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의 초대하는 일치성
몰트만 교수
삼위일체의 비밀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가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닫혀 있었던 것이 열리는가 하면, 잡히던 것이 다시금 달아난다. 우리는 항상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아직 완결된 것이 아니다. 이를 다루는 신학자들, 아니 이에 사로잡힌 신학자들에게 삼위일체론은 하나의 지속적인 학습과정이다. 그렇지만 삼위일체론은 또한 여전히 포기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우리가 예를 들어 "정치신학"과 같은 다른 신학주제들 쪽으로 관심을 돌린다고 하더라도, 삼위일체론을 회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하나의 이론은 신학자들에게 부과된 가장 고상하지만 분명히 가장 겸손하게 만드는 임무이다.
나는 이러한 개인적인 언급부터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내가 이 짧은 논문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 전체도 아니고, 삼위일체론이 인간, 역사와 우주를 이해하는 데 기여하는 무시못할 그 결과도 아니기 때문이다. 1980년에 출판된 책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에 덧붙여 나는 여기서 오늘 날의 논의에서 비판되는 점들을 다루는 데 기여할 수 있을 몇 가지 언급들에 국한한다. 나는 이 언급들의 촛점을 삼위일체론의 구원사적 근거와 삼위일체적으로 규정되는 그 일치성에 대한 질문에 맞춘다.
1. 그리스도교적 삼위일체론의 전개를 위한 착안점
그리스도교의 신론 일반이 그러하듯이, 그리스도교적 삼위일체론도 옛부터 두 측면, 즉 철학적 측면과 성서적 측면 혹은 관념적 측면과 구원사적 측면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 두 측면을 하나의 해석학적 과정 안의 두 요소들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측면으로부터 우리가 출발하느냐와 어떤 측면이 주어이고 어떤 측면이 술어인지에 대한 질문도 여전히 남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적 이성(理性)의 빛의 도움으로 우주론적 신증명을 빌려 하나님이 존재하며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 하나님을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으로 인식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그는 그리스도적 전통을 수용했다. 그의 방법에 따르면 하나님의 존재와 일치성을 인식하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인식보다 선행하며, 또 전자가 마치 특수한 구원사적인 모형을 위한 보편적인 틀이 되는 것처럼 후자를 규정한다. 그러나 거꾸로 구원사적인 삼위일체의 모형도 이미 보편적인 틀을 그 자체 안에서 삼중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요구한다.
터툴리안이 "한 본질 - 세 위격들(una substantia - tres personae)"이라는 명제를 제시했을 때, 그는 구원사로부터 세 위격들의 인식을 획득했으며, 이를 하나의 영원한 신적인 본질의 개념 안으로 이끌어 들였다. 그래서 그는 이 본질이 세 위격들 혹은 세 실재들 안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세 명의 대(大) 카파도키아 신학자들도 바로 이와 똑같이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도 삼위일체의 구원사적인 인식으로부터 하나의 최고의 존재의 삼위일체적 존재론을 발전시켰다. 그들도 하나님을 - 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 최고의 실재만이 아니라 동시에 절대적 주체로도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알고 있으며, 영원히 자기 자신을 바라는 주체라고 설명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신적인 이성과 의지의 주체를 "아버지"라고 보았고, 그의 이성으로부터 나오는 말을 "아들"이라고 보았으며, 그의 이성과 의지로부터 나오는 사랑을 "성령"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 하나의 신적인 주체를 꼭 닮은 모습은 오로지 몸을 지배하는 각 인간 개체의 영혼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렇게 이루어진 최고의 존재의 삼중성에 대한 통찰은 구원사로부터 유래한다. 구원사적인 인식은 이 통찰을 통하여 보편적인 것이 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교적 삼위일체론의 전개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실로 벌써 반대되는 길을 들어선 셈이다.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인식은 계시와 구원사를 통하여 규정되어져 있고,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의 인식은 철학적으로, 다시 말하면, 우주론적으로, 세계사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적인 삼위일체의 인식 문제에서 위로부터 아래로 인도하는 그 어떤 길도 아래에서 시작하지 않은 것은 없다.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특수한 것으로 인도하는 그 어떤 길도 특수한 것 안에서 시작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리고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개별적인 것으로 인도하는 그 어떤 길도 개별적인 것 안에서 시작하지 않은 것은 없다. 이를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마틴 하이덱거(Martin Heidegger)가 말한 근대의 "주체성의 형이상학"의 조건 아래서 하나님을 생각하려고 한 독일 관념주의의 사색적인 삼위일체론들이라고 생각된다.
만약 하나님이 그의 개념으로부터 절대적 주체로 이해될 수 있다면, 그는 또한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분하고 자신을 자기 자신과 구별하며 자신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할 능력도 갖고 있다. 반성(反省)과 사랑의 과정은 매개(媒介)될 수 없는 신적인 생명 안에 있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과정을 이룬다. 만약 우리가 최근의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기 위하여 칼 바르트와 칼 라너처럼 이 착안점을 받아들인다면, 절대적인 신적 주체의 역사적 계시는 그의 "자기계시"이고, 인간의 구원은 절대적인 신적 주체의 "자기전달"에 놓여 있으며, 이 자기계시 혹은 자기전달은 신적 주체의 내적인 자기구분을 그 가능성의 초월적 조건으로서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도 여전히 설명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바르트가 신약성서를 일러 말한 "로마 황제시대의 소식들에 관한 작은 책자"가 말하듯이, 이 "자기계시"와 이 "자기전달"이 특히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달렸던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더 이상 연역(演繹)될 수가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 주체의 형이상학에서 취해 온 개념들을 성서에서 증언된 구원사에 적용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세 존재방식(Seinsweise)을 갖는 한 인격적인 하나님"에 관한 바르트의 명제나 "세 분명한 실재방식(Subsistenzweise)을 갖는 한 신적인 주체"에 관한 라너의 명제도 아들 예수와 그의 아버지 "아바"와 성령 사이에서 반영되는 역사에 맞지 않는다. 신약성서에서 매우 인상깊게 증언되어 있는,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아들과 아버지와 아들을 증언하고 영화롭게 하는 영의 인격적인 대면관계는 연역적으로 취해진 최근의 저 삼위일체론의 명제들에 의해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이로부터 그리스도교적 삼위일체론의 착안점은 성서에서 증언된 구원사, 즉 아버지, 아들과 영의 역사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나는 이끌어 낸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적 삼위일체론의 방법은 구약성서의 하나님 인식의 방법과 일치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구약성서는 항상 "야훼는 하나님이시다"고 말하고, "야훼는 왕이 되실 것이다"고 말한다. 착안점은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역사적이고 특별한 야훼의 계시이다. 그러나 그 목표는 "야훼는 하나님이고, 그분 밖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보편적 인식이다. 이름은 주어를 계시하고, 주어는 술어를 규정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삼위일체론이 성서에서 증언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구체적이고 특별한 역사로부터 출발하며, 그 일치성과 신성(神性)의 보편적인 계시를 지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적 계시는 우리가 시작하는 출발점이 아니고, 우리가 지향하는 빛이다." 자연의 빛(lumen naturae)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도 항상 영광의 빛(lumen gloriae)의 반사와 전조(前兆)로 이해되었다.
성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삼중성이 아니라 그 일치성이 주된 문제이다. 아버지, 아들과 영의 일치성을 미리 전제하고, 이를 다른 인식원천으로부터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들의 파송, 헌신, 부활의 구체적인 역사로부터, 그와 결합된 성령의 파송, 내주, 살림의 구체적인 역사로부터 그 일치성에 대한 질문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대답은 삼위일체론적인 대답이 될 것이지, 결코 삼위일체론 이전의 대답, 일신론적인 대답일 수가 없다. 대답은 종말론적인 대답이 될 것이지, 결코 관념적인 대답이 될 수가 없다.
구원사적 착안점이란 그리스도교적 삼위일체론을 성서에서 증언된, 영의 능력 안에서 이스라엘, 그리스도 및 교회와 함께 한 하나님의 역사에 맞추는 것을 말한다. "성서적"이라는 표현 때문에 설정된 한계를 열어 놓기 위하여 나는 이 착안점을 "구원사적"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하나님의 창조사를 전제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원사로부터 출발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역사로부터 출발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역사와 결합되어 있는 영의 역사로부터도 출발한다. 그는 이 구원사를 그 종말론적 지평 안에서 인식한다. 이 종말론적 지평은 "하나님 나라"의 상징으로써 표현되며,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그 본질로서 갖는다. 이처럼 "구원사적" 출발점을 갖는 자는 "사랑하는 아들" 예수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아바"에 대한 신앙과 더불어 그리고 인간을 신앙 안에서 갱신시키는 성령의 경험과 더불어 시작한다. 즉 그는 서로 구분되고 서로 다른 이 세 주체들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시작하고, 그들의 역사 안에 있는 일회적이고도 유일독특한 그들의 협력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관계와 일치성에 대하여 질문한다. 즉 그는 이 구원사를 이 주체들의 계시사로 인식하고, 그들의 역사를 세 주체들의 생동력이 있고 상호적이며 하나가 되게 하는 관계의 역사로 인식한다. 그들의 역사는 그들의 사귐의 관계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아버지, 아들 그리고 영의 삼위일체적 역사라고 부른다. 가난하고 죄많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아버지와 맺는 아들과 영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발견하기 위하여 이 역사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끝내는 온 피조물이 영광의 나라에서 그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이 삼위일체적 역사는 구원사가 된다.
소명, 칭의 그리고 성화에 힘입어 "아들의 형상을 본받음"(롬 8, 29)으로써, 인간은 "양자신분"을 받으며, 아버지와 맺는 예수의 관계 안으로 받아들여진다.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아들처럼 그리고 아들과 함께 "아바, 사랑하는 아버지"(롬 8, 14 이하)라고 기도한다. "구원"은 실로 삼위일체적 역사를 통하여 삼위일체의 영원한 생명 안으로 받아들여지게 됨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관계의 순환을 열어 보이고 영혼을 하나님 자신만의 생명의 강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계시와 구원의 총괄이다."
이 구원사적 착안점을 더 정확하게 세분화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론적, 성령론적 및 종말론적 관점 안에서 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먼저 이 세분화는 성서적 근거를 갖는 포괄적인 삼위일체론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론적 방향성은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신약성서의 아들-그리스도론으로부터 고대교회의 그리스도론이 형성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 개념 안에서 삼위일체론이 생겨날 필연성이 생겨났다. 왜냐하면 아들 아버지와 맺는 예수의 일치성과 아들과 맺는 아버지의 일치성이 이와 달리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삼위일체론을 그리스도론적으로 뒷받침하는 현상이 더 지배적이었고, 동방교회의 신학이 당연히 "그리스도 일원론적"이라고 비판한 협소화를 초래했다. 즉 만약 그리스도론이 공관복음서에서 증언된 예수의 역사를 정당히 다루고자 한다면, 또 원시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론의 전승사를 보존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론은 이미 성령론을 전제한다. 아들 예수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아버지로부터 나온다. 그는 성령에 의해 수태되며, 성령세례를 받으며, 성령에 의해 시험받기 위해 광야로 인도되며, 성령 안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을 고치며, 끝내는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친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의 역사는 영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론은 성서적으로 성령론적 그리스도론과 더불어 시작한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과 더불어 이 관계는 비로소 역전된다. 아들은 성령을 보낸다. 그리고 아들 자신은 살리는 영 안에 임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령론은 그리스도론적 성령론이 될 것이다. 성령은 "아들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들을 분별하는 척도이다. 아들의 역사와 영의 역사는 상호 간에 서로를 제약한다. 이러한 인식을 통하여 (성직주의적인) 그리스도 일원론의 경향성도 배제되만, 자유롭게 발호하는 유심주의적이거나 심지어는 신령주의적인 성령론도 역시 배제된다.
영과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영의 역사적 상호활동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피조물과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이것은 피조물을 아버지와의 사귐 안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역사적 상호활동은 아버지를 계시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 일어난다. 구원을 상실한 피조물이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구원을 얻는다면,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에 대한 자신의 권리도 되찾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되찾게 될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와 영의 역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빌 2, 11) 일어난다. 구원사의 이 종말론적 완성은 아들이 나라를 아버지에게 넘겨 주어 "하나님이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된다"(고전 15, 28)는 사실을 통하여 그리스도론적으로 설명된다. 또 이 완성은 이 새 창조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서 구원을 얻는다(계 1, 6)는 사실을 통하여 성령론적으로 설명된다. 우리는 구원사를 삼위일체적 역사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그 종말론적 완성을 우리는 삼위일체적 찬미론 안에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삼위일체적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삼위일체를 찬양하는 가운데서 그 목표에 이른다.
2. 삼위일체적 구원사를 위한 삼위일체적 개념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 "이론"(신론)은 경험되고 이야기된 하나님의 "역사"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그 과제는 이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있으며, 그 위험은 이 역사를 개념 안으로 폐기하는 것에 있다. 만약 삼위일체적 구원사가 삼위일체론의 착안점이라면, 이 삼위일체론은 이 역사와 관계를 맺게 됨으로써 이 역사에서 자신을 입증하고, 이 역사 안에 자리잡아야 한다. 거기서 사용되는 개념들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사이의 삼위일체적 역사로부터 취해져야 하며, 늘 이에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삼위일체론이 이 역사의 분명 한 세 주체들로부터 출발해야 함을 뜻한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성서적으로 실로 의지와 이성을 가진 주체들로서 더불어 함께 말하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더불어 "하나"를 이룬다. 바울과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하나님"을 말할 때, 이는 "아버지"를 의미하는 것이고, "아들"을 아버지에게 분명히 종속시키는 반면에,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하나의 발전된 삼위일체론적 언어를 발견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요한복음의 예수는 말한다. 그는 "나"와 "너"를 구분하며, 인식과 의지의 일치만이 아니라 상호 내주의 일치도 지시한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14, 11; 17, 21 등).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의 유일한 신적 주체의 두 존재방식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들은 "한 분"이 아니라 "하나"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를 이룬다. 이 사실은 복수인 "우리가"와 "우리를"에 의해 표현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개념은 위격들의 주체적인 구별을 폐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이 개념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위격들 사이에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이루어지는 역사를 폐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안의 한 본성, 한 인식, 한 의식"이라는 신스콜라주의의 명제를 칼 라너와 칼 바르트의 의미로 받아들여서, "한 하나님은 분명한 세 실재방식 안에 실재한다"거나 "세 존재방식 안에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삼위일체적 구원사는 그 구체적 매개체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겟세마네에서 더불어 행동하는 자는 한 유일한 주체의 분명한 실재방식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골고다의 십자가에서도 한 "위격적인 하나님"의 한 "존재방식"이 다른 존재방식을 향햐여 소리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이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될 "한 하나님"인가 하는 것, 다시 말하면, 그의 존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부터 비로소 계시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에서 위격, 관계, 순환 그리고 조명과 같은 삼위일체론적 개념들의 상호보충성이 주목되어야 한다. 삼위일체적 구원사를 주목할 때,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개념들은 상호보충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 개념이 다른 개념을 포괄해서도 안 되고, 다른 개념들의 상위개념이 되어서도 안 된다.
위격과 관계는 상호보충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위격성과 관계성은 동시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위격과 관계는 동일한 기원을 갖는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아바는 이 아들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아들을 바라보는 그의 아버지 신분은 그의 위격을 구성한다. 아버지로서의 그의 위격은 (독생한) 아들과의 일회적인 이 관계를 통하여 규정된다. 많은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이 기울어지는 사고경향처럼 하나님이 그 자신 안에서 아버지이고, 그는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단지 그 자신을 "발현시킨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거니와, 스콜라 신학에서 종종 볼 수 있듯이, 그의 위격이 바로 이 관계와 다름이 없다고도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아버지를 아버지 신분으로부터 구분하는 것은 바로 한 구체적 존재를 한 존재방식으로부터 구분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한 아버지(pater)에게는 말을 걸 수 있지만, 아버지 신분(paternitas)에게는 말을 걸 수가 없다. 위격은 관계에 선행하지 않고, 관계는 위격에 선행하지 않는다. 양자는 동시에 더불어 생겨난다. 그러므로 환원도 통괄도 허용되지 않는다.
신적인 위격들은 단지 서로에 대한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고, 요한복음의 표현방식이 가리키듯이, 서로 안에서 존재하기도 한다.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다. 성령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들 안에 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 있다. 위격들이 이처럼 서로 안에서 친밀하게 내주(內住)하는 것과 완전히 침투(관통)하는 것은 삼위일체적 순환(循環: Perichorese) 이론에 의해 표현된다. 이것은 위격이론과 관계이론을 넘어서는 삼위일체적 일치성을 표현한다. 신적 위격들은 그들의 영원한 사랑의 힘으로 서로와 함께, 서로를 위하여 그리고 서로 안에서 너무나 친밀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은 일회적이고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그들의 일치성 안에서 그들 자신을 구성한다. 삼위일체적 일치는 신적 위격들의 이차적인 "사귐"이 아니고, 이 위격들은 한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나 "반복"이 아니다. 삼위일체의 내재적 관계와 삼위일체적 순환은 서로 상호보충적 관계를 이룬다. 순환적 일치가 분명한 관계들을 폐기하지도 않고, 후자가 전자를 침해하지도 않는다. 삼위일체적 일치의 순환적 개념은 삼신론과 마찬가지로 양태론의 위험도 다같이 극복한다. 왜냐하면 순환이론은 삼위성과 일치성을 결합하면서도, 삼위성을 일치성으로 환원시키거나 일치성을 삼위성으로 환원시키지도 않기 때문이다. 순환적 일치성은 신적 위격들과 함께 신적 관계들로부터도 나온다고 동시에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삼위일체의 내재적 생명이 순환론적으로 이해된다면, 아버지, 아들 그리고 영의 삼위일체적 역사와 마찬가지로 신적 생명도 단지 한 주체에 의해서만 영위되지 않는다. 순환론적 일치의 개념은 삼위일체론적 삼위성-일치성(Dreieinigkeit)의 개념이다.
신적 위격들의 이 순환론적 일치성 안에는 단지 일치(Einheit)만이 아니라 독자성(Eigeheit)도 존재한다. 신적 위격들은 영원한 영광의 발현을 위한 그들의 내주를 통하여 영원한 순환 안에서 서로를 인도한다. 성령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아들과 함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 아버지는 아들과 영 안에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아들은 영을 통하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 그들은 단지 관계를 맺으면서 서로를 위해 사는 것만도 아니고, 단지 순환론적으로 서로 안에서 사는 것만도 아니다. 그들은 영원한 빛 안에서 더불어 서로를 표현하고 묘사한다. 이로 인하여 순환론적 일치는 영광 안에서 반사된 일치가 된다. 관계를 맺는 위격들의 순환론적 통합은 그들의 발현된 특징들을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치의 삼위일체론적 개념과 그 구원론적 개념의 상호보충성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증언되고 경험된 구원사를 따른다면, 우리는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일치를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해야 하며, 이것을 양태론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만약 구원의 완성이 분리되고 찢겨진 피조물들과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결합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일치를 열려 있고 초대하며 결합하고 통합하는 일치로 이해해야 한다.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아들 예수와 아버지의 일치는 파송과 순종, 희생과 부활 안에서 이루어진 의지의 일치이다. 이것은 관계론적 일치이다. 이것은 이를 넘어서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그리고 영이 아버지와 아들 안에 상호 내주하는 일치이다. 즉 이것은 순환론적 일치이다. 이것은 이를 넘어서 성령을 통한 변모 안의 일치이다. 이것은 반사되고 발현된 일치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본성의 일치는 앞에서 말한 일치의 특징에 의해 구성되며, 이를 페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순환론적 일치의 개념이 구원론적으로 통합적 일치의 개념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전자는 구원사와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피조물의 고난이 하나님과의 분리인 죄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면, 구원은 피조물이 은혜로 인해 하나님과의 사귐 안으로 용납되는 것에 있다. 구원은 이 결합에 있다. 분리된 자들의 하나님과의 결합은 단순히 외형적인 결합만은 아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맺는 자신의 관계 안으로 인간을 받아들이고, 인간을 아버지의 자녀, 아들과 딸로 삼음으로써, 이 결합은 이루어진다. 성령이 아들과 그리고 성령과 맺는 자신의 관계 안으로 인간을 받아들이고, 인간을 그의 영원한 사랑과 그의 영원한 찬양에 참여시킴으로써, 이 결합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내어주는 사랑(요 3, 16) 안에서 하나님 자신인 사랑(요일 4, 16)을 발견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사랑하는 그 긍정은 그를 영원히 그 자신으로 존재하게 하는 바로 그 긍정이다. 피조물의 구원은 하나님의 관계들의 순환과 아버지, 아들 그리고 영의 상호 내주의 순환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있다. 그들의 상호 내주는 인간을 포함한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 16). 내주는 또한 새 창조의 비밀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 28).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순환론적 일치는 이러한 관점에서 초대하고 결합하는 일치이고, 또 그래서 인간개방적이고 세계개방적 일치이다. "신적 위격들의 상호관계는 너무나 넓기 때문에, 온 세상이 그 안에서 거할 자리를 갖는다"(Adrienne von Speyr).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 일치의 개념을 배타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내가 "열려 있는 삼위일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바로 이것을 뜻한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전통적인 원형적 삼위일체나 삼각형적 삼위일체의 모습과 대립시켰던 것이다. 삼위일체는 흘러 넘치는 은혜로운 사랑의 힘 때문에 "열려" 있다. 이것은 사랑받고 발견되며 용납된 피조물들을 위해 "열려" 있다.
3. 삼위일체론에서의 일반개념들의 문제점
만약 삼위일체론이 삼위일체적 구원사로부터 출발점을 취하게 된다면, 끝으로 전통적 삼위일체론에서 상위개념들이 사용된 것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반문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아들이 아버지에 의해 "출생한다는 것"과 영이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서로 다르다. 만약 우리가 양자를 나옴(processio)이라는 상위개념 아래 포괄하여 "두 나옴"에 관해 말한다면, 그 즉시 그러한 위험이 나타난다. 아버지와 관계맺는 아들과 아버지와 관계맺는 영의 구체적인 특수성은 간과된다. 그렇게 되면, 쉽사리 영이 둘째 아들로 이해될 수 있거나, 아들이 둘째 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아버지에 의한 아들의 "출생"과 아버지로부터의 영의 "나옴"을 위해 어떠한 상위개념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체적이어야 하며, 하나를 다른 하나 다음에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각자가 일회적이기 때문이다.
영이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그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관계론적 형태를 "받는다는 것"은 서로 다르다. 서방교회가 필리오케(filioque)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러한 차이점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표현 때문에 마치 성령의 존재가 아버지와 아들 안에서 두 기원을 갖는다는 인상이 쉽게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그리고 아들로부터"의 표현과 함께 행해지듯이, 양자를 통괄해서는 안 된다. 이 표현은 도대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무엇이 나오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해준다. 우리는 구체적이어야 하며, 아버지와 성령의 관계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를 오로지 연이어 이야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각자가 일회적이기 때문이다.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이 세분화되지 않은 필리오케-표현을 정당하게 배격한 근거로서 아버지의 군주지배를 제시했지만, 이것도 그 나름대로는 세분화되지 않은 것이다.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이 고대교회에서도 논쟁의 여지가 없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 개념을 삼위일체론 안으로 도입함으로써, 분명히 아들과 성령에 대한 아버지의 유일독특성을 강조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 아버지가 오로지 아들의 신성과 성령의 신성의 "원인"으로만 칭해지면, 아들의 "출생"과 성령의 "나옴" 사이의 구체적인 차이점은 사라져 버린다. 세분화되지 않은 필리오케 이론을 방지하게 위하여 원인 개념을 도입한 것은 물론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이것은 이와 비슷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더욱이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보편적인 세계관계, 즉 세계조화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재적 생명 안으로 이전된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 단일주의"(Monopatrismus)를 통하여 위험한 "필리오케 사상"(Filioquismus)을 삼위일체론에서 몰아낸다고 해서, 비슷한 어려움에 빠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유일원인성(唯一原因性) 개념은 삼위일체의 구체적인 내재적 관계를 없애 버릴 위험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인 개념은 오로지 전이된 의미로서만 사용될 수 있다. 그것은 아들의 출생과 성령의 내쉼을 위한 상위개념이 결코 아니다.
또한 삼위일체론의 세 실재들이나 세 위격들 -그리고 내가 이 강연에서 스스로 사용하고 있는 세 주체들이라는 어법도 그렇거니와 -도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의 동일한 위격개념 혹은 주체개념을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에 적용시키고, 이로 인하여 그것들이 마치 동질적이고 동일한 것들, 즉 실재들, 위격들 혹은 주체들이라는 인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실재(hypostasis), 위격 혹은 존재방식과 같은 상위개념들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사이의 구체적 차이점을 없애 버린다. 만약 그와 달리 위격이 그들의 관계 안에서 파악될 수 있고 이를 떠나서는 파악될 수 없다면, 그들은 단지 그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그 위격성에서도 서로 다르다. 만약 우리가 구체적이길 원한다면, 아버지, 아들 그리고 영에게 각자마다 다른, 즉 독자적이고 일회적인 위격개념을 적용해야 한다. 그들을 신적 "위격들"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 안에 양태론의 경향성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실재나 위격과 같은 상위개념은 공유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드러낼 뿐이지, 그들에게서 독자적인 것과 상이한 것은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위개념들을 삼위일체론 안으로 도입하는 것이 동반하는 위험성을 간단하게 설명한 것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야 한다. 즉 삼위일체론에서는 그 어떤 통괄적 상위개념들도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다. 내재적 삼위일체의 생명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일회적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일회적이라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길과 활동에서 다른 것의 기원과 원형으로 인식될 수 있다. 내재적 삼위일체론에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오로지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지, 통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가 증명하듯이, 추상화(抽象化) 안에서 이단이 뿌리내리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이야기하는 세분화(細分化) 안에는 정통주의의 기초가 놓여 있다. 이해하는 것과 이야기하는 것은 상호 간에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그래서 이해로 인도한다. 그런데 이야기를 요구하는 삼위일체적 역사 안의 역사적 우연성과 찬양을 요구하는 삼위일체 자체 안의 기원적 우연성 사이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에는 삼위일체 하나님 그 자신과 동일한 역사가 있다. 모든 이야기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을 놀람 가운데서 무궁히 찬양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영원을 필요로 한다.
"개념들은 우상을 창조한다. 오로지 놀람만이 그 무엇을 이해한다."고 닛사의 그레고리(Gregor von Nyssa)가 말한 것은 옳다. 이것이 삼위일체 이론에게 주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삼위일체론적 개념형성의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놀람을 설명하고, 이러한 놀람으로 인도하려고 한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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