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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스와 장로교회<자료제공: 생명의 말씀사 `청교도 인물사`>

by 【고동엽】 2021. 11. 5.
낙스가 주축이 되어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 안에는 칼빈주의 색채가 짙게 깔려 있지만 교회 정치에 있어서 장로교회로 한다는 명문 규정이 없다. 더욱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낙스의 생존시 감독(Superintendent)이라는 직책이 엄연히 존재한 점이다. 그렇다면 낙스는 영국 성공회와 같은 감독교회(Episcopal Church)를 스코틀랜드에 창설했는가 하는 것이 규명되어야 한다.



에든버러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였던 도널드슨(G. Donaldson)은 낙스가 개혁한 스코틀랜드 교회는 처음부터 감독제였으나, 그의 후계자 앤드루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이 제네바에서 돌아와 제2의 개혁을 일으킴으로써 장로회 체제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도널드슨이 무엇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하는가?

첫째, 낙스는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영국의 궁정 목사로 시무할 때 이미 감독교회 정치의 영향을 받았다.

둘째, 스코틀랜드는 종교 개혁 이전부터 개혁파 교회보다는 루터파 교회의 영향하에 있었다.

셋째, 1560년 낙스가 작성한 제1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에 의하면 목사의 임명이 회중에 의한 선거와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에 의해 시행된 시험과 공적 임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이란 상당한 권한이 부여된 감독을 의미한다.

넷째, 감독은 1년에 2회 이상 담당 관할 구역을 시찰하고, 목사의 불경건한 삶이 발견될 경우 대회를 소집하여 해당 목사를 해임시킬 뿐 아니라, 감독구에 있는 주요 도시에 감독 재판소를 설치하여, 감독의 임명 또는 교인들의 이혼 문제를 다루는 사법 재판관 기능을 했다.

다섯째, 연금 수령에 있어서 감독은 500내지 700파운드를 받았는데 반해 일반 목사들은 100파운드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차등 지불은 감독의 우위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도널드슨의 학설은 내픈과 리드에 의해 반박되었다. 특히 리드는 낙스의 저술을 세세히 분석하여 낙스가 성직자의 주임무를 말씀의 선포로 보았던 점 그리고 성직자는 성공회와 같이 교회 기구나 세속 권력의 관여가 아닌 오직 회중의 동의에 의해서 임명된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오덕교 교수도 리드의 학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제1치리서 제5항 제1조에서 제3조에 기록된 “감독”이라는 용어는 낙스의 진의가 아니었다. 낙스가 처음 작성한 원본에는 감독이란 용어가 빠졌으나 후에 그의 동료 윌록과 스포티스우드가 수정 작업에 참여하면서 감독이라는 말을 삽입했다.

이 감독이라는 명칭은 개혁을 추진하던 당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마련된 행정 조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의 감독직은 영구직이 아닌 한정직이었고(처음에는 3년, 1570년도부터는 1년으로 단축되었음), 자기 관할 구역으로부터 비판과 치리를 받는 입장이며, 무엇보다도 영국 성공회가 인정하지 않는 장로 제도를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인정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감독직은 도널드슨이 생각한 것처럼, 영국 교회의 치리자의 입장이 아닌 지교회를 돌보는 방문자 또는 순회 전도자로 해석되어야 한다.

1566년 스코틀랜드 총회는 제2헬베틱 신앙 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을 채택하여 목사 직위상의 우월성을 부정하였다.

여기에서 낙스는 영국 망명 생활에서 로체스터 감독직을 제안받았으나 감독 정치는 성경이 금한다고 믿었기에 정중히 사양한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따라서 낙스는 처음부터 스코틀랜드에 장로교회를 조직하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못해 장로교회의 씨앗만 뿌린 것이다.

우리는 1560년 당시 비록 개신교 세력이 절대 우위를 차지했지만, 가톨릭 교회의 직분자들(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등)이 계속 교회에 출석했고, 그들은 직분에 따른 재산도 그대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야 한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가톨릭 성직자 및 그들의 재산 관리 때문에 상당 기간 동안 그들과 타협해야 했던 것이다.

1572년 추밀원과 개혁교회 지도자들이 합동하여 리스 협약(Concordat of Leith)을 작성했다. 이 협약에서 가톨릭측 인사들도 개혁교회에서 임직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개혁교회의 일원이 되면 개혁교회의 총회에 복종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낙스가 뿌린 장로교회의 씨앗은 그의 후계자 앤드루 멜빌 시대에 와서 꽃을 피웠다.

<자료제공: 생명의 말씀사 '청교도 인물사'>
로이드존스연구사이트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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