릭의 미사 역시 희생제사가 될 수 없고, 신앙의 강화(zur Stärkung des Glaubens)에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Ibid., 358. “... sed fidem eius confirm‎!abat, qua iustificabatur et vivificabatur, ita nec participatio mensae iustificat, sed fidem confirm‎!at, ut supra dixi. Sunt igitur impiae missae omnes praeter eas, quibus conscientiae ad confirm‎!andam fidem eriguntur.

안수, 결혼, 사제서품등은 성례가 될 수 없는데, 안수는 견고케함(die Firmung)에 유익하지만 성례로 제정된 바 없으며, 결혼 역시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제정되지 않았으며, 성직자 안수식 역시 은혜의 ‘표식’으로 칠 수 없다. 성직자란 가르치며, 세례를 베풀며, 성찬을 축복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로 교회가 선출했을 뿐이다. 감독, 사제, 집사도 마찬일 뿐이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벧전 2:9절을 인용하면서 멜랑히톤은 “우리 크리스찬은 모두가 사제들이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 우리의 생애를 희생제사로 드리기 때문이다.” 성도는 거룩한 나라, 제사장, 왕이 된다. Ibid., 361f.

믿음은 사랑(Liebe)을 열매로 가져다 준다. Ibid., “... amorem dei esse fructum fidei.” 신앙은 성도로 하여금 진정한 긍휼을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그런 후 이웃사랑으로 나아가게 된다. 어거스틴에 의하여 사랑의 순서를 말하는데, “먼저 영혼을, 그리고 육체를, 먼저 우리를, 다음에 이웃을 사랑한다.” Ibid., 364. “Augutinus ordinem diligendorum concepit, ut primum animas, postea corpora, primum nostros, postea alienos diligamus.” ; Ibid., 365. “zuerst sollen wir die Seelen, dann erst die Leiber lieben, zuerst die Unseren, dann erst die Fremden.”

권세(Obrigkeit)는 어거스틴, 그리고 루터의 두 왕국론의 입장과 다르지 않게, 먼저 세상(weltlich) 권세와 영적(geistlich) 권세로 나눈다. 세상 권세는 “칼”로 다스리어 세상의 평화를 유지시키는데, “칼”이란 무력과 권위로 다스리는 세상 나라의 속성을 말한다. 영적 나라는 감독들, 섬기는 자들을 의미하며, 권세잡은 자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감독들에게는 새로운 법을 만들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고,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도록 부름을 받았을 뿐이다. 인간의 말을 전해서는 안된다. Ibid., 369ff. 그러니까 중세교회가 만들고 새롭게 추가시킨 법령과 외경등은 인정될 수 없다는 지적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1521년 24살의 나이에 쓴 멜랑히톤의 종교개혁적 신학일반을 다룬 저작 『로치 콤뮤네스』는 마지막으로 인간관계에서 파생될 수 있는 오해와 성가신 일들을 신앙과 사랑이라는 불가분성으로 연결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느니라”(고전 2:4)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이론에의 그 어떠한 강조보다도 능력있는 한 성도가 되기를 원했던 멜랑히톤의 모습이 제시된다 하겠다.


IV.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가장 가까이서 루터의 종교개혁의 출발에 힘을 보탠 루터의 동역자 멜랑히톤의 생애와 사상을 간단하게 살펴 보았다. 특히 그의 초기 사상을 1520년 8월 “스콜라주의를 대적하여 발표한 18가지의 명제”와 1521년 12월 나온 종교개혁적 신학일반을 다룬 『로치 콤뮤네스』를 중심으로 조명해 보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멜랑히톤의 노력으로 형성된 1530년 루터교의 최초의 신앙고백 『아우구스타나 신앙고백』(Confessio Augstana)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더욱 밝히 멜랑히톤의 사상을 추적해 볼 수 있었을 것인데, 다음의 기회에 맡긴 점이다. 『아우구스타나 신앙고백』을 분석할 때 멜랑히톤의 사상의 성숙뿐 아니라, 변천의 추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과 멜랑히톤의 사상을 전적으로 동일선상에 두고 보는 것은 이의를 불러 일으킬 것이나, 이러한 연구는 종교개혁 신학의 긴장과 변천과정을 성숙성과 함께 인지하게 될 것이다는 생각이다.




당시 에라스무스를 중심으로 한 인문주의자들이 전적으로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절대적인 영향을 준 점은, ‘원전으로 돌아갈 것’(ad fontes)과 ‘원어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 점에서는 강력하게 종교개혁자들에게 거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중세교회의 부패를 예리한 지성과 비판력으로 직시하면서 새로워지기를 갈망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점에 있어서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사상에 동의를 하였으며, 카톨릭 교회로부터 오해도 받았다. 특히 교황은 당시 최대의 석학 에라스무스가 루터를 이단으로 공격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에라스무스는 쉽게 응하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자유의지론에 다른 입장을 보여 루터와는 다른 길을 걷는 자로 평가되기도 했으나 이점에 있어서는 그렇게 간단하지마는 않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어쨋튼 무엇보다도 확신있게 멜랑히톤이 의존하고 있는 바는 성경외에 루터, 어거스틴을 위시한 몇몇 초대교부들이었다.




1521년의 『로치 콤뮤네스』는 1520년에 발표한 “스콜라주의 신학을 대적한 18가지 명제들”을 더욱 확신있게 그리고 보다 방대하게 종교개혁 사상에 입각하여 저술하였다고 확인할 수 있겠다. 그 이유로는 18가지 명제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거의 동일하게 이 「로치」에서도 교리와 삶으로 나누어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의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을 공박하는 논리 역시 다르지 않게 유사하게 대두되고 있다. 특히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은 멜랑히톤이 본서에서 1520년 세상에 나온 루터의 종교개혁적 3대 저술인 『기독교인의 자유』, 『바벨론적 포로』 등에 힘입어 보다 확신넘치게 종교개혁사상을 정리하며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개혁의 진수로서 평가되는 루터의 3대 저술에 입각하여 20대의 청년 멜랑히톤이 자신의 펜을 직접들어 종교개혁신학을 종합하고 정리하며 체계를 세워나갔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동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떠오르는 종교개혁의 동터오는 새벽 서광을 충분히 실감하게 된다.



주 도 홍(기독신대원 교수, Dr.theol.)
출처 : 비교적 젊은 개혁주의자들의 아지트!
글쓴이 : 하늘형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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