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를 통해 본 개혁과 교회문제 / 이상규교수
글쓴이: 열매가득 08.03.03 http://cafe.daum.net/tbbl/Gasu/59
아래 글은 진리와 학문의 세계 제13권(2005년 가을호 달구벌기독학술연구회)에 실린 글을 옮긴이(keeper77)가 손수 타이핑하여 다시 편집, 게재합니다.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2006년 개강(봄)학기 학술세미나에 고신, 이상규교수가 금번에 말씀을 전해주실 것으로 예정되어 있어서 마침“교회사에 비춰 본 한국교회의 문제와 교회개혁에 관한 좋은 글”이 있어 게재합니다. 꼼꼼히 읽어 보시면서, 여러 가지 리플(소감)도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퍼 가실 때에는 옮긴이의 수고도 고려하여 답글도 잊지 마시길....
교회사를 통해 본 교회개혁과 한국교회의 문제
(Vita clerici est evangelium laice)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Th.D)
1. 시작하면서
교회개혁은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었고 범람하는 물결을 이루고 있다.‘교회개혁’을 이루려는 단체도 조직되었고,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교회를 항의 방문하거나 피켓을 들고 시위하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한국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한국교회에서 개혁에 대한 요구가 높은 것은 한국교회에는 뭔가 개혁되어야 할 것이 많고, 개혁되지 않으면 안 될 그 무엇이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개혁을 말할 때 현실적인 문제에 앞서 보다 근원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고, 이런 점에서 교회사적 측면에서 교회 개혁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교회 개혁의 문제를 역사적 안목으로 살펴보고, 이를 기초로 한국교회의 문제와 쇄신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2. 교회사에서 본 교회 개혁
서양 전통에서 교회가 본래적 교회로부터 이탈했고 따라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인식한 구체적인 최초의 경우는 사도이후 첫 기독교 문서라고 할 수 있는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서신에서부터 나타난다. 96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서신에서 비록 클렌멘트는 오늘 우리가 말하는 식의‘개혁’을 말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본래적인 사랑과 순종, 겸손이 없는 교회 분규에 대해 비판하면서 저들을 질책하고 그런 삶으로부터 돌아설 것, 곧 쇄신을 요구했다. 클렌멘트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고, 교만, 자만, 탐욕, 투쟁, 그리고 분열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음”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겸손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클레멘트는 평화와 화목을 위해 목회자들이나 장로들을 존중하고 복종할 것을 권하고, 목회자의 권위와 권한을 강조했다. 이렇게 본다면 교회쇄신의 요구는 교회 역사만큼이나 긴 역사임을 알 수 있다.
특히, 2세기 중반(156-172) 몬타누스(Montanus)는 당시 교회의 속화와 타락을 심각하게 생각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비록 그의 교회쇄신에의 의지는 이단운동으로 발전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이나 마르키온파 등과 같은 초기 이단들과 달랐다. 몬타누스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다. 2세기 당시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가 식어지고 교회 안에 안일과 나태가 구체화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보혜사 성령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성격상 교회개혁적 동기를 지니고 있었다. 비록 현실 교회의 나태와 안일, 그리고 속화 현상에 대한 그의 쇄신의 의지가 오도된 방향으로 전개되어 드디어는 거짓 계시운동(僞經運動)으로 발전하였지만 그는 2세기 당시 교회의 속화현상을 인식했던 인물이었다.
수도(원) 운동(제도) 또한 당시 교회의 타락과 속화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물론 수도원 운동은 자연과 은총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이원론이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교회의 속화와 타락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안토니우스(Anthonius, c.250-c.356)로 시작되는데, 그는 270년 경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명상에 전념하기 위해 은둔의 길을 갔는데 이것이 수도운동의 기원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집트의 금욕주의 운동은 시리아와 소아시아 그리고 서부 유럽에까지 퍼져나갔고, 소아시아에서는 바질(Basil), 나시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anzus), 닛사의 그레고리 등에 의해 수용되었다. 이 운동은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295-373)에 의해 서방에 소개되었는데, 마틴(Martin of Tours, c. 316-397), 히에로니우스(Hieronius), 제롬(Jerom), 암브로스(Ambrose), 어거스틴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후에는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542?)에 의해 서방교회 수도원운동의 기본 토대가 형성된다. 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이런 수도원 운동의 전개의 현실적 동기였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고 교회가 세속화되자 이에 대한 반동으로 금욕생활이 강조되었고, 교회가 조직화되고 규율화 됨에 따라 새로운 제도의 신앙생활에 대한 욕구가 수도원운동으로 확산되어 간 것이다.
일반적으로 313년 기독교 공인을 교회가 본래적 교회 혹은 사도적 교회로부터 이탈한 뚜렷한 시기로 보고 있다. 312년 밀비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콘스탄틴은 313년 1월 {밀란칙령}(Edict of Milan)을 발표함으로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했다. 이 당시 제국의 기독교 인구는 약 10% 정도로 파악되는데,(Norman H. Baynes, Constantine the Great and the Christian Church (Oxford: Oxford Univ. Press, 1931), 4. 기독교 공인 이후 기독교회의 신앙과 삶은 현격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제 박해는 종식되었고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보호를 받았고 차츰 차츰 권력의 비호까지 받게 되었다. 예배를 위해서 교회당이 건축되었고, 감독과 설교자들은 국가로부터 급료를 받았고, 교직자의 납세는 면제되었고(319), 주일(主日)은 안식하는 날로 지정되어 그 준수가 의무화 되었다(321). 380년대를 경과해 가면서 기독교는 제국의 국교(國敎)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난의 길이었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앙적 용단을 필요로 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영광과 지위와 명예를 얻는 길이었다. 탄압받던 기독교가 보호받는 기독교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교회는 차츰차츰 신약 교회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회 안에는 이교적 풍습과 미신, 신비주의적 의식과 거짓된 경건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고난과 희행, 겸손과 봉사, 혹은 성결과 거룩과 같은 신령한 가치는 그 의미를 상실하였고, 현세적 부와 권력을 지향하는 인간적 탐욕이 교회를 지배하였다. 이런 점들은 이전의 교회와 구별되는 뚜렷한 변화였고, 차츰 교회의 제도화와 교권체제가 확립되어 갔다. 그래서 4세기 이후의 교회를 이전 시기와 구별하여 ‘콘스탄틴적 기독교’(Constantinian Christianity)라고 부른다. 그래서 4세가 초를 거쳐 가면서 교회는 본래적 교회와 다른 변질된 교회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 점을 달리 말하면 4세기 이전의 교회를 참된 교회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개혁을 말하는 이들은 4세기 이전의 기독교회, 혹은 사도적 교회를 이상적인 교회로 인식하게 된다. 특히 재세례파는 4세기 이후의 교회 곧, 중세교회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보아 그 의미를 완전히 부정하는 역사의 비연속성(discontinuity)을 주장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개혁의 목표는 313년 이전으로 돌아가는‘복귀’(restitution)였다. 재세례파가 삼위일체론이나 예정론에 대해 부정적인 이유는 그런 교리들이 313년 기독교의 공인 이후 제정된 교리라는 점 때문이었다.
흔히 기독교의 공인이나 국교화 이후의 기독교회를 본래적 교회로부터 이탈한 변질되고 타락한 교회로 말하지만, 윌리엄 커닝헴은 교회의 변질은 이미 2세기 초부터 있어왔다고 지적한다. 윌리엄 커닝헴(William Cunningham)은 그의 [역사신학](Historical Theology)제1권 7장에서 교회의 부패는 이미 2세기부터 나타난다고 지적하고, 그 징후로 3가지를 지적한 바 있다. 첫째는 고위성직(Prelacy)의 발생과 발전, 둘째는 은혜의 교리에 대한 모호하고도 잘못된 견해의 대두, 셋째는 덕(Virtue)과 성만찬의 효과에 대한 오도되고 과장된 개념의 대두가 그것이다. (William Cunningham, Historical Thology, Vol. 1, 202). 말하자면 2세기 초부터 보여주는 인간중심주의가 교회의 변질과 타락의 시작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점은 2세기부터 서서히 나타나는 감독정치 제도와 괘를 같이 한다. 독일의 교회회사가 슈미트(K. D. schmidt)는 95년경부터 카톨릭교회가 시작되고 200년경에는 상당한 정도의 확고한 조직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K. D. Schmidt, Kirchengeschichte, s. 73.) 그도 1세기 말에서부터 교회의 제도화가 시작되었다고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점을 고려해 볼 때 교회의 속화나 타락은 중세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태동한 이후부터 줄 곧 제기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이지만,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Divine institution, human constitution)이기 때문에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 않고 완전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에는 “영적인 비상(飛上)과 부흥이 있었는가 하면, 쇠퇴와 퇴락(頹落)의 날들도 없지 않았다. 마치 산등선을 넘으면 계곡이 있고, 계곡을 지나면 다시 산등선이 나오듯이 교회의 역사도 개혁과 타락, 부흥과 쇠퇴 등 갱정(更正)과 쇠락(衰落)의 긴 여정은 지내왔다.”(이상규, {교회개혁과 부흥운동} (SFC, 2004), 8. 교회의 역사를 보면 영적 부흥과 쇠퇴는 “때로 우리 믿음이 올라가기도 하지만(up) 때로 우리의 믿음이 내리막길로 내려가는 것(down)과 같다는 흑인영가의 가사처럼 부침(浮沈)의 역사를 겪어왔다.
교회 역사에는 영광과 오욕이 반복되었고 굴곡과 요철이 있어왔다. 이런 영욕의 자취는 외국교회의 역사만이 아니라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우선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이다. 첫째, 지상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으며, 완전한 교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교회의 쇄락과 부패 혹은 오욕의 자취는 근본적으로 교회를 구성하는 인간의 타락에 근거한다. 셋째,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며, 지상의 교회가 완전할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완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3. 중세교회는 왜 부패했는가?
일반적으로 1세기 사도시대의 교회를 가장 성경적인 기독교회로 간주하고 이를 가장 이상적인 교회로 인식하고 있다. (이 점에는 일면 타당성이 있지만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교회의 제도와 관련해서 볼 때 더욱 그렇다. 사도시대의 교회가 어떤 제도를 가졌는지 교회 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지침이나 모범이 없다. 사도 시대의 교회는 이제 성립된 교회로서 제도면에서 조직화되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그래서 초기 사도적 ‘교회상’으로부터의 이탈을 흔히 교회의 속화 혹은 타락이라고 간주해 왔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4세기 이후 교회관, 교회구조에는 많은 변화가 수반된다. 특히 평신도와 교직자간의 구별이 뚜렷해지기 시작하였고, 교회는 이 두 계층으로 구분되기 시작한다. 점차 교직자들은 교권을 행사하게 된다. 수도생활이나 금욕이 박해 하의 순교에 해당하는 영광스러운 일로 인식되고 수도승들이 출현하게 된다. 이 시대는 평신도와 교직자 간의 구별이 뚜렷해졌을 뿐만 아니라 교직자들 간에도 계층화가 나타났다. 이 계층화는 신분상의 계층화만이 아니라 수입에도 현저한 차이가 있어 고위 성직자들이 거의 생계를 유지할 정도였고 구두수선공보다 못한 급료로 살아갔다. 가난한 성직자들은 가죽 제조업, 직조, 제조업, 버터와 치즈 행상을 하기도 했다. 로마교회의 수위권이 인정되면서 로마감독이 교황권을 주장하게 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세로 접어들면서(590), 교황권의 세속권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게 되고 교회는 절대권력으로 군림하여 소위 황제교황주의(Caesar-papim)가 대두한다.
중세교회의 문제는 3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교리와 신학의 변질이다. 오도된 교리와 인간중심의 신학, 공로사상, 거짓된 경건과 신비주의는 이 시대의 변질된 신학의 교회관의 일면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중세교회의 가장 중요하고도 근원적인 문제는 신학적 혹은 교리적 변질이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논의 되었으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하였다.) 둘째, 교회 제도나 구조에 있어서의 비신학적 혹은 비윤리적 성격을 들 수 있다. 계층적 교권체제, 제도상의 문제등이 그것이다. 예컨대, 성직자들을 윤리적이지 못한 행위를 정당화 하는 ‘겸직제도’(pluralism)나 ‘부재직임제’(absenteeism), 성직자들의 취첩을 묵인하게 해 주었던 세금제도(Concubinage fee)등이 그것이다. 셋째, 부에 대한 지나친 탐욕이었다. 물질적 부요(富饒)에는 영적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는데, 교회 지도자들이 부에 탐닉하엿다는 말은 교회가 세속적 가치관을 다스릴 통제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교회 지도자들의 부에 대한 탐욕은 정도를 넘어섰다. 예컨대, 교횡 보니페이스 8세(Boniface VIII, 1294-1303)의 교황 관저에는, 공식기록에 따르면, 48개의 루비, 72개의 사파이어, 45개의 에머랄드, 66개의 커다란 진주들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부루스 셜리, [현대인을 위한 교회사], 277) 돈 만드는 천재로 알려진 요한 22세 (1316-1334)는 각종의 징세제도를 창안하여 교회 질서를 극도로 문란 시켰고, 성직을 매매하고 면죄부를 판매했다. 넷째, 교회가 세속 권력을 탐닉했다는 점이다. 영적 공동체인 교회가 권력 지향적 계급체계로 변모되었고, 교회 지도자는 세속권력을 추구했다. 교황은 교회의 수장으로만이 아니라 세속까지도 다스리는 교황이었다.
이렇게 교회 지도자들이 세속적 가치인 부와 권력을 움켜지게 되자, 도덕적 윤리적 표준을 상실하였고 극도의 문란한 일면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종교개혁 직전의 교황이었던 알렉산터 6세(1492-1503)는 교회의 관행과 규율을 무시하고 극도의 타락과 방종한 생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교황이 되기 전에도 몇 사람의 정부와 3남 1녀를 두고 있었으나, 교황이 된 후에 7명의 자녀를 더 얻었다. 1447-1517년 어간의 교황 중 절반이 사생아를 두었고, 15세기 말 콘스탄츠교구의 경우 매년 약 1,500명의 사생아가 출산했다. 스코틀랜드의 성(性) MaTaggart는 ‘사제의 아들’(son of the priest)이란 뜻이고, MacNabb이라는 성은 ‘수도원장의 아들’(son of the abbot)이란 뜻에서 기원했다. 독일의 여러 도시에는 소위 여성의 집(Frauenhausen)이라는 환락가가 있었고, 여성의 주 고객은 성직자들과 고위 관리였다. 교회의 윤리적 부패는 심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16세기에는 반(反)성직주의 사상이 심화되고 있었다.(이상규, 19ff)
이런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는 카톨릭 측에서도 인정했다. 즉 교황 아드리아누스 6세(Adrianus VI, 1522-1523)는 신성로마제국의 뉘른베르크국회(1522-23)에 파견한 교황사절 프란체스코 치에레가띠 추기경에게 보낸 훈령에서 “루터 이단으로 교회가 받는 어려움의 책임은 성직자들, 특히 교황청과 그 성직자들에게 있다.”고 시인했다. 이 훈령에서는 “교회 안에는 가증할만한 폐습이 많이 있으며, 이러한 병폐들은 교황을 포함하여 성직자들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각자는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독일의 에밀 부른너(Emil Brunner)는 ‘에클레시아’가 ‘키르헤’(Kirche)로 바뀌면서 교회가 부패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신앙공동체가 제도화 되면서 본래적 교회관을 상실했다는 주장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제국의 영토에 살았으나 정신적으로는 그 사회로부터 이민을 떠난 이들이었다. 기독교 공동체는 심리적으로 그 시대를 초월해 사는(living in an imagined exile)이들이었으나 로마제국의 질서에 정주해 가면서 본래적 교회로부터 이탈했다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파로이코이’(헬), 곧 ‘나그네(들)’라고 불렀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 “나그네와 행인 같은....”에서 처음 사용된 이 말은 기독교인들의 살므이 방식과 현실 세계에 대한 태도를 반영하는 용어였다. (유사한 용어로 파로이키아(벧전 1:17), 파레피데모이(행인,2:11)등이 사용되었다. 고대 헬라세계에서 사용된 파로이코스는 법적인 용어었다. 즉 시민권이 없이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가리키는 용어였는데,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가 pregrinus였다. 영어의 필그림(pilgrim)은 여기서 기원하였다. 이 말속에는 비영속성, 일시성, 잠정성등의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교적인 세계에서 이질성(heterogeneity)을 인식하고 이 세상의 가치와는 구별된 삶을 지향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구원사적인(salvation-historical)중요성을 지니는 구별된 방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4세기를 거쳐 가면서 나그네 공동체가 4세기 이후 안주 공동체로 변모되면서 교회관의 변질이 나타나고 교회가 속화되고 타락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듯이 이 땅에서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이 땅의 가치와 이 세상의 조류를 따르다 보니 교회의 본질에서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중세교회의 문제는 결국 교회지도자,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성직자들의 문제였다. 우리가 교회가 부패했다고 말할 때, 이 말을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교회지도자가 부패했다는 말이고, 좀 더 정직하게 말하면 성직자들이 부패했다는 말이다. 결국 중세교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볼 때 성직교육의 부제와 성직자의 양산이었다. 이것이 중세교회가 부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인적 요인이었다. 티르나겔(N. S. Tiernagel)에 의하면 16세기 초 유럽 인구 중 85%가 농민, 노동자였고, 10%가 통치 그룹 혹은 귀족이었고, 성직자가 5%에 달했다고 한다. 1500년 당시 세계 인구를 약 5억으로 추산하는데, 유럽의 인구를 1억으로 본다면 성직자 수는 무려 5백만 명에 달한다. 16세기 초 독일 지방 쾰른(Cologne)만 해도 무려 5,000명의 사제들과 수도사들이 있었다. 전 독일에 수도사들과 수녀들의 숫자는 무려 1백 50만 명에 달했다. 어떤 지역은 인구 30명당 1명의 성직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럴 경우 이들을 성직자로 구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성직자의 과대 배출은 성직자의 지적, 영적, 도덕적 수준을 저하시켰고, 이들을 상호 경쟁적으로 만들었을 뿐 만 아니라, 성직자의 권위와 신뢰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또 성직자의 양산은 성직자들간의 경제적 불균형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성직자 수의 급증은 성직자들의 혜택을 감소시킬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호경쟁적인 관계가 형성되었고, 어떤 성직자들은 어마어마한 부를 향유하고 사치와 방종을 일삼았으나, 다른 한편의 성직자들의 빈곤과 가난은 극에 달했다.(이상규, 20.) 중세교회의 근원적인 문제는 결국 지도자, 곧 성직자들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제도나 조직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제도나 조직도 그 제도와 조직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기에 교회의 부패가 극에 달했던 중세말기에 나온 유명한 경구가 “성직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이다”(Vita clerici est evangelium laice)라는 말이었다.
4.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성장’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국내외적으로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으나, 동시에 ‘성장’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다른 많은 가치를 포기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수적인 성장이라는 한 가지 가치를 절대적 가치로 받아드리다 보니 성장 아닌 다른 것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 결과가 건실한 신학에 대한 무관심, 교회의 명분 없는 분열, 교회공동체의 도덕적 윤리적 계도성의 상실, 치리에 대한 무관심, 기복주의적인 설교, 무분별한 신학교의 난립과 신학교육의 부재 등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고, 한국교회의 혼란을 초래했다.
개혁자들의 주장처럼 신학은 교회를 이끌어 가는 터이자 축이었다. 건실한 신학이 없거나, 신학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잘못되지만, 한국교회는 신학 그 자체를 무시하거나 경시했다. 또 ‘신학 없는 교회’ 나 ‘교회 없는 신학’을 추구하는 양극단은 한국교회 안에 극단적인 현상을 가져왔다. 즉 교회가 안중에 없는 신학운동은 극단적 자유주의 혹은 종교다원주의 신학으로 발전하여 기독교의 고유성과 독특성을 파괴하고 있고, 신학 없는 교회운동은 극단적인 주관주의 혹은 신비주의 운동으로 발전하여 한국교회를 게토화 하고 있다. 심지어 ‘일천번제’(一天燔祭)라는 기상천외한 헌금관행이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지고 있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종교적 권위주의 또한 한국교회의 커다란 문제점이다. 당회, 노회, 혹은 총회가 지나치게 권력구조화 되었고, 세속 정치계와 방불할 정도로 엽관제도화(spoil system)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교회구조나 조직이 복음 전파를 위한 형식이 아니라, 복음운동을 방해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런 점들과 함께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적이지 못하거나 비윤리적인 일들도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심심찮게 보도되는 교회나 교회지도자의 비리는 교회에 대한 신뢰성을 상실하게 만들고 사회적 지탄을 받게 한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교회 쇄신의 길을 없을까?
5. 한국교회 개혁의 길은 무엇인가?
성직자의 자기 혁신
오늘 우리가 한국교회가 부패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지도자들이 부패했다는 뜻이다. 역으로 말하면 한국교회를 쇄신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들의 자성과 자각, 그리고 자기 쇄신이다. 앞에서 지적한 한국교회의 문제들은 교회지도자들과 직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예컨대 한국(장로)교회의 분별없는 분열은 지도자들에 의해 자행되어 왔고, 공인이자 지도자로서의 바르지 못한 삶이 한국교회가 지탄받았던 이유였다. 따라서 한국교회를 쇄신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지도자들, 특히 성지자들의 자기 혁신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 교회지도자나 목회자가 권력과 물질과 명예로부터 자유할 때 한국교회에서 문제시되는 상당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곧 성실한 목회활동, 규모 있는 삶, 투명한 재정 관리와 집행, 깨끗한 은퇴 등은 교회의 불필요한 잡음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직자에게는, 불교식 용어를 빌리면, 진정한 출가(出家)정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느 시대든 교회 쇄신의 가장 중요한 길은 성직자들의 삶이었다. 중세교회의 경우처럼 한국교회에서도 성직자의 과대베출은 성직자의 질적 저하와 교회 난립, 그리고 분열 등 여러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 된다.
신학교육의 제고
한국교회 쇄신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신학교육의 쇄신이다. 앞에서 중세교회 타락의 근원적인 원인은 성직자의 과대 배출과 성직교육의 부제를 말한바 있는데, 이와 동일한 환경이 오늘 한국의 상황이다. 신학교육의 내용은 차치하고 우선 신학교육기관의 정비가 시급한 현실이다. 신학교의 난립은 교회 분열과 상관있다. 현재 한국에는 약 3백 개에 달하는 무인가 신학교 혹은 신학교육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상당수는 교단적 배경이 없거나 불분명한 사설 신학교이며, 많은 신학교들은 신학교육적 소명이나 사명의식을 의심케 하는 운영상의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무자격신학교는 한국교회 문제의 진원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신학교들이 목회자 양성이라는 고유한 목적만을 가지고 운영되고 있는지를 솔직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 도리어 ‘신학교’라는 특수성을 이용하여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연 2천500명에서 3천명의 목회자가 배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규학교가 아닌 경우 신학교육에 대한 감독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건실한 신학교육의 부재는 한국교회의 수준을 격하시키고 천박한 기독교로 전락하게 만든다. 무인가 신학교, 아니 무자격 신학교가 문제시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무자격 교역자를 양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는 자기 파괴적 요인이 된다는 점 때문이다. 합리적 사고, 건전한 평가와 판단 능력, 부분과 전체에 대한 반성적 성찰 능력은 목회자적 자질과 인격과 더불어 정신적 지도자의 필수적 조건이라고 볼 때 오늘의 무자격 신학교를 통해 배출되는 ‘교육받지 못한’교역자들이 가져올 부정적 기능은 대천덕 신부의 ‘미숙한 신학의 위험성’이란 논문에서 잘 지적된 바 있다.
신학교육에 대한 제고와 함께 목회자 양성 방식에 대해서도 고려해 볼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스펄전이 말한‘이중 소명’ 정신에 부합되게 목회자 양성은 신학수업을 지향하는 본인의 자원과 함께 교회적 추천을 받도록 하는 새로운 목회자 양성 방식을 고려해 봄직하다. 현재는 자신의 자원에 의해 신학교육을 받게 되고 그 후에 교회의 청빙을 소명으로 간주하지만, 필지는 교회적 추천을 받은 자가 신학교육을 받도록 하고, 교회적 후원 속에 목회자가 양성되어야 보다 합리적인 목회자 양성 방안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어떻든 신학교육의 재고는 한국교회를 쇄신하는 중요한 길이 될 것이다.
설교의 갱신
한국교회를 쇄신하는 또 하나의 길은 설교의 갱신이다.(한국교회 설교 관행과 쇄신에 대해서는 이상규, “한국교회에서의 설교, 그 역사와 평가,”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30호(22005년 봄호), 52-69.) 설교란 바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는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설교이다. 따라서 설교의 갱신은 한국교회의 쇄신을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방편이 된다. 현재 한국에는 약 5만여 개의 교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한국교회의 정기적인 설교자는 약 8만명에 달한다. 이중 장로교회는 전체교회의 68%를 차지하고 있고, 감리교회는 13%에 달한다.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성장’이었는데, 전도행위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넓은 의미의 전도명령의 수행이라기보다는 개 교회 성장에 보다 큰 강조점을 둔 교회의 수적 확장을 의도한 것이었다. 그래서 설교도 현세적 안녕이나 물질적 축복, 소원성취를 위한 방편으로 강조되어 기복적 설교가 특징이었다. 구약은 한국특유의 기복신앙의 관점에서 축복과 저주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었고, 이를 위한 모범으로 예화가 인용되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설교는 흉(凶)과 화(禍)를 피하고 길(吉)과 복(福)의 추구를 신앙의 이상으로 삼기 때문에 차원 높은 생활윤리나 공의(公儀), 가치의식, 혹은 삶의 문제를 제시하지 못했다. 기독교 신앙을 양재(讓災)나 치병(治病)등과 같은 측면으로만 본다면 본래적 기독교회가 가르치는 이타적(利他的)성격은 크게 훼손되고 말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는 구속사적(heilsgeschichtlich)설교가 소개되고, 강해설교가 강조되기도 했으나 한국교회를 움직이는 소위 대 교회의 설교는 여전히 성경의 세계와 현대 사이의 역사적 문화적 간격(then and now)을 무시하는 ‘모범론적’ 설교가 특징을 이루고 있고,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풍유화(諷遊化, Allegorizing)와 신령화(神靈化, Spiritualizing)가 적지 않다. 구약본문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과 함께 비 교리적 설교가 유행한다. 무엇보다도 성경원전의 의미를 천착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부족하다. 특히 한국교회 강단에서 얼마나 좋은 설교를 할 것인가? 혹은 얼마나 감동적인 설교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분의 가르침을 바르게 드러내는 ‘정직한’ 설교일 것이다. 정직한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성경 본문을 신학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건실한 신학교육과 성경 언어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이런 진지한 노력이 동반될 때 한국교회 강단이 새로워지고, 이런 일련의 노력이 근원적으로 한국교회를 갱신하게 될 것이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한국교회 강단의 쇄신이 이루어 져야 한국교회가 변화될 수 있고, 이를 통해서 이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선포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야말로 한국교회를 갱신하는 최선의 길이다. 이런 점을 특히 강조했던 집단이 청교도들이었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설교는 교회 개혁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한국교회에서 설교의 갱신은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교회구조와 제도의 문제
한국교회 갱신의 또 한 가지 측면은 교회 제도나 구조의 문제이다. 우리는 교회의 구조나 제도에 대해 무관심하기 싶다. 그러나 이 점도 결코 경시될 수 없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에 대한 반발 때문에 교회를 ‘성도의 모임’(communio sanctorum)이라는 개념으로 말함으로서 교회를 제도임을 강조하지 않았다. 루터파는 이 제도면에 대한 소홀 때문에 결과적으로 중세 카톨릭의 감독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예배 의식도 소극적으로 개혁한 것을 볼 수 잇다. 반면에 칼빈은 교회란 성도들의 모임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관(institution)임을 인식했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과는 다른 교회제도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로서의 교회의 개념이 성도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개념보다 선행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있고, 그리고 이에 응답하는 신자들의 모임이 있어서 교회가 성립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본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교회제도는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서양 기독교 전통에서 전수받은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우리 한국교회가 정한 제도, 교회구조, 그리고 각종 규정에 있어서도 갱신의 여지가 없는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목사의 직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장로교 전통 때문에 우리에게는 성직주의(clericalism)나 중세적인 계층구조로 빠져들 위험이 항상 있다. 또 한국적인 문화적 상황에서 교회구조를 계급적이거나 지나치게 권위적인 구조로 이해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런 점들에 대해서도 신학적 정리가 필요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이지만 교회가 정한 규정이나 관행에서도 쇄신의 여지가 없는가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일예를 든다면 공로목사, 공로장로, 혹은 명예권사 등과 같은 제도가 정당한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교회 역사적으로 보는 정치적인 제도나 교회 구조와 함께 한국 교회의 고유한 제도들에 있어서도 개혁과 쇄신이 필요할 것이다.
6. 맺는 말: 한국교회 개혁은 목회자의 의식에 달려있다.
이상에서 말해왔듯이 한국교회 개혁의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지도자 곧 목회자의 의식이다. 신학적인 분별력, 균형 잡힌 윤리의식, 보편적인 사고, 상식과 교양, 동양적 예(禮)와 덕(德)이 어우러질 때 한국 기독교의 쇄신은 가능할 것이다. 신학교육, 설교, 바른 가치의식 등은 다 목회자와 관련되어 있다. 오늘 한국에서 교회개혁을 말하는 이들은 교회의 구조적인 문제 혹은 현실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것 같다. 목회자의 세습을 반대한다든가, 조용기목사 은퇴반대를 반대한다든가 하는 문제는 사실은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체 지극히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교회의 제도나 구조, 또 한국교회가 정한 제도들은 따지고 보면 그 제도를 만든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미 하우츠바르트(B. Goudzwaard)가 지적했지만 구조나 제도란 것은 그런 구조나 제도를 고안한 인간의 마음에서 연유하기 때문에 그런 구조에 집착하기 보다는 그런 구조를 만든 인간이 어떠하냐가 더 중요하다.
교회사가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나그네 의식으로 사는 것이다. 중세교회가 ‘나그네성(性)’ 혹은 ‘나그네 의식’을 상실하고 이 역사현실 속에 안주하려고 했을 때 지상의 제도나 지상의 세력과 타협했던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나그네적 삶의 방식을 권장해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 속에 깊이 새겨준 삶의 방식을 이 땅에서는 나그네란 의식이었다.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게 함으로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고, 이 땅의 가치들, 곧 권력, 명예, 물질로부터 자유하는 삶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타락은 그 정체성 상실에 있었다.”는 좌파적 철학자인 폴라니(Karl Polanyi)의 말은 진실이다. 마지막 한 가지 고려할 점은 한국교회 일각에서 개혁에 대해 말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개혁의 대상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자신은 개혁의 주체이며, 상대는 개혁의 대상인 듯이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한국교회’를 대상화 혹은 객관화하고 비판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도 한국교회의 일원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출처 :keeper77 카페독서실 원문보기 글쓴이 : keeper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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