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P. Clowney), 성경신학이란 무엇인가? (1)
진실 2021. 3. 25. http://blog.daum.net/kkho1105/23220
E. 클라우니(Edmund P. Clowney)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하여 휘튼대학과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예일대학교, 휘튼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개혁신학자인 메이첸이 세운 정통장로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회를 하다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실천신학 교수와 총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글은 그의 저서인 Preaching and Biblical Theology에 기록한 된 것으로 요약 소개해 본다.
타인이 쓴 책에서 설교를 베끼지 않는 설교자는 누구나 자기의 설교를 취합해 한 권의 책으로 내고 싶어 한다. 이 경우 설교 문학의 흐름은 한눈에 파악이 되지만 그렇다고 현대 홍수같이 쏟아지는 설교집의 범람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눈으로 보면서도 귀로는 듣지 않는 현대 청중 앞에서 늘어놓는 하나같이 무미건조한 설교들은 신경질적이고 따분해 하는 이런 왜곡된 세대에 대한 특단의 대책을 요구한다.
현대 자기의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아다니는 행동주의 과학자들은 목회자들 사이에서 다시 일고 있는 논쟁을 더욱 자극하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목회자가 상황에 맞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목회심리학에 정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심리분석이 어렵다면 최소한 상담의 기법이라도 터득해 적어도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교감을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학자들도 목회자들에 대해 새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목회자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역할 가운데 설교자로 남기를 원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이런 심리에서 비롯된 목회자의 갈등에 대해 분석하였다. 이 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강단의 설교자들에게 새 정보 제공과 함께 더욱 많은 부담, 당황스러움을 안겨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새 컴퓨터 통신 분야도 설교자의 단상 아래까지 점거해 들어오고 있다. 현대 목회자들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설교의 교회적 배경에 대해 듣고 있고 상징에 대한 최신 서적들에 상당히 당황해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설교는 반드시 예배나 성례와 연관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새 흐름의 배후에는 지금까지 잊혀진 그러나 아직도 해결해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들이 깔려 있다. 이 시대의 설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우리는 먼저 설교란 무엇이고 무슨 내용을 선포해야 하는가에 대해 알아야 한다. 현대 말씀사역에 있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신학이다. 현대 설교에 대한 관심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 원인은 최근에 형성되고 있는 새 신학적 공감대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성경연구에 대한 새 관심은 설교의 본질과 내용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실정이다.
설교자가 진리를 붙들고 또한 진리에 의해 붙잡혀야 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의 의미와 구조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새롭게 감당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된다. 현대 설교와 관련된 새롭고 다양한 흐름들 가운데는 성경신학이라고 지칭되는 연구만큼 의미있거나 유익함을 주는 것도 없다.
성경신학이란 무엇인가? 비록 성경신학이 현대 신학의 한 부분으로 널리 인식되어 있음에도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많은 논문과 글을 볼 수 있다. 성경신학이란 용어는 종종 기독교 신학이라는 말과 단순한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적어도 이 용어는 고전적 의미에서 볼 때 성경 교육에 필요한 조직적 체계와 관련해 사용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용어사적으로 이 말에는 보다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 왔다. 처음에 이 용어는 교의신학을 뒷받침하기 위한 성경본문 연구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독일 경건주의자들이 자기들의 교리적 명칭으로 사용한 후 이 단어는 논쟁적인 주제로 떠올랐다. 그들은 스스로 성경신학을 루터 정교회의 사색적 스콜라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그 후 이 단어는 성경신학을 성경적 신앙에 대한 역사적 연구와 동일한 개념으로 보는 합리주의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 카이퍼가 지적한 대로 합리주의자들은 성경신학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 단어를 교회의 고백적 신학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제시함으로 둘 다 모두 거부할 명분을 쌓는 한편 합리주의적 신학을 더욱 공고히 하는 기회로 삼았다.
불행하게도 이런 성경신학적 개념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예일대학의 덴탄(Dentan) 교수는 “현대적 의미에서 성경신학은 모든 학자들이 성경적 유추나 신앙적 유추와 같이 성경의 신앙적 사상은 통일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통적 교회 교리들과도 일치해야 한다고 믿는 낡은 해석원리들을 포기할 때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세기 동안 특히 헤겔의 역사철학과 발전해온 이 합리주의적 원리들은 완전히 자멸했다. 켈러(Kaehler)는 “성경신학의 역사를 흩어보면 어떻게 이 분야가 스스로 붕괴하게 되었는지 놀랍다”라고 했다. 역사적 방법론에서 주장하는 상대주의는 각 개념의 본질에 해당하는 규범적 요소들이 상실되었다는 이유로 성경적이라는 말과 신학적이라는 말을 분리했다. 종교사적 방법에 있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 이들의 논리는 결국 신구약 성경이 민족적 종교 문학과 구별될 수도 없고 이스라엘 종교를 주변국의 종교로부터 분리할 수도 없다는 결론으로 귀착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칼 바르트(Karl Barth)의 로마서 주석 발간을 계기로 이런 흐름에 역행하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대 사람들은 성경신학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것은 규범적 요소라 확신한다. 이런 강조와 함께 성경신학에 대한 새 연구와 관심이 늘어났다. 규범적 요소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그러나 회복의 방법에 있어서 의견이 다양하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전과 달리 성경이 스스로 일관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어떤 성경적 유추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기독교회의 정서에 부합되는 고대 이스라엘의 일관된 종교적 체험 속에서 규범적 통일성을 찾으려는 사람이 있고 성경의 기념비적 사건들을 통해 계속해 일관성을 이어오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에서 이를 찾으려는 사람도 있다. 성경신학의 가능성에 대한 열띤 토론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성경의 규범적 통일성을 인정하면서 성경신학의 규범적 통일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보여준다. 성경에는 다양한 신학이 존재한다고 믿는 학자들은 성경신학의 통일성을 위한 성경적 근거를 포기한지 오래다.
그들은 앞으로도 이스라엘의 종교적 경험으로부터 증류해 내거나 지적 신앙의 통찰을 통해 신학적 통일성을 찾으려 하겠으나 어떤 결과를 내던 성경신학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다. 가령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와 계시 행위를 성경신학의 근본적 통일성으로 제시한다 해도 그들이 성경 자체를 부인하는 한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찾는데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인간적 세속 문학에 나타난 다양한 반응들이 신적 행위의 일관된 흐름과 상통한다고 믿을지 모르나 그들이 생각하는 신적 패턴이 기록된 성경으로 남아 있지 않은 한 이런 생각은 모두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다. 기록된 성경을 떠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히브리 선지자들과 동일하다는 사실조차 단언하기 어렵다.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신은 그들이 말하는 바알일지도 모른다.
실제 비판학자들이 성경 내용을 분석하는 과정을 보면 그들이 어떤 전제를 가지고 그 일을 하고 있는지 명백하게 드러난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성경적 유추를 현대적 사고의 틀로 대치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지금도 특별계시는 지속되고 있으며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계시는 선지자들이 기록한 내용을 교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영감과 조명을 혼돈하여 현대 통찰력을 과신하고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성경의 메시지는 비신화화 되어야만 한다는 불트만(Bultmann)의 주장은 이런 전제에 대한 저들의 일관된 외침의 한 표현이다. 만약 저들의 주장대로 계시된 진리는 없고 오직 실존적 게시 행위를 통한 경험만 존재한다면 현대적 지성은 누가 보아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런 경험에 대한 규범적 기준이 제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성경신학을 하고자 한다면 성경적 전제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지금까지 역사 방법론으로 당연시되어 온 반초자연주의를 버려야만 한다. 이처럼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역사 방법론적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뻔뻔하게 남은 부스러기를 가지고 아니면 신앙은 없고 자식만 남은 과학적 영역의 먹구름 속에서 성경신학의 체계를 세워보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계속)
요약 정리: 김순정 목사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P. Clowney), 성경신학이란 무엇인가? (1):리폼드뉴스 (reformednews.co.kr)
진실 2021. 3. 25. http://blog.daum.net/kkho1105/23220
E. 클라우니(Edmund P. Clowney)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하여 휘튼대학과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예일대학교, 휘튼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개혁신학자인 메이첸이 세운 정통장로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회를 하다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실천신학 교수와 총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글은 그의 저서인 Preaching and Biblical Theology에 기록한 된 것으로 요약 소개해 본다.
타인이 쓴 책에서 설교를 베끼지 않는 설교자는 누구나 자기의 설교를 취합해 한 권의 책으로 내고 싶어 한다. 이 경우 설교 문학의 흐름은 한눈에 파악이 되지만 그렇다고 현대 홍수같이 쏟아지는 설교집의 범람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눈으로 보면서도 귀로는 듣지 않는 현대 청중 앞에서 늘어놓는 하나같이 무미건조한 설교들은 신경질적이고 따분해 하는 이런 왜곡된 세대에 대한 특단의 대책을 요구한다.
현대 자기의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아다니는 행동주의 과학자들은 목회자들 사이에서 다시 일고 있는 논쟁을 더욱 자극하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목회자가 상황에 맞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목회심리학에 정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심리분석이 어렵다면 최소한 상담의 기법이라도 터득해 적어도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교감을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학자들도 목회자들에 대해 새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목회자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역할 가운데 설교자로 남기를 원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이런 심리에서 비롯된 목회자의 갈등에 대해 분석하였다. 이 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강단의 설교자들에게 새 정보 제공과 함께 더욱 많은 부담, 당황스러움을 안겨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새 컴퓨터 통신 분야도 설교자의 단상 아래까지 점거해 들어오고 있다. 현대 목회자들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설교의 교회적 배경에 대해 듣고 있고 상징에 대한 최신 서적들에 상당히 당황해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설교는 반드시 예배나 성례와 연관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새 흐름의 배후에는 지금까지 잊혀진 그러나 아직도 해결해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들이 깔려 있다. 이 시대의 설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우리는 먼저 설교란 무엇이고 무슨 내용을 선포해야 하는가에 대해 알아야 한다. 현대 말씀사역에 있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신학이다. 현대 설교에 대한 관심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 원인은 최근에 형성되고 있는 새 신학적 공감대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성경연구에 대한 새 관심은 설교의 본질과 내용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실정이다.
설교자가 진리를 붙들고 또한 진리에 의해 붙잡혀야 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의 의미와 구조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새롭게 감당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된다. 현대 설교와 관련된 새롭고 다양한 흐름들 가운데는 성경신학이라고 지칭되는 연구만큼 의미있거나 유익함을 주는 것도 없다.
성경신학이란 무엇인가? 비록 성경신학이 현대 신학의 한 부분으로 널리 인식되어 있음에도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많은 논문과 글을 볼 수 있다. 성경신학이란 용어는 종종 기독교 신학이라는 말과 단순한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적어도 이 용어는 고전적 의미에서 볼 때 성경 교육에 필요한 조직적 체계와 관련해 사용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용어사적으로 이 말에는 보다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 왔다. 처음에 이 용어는 교의신학을 뒷받침하기 위한 성경본문 연구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독일 경건주의자들이 자기들의 교리적 명칭으로 사용한 후 이 단어는 논쟁적인 주제로 떠올랐다. 그들은 스스로 성경신학을 루터 정교회의 사색적 스콜라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그 후 이 단어는 성경신학을 성경적 신앙에 대한 역사적 연구와 동일한 개념으로 보는 합리주의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 카이퍼가 지적한 대로 합리주의자들은 성경신학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 단어를 교회의 고백적 신학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제시함으로 둘 다 모두 거부할 명분을 쌓는 한편 합리주의적 신학을 더욱 공고히 하는 기회로 삼았다.
불행하게도 이런 성경신학적 개념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예일대학의 덴탄(Dentan) 교수는 “현대적 의미에서 성경신학은 모든 학자들이 성경적 유추나 신앙적 유추와 같이 성경의 신앙적 사상은 통일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통적 교회 교리들과도 일치해야 한다고 믿는 낡은 해석원리들을 포기할 때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세기 동안 특히 헤겔의 역사철학과 발전해온 이 합리주의적 원리들은 완전히 자멸했다. 켈러(Kaehler)는 “성경신학의 역사를 흩어보면 어떻게 이 분야가 스스로 붕괴하게 되었는지 놀랍다”라고 했다. 역사적 방법론에서 주장하는 상대주의는 각 개념의 본질에 해당하는 규범적 요소들이 상실되었다는 이유로 성경적이라는 말과 신학적이라는 말을 분리했다. 종교사적 방법에 있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 이들의 논리는 결국 신구약 성경이 민족적 종교 문학과 구별될 수도 없고 이스라엘 종교를 주변국의 종교로부터 분리할 수도 없다는 결론으로 귀착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칼 바르트(Karl Barth)의 로마서 주석 발간을 계기로 이런 흐름에 역행하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대 사람들은 성경신학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것은 규범적 요소라 확신한다. 이런 강조와 함께 성경신학에 대한 새 연구와 관심이 늘어났다. 규범적 요소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그러나 회복의 방법에 있어서 의견이 다양하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전과 달리 성경이 스스로 일관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어떤 성경적 유추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기독교회의 정서에 부합되는 고대 이스라엘의 일관된 종교적 체험 속에서 규범적 통일성을 찾으려는 사람이 있고 성경의 기념비적 사건들을 통해 계속해 일관성을 이어오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에서 이를 찾으려는 사람도 있다. 성경신학의 가능성에 대한 열띤 토론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성경의 규범적 통일성을 인정하면서 성경신학의 규범적 통일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보여준다. 성경에는 다양한 신학이 존재한다고 믿는 학자들은 성경신학의 통일성을 위한 성경적 근거를 포기한지 오래다.
그들은 앞으로도 이스라엘의 종교적 경험으로부터 증류해 내거나 지적 신앙의 통찰을 통해 신학적 통일성을 찾으려 하겠으나 어떤 결과를 내던 성경신학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다. 가령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와 계시 행위를 성경신학의 근본적 통일성으로 제시한다 해도 그들이 성경 자체를 부인하는 한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찾는데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인간적 세속 문학에 나타난 다양한 반응들이 신적 행위의 일관된 흐름과 상통한다고 믿을지 모르나 그들이 생각하는 신적 패턴이 기록된 성경으로 남아 있지 않은 한 이런 생각은 모두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다. 기록된 성경을 떠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히브리 선지자들과 동일하다는 사실조차 단언하기 어렵다.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신은 그들이 말하는 바알일지도 모른다.
실제 비판학자들이 성경 내용을 분석하는 과정을 보면 그들이 어떤 전제를 가지고 그 일을 하고 있는지 명백하게 드러난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성경적 유추를 현대적 사고의 틀로 대치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지금도 특별계시는 지속되고 있으며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계시는 선지자들이 기록한 내용을 교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영감과 조명을 혼돈하여 현대 통찰력을 과신하고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성경의 메시지는 비신화화 되어야만 한다는 불트만(Bultmann)의 주장은 이런 전제에 대한 저들의 일관된 외침의 한 표현이다. 만약 저들의 주장대로 계시된 진리는 없고 오직 실존적 게시 행위를 통한 경험만 존재한다면 현대적 지성은 누가 보아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런 경험에 대한 규범적 기준이 제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성경신학을 하고자 한다면 성경적 전제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지금까지 역사 방법론으로 당연시되어 온 반초자연주의를 버려야만 한다. 이처럼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역사 방법론적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뻔뻔하게 남은 부스러기를 가지고 아니면 신앙은 없고 자식만 남은 과학적 영역의 먹구름 속에서 성경신학의 체계를 세워보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계속)
요약 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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