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힘으로 산다
민 14:36-38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
니라.
오늘은 경제적으로 참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경제가 더 어려울 것이라는 말에 모두 두려움이 배로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때 덩달아 불안해하지 말고 자세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IMF때 온 나라가 나라 망하는 줄 알고 모두 앞이 캄캄해서 난리를 떨었지만 2년 만에 거뜬히 그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오늘의 고난도 곧 극복되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소망을 바라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때에 값을 발휘해야 합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6•25의 불행한 역사를 거쳐 왔습니다. 그 때는 참 불행한 역사였지만 어찌 보면 그 불행들이 오늘 우리나라를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모진 훈련들이 오늘 강력한 체질을 만든 것입니다.
윌리엄 번스타인은 그의 저서 “부의 탄생“에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얻은 엄청난 충격들이나 실패의 경험은 큰 이익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들 들었습니다. 세계 1,2차 대전 때 전쟁을 겪은 나라들 중 일본, 독일, 한국은 전쟁당시에는 다 망가져 회복불능상태까지 되었지만 그런데 전후 유독 이 나라들만 고도성장을 누린 국가들이 되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전쟁이 없었던 나라 중 오늘 가장 낙후된 나라는 영국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오늘 이 어려움은 우리나라가 더 다져지게 되는 계기가 되고 도약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모두 두려워한다고 덩달아 두려워하고 움츠러들면 안 됩니다. 오늘처럼 미래가 암담할 때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처럼 처신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때에는 갈렙과 여호수아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10명은 참 무책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으로 주어진 땅이며 하나님이 거저 주신 땅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땅을 돌아보고 와서 그 땅을 악평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부정한 것이고 가나안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에게 소망을 빼앗고 밤새도록 통곡하게 만들었습니다. 죄는 남의 물건을 훔친 것만 죄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용기를 빼앗고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것도 죄입니다. 믿음을 상실하게 하고 소망을 빼앗는 것도 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불평과 불만과 악평하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전염됩니다. 빨리 무섭게 파괴력을 가지고 전염시킵니다. 그래서 온 백성들이 그들의 보고를 받고 밤새도록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나안에 대한 소망과 기대감을 순식간에 빼앗아 버렸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에 행복을 말하고 언약을 말하고 희망을 전염시켜야 합니다. 희망도 전염됩니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 니콜라스 크리스타키스 교수는 영국 의학저널에 기고한 논문에서 “행복은 일반적인 통념보다 훨씬 전염성이 강하다”고 말 했습니다. 1983년부터 2003년까지 20년간 미국인(메사츄세츠) 4,739명을 대상으로 행복감이 어떻게 이웃과 공유되는지에 대해 연구하였습니다. 연구결과 옆집이 행복할 때 가까이 사는 나에게 전염되는 확률이 34%로 가장 크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이웃을 잘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까운 친구가 행복할 때 42%로 최고로 행복을 전염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때의 행복감은 갑자기 5천 달러가 생긴 것만큼 행복이 전염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행복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사회의 중심에서 살아가게 되면 그 주위의 사람들 모두에게 행복감을 전염시킨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은 반드시 돈을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용기를 주고 격려하고 희망을 주는 것도 아주 큰 도움을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나 지도자들은 세상에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행복을 주고 용기를 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정탐꾼 12명중에서 10명은 그 시대에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믿음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에게 꿈과 용기와 희망을 빼앗았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이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자신들과 가족들도 그 밤에 낙심하여 통곡하였던 모든 사람들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땅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40년 동안 광야생활이 연장되고 재훈련을 하면서 피나는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12명중에서도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유일하게 그날 보고할 때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대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소개한 사람들입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사람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몇 가지 남다른 태도가 있었습니다.
긍정의 믿음
그 긍정의 근거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신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말씀은 이 세상에 생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있는 곳에 변화와 기적과 새 생명과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이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마침내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긍정의 힘과 사고와 판단으로 마침내 가나안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했습니다. 그래서 10명이 가나안 땅을 악평하며 백성들 앞에서 이제 가나안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니 애급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선동할 때 백성들은 모두 눈물바다를 이루었고 마침내 백성들은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습니다. 그때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백성들 앞에 나서서 외쳤습니다.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14:6)”고 했습니다.
그때 그 두 사람은 조용히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옷을 찢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슬플 때 하는 행동이 옷을 찢고 재와 티끌을 머리에 쓰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때 백성들 앞에 뛰어 나가 큰 소리로 외쳤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마음속에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연해서 불이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마음에 충만한 열정이 들어 있습니다. 몸이 건강한 사람은 항상 움직입니다. 건강한 아이들 보면 쉴 사이 없이 움직입니다. 속에서 충천하는 힘이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은 속에서 말씀과 영적인 힘이 솟아나는데 그냥 보고만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뛰어 나가서 외쳤을 것입니다. “그 땅은 우리가 가보니 과연 약속하신 그대로 그 땅은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더라, 가자, 우리들이 가면 하나님이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이것이 지도자의 모습이고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내안에 말씀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어둡고 힘들지만 문제는 내안에 이 말씀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내 안에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힘 있게 내주해 계시다면 오늘이 그렇게 비관스럽고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수아와 갈렙이 장수한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중대한 역사를 움직이실 때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 같은 몇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죄송한 일이지만 그 10명의 지도자들은 들러리들입니다. 그들이 그 땅을 아무리 악평하고 가나안은 절대 못간다,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니 애급으로 돌아가자 하고 선동해도 하나님의 일은 지장 받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만 불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고를 가진 불신앙을 가진 사람은 가나안에 가서 살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그 10명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내 마음속에 말씀이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한 일입니다.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모세의 가장 가까운 시종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 여호수아를 데리고 갔습니다.(수 24:14)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10계명 말씀(강령)을 주실 때 여호수아도 그곳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과 모세가 (출 33:7-11) 친구같이 대화를 나눌 때 그 때도 그 곁에 여호수아가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미리 준비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개인이 아닌 민족을 이끌 준비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다 마침내 모세가 죽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이제 너는 이 백성을 이끌고 내가 주는 땅으로 가라(수1:1-2)”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서 1장을 보면 그에게 주신 약속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함에게 모세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여호수아가 이끌 것이라고 재약속을 하셨습니다. 또 그에게 리더십과 주어진 사명을 성취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코 그 옆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도 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장8절을 보면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이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말씀묵상에서 얻어진 힘으로 가나안을 정복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였습니다. 그 힘으로 사탄의 모든 훼방도 물리쳤고 리더십도 얻었고 지혜도 얻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 말씀의 힘으로 이겨나갔습니다. 이 말씀이 이 두 사람에게 긍정의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셨습니다.
언약의 믿음
이 두 사람은 장수였습니다. 몸만 장수가 아니고 정신도, 영적으로, 신앙으로, 결단력으로도 장수였습니다. 그래서 10명 모두가 불평을 유도했을 때 이 두 사람은 나서서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약으로 주신 땅이다, 비록 그들은 우리보다 크지만 하나님이 도우시면 우리는 충분히 그들을 정복할 수 있다.” 이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이 언약의 믿음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그 백성들에게 얼마나 많이 약속했습니까. 가나안은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 하셨습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 입니다. 홍해를 건넌 것도 가나안을 가기 위해서 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가나안이 불가능하게 보였지만 이 두 사람에게는 그 땅은 언약의 땅으로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큰 것이 별로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거친 땅이 오히려 옥토로 보였고 젓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오늘의 현실 속에서 이미 약속하신 모습을 미리 보는 안목이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도 보지 못한 천국을 보고 믿는 것입니다. 가나안도 그런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가나안 땅에서 젓과 꿀이 흐르는 광활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들의 가는 길을 막을 수 있습니까. 믿음은 꿈이고 환상이고 약속입니다. 그 환상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오직 현실만 말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은 소망적인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불평하고 불만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이 산다는 것은 그래서 불행한 일입니다. 얼마나 불행한가 하면 그런 사람은 미래와 소망과 믿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인생은 오늘 현재만을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현재는 재미가 없습니다. 오늘 현재만 보면 절망뿐이고 미래가 암담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나오는 것이 한숨이고 걱정이고 미래가 불안해서 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악평하였던 것입니다. 언약의 힘이 약하니까 보이는 것이 오늘 현재 삭막한 땅과 키 큰 사람들과 불가능만 보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가나안 땅 즉 천국에 대한 언약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꿈을 주고 삶의 목적이 분명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천국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때 우리는 흔들리는 나를 붙잡을 수 있고 흔들리는 여론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개척의 믿음
세계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는 한결같이 주어진 환경을 고치고 살아갑니다. 그 말은 주어진 운명을 바꾸고 개선하고 새롭게 만들어 살아간다 그 말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생리가 운명에 순응하는 삶이 아니고 개척하고 만들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간 나라는 환경개선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개척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갈렙도 여호수아도 아낙손들의 거인됨을 보았습니다. 그들 모두가 전사들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크고 견고한 성읍이 있는 헤브론 땅을 정탐할 때 그들은 얼핏 보면 패배를 모르는 사람들 같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성이나 큰 키를 볼 때 누구도 저들을 침략하기가 쉽지 않겠구나 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이 문제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백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 우리가 그들을 쫓아내리이다(14:8)” 그 말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불가능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믿는 이 믿음이 축복이고 능력의 시작입니다. 마태복음 28장20절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 외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이것이 우리 믿음의 근간이고 뿌리이고 기초이고 권위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 땅이 내가 원한 땅이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땅임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하는 일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그 결과 나머지 10명과 모든 기성세대들이 다 광야에서 죽었지만 이 두 사람은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갈렙의 나이가 80세였는데 그때에도 갈렙은 가나안의 남은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원해서 정복에 나섰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을 분배하는 일에 전염했습니다. 불행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다 죽었는데도 이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노년까지 믿음의 선구자, 가나안의 개척자들이 되었습니다. 믿음에서 나온 이 긍정의 힘이 세상을 바꾸어 놓습니다.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아이에게 기자가 “너무 힘들겠구나”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래도 감사해요, 하나님이 한쪽 다리는 남겨 주셨으니까요“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누가 힘듭니까.
하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그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본체이신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말씀의 씨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고 마침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임하시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새 세계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이 말씀을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새롭게 잉태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에 사로잡히기를 원합니다. 그 말씀에 이끌려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이 세상에 희망을 말할 수 있고 소망을 전하고 행복을 전염시키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말씀으로 오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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