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의 선구자 : 존 칼빈 (1509~1564) [유년기] 1. 출생 1509년 7월 10일 파리에서 동북쪽으로 약 60마일가량 떨어진 노용(Noyon)시(市)에 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Gerard Calvin)는 본래 노동자였으나, 부지런하고 조직적이 고 독립정신이 강해서 노용 감독구의 서기가 됐다. 그의 어머니(Jeanne Le Franc)는 그 성내에서 신앙의 인물로 존경받는 부인이었다. 2. 어린시절 칼빈은 노용(Noyon)에서 14살때까지 살며 지방학 교에서 열심있는 학생으로서 관심 있는 학과를 빠른 속도로 정복해 나갔고, 친구들로부터 같은 동료라기 보다는 선생님으 로 생각될 정도의 감탄과 칭찬의 말을 들었다. 한번 만난 사람과 한번 배운 학과는 모 두 기억하는 비상한 천재적 소질을 발휘하던 그는 우뚝솟은 성당의 영향력 아래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경건생활을 하였던 것은 그의 부모의 영광이었다. 3. 대학생활 1523년 존 칼빈은 파리로 가서 마르세대학에 등록하여 마두린 코디어(Mathurin Cordier)교수에게 라틴어를 직접 사용하는 것을 배우다가 그해 겨울에 몽테규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코디어교수와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후일에 하나님의 교회에 유효하게 쓰임받을 훌륭한 준비였다. 몽테규대학으로 간 칼빈은 그곳에서 금욕주의의 학칙을 철 저히 준수하며 장기간 공부하는 습관을 익히고 논변술과 논박법을 배웠다. [청년기] 1. 부르지대학 파리의 대학에서 5년의 훈련을 마친 뒤 1528년 칼빈은 신학연구자격시험에 통과하였 으나, 그의 부친의 권유로 법학을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법조계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해서 신학의 길을 아예 자른 것은 아니다.) 오르레안대학의 피터 타아잔 문하에서 법학 을 약 1년간 배웠으나 그는 부르지대학에서 강의하던 안드레아 일키아티 교수의 명성을 듣고 부르지대학으로 옮긴 수 멜케오어 볼마르 문하에서 강의하던 그의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칼빈은 볼마르 교수의 교육(언어, 문화, 고대문화연구, 신약원문연구)아래서 조 직적인 개혁수행하고 주석을 쓸 수 있는 기초를 잡은 것이다. ]2. 파리의 왕립대학 1931년 파리의 왕립대학은 성경이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연구되었다. 법학을 권유하 던 칼빈의 아버지는 그해 병으로 돌아가셨다. 이에 칼빈은 파리로 돌아가 왕립대학에서 헬라어, 히브리어 공부를 하였다. 또한 그는 1932년 그곳에서 세네카의 관용론 주해서 를 출판하기로 했다. 3.프로탄테스트 인도주의적 색깔을 강하게 띄던 칼빈은 1532년 오르레안으로 갔다가 (학업을 위해) 이듬해 아시 파리로 돌아올 때 그는 프로테스탄테였다. 1532년에 그는 갑작스런 회개 를 경험한 것이다. 그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였다. 그는 즉시 복음사역자로서 그리고 종교개혁가로서 두가지 사명을 동시에 깨닫게 된 것이다. 칼빈은 그의 친구 니 콜라스 콥을 위하여 프로탄테스트 선언문을 쓰고난 후 힐책과 비난으로 은둔생활을 하였 는데 그곳은 앙굴렘(Angoulem)이었다. 칼빈은 이곳에서 "기독교 강요"의 체계를 세워 나갔다. [사역기] 1. 기독교 강요 1536년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프랑스의 신교들들의 박해에 대한 탄원서로서 프란시스1세에게 보내는 글로 썼다. 그의 글은 조직적이고 질서와 논리가 정연한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로 개혁교회의 가장 큰 이정표가 된 것은 그 책의 성경에 대한 충실성 때문이다. 2. 제네바 개혁운동 하나님의 섭리속에 칼빈은 제네바의 개혁지도자 화렐과 만날 기회가 생겼다. 화렐의 "요나의 비유"를 통한 설득에 칼빈은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극도로 타락한 제네바에 머물게 된 칼빈은 이름없는 종교 개혁가로서 종교개혁의 첫발을 내딛었다. 1536년 로잔에서 신교와 구교사이에 성찬문제로 토론회가 있을 때 칼빈은 교부신학을 자유로이 인용하여 신교의 주장이 성경적임을 갈파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 작했다. 1537년 제네바시의 소의회와 2백인 회의에서 그의 '요리문답'을 정식 채택되었 고 아이들을 비롯한 모든시민은 칼빈의 신앙요리 문답을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시민들은 그를 이단으로 몰아갔고, 개혁자들은 끝까지 신앙고백을 강행하려다가 시정부 와 충돌하게 되었다. 습격, 협박등의 소용돌이속에서 결국 시의회의 가결에 의해 칼빈 과 화렐은 1538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3. 스트라스 버그 칼빈은 바젤(Basel)로 갔다가 1538년 9월 프랑스 난민 교회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신학을 강의하였으며 로마서 주석도 내었다. 그는 스트라스 버그에서 약 3년간 있으면서 매우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 시기에 그는 결혼도 하였으며 기독교 강요 제2판도 내었다. 분주한 가운데 행복했던 칼빈에 비하여 제네바는 반대였다. 1540년경 반대파의 세력이 약해지고 부패는 더하여 져서 제네바시는 칼빈을 재초청하였다. 칼빈은 응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의 동역자 화렐의 간곡한 권유에 의해 1541년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4. 다시 제네바로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은 시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자 그의 개혁 이상을 실현하기에 노력하였다.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와 처음행한 일은 시의회에 나가 법에 의지하여 교회를 다스릴 것과 교회법규를 제정할 것, 그리고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에게 시 위원회의 고문위치를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법규"가 1541년에 대중앞에 낭독되고 정부와 시민에 위해 채택되었다. 하지만 1543년 시의회는 장로원으로부터 제명권을 박탈하고 1548년에는 칼빈의 모든 책은 출판전에 검열을 받도록 규정하였다. 1553년 추방을 각오하고 사실상 교회에 작별을 고하는 설교를 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계속된 투쟁은 1553년말 칼빈의 적수 세르베투스(Servetus)의 죽음으로 승리를 쟁취하였다. 세르베투스를 지지하던 자유파의 많은 지도자들은 제네바를 등지고 도망하였다. 장로원은 제명권을 찾았으며 그 결과 징계권 행사에 있어서 교회와 국가는 엄밀히 분리되었다. [노년기] 1. 성취 1559년은 칼빈으로서 성취의 해였다. 제네바시가 그에게 시민권을 줌으로 경의를 표한 것 보다 더 가치를 준 것은 그가 학술원(Accdemy)설립허가를 받은 것이었다. 교육받은 지도자를 교회에 공급하고자 했던 칼빈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그는 건강이 아주 나뿜에도 불구하고 연 200회의 강의와 200외의 설교를 하였다. 성경 각권을 주석하였고 '기독교 강요'를 계속 재편집하며 20편에 달하는 신학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그의 제작 전집은 총 59권에 달한다고 한다. 2. 죽음 1564년 그의 건강은 기울기 시작해서 그해 2월 마지막 강의와 마지막 설교를 하고 4월 마지막 예배에 참석하며 성찬에 참여 한 뒤, 1564년 5월 27일 칼빈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칼빈의 서거 소식은 제네바를 울음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칼빈의 유언에 따라 그의 장례식은 아주 간소하게 치뤄졌으며, 그의 무덤 역시 비석하나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소나무 곁에 묻혀 있을 뿐이다. |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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