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지혜 (위르겐 몰트만 / 2000.5.19, 서울신대원 방문 특강, 이신건 통역) 성서 전승에 따르면,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식의 근본(시작)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따르면, 모든 지식은 놀람의 열매이다. 우리는 예루살렘과 아테네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가? 우리는 교회 와 작업실 사이에서 결단해야 하는가? 과학과 휴매니티는 서로 다른 두 문화 혹은 실재를 보는 서로 다른 두 창문인가? 갈릴레오가 자신을 반대하는 신학자들에게 목성의 달을 보여주려고 하였을 때, 신학자들은 그의 망원경을 보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진리는 자연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텍스트의 해석에서만 발견된다"고 믿었다. 파스칼은 과학과 신학의 이런 분리를 다음과 같이 전형적으로 정의하였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구별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우리는 이성과 실험 대신에 물리학 전 통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맹목성을 한탄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신학에서 성서와 교부들의 전승 대신에 이성적으로 논증하는 사람들의 오류에 놀랄 것이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놀 람이 왜 우리를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인도하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왜 우리를 세계에 대한 놀람으로 인도하지 않는가? 1. 모든 지식은 놀람의 열매이다 일반 인식론에서 우리는 동일한 것과 비슷한 것을 인식(cognition)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재인식(re-cognition)하게 하는지를 안다. 그 반면에 서로 다르고 낯선 것을 아 는 것은 우리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확인한다. 하지만 우리는 낯선 것을 어떻게 지각하는가? 새로운 것에 대한 지각의 뿌리는 오직 지각하는 주체 안에서만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각되 어야 할 대상 안에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지각하기를 원하는 것만을 지각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만을 지각하지 않고, 자신을 보여주는 것(자신을 지각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을 지각한다. 지식을 낳는 지각은 각성된 인간의 감각과 외부 세계의 인상의 만남에 서 일어난다. 이런 종류의 만남은 놀람 가운데서 일어난다. 만약 어떤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하면, 마치 꽃들이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듯이, 우리의 감각은 인상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연다. 그리고 지각된 대상들 혹은 과정들은 마치 태양 광선처럼 신선하고 여과 없이 우리의 감각 기관을 침투한다. 그것들은 정말 문자 그대로 인간을 위압한다(impose= 인간을 감동시킨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 도장을 찍고(impress), 우리는 도장이 찍힌다.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 마음대로 취할 수 없다. 우리는 뜻밖의 일에 놀라게 된다. 우리는 태풍에 당황한다. 처음부터 우리는 당황한다. 우리의 눈먼 놀람 때문에 당황한다. 이것은 경고(alarm)와 놀람(amazement)이 왜 서로 밀접히 결합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놀람 중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사물을 지각한다. 놀람은 직관의 원천이다. 놀라는 어린이는 아직 아무런 개념을 갖지 못한다(개념은 모든 방면에서 밀려오는 인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기능이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비교할 수 있는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두 번째 혹은 세 번 째만에 인상을 깨닫게 하는 기억들이 형성되며, 밀려오는 인상을 대할 수 있는 반복적인 태도가 생겨난다. 여러 차례의 반복 후에 어린이는 비로소 깨달음에 익숙하게 된다. 어린이는 더 이상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린이는 습관적으로 행한 대로, 학습한 대로 반응한다. 이것은 성인들 이 놀람을 어린이의 눈에 속한 것으로 보는 이유이다. 어린이의 눈은 세계를 처음으로 본다. 모든 어린이와 함께 새로운 인생은 시작하며, 모든 어린이들은 세계를 그 자신의 방법으로 발견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린이와 같은 놀람을 넘어설 수 있다. 그리고 놀람은 언제 어디서나 지각과 함께 하기 때문에 현상은 전례가 없는 것이라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새 로운 과학 지식은 "발견"이라고 불리며, 그것은 놀람("처음으로 보는" 사물에 속하는 놀람)을 일으 킨다. 그 다음에 그것은 반복되고, 증명되며, 그래서 우리 지식의 지평을 확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발견에 발견한 자의 이름을 붙여줌으로써(예: 허블 효과) "처음"을 기억한다. 이런 종류의 사건은 새로운 것에 대한 놀람을 일으키기 때문에 우리는 발견(dis-covery = 커버를 벗기다)에 관해 이야기한다. 발견이란 지금까지 숨어 있던 것과 여태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열린다는 뜻이다. 과학 시대의 시작부터 우리는 이런 발견의 능동적인 면을 강조하여 왔다. 사람들은 미지의 대륙 으로 탐험 여행을 떠나거나, 자연의 미지 영역에서 실험하는 과정에 그러한 발견을 "이룩하였다"(make). 하지만 모든 발견은 그 객관적인 측면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현상들"(phenomena)에 관해 말하는 이유가 되며, 숨겨진 것이 "그 자신을 드러내었다"고 말하는 이유 이다. 이것은 그러한 발견의 수동적인 측면이다. "우리에게 우연히 일어나는" 경험들이 있다. 우리 가 그런 경험들을 기대하더라도, 그것들은 뜻밖에 우리를 놀라게 한다. 만약 우리가 처음으로 이루어진 발견의 주관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측면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드러낸 것과 발 견된 것의 일치(consonance =조화, 공명)를 볼 수 있다. 재발견(re-discovery)은 계시(re-velation) 에 상응한다. 우리는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지각하여 왔다. 우리는 우리가 고안하 지 않았던 것을 이끌어내었다. 사물은 우리가 발견한 바로 그대로 존재한다. 세계는 우리 인간에 의해 알려질 수 있다. 세계는 우리의 이성으로 접근할 수 있다. 세계는 숨겨진 합리성에 의해 탐 구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인간은 생존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놀람은 단지 처음 발견된 것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우리가 그 무엇을 이미 알고 있고 그것에 친숙할 때조차도 놀람의 어떤 요소가 우리의 모든 지식을 동반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와 우리의 삶에서 그 어떤 것도 "그 자신을 반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간은 비가역적이기 (뒤집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Heraclitus). 지나간 것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의 모든 순간은 유일하다. 오로지 우리 안의 놀람의 요소만이 모든 사건들의 유일성을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일하거나 동일해 보이는 모든 것 안에 있는 비동일성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건들의 유일성에 대한 느낌은 원초적인 감각으로 - 이를 우리는 어린이와 같은 감각이 라고 부를 수 있다 - 놀랄 수 있고 당황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보존되어 왔다. 그들은 현재적 순간의 유일성을 놀람 속에서 지각한다. 놀람 속에서 그들은 발견의 "첫 시간"을 파악한다. 놀라 지도 못하고 당황하지도 않는 사람은 항상 같은 것,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따분한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자신이 배웠던 것에 습관적으로 반응한다. 그리고 그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인생은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간다. 아니 그가 인생의 곁을 스쳐 지나간다고 해야 적절하다. 인생의 모든 기회는 유일하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두 번째의 기회"와 같은 것은 없다. 두 번째 로 찾아오는 똑같은 기회는 없다. 실로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실재하는 당황과 놀람을 통하여 주의를 환기하고 각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어의 카이로스(kairos)와 같이 유일한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 세심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놀라움을 향해, 그리고 모든 순간에 새로운 것을 향해 마음을 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만나는 실재를 새롭게 발견하며, 그리고 무엇이 일어나든지 간에 그것을 향해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면서, 기다림으로 가득한 인생을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근본(시작)이다 우리는 어린이에게, 모든 성인 안에 있는 원초적인 어린이에게 놀람은 지식의 뿌리가 된다고 말 하였다. 그에 반해 우리가 늙은이에게 기대하는 것은 지혜이다. 늙은이는 인생의 경험을 통하여, 죽음이 다가옴으로써 지혜로워진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비록 사람이 삶과 죽음의 경험을 통하여 지혜로워진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과정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영원히 젊기"를 소원하였던 모든 사람들이 부르던 잘 알려진 노래가 있었다. "60살을 먹어도 조금도 지혜롭지 않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지혜로워지는가? 지혜는 경험에서 바로 생겨나지 않는다. 지혜는 경험을 반성적(反省的)으로 다룬 열매이다. 우리 를 지혜롭게 하는 것은 즉각적인 지각이 아니다. 지혜는 지각의 수용이다. 지혜는 지식의 윤리이다. 만약 우리가 의식(consciousness)에서 양심(conscience)을 만들어내고, 그래서 우리가 행하거나 행하지 않았던 것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지혜로워진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되돌아보면서 이렇 게 말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의 발명품이 무슨 목적에 유용한가? 당신의 인생에서 어떤 경험을 하였는가? 당신이 죽으면 무엇이 남게 되는가? 지혜는 즉각적인 놀람에 대한 반 응이다. 놀람 속에서 세계를 발견하는 것과 이런 지각을 지혜롭게 다루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물론 우리가 늙은이들에게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 리가 그들에게서 지혜를 발견해야 한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 우리가 알고 있 는 것, 그리고 우리가 행하거나 행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반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에 필적할 만 한 힘이 있어야 한다. 이 힘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갈 수 있다. 이것은 특별한 인식 일 수는 없다. 지혜는 모든 가능한 인식과 함께 인식될 수 있는 세계까지도 초월해야 한다. 성서 전승에서 한 사람을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초월은 "주님에 대한 경외"라고 일컬어졌다. 이것은 이른바 "전적인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의미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것은 원초적인 종교 경험의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숭고하 심, 그분의 지혜의 측량할 수 없음, 그분의 창조적인 영의 불가해한 복잡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언제나 더 크신 하나님"(Deus semper major)의 위엄에 대한 공경을,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선하심에 대한 어린이와 같은 근본적인 신뢰, 역사와 우주, 생명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에 서 행하신 그분의 창조적인 행동에 대한 호기심과 결합시킨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우리로 하여금 사랑받지 못하는 전능자의 노예가 되게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다 른 측면이다.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성숙이다. -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다"(집회서 1,16,14). "주님을 두려워함은 행복이요, 영예며 쾌락이요 환희의 극치이다"(집회서 1,11).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요일 4,18)고 말할 때,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임재의 두 측면이다: 멀리 계심과 가까이 계심, 숭고하심과 친숙하심. 인간의 지각과 능력을 다룰 때,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함께 시작해야지, 죽음에 대한 두 려움과 이 두려움이 일으키는 죽음의 엄청난 허무함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시작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편 90편을 루터 역으로 읽는다면,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교 훈을 얻는다: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셔서, 우리가 지혜로울 수 있게 하소서"(12 절). 하지만 죽음은 단지 시간의 불가역성과 생명의 모든 순간의 복귀 불가능성만을 드러낼 뿐이 다. 즉 죽음은 생명의 놀라운 일회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것은 놀라는 인식에 속한 것이지, 아직 지혜에 속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 가운데서 우리는 죽음이나 무상한 시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외 속에서 우리는 인식가능한 세계와 이 세계를 아는 것에 대한 준거(frame of reference)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인식가능한 세계의 준거는 세계를 알 수 있는 근본적인 가능성이다. 이를 성서적 용어로 표현하 면, 만물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 그리고 이를 아는 것은 인간을 지혜롭게 한다. "주님은 지혜로 땅의 기초를 놓으셨다"(잠 3,19). 그분의 지혜는 "모든 것보다 먼저 창조되었다"(집회서 1,4). 그리고 온 세상은 그분의 지혜로 충만하다"(지혜서 1,7). 이전부터 있었고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주와 생명 안에 퍼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이런 근본적인 신뢰는 순수 이성의 전-합리적 (前-合理的: pre-rational) 가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모든 과학적 발견은 세계 안에 있는 이런 지 혜로운 합리성의 어떤 것을 드러낸다(dis-cover). 하나님의 지혜 혹은 하나님의 로고스에 의해 결정된 세계의 구조는 인간의 지식을 촉진하다. 하지만 인간의 지식도 그와 동시에, 그 신적인 숭고함 속에서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지식 속에서 인간이 지혜로워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인하여 겸손해질 수도 있는 이유이다.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다"(잠 11,2). 우리의 지식이 아무리 커져도 우리가 얼마나 작은지를 알면, 우리는 겸손해진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식의 확장은 하나님의 고귀한 지혜의 "넓은 공간" 안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인간의 지식의 준거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 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다. 왜냐하면우리가 무엇을 알든지, 알려진 대상 그 자체의 존엄성을 존경하는 것은 지혜롭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식으로써 자신이 알고 있는 자연의 한 부분을 파괴하는 사람, 혹은 자연을 파괴할 목적을 위해 자연을 알고 있는 사람은 지혜롭지도 않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통하여 우리는 생명 경외를 배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통하여 우리는 사물의 존재와 일회성을 존경한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사물의 존재 혹은 비존재, 그것의 생명 혹은 죽음을 결정하는 주인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만물 안에 감추어져 있는 지혜를 사랑한다. 우리는 사물을 우리 자신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눈으로도 바라본다. 사물이 하나님 앞에 "존재하고" 있는 바로 그대로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는 사물의 내적인 측면, 사물의 본성 "그 자체"(an sich: I. Kant), 우리가 볼 수 없는 본질적인 존재에 주목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지혜롭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물을 그 자체로서 사랑할 수 있는 만큼 그 사물의 진리를 알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물을 알기 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 그것을 소유하고 착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롭고 질서잡힌 창조의 공동체 안에서 그것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을 똑같은 감정(sympathy)의 응집성(coherence) 안에서 지각한다. 이 응집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는 만물을 하나로 통일한다. 세계에 대한 지식의 준거는 알 수 있는 세계의 전제(前提)와 목표 그리고 그 "넓은 공간"에 영 향을 주지만, 우리가 확실한 지식에 도달하는 방법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여기서는 데카르트 (Descartes)의 원리가 적용된다: "De omnibus dubitandum est"(일체를 의심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방법론적 회의"이다. 이것은 결과와 관련된 것이지, 세계와 인간 혹은 우리 자신의 무익함 에 대한 실존적 절망과는 무관하다. 우리가 언급한 바로 그 준거는 우리를 이러한 방법론적 회의로 인도한다. 왜냐하면그것은 지식의 결과가, 회의와는 달리, 우세하다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확실한 지식과 같은 것도 존재하기 때문에 회의는 모든 부끄러운 결론을 배제해야 한다. 3. 지혜와 과학의 윤리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이미 획득된 지식을 다루는 일에서 우리를 지혜롭게 한다. 이것은 과학적 윤리와 나란히 과학적 발명품들을 기술적으로 다루는 윤리를 가능케 한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써 죽음을 유포하지 않고 생명을 촉진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순수 과학과 실용 과학 사이에 놓여 있는 문제점, 기술적 발견을 평화와 전쟁에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봉착한다. 첫 번째로 가능한 갈등 - 순수 과학과 실용 과학 간의 갈등 - 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원치 않게 빠져들었던 딜렘마에 의해 입증된다. 1907년에 그가 발견한 상대성 원리는 "내 생애의 가장 행복한 사상"이었다고 그는 고백하였다. 1915년 12월의 수성(水星)의 운동에 대한 예언이 적중한 후, 그는 "자연이 내게 말을 하였음"을 확신하였다고 전기(傳記)는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순수한 지식, 이미 알려진 것과 증명의 황홀한 조화였다. 하지만 곧이어 핵분열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히틀러의 명령을 받는 독일이나 민주주의적인 서방 강대국들이 핵분열을 이용하여 원자 폭탄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났다. 이미 오래 전부터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1939년에 아 인슈타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그의 유명한 편지에서 원자 폭탄의 제조를 결심하였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로 1945년 8월에 히로시마와 나까사끼는 파괴되었다. 수 십만 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순수한 지식과 발견의 놀라운 기쁨은 인간들 간의 이해와 권력 투쟁의 충돌이라는 잔인한 현실로 끝을 맺었다. 독일 화학자요 노벨 수상자였던 프리츠 하버(Fritz Haber)는 다른 딜렘마에 직면하였다. 그가 공기에서 수소를 분리하는 것을 발견하였을 때, 그로 인하여 평화 기간에는 인공 비료를 생산하고 전쟁 기간에는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의 연구 결과로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은 독가스를 만들 수 있었다. 그의 딜렘마를 해결하기 위한 그의 구호는 간단한 것이었다: " 나는 누구에게 봉사해야 하는가? 평화 기간에는 인류에게, 전쟁 기간에는 조국에게 봉사한다." 하지만 조국을 위한 그의 사랑은 한계가 있었다. "아리안 종족이 아닌"(non-Arian) 그의 동료가 1933년에 그의 연구소에서 해고당하였을 때, 그는 사표를 내었다. 과학 지식에 대한 과학자들의 책임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그리고 그들과 다른 사람들은 무 엇을 위해 과학을 연구하는가? 그리고 과학은 어디까지 가는가? 만약 국가들 간의 전쟁이 인류 전체의 위기가 된다면, 그리고 만약 이 전쟁에 인류 그 자체의 생존이나 파멸이 걸려 있다면, 사람들은 대량 몰살의 도구들을 사용하는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뿐만 아니라 그 실제적인 건설과 제조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는가? 1958년에 독일 핵물리학자는 이 책임을 받아들였고, 이런 대량 몰살의 도구들을 제조하는 일에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 일로 수많은 정치가들은 큰 괴로움을 겪었다. 물론 이 책임은 해당 과학자들과 기술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모든 사회와 우리 모두의 책임이고, - 치명적인 위협을 당하는 것은 인류이기 때문에 - 인류 전체의 문제이다. 국가 공동체는 화생방(ABC) 무기에 의한 멸망 가능성의 수동적인 대상이 되는 역할에 저항해야 하며, 공동 생존의 능동적인 결정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과학 지식을 사용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게 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세계"의 "순수한 지식"에 대한 사심이 없는 기쁨과 같은 그런 것이 도대체 존재하는가? 과학 발전과 과학 연구의 재정지원은 항상 경제적, 정치적 관심에 의해 먼저 주도되지 않는가? 자연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의 획득이 과학을 촉진하는 "지식을 구성하는 관 심"(knowledge-constitutive interest)이었다는 사실을 현대의 첫 번째 과학 이론은 증명한다. "아는 것은 힘이다"라고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말했다. 과학은 인간에게 자연에 대한 지배권(sovereignty)을 돌려준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될 때 부여된 역할이지만, 죄로 인하여 상실하였다. 과학을 통하여 인간은 "maitre und possesseur de la nature"(자연의 주 인과 소유자)가 된다고 르네 데카르트는 그의 과학 이론에서 같은 시기에 말하였다. 만약 인간이 과학을 통하여 획득하는 자연 지배력을 통제할 수 없다면, 인간은 여전히 지혜를 배우지 못한 것이다. 만약 자연 정복(땅과 피조물의 정복)이 과학과 기술 문명의 목표라면, 다른 모든 생명체들이 인간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만나야 할 것이라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스스로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로 승격하고 그 자신이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 하는 사람은 자연을 파괴하고, 결국에는 그 자신도 파괴한다. 자연의 인간적인 측면과 그 다른 요소들 간의 조화는 약자가 패배하는 투쟁으로 변한다. 인간과 그 "동료 피조물"(1986년 독일 동물 보호법의 용어)이 참여하는 창조의 공동체는 정복당하는 동료 피조물들의 착취로 바뀐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축복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현대인을 하나님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롭 게 한다. 하나님 콤플렉스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권력에 흠뻑 취하게 만들었고, 그들이 획득하였던 자연 지배력을 통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미친 환상을 갖게 만들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인간에게 물리적 권력에 대한 도덕적 권력을 부여하는 지혜를 낳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해야 할 필요가 없다. "할 수 있음"(Can)은 "해야 함"(Ought)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획득한 권력은 생명을 죽이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 사용될 수 있듯이, 생명을 촉진하 기 위해 사용될 수도 있다. 괴테의 "마술사의 제자"는 그의 스승에게서 빗자루를 움직일 수 있는 주문을 배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빗자루를 다시 구석에 치우는 주문은 배우지 못하였다. 언제 우 리는 이런 두 번째의 권력 주문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궁극적으로 지식을 구성하는 지혜를 낳는다. 이런 지혜는 그 대상을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을 갖지 않고, 생명 을 촉진하는 공동선(共同善) 안에서 그것과 사귀기를 원하고 그것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 400년 동안 과학과 기술은 자연정복의 능력을 확장해 왔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문명을 지구의 자연 안으로 통합할 수 있는 다른 시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문명도 역시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50년 동안 우리가 발견하고 알게 된 것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이제 우리는 더 많은 지혜와 지혜로운 지식 활용이 필요하다. 도대체 인류에게 미래가 있다고 한다면, 그 미래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에 속한다. 왜냐하면"지혜는 자신을 가진 자에게 생명을 주기 때문 이다"(집회서 1,12). 4. 지구의 미래를 위한 공동 희망 끝으로 과학-기술 문명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가? 인간의 목적과 목표는 어디에 있는가? 산업 혁명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보 신앙을 동기화하고 활성화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런 "신앙"을 더 이상 가질 필요가 없으며, 그것을 더 이상 비판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경쟁 의 원리에 의하면, 모든 과학과 기술은 계속하여 가속적으로 진보해야 하는 숙명에 빠졌기 때문이 다. 발전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실패한 사람이다. 우리의 진보는 "가속의 함정"(accelaration trap) 에 빠졌다. 진보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 목표를 묻고, 원한다면, 그 과정을 교 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진보 그 자체는 단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어떤 목표가 인간적인 것인지를 정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기술적, 경제적, 재정적, 군사적 권 력의 증대에 따라서 진보를 계산한다. 하지만 권력 그 자체는 인간적인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단 지 인간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의 집합일 뿐이다. 해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획득하기가 더욱 용이해진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개의 큰 규모의 과학적, 기술적 프로젝트는 국민의 뜻을 민주적으로 결정함으로써 발전된 것 이 아니고, 오히려 국민의 뜻에 반하여 발전되었다. 독일에서 핵무기 시설을 세우기 위한 민주적 인 결정이 없었다. 오늘날 유전자 조작 식품에 관한 민주적인 결정이 없다. 1989년에 동서 간의 갈등이 종식된 후, 진보는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진보도 그렇거니와, 세계화는 인간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인간인 것은 아니다. 세계화는 오로지 천연 자원을 마음대로 통제하고 착취하고 상품화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점점 더 소수의, 하지만 점점 더 거대한 "세계화 선수들"이 이런 사업을 분할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단기간의 이익 때문에 장기간 동안 인류가 파산하고, 지구-시스템이 붕괴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지구화의 인간적인 목표와 목적에 관해 공개적인 토론을 하기 시작해야 한다. 무자비한 착취로 인한 지구 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창조의 통전성"(Integrity of creation)과 "환경 보호"에 관심을 집중하고 생명-윤리적인 동의를 통하여 생명을 보호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이런 보수적인 윤리는 항상 뒷북치는 식이었다. 지구화의 인간적인 목표와 목적을 위한 새로운 모델을 발전시키고 진보의 의미와 무의미를 연구하는 것이 더 좋다. 우리는 이런 모델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에쿠메네(Ecumene)의 개념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이 개념은 교회권 밖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던 소박한 개념이었다. 헬라어 에쿠메네는 "지구의 모 든 거주 영역"을 뜻하는 개념이다. 이런 설명으로부터 우리는 "거주할 수 있는 지구"와 이 지구- 시스템 안에서 기거할 수 있는 인류의 목표로 옮아간다. 지구 가족(household of the earth)이 다 른 모든 종(種)들에게 가정과 역할을 주어왔듯이, 그것은 인류에게도 가정과 역할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개미는 개미집의 형태를 알고 있고, 모든 벌은 벌집의 형태를 알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방법대로 그것을 알고 있지, 우리의 방법대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만은 그 형태를 모르고 있다."고 도스토예프스키(Dostojewski)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만약 진보와 권력의 세계화 를 위한 인간적인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구 시스템 안에서 인류가 기거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구는 인간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고, 또한 수십억 년 동안 그렇게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지구가 없이는 살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구(땅)로부터 만들어졌고, 죽을 때 지구(땅)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구-시스템에 의존해 있지만, 지구-시스템은 인간에 의존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인간의 문명이 지구-시스템 안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연이 인간의 지배 아래 있다고 하더라도, 지구-시스템이 인간의 문명 안으로 통합될 필요는 없다. 오직 나그네만이 자연을 착취하고, 삼림을 벌목하고, 물고기를 남획한다. 그리고는 유목민처럼 떠나간다. 하지만 이 땅의 거주민들은 땅과 바다, 공기의 생존 가능성(liability)을 보호하려고 할 것이다. 오늘날 경제적 관심과 생태적 관심 사이의 많은 갈등은 외국 회사와 자국민 사이의 갈등 이다.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도대체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는 나그네인가 거주민인가? 늘 발전하는 인류의 과학적, 기술적인 능력은 권력쟁취를 위한 파괴적인 전쟁을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지구의 지속 가능성(sustainable liability)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멸망할 수 있는 세계는 보호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표를 향해 계속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 목표는 창조와 함께, 이 지구 위에서 인류가 등장하면서 주어졌다. 이 지구-시스템은 모든 지구 피조물들의 "공동의 집"이 되도록 운명지어졌으며, 모든 생명체들의 사귐을 위한 집이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 안에서 푸른 별 지구의 이러한 생명-시스템이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창조주의 소유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땅은 주의 것이다(시 24). 왜냐하면 지구는 역시 하나님의 집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영원하신 분이 지구에서 살기 위해 오신다면, 그때에 지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안식하시지 못하는 희망과 역사의 하나님은 "안식"에 이르실 것이다. 이것은 지구를 위한 위 대한 성서적 - 유대교적, 그리스도교적 - 비전이다. 이것은 최후의 약속이다: "보라, 하나님의 집 이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계 21,3 사역). 만약 이 최후의 "세키나"(Shekhina), 즉 하나님의 우주적 내주(內住)가 하나님이 계획하신 지구의 미래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미 여기서, 지금 지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여길 것이고, 모든 지구 피조물들을 거룩하게 보존할 것이다. 우리는 지구의 "주인과 소유자"가 아니다. 아마도 우리는 어느 날 지구의 사제(priest)가 되어, 지구 앞에서 하나님을 대변하고 하나님 앞에 서 지구를 대변할 것이다. 우리가 만물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맛보며," 하나님의 오고 있 는 영광 안에서 만물을 느끼며, 우주적인 하나님 찬양에 참여할 때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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