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다시 살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0-28 )
부활의 은혜를 기원합니다. 본문의 고린도전서 15장은 바울의 기독론이요, 기독교의 부활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다면 어떤 몸으로 다시 살 수 있는가?”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는 형식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전한다음,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은 의미가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성도 부활의 증거이며,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믿고, 또 장차 부활할 것을 믿는 신앙으로 살아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다시 살 수가 있습니다. 이같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삶을 힘써야 합니다.
1. 죽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죽음으로 사는 법이란 예수님처럼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한 죽음으로서 사는 법을 몸소 실천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이와같이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고 더 값진 것을 찾는 삶이, 곧 죽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철학자 하이덱거는 “죽음 때문에 인간은 실존적 각성을 촉구 받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80세까지 사는 사람이 40세를 살았다면 이제 40년은 이미 죽은 것과 같습니다. ‘레오나르다빈치’도 “충실한 하루가 행복한 수면을 가져오는 것같이, 충실한 인생이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죽어져야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죽어야 사는 것은 진리입니다. 연어도 자기가 태어난 곳을 찾아가 알을 낳고 죽습니다. 거미는 자기 새끼에게 자기의 몸을 양식으로 주어 먹게 함으로 새끼가 살고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슈바이쳐’ 박사는 신학자요, 음악가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으나, 의학을 공부하여 아프리카에 몸을 바쳤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그의 명성과 존경심은 온 인류의 가슴 속에 살아있습니다. 미국의 ‘로스’ 의사도 “죽음으로 사는 자가 완전한 삶을 산다”고 하였습니다. ‘성 멜몬리’도 죽음을 알고 죽어가면서 사는 것이 생명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몽골의 선교사로 평양에 가서 순직한 ‘최순기’ 선교사의 유언에서도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죽음으로 더 크고 강한 선교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더 낫고 훌륭한 가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재산과 시간을 바치고, 이를 위해 최선의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 곧 죽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같은 삶을 살도록 다짐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로 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사는 법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사는 것은 영생하는 삶이요, 생명적인 삶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의 조상들은 만나를 먹었으나 죽었거니와 나를 먹는 자는 영원히 산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에서 만나만 먹고, 만나만 위해서 사는 자는 만나와 함께 썩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살던지 죽던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전 15:31, 빌 1:20~21)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바울 사도는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그리고 의에 대하여 사는 것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어거스틴과 생년월일이 같다는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의 학문적 적입니다. 두 사람은 기독교 진리에 대하여 적지 않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펠라기우스는 이단으로 죽음의 길을 가고, 어거스틴은 정통 기독교 교리를 정립하는 성자가 되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우리의 죄만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음을 가지고 났고, 죽음에서 살다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보았습니다. 그는 죄가 죽음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면 그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죽음으로 패하고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의가 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하는 삶을 살 수 있음을 피력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로 사는 법을 익히시기 바랍니다.
3. 죽음으로부터 탈출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죽음의 발목을 잡는 것은 죄요, 죄의 유혹입니다. 죄에게 한번 잡히면 끈질기게 달라붙어 탈출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래전의 “빠삐용”이란 영화에서 빠삐용이 감옥의 섬에서 탈출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빠삐용은 결국 천만길 낭떠러지 바다에 떨어지면서 탈출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이처럼 죄의 유혹을 이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삭개오는 대단히 용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체면에 그의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 등을 물리치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고통은 나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고통과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와같은 것은 당연히 싫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고난은 또 하나의 용기있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동기가 됩니다. 제주도에는 돌담이 많습니다. 바람이 돌담을 쌓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람은 제주도에 돌담을 쌓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위에 나쁜 것이 많습니다. 주위에는 죄악이 관영하여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그러기에 죄로부터 이기는 용기가 생기고, 믿음의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거룩한 주의 날입니다. 이날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활의 축복이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법을 익히십시오, 또한 죄와 죽음부터 탈출하는 용기를 새롭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강동수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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