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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예수 (마1:21-23)

by 【고동엽】 2021. 10. 17.

임마누엘 예수 (마1:21-23)

유대 땅 베들레헴 들녘에 들렸던 천군천사의 노래처럼 이 성탄에는 하나님께 무한한 영광이요, 땅에 있는 우리 가운데에, 그리고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여러 성도들에게는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성탄절이요, 연말의 바쁜 계절이기 때문에 맞이하는 사람들의 자세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하며, 때로는 깊은 감격과 기쁨, 그리고 은총을 느끼는 날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 해 전에 미국 보스톤 가까운 곳에 작은 도시 소머빌에서 성탄절을 맞아 신청 앞에 아기 예수의 탄생 장면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어떤 장난꾼이 아기 예수를 훔쳐가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르게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멀리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찾아온 동방박사와 들에서 달려온 목자들의 모습까지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심지어 포대기도 말구유도 다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없었습니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도, 트리도, 즐거운 음악도, 그리고 맡은 선물을 받게 되어도 예수님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모빌 시청 앞처럼 지금도 예수 없는 성탄절을 즐기지 않나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는 임마누엘이라는 말입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란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의 의미를 깨닫는 날이요, 그 뜻을 바로 이해할 때 진정한 크리스마스를 지내게 될 것입니다.

1. 우리는 먼저 이스라엘과 예수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알고 홀아비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같은 처지에 있어 보지 않고는 상대를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거나 통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래서 독일의 문호 괴테도 "내가 당하는 괴로움은 맛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경우에 처해 보아야 그 사정을 압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계시고자 인간 속에 오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셨다고 하더라도 함께 어울리고 통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시되 그가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써 함께 계심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은 예수님에게서 더욱 절실해지고 분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오셔서 우리처럼 고통하시고 배고파하셨으며, 하나님께 울부짖기도 하시고 눈물 흘리며 울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피도 흘리셨고, 그리고 죽기까지 하신 삶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고 하시던 주님의 궁핍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궁핍을 이해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에서는 제가 홀로 울며 아파하던 일을 보게 됩니다. 또 죽음을 눈 앞에 두고 그것이 엄연한 하나님의 뜻인 줄 아시면서도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면케 하소서."라고 기도하시던 모습에서는 가장 인간적이고 우리다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볼 수 있고 그 안에서 동시에 하나님을 볼 수 있으니, 그분이야말로 우리 속에 오신 하나님이시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 안에서 발견되는 임마누엘의 깊은 의미와 바른 뜻을 알게 될 때 성탄의 의미가 새롭게 될 것입니다.

2. 예수가 우리에게 오신 임마누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말에서 왕이 거지가 되었다는 의미 이상의 엄청난 비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같은 동류에서의 위치나 값의 변동이 아닙니다. 완전히 상상을 초월한 존재양태의 변화요, 엄청난 평가절하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등사상을 밑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 제도하에서도 대통령이 어떤 평민과 악수를 나누거나 식사를 함께했다 하면 그것은 큰 뉴스가 되어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소개되는 일이 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인간끼리 지위의 차이에서 오는 격차를 좁힌 것도 대단하거든 하나님이 인간 되심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하의 원인이 인간사랑이라니 이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한일 4 : 10에서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사 임마누엘 되심은 바로 하나님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죄악으로 눈이 멀고 귀가 먹어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한 채 죽음으로 가면서도 죽음의 길인 줄 모르는 인간들을 구원하사 새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 그가 사람되심은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오직 인간사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임마누엘 되신 결과 우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사람되시사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심으로써 우리지위에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친구와 함께 부대 안을 걸어다닐 때보다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친구와 함께 할 때가 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됩니다. 별을 단 장군과 함께 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같이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평가됩니다. 옛 어른들이 “친구를 보아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한 말대로 함께하는 사람을 보아 그를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되었으니, 이 어찌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요한 1:12에 보면 임마누엘 되신 예수와 함께 지내는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다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보통 변화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엄청나고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 5 :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 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에서 볼 것 같으면 '새 피조물'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의 것과 비교해서 조금 나아졌다거나 전의 것에서 진화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새로워진 새 피조물이라는 말씀입니다. 격상되어도 보통 격상이 아니기 때문에 '새 피조물'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티끌만도 못 하며, 굴러다니는 돌덩어리처럼 버려진 인간이었지만 이젠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명에 의미를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우리의 이 생명을 더욱 고귀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생명이니 어찌 값없다 하겠습니까? 값지고 고귀한 생명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루하루가 의미 있고 새로우며 우리 삶의 한발자국 한발자국이 값있고 보람있게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물러서지 않고 전진만을 생각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시사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는 임마누엘, 즉 예수님의 탄생은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 :20)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가 땅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하늘나라의 시민된 자부심으로 살 수 있게 해준 큰축복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임마누엘 되신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며, 이 큰 축복과 은혜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다짐하는 올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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