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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와 성경해석 / 오광만의 성경해석

by 【고동엽】 2021.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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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만 교수/ 장신신학원 교수


독자들 중에는 성경을 읽으면서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할례가 중요시되었지만 신약 시대에 와서는 그것이 세례로 대체되거나, 바울에 의해서는 부정적인 취급을 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유월절과 성만찬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반면에 십계명은 아직도 건재한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어떤 내용은 신약에 그대로 전수된 반면, 또 다른 것은 아예 폐지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또 그런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데 있어 어떤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계시하신 내용을 기록한 것이므로 성경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특징을 아는 것이 성경 해석에 요구되는 것입니다.

구속사적 괴리
성경은 우리에게 단 시간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여러 저자들을 통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책마다 시간적으로 간격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발생한 구원의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구약 시대에 발생한 사건과 그 시대에 존재했던 제도가 신약 시대에 와서는 변화가 발생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사는 구약에서의 의미와 신약에서의 의미가 다릅니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리는 예식을 구체적으로 행했으나, 신약에서는 그런 행동이 일체 없는 것입니다. 할례 역시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 백성의 표로서 의미가 있었지만, 신약에서는 의미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는 장애로 여겨져 폐지해야 할 것으로 이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신약의 저자들과 동일한 신약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신약 시대의 사람들과 다른 문화, 사회, 언어적인 간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6:20의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바울 사도의 권면을 디모데후서 4:2의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는 말씀과 같은 비중을 두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되었던 여자가 예배 시에 머리에 쓰고 기도하는 문제에 대해 이 시대 사람들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 사이, 심지어 신약의 어떤 교훈 자체에 있어서까지 어떤 다른 점이 있어 이후 시대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을 구속사적 괴리라고 부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 독자들 시대와 우리 시대 사이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발견해야 하는지 또 그런 상황 속에서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겠습니다.


계시 역사로서의 성경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시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셨을까요? 마태복음 11:25~27(병행, 눅 10:21~24)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특성을 잘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마태(“이 때엡“)와 누가(“그 때엡“)는 시간의 부사를 사용하여 잘 알려진 이 말을 시작합니다. 마태의 “이 때염는 시간적인 관심보다는 그가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주제와 관련된 관심사를 반영합니다. 그가 11장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와 관련하여 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반면, 누가의 이 말은 70인이 전도에서 돌아온 후 한 것으로 앞의 문맥과 연결시키려는 누가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17절). 누가는 제자들이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표시하기를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였다“(21절)고 하였고, 이것은 20절의 제자들에게 기뻐하라고 가르친 내용과 병행을 이룹니다. 누가의 본문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동일한 본체론적 동등성과 예수님의 메시아 의식을 나타내는 구절이며, 또한 무엇보다도 성부와 성자의 계시 활동과 계시 활동의 내용에 관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배경이야 어떠하든 간에 두 본문에는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의 독점성이 천명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앎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것을 계시라는 용어로써 표현하셨습니다. 본문에 반영된 계시의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계시의 필요성
“계시하다, 나타내다“는 단어는 “감추다“에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즉, 계시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감추어졌던 어떤 것(비밀한)을 밝히 드러내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시하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계시는 그분이 계시해주시지 않는다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찾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밖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마태와 누가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혜 있는 자에게 감추시고 어린아이에게 계시하셨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계시의(하나님) 주권성
하나님은 계시를 하실 의무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 강제로 계시하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활동은 그분의 순전히 자의적이며 주권적인 행위에 의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6; 눅 10:21)라는 말로,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는 자가 없나이다“라는 말로써(마 11:27; 눅 10:22) 이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계시의 전 포괄적인 범위
계시의 범위를 알기 위해서 이 구절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용어는 “‘이것을‘…에게는 숨기시고…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눅 10:21)와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사오니“(마 11:27; 눅 10:22)에서 “이것“과 “모든 것“입니다. “이것“은 지시대명사로서 선행사가 필요한데, 마태복음에서는 20~24절의 여러 도시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들이 그 선행사이고,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사탄과 그의 통치를 무력화시킨 종말론적 정복이 그 선행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마태복음 11:12, 13에 나타난바 선지자와 왕들(율법과 선지서)로 특징되는 옛 질서와 대조되는 실체들입니다. 즉, 제자들이 지금 보고 듣는 실체들은 새로운 종말론적 실체들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하여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실체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마 11:11~13; 눅 10:9).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것‘의 선행사라면, 하나님 나라가 표현하는 삶의 전 포괄적인 질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종말론적 주되심,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통치(엡 1:22) 등이 여기에 포함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시에 들어있는 내용들입니다.


계시와 역사
계시는 역사 속에서 그리고 역사의 과정 속에서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개관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성경 계시의 역사를 개관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계시의 역사를 형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전 시대에 약속하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절정에 달한 구원입니다. 태초부터 시작된 역사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구속(구원)은 하나님의 백성과 맺은 언약에 따라 실현된 구속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구원의 역사뿐만 아니라 언약의 역사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방금 언급한 내용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곳이 히브리서 1:1, 2a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구절은 우리에게 계시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 그 특징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여기서 먼저 계시의 사실을 천명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옛적이나, 마지막 날인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계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심(계시하심)에 있어 계시들 사이에 구별(대조)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시간적으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말씀하신 것과 지금, 마지막 시대에 말씀하신 것 사이에 대조가 있습니다. 수단과 관련하여 계시는 조상들에게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계시의 수단(중보자)으로서 선지자란 말을 하나의 제유법을 사용하여 단지 구약의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오시기 이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전(全)계시를 가리키면서, 그 때의 계시와 마지막 날에 주어진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계시와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조는 서로 반대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새 언약과 옛 언약사이의 구별을 나타내는 대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많은 분량과 많은 방법으로 표출되었는데, 여기서는 계시의 다양성이 강조되었습니다.


히브리서 2:2~4은 히브리서 1:1, 2을 보충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1장의 언급과 마찬가지로 옛 계시와 새 계시의 대조를 보여줍니다. 본문에는 천사로 주어진 구약 시대의 구원과 주님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동원되어 주신 신약 시대의 구원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3:1~6에서도 선지자의 으뜸인 모세(신 18:15, 18)와 그리스도를 대조하면서, 옛 시대의 사역자인 모세와 예수님의 사역이 종과 주인의 아들이란 차이로, 계시는 서로 대조된다는 사실이 강조되었습니다.


긴긴 계시의 역사 동안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계시 수단을 사용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꿈이나 환상, 또는 음성, 또는 사람의 육성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헤르만 바빙크 박사는 <하나님의 큰일>(Our Reasonable Faith)이라는 책 56~68쪽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방법을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그가 사용한 용어는 신의 현현(Theophany), 예언(Prophecy), 이적(Miracles)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한편 유용하지만 다른 한편 계시 이해에 혼동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이 용어를 게할더스 보스 교수가 사용한 용어로써 표시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보스는 이것을 임재(Presence), 말씀(Word), 행위(Deed)로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각각 바빙크의 신의 현현, 예언, 이적에 해당하는 말들입니다. “임재“란 매개체 없이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을 알리신 계시입니다.


“말씀 계시“는 하나님께서 직접 또는 예를 들면, 모세, 선지자, 천사처럼 다른 인격체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행위 계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구원 행위와 관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이룩하시고, 그의 피조물들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활동하시는 패턴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행위들은 상호 관련 없는 어떤 일련의 사건들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목적이 있는 총체적인 역사입니다. 그 중심과 절정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두 계시(“말씀 계시“와 “행위 계시“)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말씀 계시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행위 계시를 위하여 있으며, 행위는 말씀 계시의 주제가 됩니다. 모든 말씀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그분의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는 말씀 계시로서 전 구속 계시 역사를 보여 주는데,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의 말씀과 구속 행위가 짝을 이루며 등장하는 법입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 사건의 경우, 출애굽이라는 행위 계시가 발생하기 수백 년 전인 창세기 15:13~16에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집트에 갔다가 다시 올라 온 것을 계시한 예고(말씀 계시)가 등장합니다. 출애굽 1장 이하에도 출애굽에 대한 계시적 말씀이 먼저 주어졌고, 그 후 열 가지 재앙을 필두로 그 전체 과정이 홍해를 건넌 사건으로 실제의 출애굽(구속 행위)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9, 20장은 십계명을 주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구원 행위에 대한 설명과 그 의의를 설명하는 말씀 계시를 표현합니다(특히, 출 19:4, 20:1, 2).


성경은 이런 식으로 계시 상호간에 유기적인 연관성도 지니면서 또 이전 계시와 이후에 주어진 계시 사이에 발전과 상이성을 지니면서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이런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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