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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칼 바르트의 <창조론>과의 대화

by 【고동엽】 2021. 10. 13.

칼 바르트의 <창조론>과의 대화

 

(몰트만 저, 이신건 옮김,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1998, 대한기독교서회) 중에서)

 

내가 여기서 칼 바르트와 논쟁하려는 것은 그와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바르트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스승을 존경하는 방법은 그의 사상을 반추하고, 그의 문장을 인용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사상을 그의 책임에 돌린 후에 더 큰 그의 권위를 빌려서 그로부터 자기 자신의 사상을 다시금 가져오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그가 관심을 가졌던 바로 그 일을 독자적으로 깨닫고 말하려고 하는 데 있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이 일은 결국 우리의 부분적인 인식보다 더 큰 것이고, 그래서 이 일은 우리 모두의 노력을 추구와 생각의 사귐 안으로 이끌어간다. 이 사귐 안에서 우리는 서로로부터 배우고, 서로를 교정하면서 보완한다. 내가 이것을 말하는 것은 모든 인식이 동일한 상대성을 갖는다는 일반적인 의미 때문이 아니라, 인식이 열리고 능가되는 그러한 시간과 상황의 구체적 차이를 보기 때문이다. 아리안 종족의 피와 땅을 숭배한 "제3제국"에서 그리스도론적 창조신학은 지구의 생태학적 위기를 깨닫는 오늘 날의 창조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촉진되었다. 서로 다른 상황은 계시적 특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해석학적 적합성은 갖는다. 나는 이런 뜻에서 바르트의 창조론의 의도를 수용하려고 하며, 그 자신이 시도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 의도를 실현하려고 한다. 나는 바르트가 이 점을 원칙적으로 싫어하진 않았으리라고 믿으며, 오히려 똑같은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바르트 이후의 신학"을 그 자신이 다르게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리라고 믿는다.
사람이란 늙어지면 되돌아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흉금(胸襟)을 털어놓게 되는 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기억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설령 시간적으로 볼 때는 까마득히 오래된 다른 과거일지라도, 가까운 현재(現在)이다. 칼 바르트는 내게 현재이다. 이반트(Iwand), 볼프(Wolf)와 베버(Weber)의 주위에 몰려든 괴팅엔 대학생들이었던 우리의 그리운 시선은 일찍부터 바젤을 향해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장학금을 받거나 최소한은 뢰라하(L rrach)에 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런 가능성도 저런 가능성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을 읽을 도리 밖엔 없었고, 직접 강의를 들을 수는 없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분명한 거리를 유지했다. 여전히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때문에 끙끙 앓고 젊은 시절의 루터를 가지고 씨름하던 그 당시의 나에게 "교회 교의학"의 명상적이고 찬송가적인 옛 스타일은 하나의 아름다운 꿈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전쟁터에서 막 되돌아 왔는지라, 이 꿈은 폐허가 된 이 땅에서 진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왔다. 내 심금을 울린 것은 오직 십자가 신학적인 예정론(Ⅱ/2)이었다. 나는 헬무트 트라웁(Helmut Traub)의 소개로 두 번 바르트를 방문할 수 있었지만, 나 자신의 문제에 너무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이 짧은 시간에 그를 특별히 따뜻하게 느낄 순 없었다. 그 이후에 나는 신학사적 질문들, 특히 17세기의 계약신학에 관심을 돌렸다. 왜냐하면 오래 동안 - 헤겔 이후에 다른 철학이 존재할 수 없듯이 - 바르트 이후에 다른 신학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인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신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준 자는 아놀트 반 룰러(Arnold van Ruler)와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였다.
그런 후에 너무 짧았지만 서신으로 또 한번 강렬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1964년에 그에게 나의 "희망의 신학"을 보내었을 때이다. 그는 이 책을 즉시 읽고 논의했음이 분명하다. 11월 8일에 리하르트 카르벨(Richard Kahrwel)에 보낸 서신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책은 "매우 고무적이고 자극적이다. 왜냐하면 젊은 저자는 로마서 주석과 바젤의 늙은이의 교회 교의학에서보다 훨씬 더 낫게 복음의 종말론적 측면을 부각시키려고 열렬히 노력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책을 여러 대중 앞에서 읽었지만, 그를 따르기를 주저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조직신학적 시도는 - 이것을 칭찬할 수 있다고 한다면 - 진리라고 하기에는 거의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번의 일반적인 긍정적 평가 후 11월 17일에 그는 기념문집 안에 좀 다른 내용의 글을 써서 내게 보내주었다: "나의 '불만'은 당신이 모든 신학을 곧장 종말론으로 해소시키고, 초(超)-블룸하르트, 초(超)-오버벡, 초(招)-슈바이쳐를 등장시키는 일방성에 있읍니다. 신랄하게 말하자면, 당신의 '희망의 신학'은 블로흐 씨의 '희망의 원리'에 세례를 준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내가 주저하게 되는 것은 바로 당신에게서 신학이 너무 원칙적(즉 원칙적으로 종말론적)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나도 한 때 이러한 방향 안에서 돌진하려고 시도했으나, 이로부터 손을 뗐음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 구원은 KD(교회 교의학)로부터 나오지 않고(이 교의학으로부터 당신의 책을 읽었습니다만), '영원히 부요한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나옵니다. 나는 이것을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내게 - 용서하십시오! - 좀 가난한 분으로 여겨집니다."
실로 이것은 대단히 신랄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요한' 하나님이나 "가난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바르트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비판적인 그의 관점은 그가 내가 확신하는 "일차원적" 종말론적 사상을 "삼차원적으로" 풀어놓았다는 데 있었다: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인정하고, 그와 함께 종말론(eschata)의 비중이 온통 걸려 있는 삼차원적 사고를 위한 자유를 얻으며, 자연의 나라와 영광의 나라에 동등한(단지 잠정적으로만이 아닌) 찬양을 돌리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삼중적 시대(KDⅢ/2, 47,1; Ⅱ/1, 698-672)와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적 파루시아(KDⅥ/3 §69)에 관한 나의 구상이 당신에게는 별로 감동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한 번도 비판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요점은 여기에 놓여 있다: 영원을 삼차원적인 시간의 양태 - 전(前)시간, 동(同)시간 그리고 후(後)시간 - 로 나누는 것이나, 유스틴으로부터 유래한 그리스도의 삼중적 파루시아 이론 - "그는 육신 안에서 왔고, 영 안에서 오며, 영광 중에 올 것이다." - 도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신약성서에서 파루시아는 실제로 단지 영광 중의 그리스도의 도래를 위해서만 사용된다. 바르트는 그의 시간론에서 미래(Futur)와 내림(Advent) 사이를 체계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그는 그의 종말론의 출발점이었던 블룸하르트의 미래적 종말론 대신에 내세웠던 1920년대의 영원의 종말론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지만 종말론과 영광의 나라를 여기서 다룰 순 없고, 은총의 나라와 자연의 나라에 대한 "동등한 찬양"이나 "잠정적인 찬양"을 다루고자 한다. 아마도 은총의 계약과 영광의 나라의 관점에서 자연의 나라에 "단지" 잠정적인 찬양만이 아닌, 벌써 잠정적인 찬양을 돌리게 될 때만, 자연의 나라는 동등하게 찬양받을 수 있는가?
나는 양자택일의 형태로 창조론의 영역에서 바르트와 토론하려고 시도할 것이지만, 창조론에 적용될 그의 다른 신학적 근본결단도 다시 취할 것이다. 먼저 다음과 같은 표제어를 붙여 본다.
1. 종말론적 창조론은 그리스도론적 창조론으로 인도한다: "창조-계약"의 이원론이 아닌 창조, 계약 그리고 계약과 창조를 성취하는 저 영광의 변증법적 운동. 그리고 "은총은 자연을 완성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연을 준비시킨다."
2.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군주론적 삼위일체론을 극복하고, 성령론적 창조론으로 인도한다: 모든 창조관계들의 표준은 명령-순종의 내재적 삼위일체의 구조가 아니라 삼위-일체의 영원한 순환이다. 이로부터 창조 공동체 안의 영의 임재가 귀결된다.
3. 계급적인 창조의 질서 대신에 창조의 사귐을: 질서는 꼭 상위질서와 하부질서일 필요는 없고, 오히려 유동적인 동등비중 안의 상호적인 사귐이다. 바르트가 삼위일체 안의 아버지-아들, 하나님-세계, 하늘-땅, 영혼-육신 그리고 남자-여자를 계급적으로 상응시키는 것은 상호성과 순환의 의미로 해체되고 활성화되어야 한다.
4. 바르트의 슐라이어마하적인 "자연스러운 죽음" 이론에서는 우주적인 부활희망이 포기되어 있으며, 유한성이 사멸성과 동일시되고 있다.
5. 바르트는 "근대의 신학자"인가?

1. 창조의 근거와 목표로서의 영광의 나라

§41의 도입문장의 두 번째 부분인 "창조와 계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증언(즉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창조의 의도와 의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시작과 그 중심과 그 마지막을 갖는,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계약의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창조 자체가 계약의 역사의 시작이듯이, 이 계약의 역사는 창조의 목표이기도 하다"(44).
나의 창조론의 네 번째 주도이념은 다음과 같다.

"은총은 자연을 완성하지 않고,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자연을 준비시킨다. 은총은 자연의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세계의 메시야적 준비이다. 이 기본명제는 하나님의 은총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볼 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하여, 그의 부활은 세계의 새 창조의 시작이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자연과 은총 그리고 자연과 은총의 관계는 자연만이 아니라 은총도 완성하며, 그러기에 이미 여기서 자연과 은총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규정하는 영광의 관점 안에서 말할 수 있다는 결론이 이로부터 생긴다. 역사적 계시가 아니라 역사적 계약을 통하여 약속되고 보증되는, 오고 있는 영광의 나라가 비로소 창조의 '내적 근거'라고 불릴 수 있다"(22).

바르트는 계약을 인간, 오로지 인간에게만 관련시킨다. 그래서 마치 인간이 아닌 세계가 오로지 인간만을 위하여 창조되기나 한 것처럼, 그의 창조론은 인간중심적인 특징을 갖는다. 마치 그리스도가 오로지 인간만을 위하여 왔고, 오로지 인간의 화해자와 주님이기만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계약의 시작, 중심과 마지막이다. 인간이 아닌 세계의 창조는 "계약의 외적 근거"라고 설명된다. 바르트는 여기서 단지 인간과 하나님과의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과 그 시작만을 본다.
바르트가 계약과 창조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하여 여기서는 그에게 매우 친숙했던 개혁주의적 계약신학의 도움을 받지 않았던 사실은 놀랍다. 만약 그가 쉬렝크(G. Schrenk)의 저서인 '고대 프로테스탄티즘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와 계약'(Gottesreich und Bund im lteren Protestantismus, G tersloh 1922)만이라도 읽고 이를 따랐더라면, 전통과 거리를 유지한 그의 태도를 분명히 주목했을 것이다. 코케유스(Coccejus)에게서 창조는 단지 계약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행위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계약, 즉 창조계약이다. 계약의 역사는 공로계약을 단계적으로 허물고 은총계약을 단계적으로 세운 다음에 영광의 나라의 미래로 전진한다. 초기 교부들 이래로 신학전통이 항상 말해 왔듯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트 교리문답이 말하듯이, 인간이 창조된 것도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기" 위함이다. 빌립보서 2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낮춤과 들림, 십자가의 죽음과 온 우주의 찬양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의 역사와 더불어 모든 피조물들과 맺은 태초의 창조계약도 하나님의 현재적인 영광 안에서의 새 창조의 완성으로 인도된다. 정통주의 신학은 "우주의 신성화"가 창조의 목표와 은총의 의도라고 말한다. 왜 바르트가 창조와 계약을 그렇게 지나칠 정도로 이원론적으로 서로 관련시켰는지, 왜 안식일을 "창조의 면류관"(252)이라고 인상적으로 설명한 그가 실제로는 "근대의 종교"와 공유하고 있는 저 이원론적인 인간중심주의를 교정하지 못했는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내게는 점점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를 자신의 관심 안에서 교정하려고 한다면, 그의 도입문장의 마지막 언급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게다: 창조는 그 자체로서 "이 역사(즉 계약)의 시작"이다. 만약 이 점이 옳다고 한다면, 창조는 이미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계약이지, 단지 한 피조물과만 맺은 그러한 계약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창조 전체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약이라고 한다면, 단지 인간들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이 계약 안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계약의 중심"으로서 또한 인간들만의 화해자가 아니라, 에베소서 1장과 골로새서 2장이 말하듯이, 온 우주의 화해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세계는 단지 인간을 위해서만 창조된 것이 아니고(20ff.), 인간도 땅을 위해서 창조된다. 일방적인 의도는 결코 없으며, 모든 피조물들이 사귐 안에서 상호 교류하도록 배려된다. 그리고 만약 창조 자체가 이미 이 역사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그 안에는 분명히 이 계약의 역사를 위한 하나의 끊임없는 편차, 하나의 경향성과 개방성이 나타난다. 그래서 자연의 나라에 대한 찬양은 하나의 잠정적인 찬양이다. 잠정적인 것, 자신을 넘어 지시하는 것, 비유들과 약속에 대한 찬양은 그에 대한 참된 찬양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의 역사는 그 나름대로 영광의 나라에서의 그 완성을 위한 약속, 경향성과 개방성으로 충만하다. 은총은 아직까지 영광이 아니라 그 약속과 시작이다. 이것은 은총에 대한 "잠정적인 찬양", 그 종말론적 잠정성에 대한 찬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링크(Chr. Link)가 염려한 것과 같이, "종말론적인 구원"을 옹호한답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일어난 구원"으로부터 그 현실성을 "박탈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나는 바르트 자신이 종말론적인 구원의 "선취"(先取)라고 말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일어난 화해를 찬양한다. 계약의 역사의 끝에는 계약이나 역사 혹은 실존과 세계의 역사성이 아니라 다시금 창조, 즉 새 창조가 있다(계 21).
창조,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내주(內住)로 인하여 영화롭게 변한 창조는 역사의 목표이다. "자연의 역사화"가 아니라 종말론적인 "역사의 자연화"가 창조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은총과 영광, 화해와 구원 사이의 차이점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으면, 우리는 은총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광이 비로소 줄 수 있는 것을 은총으로부터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과 역사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 창조 안의 하나님의 보이는 내주(theosis)가 비로소 모든 피조물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하나님에게 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차이점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희망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인간 실존의 구원과 인간역사의 완성만이 아니라 여기서 신음하는, 인간이 아닌 피조물의 구원과 완성이기도 하다. 종살이하는 피조물을 구원할 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롬 8, 21).
종말론적 창조론은 처음을 마지막의 빛 안에서 해석하며, 회상을 희망의 빛 안에서 해석한다. 이스라엘이 "태초의" 창조를 엑소더스, 계약과 토라의 빛 안에서 설계했듯이, 그리스도교도 창조를 부활한 메시야의 빛 안에서 해석하며, 죽은 자들로부터 처음 일어난 자 안에서 온 창조물보다 먼저 난 자를 인식한다(골 1, 15). 메시야는 토라 대신에 등장하여 창조를 해석한다. 그는 창조를 그에 의해 예고되고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빛 안에서 해석한다. 그러므로 만약 참으로 그리스도론적인 모든 창조론이 예수 그리스도를 오고 있는 나라의 메시야로 진지하게 여긴다면, 그 자체상(eo ipso) 종말론적인 창조론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곧 창조론이 세계현실의 곤핍성(Adorno)과 메시야적 암호성(Bloch)을 메시야적인 빛 안에서 풀려고 노력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창조는 존재의(ontisch) 약속이고, 존재론적(ontologisch) 비유이며,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 약속과 실제적 상징이다.
종말론적 창조론으로부터 하나의 우주적 희망이 생성된다. 이로써 온 창조와 관련된 하나의 종말론, 인간의 운명만이 아니라 인간의 문명과 인간이 아닌 자연과의 관계와도 관련된 종말론, 그리고 인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연과도 관련된 종말론이 요청된다. 인간의 세계는 장차 어떻게 될까? 인간들과 또 지구의 자연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는 장차 어떻게 될까? 인간들이 존재하기 전에도 존재했던 세계, 인간들이 없이도 존재하는 세계, 아마도 인간들이 사라진 후에도 존재하게 될 세계는 장차 어떻게 될까?

2.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군주론적 삼위일체론을 극복하고,
성령론적 창조론으로 인도한다

바르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그의 모든 숨겨진 출발점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비밀에 있다. 여하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어디서나 인식할 수 있는 그의 창조론의 청사진이다. 그러므로 그의 창조론의 이런 혹은 저런 구조를 바꾸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을 바꿀 수 있다. 나는 1980년도에 쓴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바르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 군주론"에 반해 하나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제시했다.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는 해방신학을 위하여, 파트리치아 윌손-카스트너(Patricia Wilson-Kastner)은 여성신학을 위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정통주의 신학도 이미 이런 길을 들어서고 있었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을 새롭게 해석할 때, 절대자를 더 이상 실체로 사고하지 않고 주체로 사고하려는 현대인의 욕구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므로 터툴리안의 기본명제 한 본질 - 세 위격들(Una substantia - tres personae)이 서로 다른 세 존재 방식 안에 있는 한 신적 주체로 변경되어야 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로부터 출발하는 바르트의 착안은 하나님의 주체성이 아닌 다른 그 어떠한 삼위일체론적 기본명제도 허락하지 않는다. 1927년의 "교회 교의학"에서 그 출발점은 "주님인 하나님"이다. 1932년의 "교회 교의학" Ⅰ/1에서 그 출발점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존재 방식 안에 있는 "한 분의 인격적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하나님의 주체성, 본질 그리고 통치를 동일시하며, 신스콜라 철학자 디 캄프(Fr. Diekamp)와 함께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 안에 하나의 본성이 있듯이 하나의 자의식만이 있다"(Ⅰ/1, 379). 세 신적 존재 방식은 오로지 세 번 일어나는 "하나님 안의 반복"(repetitio aeternitatis in aeternitate)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아들은 한 하나님의 영원한 자기인식과 시간적인 자기계시이고, 성령은 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계약과 자기계시의 시간적 실현이다(Ⅰ/1, 504).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한 주체성의 전제 아래서 오로지 한 하나님의 내적인 자기차별화 과정과 자기동일화 과정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는(즉 삼위일체론에서는) 세 신적 자아에 관하여는 언급되지 않고, 한 신적 자아에 관하여 세 번 언급된다"(Ⅰ/1, 370).
표본을 검사하는 잣대는 성서 역사의 해석학이다. 바르트의 군주론적 삼위일체론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아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고백하는 영의 인격적 대면관계"를 표현하지 않는다. 바르트가 교회 교의학 Ⅰ/1에서 그의 삼위일체론을 전개할 때 토대로 삼은 기본명제 "하나님은 주님이다"는 신약성서의 하나님 진술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며, 한 주체로부터가 아니라 두 주체, 아버지와 주님으로부터 나온다. 삼위일체론이 "성령의 사귐"으로 명백히 확장된다는 사실은 바로 이를 떠나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나의 삼위일체의 신학에서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역사로부터 출발했으며, 세 주체들, 즉 메시야적인 아들 예수, 그가 부르는 아바 하나님 그리고 예수를 아버지와 결합시키고 아버지를 통해 아들을 세상 안으로 보내는 성령의 구별과 사귐으로부터 출발했다. 만약 우리가 세 주체들의 삼위일체적 역사로부터 출발한다면, 그리스도의 역사의 이 세 주체들의 일치성에 대해 질문해야 하며, 이 일치를 삼위일체론적으로 파악해야 하지, 일원론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아들 예수와 아버지의 일치를 요한복음에 따라서 순환론적 일치, 다시 말하면, 상호적인 줌과 받음 그리고 참여하고 나누는 생명 가운데 있는, "주체적 우리"(Wir)와 "객체적 우리"(Uns) 가운데 있는 "나"(Ich)와 "너"(Du)의 사회적 일치로 이해했다. 요한 다마스커스(Johannes Damascenus)가 삼위일체론 안으로 이끌어들인 순환(Perichoresis, circuminsessio)의 개념은 세 위격들의 일치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다. 이 세 위격들은 그들의 상호적인 사랑을 통하여 서로 안에서 전적으로 함께 느끼며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은 완전히 하나이다. 그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열렬히 교환함으로써, 상대방 안으로 온전히 침투하며, 서로를 온전히 함께 나눈다.
파트리치아 윌손-카스트너는 Perichoresis를 Perichoreusis로 이해하고, 원무(圓舞)로 묘사했다. 이 은유에 따르면, 세 위격들은 완전한 운동 안에서 결합되어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치는 격렬한 생동성, 진동하는 운동 그리고 운동 안의 완전한 안식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 일치는 자신 안에서 만족하는 폐쇄된 일치가 아니라, 요한복음 17장 21절이 말하듯이("... 저희도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열려 있고 초대하는 일치이다. 또한 성령의 나눔 가운데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러한 영원한 생동성은 전염(傳染)하고 살리는 생명이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인 영원한 사랑은 아들의 헌신 가운데에서 모든 세상에게 자신을 나누어주는 사랑이다. 순환론적인 일치의 개념은 "삼신론"(三神論)만이 아니라 "양태론"(樣態論)의 "위험들"도 극복한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삼위성을 단일성으로 환원시키거나 단일성을 삼위성으로 환원시키지 않으면서, 삼위성과 단일성을 결합하기 때문이다. 상호성의 개념은 이러한 순환론적 삼위일체론 개념의 구성요소이며, 이 개념을 통하여 내용적으로 규정된다.
지배와 순종의 내재적 삼위일체의 구조가 하나님의 창조관계와 창조 안에서 하나님과 상응하는 모든 관계들을 규정하는 잣대가 된다는 것은 바르트의 출발점의 귀결이다. 나는 화해론 Ⅳ/1, 219쪽을 인용하고자 한다: "하나님 자신 안에 위와 아래, 전과 후, 선행질서와 후속질서가 있다고 하는 바로 이 거북스러운 사실은 부인되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존재로서 본질적으로 긍정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 그 분 안에 이 사건, 즉 순종도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내적인 삶에 속한다." 하나님의 일치는 "자기 자신 안에서 순종받는 자로서 한 분이 되고, 순종하는 자로서 다른 분이 된다는 것"에 있다. 여기서 바르트는 지엄함 가운데서 통치하고 명령하는 아버지와 겸손히 순종하는 아들을 말하고 있다(앞의 책, 213, 186, 179.). 물론 그 자신도 이것을 "딱딱하고", "위험하고" 그리고 "거북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였다. 도대체 왜 그런가? 그는 자신의 비위에 맞지 않더라도 이 명제를 주장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걸까?
내재적 삼위일체의 구성차원(構成次元)이 아니라 내재적 삼위일체의 순환과 상호성의 관계차원(關係次元)이 하나님의 창조관계와 창조 안에서 하나님과 상응하는 모든 관계들을 규정하는 잣대가 된다는 것은 순환론적인 삼위일체론의 출발점의 귀결이다. 만약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지배와 순종의 관계로 설명된다면, 이 설명은 불분명하고 오해를 낳는다. 왜냐하면 이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임의적인 관계에도 들어맞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상호적인 사랑이야말로 내재적 삼위일체의 영원한 삶을 더 분명하게 그리고 오해를 낳지 않도록 설명한다. 이 사랑 안에서 예수와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다.
최소한 여기서는 포이어바하의 종교비판의 척도를 갖고서 인간의 형상들을 신성 안으로 투사(投射)했다는 비판을 제기할 수 없다. 이 비판은 바로 가부장적인 지엄한 통치의 하나님 개념에는 맞는다. 하지만 성서적-역사적 근거를 살펴볼 때, 이 비판은 거기나 여기나 제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제1계명에 따르면, "하나님은 주님이시다"는 진술은 이스라엘의 엑소더스 경험의 요약이지, 통치의 투사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예수와 교회의 삼위일체적 하나님 경험의 요약이지, 사회적 투사가 결코 아니다. 포이어바하의 종교비판은 하나님 경험의 역사적 중재를 간과하며, 실제적 경험이라는 사실들 앞에서 무너진다.
하나님의 창조관계의 순환론적 이해는 하나님의 창조, 형성, 보존, 인내, 용납, 동반, 운동과 동고(同苦)를 그의 사랑의 표현과 생동성으로 이해한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공존(共存)은 또한 그들의 상생(相生), 공생(共生)과 상호영향이기도 하다. 창조자는 피조물들의 사귐 안에 자리잡는다. 피조물들은 하나님 안에 자리잡는다. 그러므로 창조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르트 자신이 매우 아름답게 설명했듯이(Ⅱ/1, 534), "우리는 그 안에서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행 17, 28). "창조물 안에 있는 하나님", "하나님 안에 있는 창조물", 이것은 창조의 영 안에서 실현되는 순환이다. 창조론으로써 늘 하나님과 세계의 구분과 하나님의 세계 초월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일방적이고, 세계의 세속화에 맞장구치는 세속화 신학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창조는 하나님과 세계의 사귐을 뜻한다: "당신은 생명을 사랑하는 분이며, 당신의 하나님은 만물 안에 계신다"(지혜서 12, 1). 창조는 "하나님의 세계 내재성"(Ⅲ/1, 244)과 세계의 하나님 내재성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창조의 신비는 철학적으로 범내재신론적으로 이해해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신학적으로 삼위일체론적 창조개념을 논의하고자 한다.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 즉 양태론적 성령론과 삼위일체론적 성령론을 알고 있다. 나는 (1) 하나님 아버지가 그의 딸-지혜와 그의 아들-로고스를 통하여 그의 영의 능력 안에서 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점과 (2)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을 통하여 그리고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는 점을 말하기 위하여 나의 성령론적 창조론을 "영 안에 있는 창조"라고 불렀다. "Sic in Spiritu Sancto sunt omnia" - 그러므로 만물은 성령 안에 있다:(Meister Eckhart, Sermo Ⅳ, 1). 만물이 영 안에서 창조되었다면, 영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침투하기도 하고, 그의 능력을 통하여 그것을 살리기도 한다: "주님의 영은 땅을 가득 채운다"(지혜서 1, 7). 한 영국 찬송가가 말하듯이, 영은 "모든 창조물을 통해 숨쉬는 하나님"이다. 이 영은 아들과 아버지의 영원한 순환적 일체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신학자들이 두려워하듯이, 하나님이 세계 안으로 해체될 수도 없거니와, 몇몇의 뉴 에이지(New Age) 학자들(E. Jantsch, Fr. Kapra)이 바라는 대로, 진화가 신성화(神性化)할 수도 없다. 크리스티안 링크(Christian Link, EvTh 47, 1987, 89)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영"인지 아니면 "성령 하나님"인지 비판적으로 질문했다.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에서 중요한 것은 (세계 초월적인 한 분의) 하나님의 영이고, 순환론적 삼위일체에 의하면 중요한 것은 성령 하나님이다. "성령은 생명을 주는 생명, 만물을 움직이는 자 그리고 모든 피조된 것들의 뿌리이다"(Hildegard v. Bingen).
"나, 생명의 불은
들판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 너머로 불타고,
물 위를 비추며,
태양 안에서 이글거리고,
달과 별들 안에서 빛나고,
산들바람으로써
생명으로 가득찬 만물을 깨운다.
내 숨결은 모든 초록잎과 꽃 안에 있는 생명이다. . .
. . . 이는 내가 만물 안에서 불타는
숨어 있는 불꽃이기 때문이다.
만물은 나로 인하여 작렬하고 불타오른다."

창조자의 영(Spiritus creator)은 살리는 영(Spiritus animans), 보존하는 영(Spiritus suscitans), 인내하는 영(Spiritus patiens), 활기차게 하는 영(Spiritus vivificans)으로서 모든 그의 피조물들과 그들의 창조 공동체에 임재한다. 그들은 이로 인하여 그리고 이 안에서 살아간다.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에서 "지혜"와 "영"은 종종 동일한 것이고, 서로 교체될 수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삼위일체적 일치는 창조적인 영의 활동 안에서 그 초월성을 보존하기 때문에, 영을 "가능한 한 깊이 육신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의 사귐을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살리게 하는 것들 그리고 생명에 유용한 것들과 동일시할 필요성을 나는 전혀 느끼지 않는다. 왜 자연과학적인 설명들도 생명체의 상관성과 또 영의 상관성도 발견하면 안 되는가?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으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죽음을 사랑하느니라"(잠 8, 35 이하).
실로 무엇이 생명에 유용하고, 무엇이 죽음으로 이끄는가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구원하고 의롭게 하며 거룩하게 하는 영으로부터 비로소 인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영은 "부활의 숨결"이기 때문이며, 죽음을 이기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 땅에서 누리는 생명의 은혜와 영원한 새 생명의 은혜 간의 "차이점"을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크게" 생각할 수 없겠는지 질문한 울리히 퀸(Ulrich K hn)의 물음에 나는 대답을 준 셈이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자연신학은 자연 속에서 이차적으로 하나님을 재(再)-인식한 것이며,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계시를 전제한다.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경험한 성령의 분명한 체험으로부터 역소급하여 자연 안에서 활동하는 창조적인 영의 사역을 재인식하게 되었을 때, 나는 바로 이 신학규범을 따른 것이다. 링크가 나를 비판할 때, 그는 이 설명의 맥락을 간과하였다.
바르트는 "성령론적 창조론"이 "칼빈의 특수이론"이라고 생각하였다(Ⅵ/3, 865). 이것은 단연코 아니다. 칼빈은 오히려 아버지가 항상 아들을 통하여 영 안에서 활동하며 그래서 이미 창조에서도 영이 활동하였다고 가르친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세계개방적 삼위일체론을 따르고 있다. 바깥을 향하여 항상 일신론적으로 행동하는, 그 자신 안에서는 닫혀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협소한 삼위일체 이해(opera trinitatis ad extra sunt indivisa; 바깥을 향한 삼위일체의 활동은 나누어질 수 없다.)야말로 이런 성령론적 창조론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정통주의 신학과 비교해 보면, 칼빈이 결코 "특수이론"을 만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창조의 질서 대신에 창조의 사귐을 - 하나의 모형교체

바르트는 질서가 오로지 상위질서와 하위질서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일찍부터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출발점을 하나님의 주권에 두었고, 또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그리스도의 머리-몸 표상에 따라 그리스도론적으로 정립했기 때문에, 이러한 질서표상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만약 하나님이 지배와 순종의 관계 안에서 자신과 상응한다고 하면, 그와 상응하는 그의 피조물의 모든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창조 안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바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옛 계급적 상응이론을 취한다. 하늘과 땅의 우주론적 관계와 영혼과 몸, 남자와 여자의 인간론적 관계도 이와 상응하여 배열된다. Ⅲ/2의 441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혼과 몸의 관계는 하늘과 땅의 관계처럼 하나의 창조 안에 존재하고 세계 안에 존재하는 대립이다. 그러나 인간의 혼과 몸은 한 인간이고, 하늘과 땅도 전체로서 하나의 우주이다". "인간은 뒤따르는 몸의 앞서가는 혼으로서, 성서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이 이원성 안에서 비로소 완전해지는 인간존재의 하나님의 형상성으로서 설명하는 바로 그 내용의 비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 완전함 가운에서 지배와 섬김은 한 인간의 활동으로서 서로 다르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서로 맞물려 있다"(앞의 책, 513).
나는 계급적인 상응과 비유를 이루는 우주의 이런 체계로부터 단지 두 가지의 - 물론 신경학적인 - 점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혼과 몸의 관계와 남자와 여자의 관계. a) §46의 도입문장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질료적인 유기체의 주체, 형상과 생명이고, 그의 몸의 혼이다. 양자는 완전히 동시에 폐기할 수 없는 차이, 분리할 수 없는 일치, 파괴할 수 없는 질서를 이루고 있다."
질서의 본질은 "섬기는 몸의 지배하는 혼"이 되는 것에 있다. 혼은 앞서가고, 몸은 혼을 뒤따른다. 혼은 위에 있고, 몸은 아래에 있다. 혼은 일차적인 것이고, 몸은 이차적인 것이다. 혼은 지배자이고, 몸은 피지배자이다. 물론 하나님의 영은 혼을 가득채워서 영-혼이 되게 하고, 몸을 가득채워서 영-몸이 되게 하며 그리고 양자 안에 임재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또한 "인간을 주체로 만드는 원리"로서 혼에게는 직접적으로 임재하고, 몸에는 통치하는 그 혼의 지배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임재한다. 인간은 그 자신의 주와 통치자가 됨으로써, "영혼"이 된다. 본래적인 인간의 생명활동은 인간 주체, 즉 혼의 사고와 의지에 있다. 몸의 가치는 섬김에 있다. 바르트는 혼이 결정할 때 몸이 같이 말하고, 몸이 혼의 폭력에 대항하는 저항권을 갖고 있으며, 몸이 거꾸로 혼에게 말을 걸 수 있다고는 말하지만, 양자의 소망스러운 합의에 관해서는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
바르트가 그의 옛 친구 리하르트 지벡(Richard Siebeck)을 통하여 빅토르 봐이첵커(Viktor v. Weizs cker)와 루돌프 크렐(Ludolf v. Krehl)의 정신신체의학 사상에 매우 친숙했다는 사실은 더욱 더 놀랍다. 리하르트 지벡은 1956년에 봐이첵커를 위한 한 기념문집에서 바르트의 신학적 인간론을 인간 의학과 한 번 비교한 적이 있었다. 그는 정신신체의학도 역시 "주체"를 의학에 도입한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발견했다. 즉 정신신체의학은 환자를 인격으로 대한다. 그러나 그는 바르트의 질서표상을 적용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몸과 혼의 통일성 안에 있는 긴장과 결합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몸과 혼의 갈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지배하는 자는 또한 섬기는 자이고, 섬기는 자는 또한 지배하는 자이다. . . 환자들만이 아니라 건강한 자들도 의학적으로 면밀히 관찰하면, 자주 섬김과 지배는 전혀 구분될 수 없다... 건강함, 신선함 그리고 피곤함이란 것도 무엇인가? 여기서 몸이 혼을 지배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혼이 몸을 지배한다는 말인가?"(59f). 몸과 혼의 현상들은 분리될 수 있고, 서로를 위해 대리할 수 있다: "혼이 지배하고 몸이 섬기는 그러한 몸과 혼의 일치 속의 질서는 유동적이고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인간 의학은 신학적 인간론에게 환기시키고 싶다." 이것은 하나의 "해체할 수 없는 상호내재성(Ineinander)"이다(63).
그러므로 바르트의 일방적이고 군주론적인 몸과 혼의 질서상(秩序像)을 포기하고, 몸과 혼의 상호적인 "내재성", 즉 순환의 상(像)을 적용하는 것이 더 낫지 않는가? 한 인간의 생활사와 생활형태 안에서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무의식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 의도적인 것과 비의도적인 것은 항상 서로 매우 맞물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들을 다함께 그리고 상호성 안에서 보아야 한다. 혼이 몸에게 말하듯이, 몸은 혼에게 말한다. 몸은 그 자신의 경험을 갖고 있으며, 그 몸 언어는 지혜로 가득 차서 모든 감성적인 혼은 이 지혜를 듣는다. 바르트가 평하듯이, 몸에는 단순히 혼에 의해 의식적으로 훈련받아야 할 "아래에 속한 방탕한 충동"만이 있는 게 아니다: "진정한 인간으로서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훈련시킨다는 것, 인간에게 마땅히 속한 존엄성을 지킨다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함 속에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Ⅳ/2, 510). 그래서 몸과 혼의 에너지의 생생한 상호관계와 순환적인 상호내재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나는 게쉬탈트 치료학으로부터 게쉬탈트(Gestalt) 개념을 신학적으로 취하였다.
그렇지만 바르트는 섬기는 몸의 지배하는 혼에 대한 군주론적 이해를 뒷받침하는 신학적 이유들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원형이다. 그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혼만이 아니라 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바로 혼과 몸, 이 둘의 일치성과 전체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실로 질서 가운데 있지, 무질서 가운데 있지 않다. 질서가 그에게 우연히, 외부로부터 부여되어 있는 것처럼 그가 존재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자신으로부터 질서 가운데 있다. 그는 스스로 그리고 그 자신으로부터 위에 있으면서도 아래에 있고, 일차적인 것이면서도 이차적인 것이며, 지배하면서도 지배당한다"(339f).
그렇지만 참으로 이 "내적인 주권"(400)과 자기조종과 자기지배가 인간 예수의 뚜렷한 특징들인가? 이러한 "왕적인 인간"의 상은 아마도 "항상 지배하는 신의식"을 갖는 쉴라이어마허의 예수와 들어맞는 것같다. 공관복음서의 예수상은 그렇지 않다. 여성신학이 지적하듯이, 그곳에서는 예수와 인간들, 그의 육체적 욕구와 정신적 욕구, 그가 주는 것과 받는 것, 그가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 사이에는 늘 상호성의 특징들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는 예수를 인간의 모범으로 제시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의 메시야적인 예언자와 병자들과 죄인들의 신적인 형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b) 남자와 여자에 관한 바르트의 질서상은 이미 종종 여러 측면들로부터 비판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나는 남자로서 짤막하게 정리할 수 있다. 나는 바르트의 범세계적 계급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며, 남자는 혼, 하늘과 그리스도와 상응하지만 여자는 몸, 땅과 교회와 상응하는 질서를 정당화하는 그리스도론적-신학적 근거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늘 오로지 지배와 섬김만을 지적하는 역할분배도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바르트가 "A는 B보다 앞서고, B는 A보다 뒤선다. 질서는 단계를 뜻한다. 질서는 선행질서와 후속질서, 상위질서와 하위질서를 뜻한다."(Ⅲ/4, 189)고만 말한다면, 그의 질서개념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 안으로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이것은 가부장주의의 세계질서에 지나지 않는다. 바르트도 이것을 철저히 알고 있었다. 이미 1934년에 바르트는 여성신학자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자의식 있는 자유로운 여인 앙리에트 비셔트 후프트(Henriette Visser't Hooft)를 만났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았는가? 이제 남자든 여자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지 않는가?"라는 그녀의 질문에 바르트는 바울을 변호한답시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두렵건대, 만약 바울이 당신의 마음에 어른거리는 남자와 여자에 관한 테제의 전제(상호관심, 신뢰적 책임성) 아래 있었다고 한다면, 바울은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상호관심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우월성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온 성서는 "실제로 모권주의가 아니라 부권주의를 남자와 여자 관계의 지상적-시간적 질서로서" 전제한다. 그리스도가 남자였고, 또 남자로서 아담의 우월성을 확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이다. 온갖 "모권주의"는 배제되어야 한다. 비셔트 후프트는 그에게 대답했다: "우월성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 즉 사랑이 존재한다. 사랑은 그 어떠한 우월성이나 열등성도 알지 못한다." 그녀는 1934년 5월 9일의 편지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맺었다: "내가 거부하는 것은 오로지 머리를 제거하고 몸을 제거하는 행위임을 당신이 이해하셨기를 바랍니다"(19). 나는 이 지혜로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내가 거부하는 것은 오로지 여자의 머리를 제거하고 남자의 몸을 제거하는 행위입니다. 만약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되려고 하고, 여자가 남자의 몸이 되려고 한다면, 이런 행위가 일어납니다. 순환론적인 삼위일체론의 기본사상을 따른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은 남자와 여자의 상호사귐에 있다. 결단코 남자의 "우월성"이 아니라 양자의 "상호성"만이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인간의 삶을 - 사귐을 열어 주고 상호적인 사랑과 우정 안에서 양자를 살리는 동일한 하나님의 영의 능력 안에서 - 온전히 실현시킨다. 상위질서와 하위질서가 아니라 공동적, 공동체적, 동지적 생활이야말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상응하며, 그의 나라의 육화된 약속이다.

4. 인격과 자연, 계약과 창조, 혼과 몸의 부자연스운 분열의
예로서의 바르트의 "자연스런 죽음" 이론(Ⅲ/2 § 47,5)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에 따르면, 영혼의 영적 죽음이든 몸의 육체적 죽음이든, 다같이 "죽음은 죄의 삯"이다. 원죄의 보편성은 죽음의 불가피성에 의해 입증되었다. 고대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는 이 이론을 따랐다. 영적 죽음, 육체적 죽음 그리고 영원한 죽음은 원죄의 결과와 형벌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처음으로 죄와 육체적 죽음의 인과적 관련성을 배격했다(Glaubenslehre §77). 죽음은 그 자체상 악도 아니고 하나님의 형벌도 아니며, 유한한 인간존재의 시간적 종말이다. 죄로 인해 교란된 신의식이 비로소 죽음을 악으로 경험하고, 죽음을 형벌로 두려워한다. 우리는 죽음의 종이 아니라 죽음의 두려움이다. 은총으로 인해 강화된 신의식은 죽음을 더 이상 악과 형벌로 경험하지 않고 "자연스로운 죽음"으로 경험한다.
바르트는 그 나름대로 슐라이어마허의 이해를 따랐다. 죽음은 "그 자체상 심판이 아니며, 그 자체상 그리고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표시도 아니다"(770). 죽음은 "그 자체상" 단지 유한한 존재의 한계의 형태일 뿐이고, "그 자체로서"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인간의 탄생이 "비존재로부터 존재로 나아가는 단계"이듯이, 죽음은 "존재로부터 비존재로 나아가는 단계"이다. 왜냐하면 "유한성은 사멸성을 뜻하기" 때문이다(761). 즉 "죽음 그 자체"는 유한한 인간존재의 시한부적 생존에 속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죽음 그 자체"의 이러한 본질을 바르트는 "실제적 죽음"과 구분한다. 이것은 실로 죄인들의 죽음인데, 죄인들은 이 죽음을 저주로 두려워하고 형벌로 경험한다. 그리스도와 신앙이 없다면, 죽음 그 자체와 실제적 죽음은 하나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신앙 안에서 우리는 저주의 죽음으로부터 "자연스러운 죽음"으로 해방된다. 그리하여 "부자연스러운 죽음으로부터의 이 해방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해방이기 때문에, 이것은 분명히 자연스러운 죽음으로의 인간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777). 이 자연스러운 죽음은 "창조주의 섭리에 따라 그의 피조물의 생활에 속하고, 이 생활에 필수적인 것이다"(779). 그렇다면 만약 자연스러운 죽음이 존재한다면, 구원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피안이 되고, 인간이 "과거에 존재했던 자"(Gewesener)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며, 그의 유한한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영속화되고 영화되는" 것에 있다(771).
바르트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죽음" 이해를 그리스도론적으로 뒷받침한다.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대리하여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죽을 수 있기 위해서 스스로 "죄없는" 인간이면서도 죽어야 했다. 만약 육체적 죽음 그 자체가 죄의 삯이라면, 무죄한 자는 마땅히 죽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실로 죄인들의 저주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자연스러운 죽음도 죽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로서 이미 죽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바르트는 추론한다. 그에 반해 고대 프로테스탄트의 두-본성-이론(양성론)은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 그 자체를 불멸적인 것으로 여겼다.
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과 바르트에 반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생각해 보자고 말하고 싶다.

1. 유한성은 반드시 사멸성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면, 한 편으로는 천사와 같이,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바위돌과 같이 유한한 존재이면서도 불멸적인 것이 있다. 육체적 죽음은 세대증식(世代增殖)으로 인하여 비로소 이 세계 안으로 들어왔다.

2. 새 창조에서는 더 이상 애통도 슬픔도 애곡도 없을 것이며, 더 이상 죽음도 없을 것이다(계 21, 4). 그 때에는 영원한 생명이 지배할 것이기 때문에, 모든 죽음 - 육체적 죽음, 영적 죽음과 영원한 죽음 - 은 새 창조로부터 배제된다.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은 항상 사망의 멸망(고전 21, 4)과 사망이 없는 새 창조에 대한 우주적 희망의 개인적 측면일 뿐이다. "새 땅"이 없다면, 부활의 희망도 없다. 그러므로 만약 오로지 인간만이 하나님 안에서 "영속화되고 영화된다면",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다.

3. 창조의 현 상태에서 죽음은 그 원래적 질서의 "자연스러운" 구성요소도 아니고, 인간의 죄의 삯만도 아니다. 죄는 인간적인 것이나, 죽음은 인간들, 동물들과 식물들, 즉 모든 생명체들의 숙명이다. 동물들과 식물들도 죄를 지었는가? 이들은 단지 인간의 죄 때문에 죽는가? 바울이 로마서 8장 19절 이하에서 "피조물의 탄식하는 기다림"을 말할 때, 그가 뜻한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피조물의 탄식은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고, 단지 인간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인간이 죽음의 숙명으로부터 해방되어 "몸이 구속될 날을 고대한다"는 점을 말할 때, 피조물의 이러한 보편적인 탄식과 병행해서 이를 말하기 때문에(23), 인간과 다른 모든 생명체의 탄식하고 고대하는 창조적 공동체 안에서 하나의 거대한 연대성이 생겨난다. 안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홉(Annette von Droste-H lshoff)이 그의 시 "신음하는 피조물"에서 놀랍도록 파악했듯이, 인간의 죄와 폭력 너머에도 온 땅의 피조물에 슬픔이 존재한다. 내 생각에 이 슬픔은 처음의 열려 있고 완성되지 않은 창조로 소급된다. 생명체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고, 죄의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 내가 한 번 이렇게 말하도록 허락된다면 - 하나님의 첫 창조의 세계실험과 결합된 하나의 비극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생명체의 죽음은 영광 중의 새 창조를 향한 모든 생명체의 갈망의 표시이다. 이에 관하여 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갔으니,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되었도다"(계 21, 4). 영광의 우주적 희망(롬 8, 18)은 모든 생명체의 이러한 우주적인 슬픔을 희망찬 갈망으로 변화시킨다. 새 창조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만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신성화"도 가져온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이 점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사멸성과 죽음을 이해한다면, 그리스도가 죄인들의 저주의 죽음을 죽었다는 결론과 동시에 그가 죽음의 숙명에 예속된 모든 생명체들과의 연대성 속에서 죽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로부터의 그의 부활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가져다주며, 사망의 멸망과 "장차 올 세계의 생활"에 대한 전망을 모든 생명체들에게 열어 보인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펼쳐지는, 그의 죽음과 죽은 자들로부터의 그의 부활의 이 우주적인 차원이 없다면, 창조와 구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여전히 인간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우리는 슬픔과 희망 안에 있는 더 큰 창조 공동체로 전혀 다가갈 수가 없다.

5. 신앙은 실로 늘 일종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인 죽음에 대한 종교적인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담담히 확신있게 죽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탄식하며 고대하는 모든 피조물들과의 연대성 속에서 죽도록 한다. 끝으로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이러한 죽음에 대해서는 체념할 수 있지만 개체의 죽음에 대해서는 체념할 수 없도록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개체의 죽음을 "자연스럽고" 또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지 못한다. 시간이 있는 한, 오로지 잠정적인 세력만이 죽음에게 다가온다. 죽음의 미래는 죽음이 멸망됨으로써 창조가 죽음이 없이 완성되고 새롭게 되는 데 있다.

5. 칼 바르트는 "근대의 신학자"인가?

칼 바르트와 초기 변증법적 신학의 다른 대변자들은 19세기의 개신교주의와 그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자신들을 매우 뚜렷하게 구분하고, 자기 자신들을 그에 대한 대안(對案)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변증법적 신학의 태동을 뒤따랐던 한 편의 사람들은 오래 동안 바르트의 신학을 시민적인 "근대 종교"의 극복으로 생각했다. 그 반면에 그를 추종하기를 원치 않았던 다른 사람들은 그를 반동적인 반(反)현대주의자로 보고, 그의 신학을 "신정통주의"로서 고립시키려고 하였다. 최근에 들어 트루츠 렌토르프(Trutz Rentorff)와 그의 제자 그라프(F. W. Graf)와 팔크 바그너(Falk Wagner)가 바르트와 그의 신학을 그들이 명명한 "근대 종교" 안으로 수용하려고 한 이래로 상황은 바뀌었다. 이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이 그의 하나님의 주권의 신학을 현대의 주관성의 철학의 사고모델로 소급시킴으로써 입증되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생각한다. 고로 그는 존재한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한다. 고로 그는 자기 자신을 입증한다. 바르트는 피히테(Fichte)와 헤겔(Hegel)이 발전시켰고 리하르트 로테(Richard Rothe)와 이삭 아우구스트 도르너(Issak August Dorner)가 "근대 신학"을 위해 수용했던 주관성의 철학의 사고형태를 실제로 사용한다. 그러나 단지 사고형태만을 보는 자는 바르트의 신학이 성서주석을 의도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의 의무로 여기며, 그러기에 그의 사고형태는 단지 그의 신학적 주석을 위한 보조기능만을 갖는다는 점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성서는 19세기의 산물이 아니다. 성서를 시대적인 자신의 사고형태 위에 두는 자에게 성서적인 복음은 적용된 사고형태를 변화시키고 파괴한다. 더 정확한 모든 바르트 연구는 바르트가 끌어오는 사고형태에서 성서주석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그러한 변화를 보게 된다. 사고가 깨어지는 곳마다 복음이 그 자신의 말을 하기 시작한다. 복음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현대의 시민사회 사이를 갈라놓는 분기점이다. 이 점은 바르트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사고형태와 대립해서도 그러하다.
그에 반해 그리스도교의 옛 보편성 주장을 보존하기 위해서 신학은 오늘 날 "근대 종교"의 초이론(超理論)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유감스럽게도 스스로 선택한 그 자신의 고루함을 보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헤겔이 법철학 서문에서 말한 바대로, 자신의 시간을 사고 속에서 파악하려는 자는 항상 "너무 늦게" 오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현재를 결정하지 못하는 그러한 과거만을 파악할 뿐이다. 시민사회적 그리스도교의 폐허 안에서 단지 부엉이만이 더 이상 있지도 않는 "근대 종교"를 향해 지금도 여전히 향수에 젖어 꽥꽥거린다. 그리고 만약 근대 종교가 있다고 한다면, 그 이론은 흘러간 시대와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그리스도교 형태의 후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물론 저 형태는 아직도 인식될 수는 있겠지만, 이제는 "갱신시킬"(헤겔) 수가 없다. 그리스도교의 "갱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교회의 개혁으로부터만 온다. 그리고 이 갱신은 성서의 하나님의 약속의 영으로부터 신앙이 거듭남으로써만 가능하다. "근대의 변증법"이 현대인들의 명예를 벌써 그 역으로 되돌려 놓았기에, 이러한 통찰을 오늘 날 더욱 더 중요하다. 사람들이 역사예언적으로 "근대"와 "현대"라고 칭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인류의 "학문적-기술적 문명"의 기획이다. 이 문명이 사고하고 의도하는 패러다임은 그 기본요소에서 다음과 같은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인간을 "개체"로 주관화하고, 그를 오성과 의지의 주체로 환원한다.
2. 자연환경을 "원자들"의 우주적 초석으로 사물화한다.
3. 이 두 가지 일을 통하여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힘을 획득하게 되고, 자연의 과정들을 통제하게 되며, 획득된 힘을 보존하게 된다.
이 세 가지 원리들은 오늘 날도 여전히 매우 완곡하게 근대의 "자유의지"와 "자유의 역사"라고 칭해진다.
그렇지만 오늘 날 "자연적-기술적 문명"의 거대한 기획은 세 가지의 본질적인 위기로 몰고 간다.
1. 이 문명은 "제3세계"의 불의를 낳았고, 해마다 이를 증대시킨다.
2. 이 문명은 힘을 보존한답시고 원자핵의 공포 시스템을 낳았고, 해마다 자기를 파멸시킬 힘을 증대시킨다.
3. 이 문명은 자연의 재생력을 회복시킬 수 없도록 파괴함으로써 범세계적으로 "생태계의 위기"를 야기했으며, 식물과 동물을 멸종시킴으로써 해마다 더욱 더 지구 유기체의 생태학적 재앙으로 몰고 간다.
프라일리그라트(Freiligrath) - 이로부터 이름이 유래함 - 가 한 때 1848년 3월 초순에 메시야적 열광 속에서 "근대"라고 찬양했던 그것은 오래 전부터 인류와 지구의 "마지막 시대"(Endzeit)로 변하였다. 이 "마지막 시대"란 귄터 안더스(G nter Anders)가 인류의 멸망이 언제나 가능하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현대의 학문적-기술적 문명의 세 가지 치명적 위기는 생명으로의 전향을 요구한다. 이 전향은 코스 변경 이상을 요구한다. 깨어 있는 많은 사람들은 오늘 날 전향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며, 그러기에 "탈(脫)-현대", "새 시대"(New Age)와 "근대 이후"로 나아가는 길에 관해 말한다. 비록 이런 길들이 아직은 그다지 잘 식별될 수는 없지만, 사고와 의지의 새 패러다임은 점차로 더 분명해진다. 새 패러다임의 몇 가지 기본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자유는 더 이상 권력획득과 지배를 의미할 수 없다. 그러한 자유이해의 희생과 대가는 무시할 수가 없고, 너무나 커져 간다. 그에 반해 진정한 인간의 자유는 정의와 상호인정 안의 사귐으로 나타나야 한다.
2. 인간과 인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의 문화와 지구 유기체라는 자연의 관계에서도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지배와 예속, 분리와 통제의 형태를 갖는 사고 대신에 상대(相對), 상호(相互) 그리고 동반(同伴)의 통전적 원리가 나타나야 한다.
3. 역사의 목표는 더 이상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력장악일 수가 없고, 인간의 문화가 지구 유기체라는 자연 안에 항구적으로 자리잡는 것이어야 한다.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것과 자연과 균형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생명과 생존에 유익한 목표이다.
칼 바르트는 위기를 직접 경험하는 오늘의 우리처럼 그렇게 분명히 이 위기의 확산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유럽의 "허무주의"의 등장 안에서 현대의 종말적인 "시한부 사상"(Exterminismus)의 정신적 징후를 분명히 깨달았다. 그는 그의 창조론에서 근대의 이러한 종말적인 허무주의에 맞서서 창조주의 확고한 긍정(JA)과 그의 창조의 놀라운 자비를 규명해 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근대"의 옛 패러다임 안에 있는 위대한 인물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패러다임 안에서, 그리고 그의 방법으로 이 "마지막 시대"에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초를 놓았기 때문이다.

몰트만 저, 이신건 옮김,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1998, 대한기독교서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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