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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칼 바르트의 창조론

by 【고동엽】 2021. 10. 13.

칼 바르트(오른쪽)와 에밀 브룬너
역: 신학/성경
키워드: 창조, 구속, 언약, 무로서의 악, 창조의 일식


바르트의 창조론
Barth's Doctrine of Creation


박찬호
Chan Ho Park

백석대학교 신학과
Department of Theology,
Baekseok University, Seoul, Korea
EMail: chanho@bu.ac.kr


(Received February 3, 2014,
Accepted February 6, 2014)


The theology of Karl Barth is known as a kind of Christocentricism or Christomonism. Barth's doctrine of creation is also christologically oriented. He tries to relate the doctrine of creation to Jesus Christ. Thus he contributes to the combination of creation and redemption. His explanation of the evil as nothing also divulges the triumph of grace eschatologically. Despite of some flaws, Barth's doctrine of creation has many interesting merits.


I. 서론
II. 기독론적 창조론
III. 창조와 언약
IV. 창조와 무로서의 악
V. 비판적 평가
VI. 결론


I. 서론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20세기 대표적 개신교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하였지만 스위스의 산골 자펜빌(Safenvil)에서 목회하며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자각하게 되고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던 신학의 흐름을 바꾼 20세기의 위대한 교부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런가하면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의 신랄한 비판에 영향을 받은 일단의 사람들, 특히 한국의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칼 바르트를 또 다른 자유주의 신학의 주창자로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이런 바르트에 대한 비판의 기저에는 그의 성경관이 정통적인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판단이 자리하고 있다. 바르트의 독특한 계시관에 의하면 성경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라기(is)보다는 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become)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인격적인 계시를 담고 있기에 명제적인 진리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것이기에 역설적인 면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부분들이 성경관에 투철한 한국교회 교인들에게는 바르트를 복음적인 신학자로 받아들이는데 장애로 작용하는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로버트 레이몬드(Robert L. Reymond, 1932-2013)는 바르트와 반틸이 진리의 본성이 때때로 역설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있어 같은 결론에 이르렀음을 지적하고 있다.

반틸과 같이 바르트주의적 비합리주의에 강력한 적대자가 사람에게 대한 진리의 본성에 관해서 바르트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은 아주 이상스러운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반틸과 바르트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반틸은 진리가 성경의 명제들에 객관적으로 제시되었다고 가르치는데 반해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진리는 본질적으로 실존적이라는 데에 있다. 그러나 그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서, 최소한 때때로는 종교적 진리가 역설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특별계시로서의 성경에 배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지식의 가능성, 즉 일반계시를 통해서 하나님께 이르는 가능성을 부인한 점에 있어 바르트와 반틸이 유사하다는 입장이라 주장하고 있다.

바르트의 문제점과 한계는 그대로 인정을 하되 그의 신학이 지니는 장점과 기여를 바르게 평가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바르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리지만 거의 모든 신학 서적에 바르트의 이름이 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망의 신학자들로 분류되곤 하는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과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 1928-)는 각각 일정 부분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바르트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란 늙어지면 되돌아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흉금을 털어놓게 되는 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기억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설령 시간적으로 볼 때는 까마득히 오래된 다른 과거일지라도, 가까운 현재이다. 칼 바르트는 내게 현재이다. 이반트, 볼프와 베버의 주위에 몰려든 괴팅겐 대학생들이었던 우리의 그리운 시선은 일찍부터 바젤을 향해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장학금을 받거나 최소한은 뢰라하에 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런 가능성도 저런 가능성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교회교의학>을 읽을 도리밖엔 없었고, 직접 강의를 들을 수는 없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분명한 거리를 유지했다. 여전히 키에르케고르 때문에 끙끙 앓고 젊은 시절의 루터를 가지고 씨름하던 그 당시의 나에게 <교회교의학>의 명상적이고 찬송가적인 옛 스타일은 하나의 아름다운 꿈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전쟁터에서 막 되돌아 왔는지라, 이 꿈은 폐허가 된 이 땅에서 진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내 심금을 울린 것은 오직 십자가 신학적인 예정론(II/2)이었다.

우리 앞서 살았던 어떤 신학자에 대한 이러한 자세는 반틸에 의해서도 표현되고 있는데 ‘어깨 위에 서는 신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워필드와 카이퍼의 어깨 위에 선 우리들이 그들을 가장 잘 존경할 수 있는 길은 우리들이 그들의 기본적인 입장과 일관되지 못한 것을 계속 고집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펼쳤던 사상의 주류 위에서 계속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칼빈과 사도 바울에게 가장 충실하게 된다.

이 논문에서는 바르트의 창조론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바르트는 창조를 성부 하나님의 사역으로만 이해하려 하지 않고 예의 그의 신학 전반의 특징인 기독론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또한 바르트는 창조와 구속을 연결시킨 공헌이 있다고 일반적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창조론과 관련하여 무에 호소하는 악의 문제에 대한 바르트의 해결은 많은 논란과 함께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II. 기독론적 창조론

사도신경은 대표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차례대로 표현해준다. 사도신경의 첫 머리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하고 있다. 당연히 여기에서 말하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성부를 가리킨다. 창조를 성부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정당하기는 하지만 배타적으로 그렇게 하다보면 양태론적 색채를 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창조는 우선적으로 성자나 성령의 사역이라기보다는 성부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은 삼위 하나님 모두의 사역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콜린 건톤은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남긴 주된 문제는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과 세계의 지속적인 관계에 대한 설명을 발전시킴에 있어 보다 성공적이지 못하였다는데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도신경에서와 같이 그리고 이레니우스(Irenaeus, 2세기 초-202)에 의해 인용되고 있는 신앙의 규칙의 고백에서조차 전통은 창조를 성부에게 구원을 성자에게 교회에서의 생명 등등을 성령에게 귀속시킨다. 이것은 양태론을 조장하며 구원뿐 아니라 창조의 중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를 확증하고 있는 신약성경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이것이 아마도 창조론이 그렇게 종종 단일신론적이거나 유니테리언적으로 구축되는 이유일 것이다. 오히려 창조, 화해, 그리고 구속 모두가 성부에게 속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성부의 두 손인 성자와 성령-그들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신-의 사역을 통해 실현된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중재가 있다. 그러나 존재론적인 중간자들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통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두 손’과는 독립적으로 생각된 다른 중보자-플라톤의 형상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들, 로크나 뉴턴의 실체, 버클리의 원형들-가 관심의 주된 초점이 되었을 때 상실되는 경향이 있다.

바르트 창조론의 가장 큰 특징은 창조가 계시의 기초 위에서 비록 성부에게 귀속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전체 삼위일체의 사역으로 <교회교의학>의 구조 안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성자와 성령으로 하여금 창조의 중보에서 그 어떤 구성적인 부분도 담당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단일신론이나 유니테리안으로 흐를 수 있다. 물론 뒤에서 밝히겠지만 바르트는 창조에 있어서의 성자의 역할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인정하였지만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는 충분히 개진하지 못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창조에 있어서의 삼위일체적인 중보의 회복을 시도한 것에 대해 바르트는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바르트의 창조론의 내용은 삼중적이다. 첫째, ‘또 다른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분명하게 그 자신의 구분된 존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더불어 존재한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그 자신이신 존재이시며 그 자신이 아닌 것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우시다. 그러므로 홀로 계실 수 있었다. 창조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세계를 다스리고 그 주님이신 점에서 세계의 절대적인 근원이며 목적이며 능력이시라는 엄격한 의미에서 세계 앞에 계신다’ (7). 셋째, 창조론은 성경적인 근원을 가지며 단지 성경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계 원인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창조는 완결되고 우유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배운다. 이러한 행동의 결과로 성경이 ‘하늘과 땅’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된 실체의 총합이 존재하게 되었다 (11-12).

콜린 건톤은 이러한 바르트의 창조론을 “보다 명시적으로 삼위일체론적인 창조의 중보 개념”을 제시한 판넨베르그의 창조론과 비교하고 있다. 판넨베르그가 창조의 자유와 우유성에 대하여 강조하는 부분에서 건톤은 바르트의 메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건톤이 보기에 바르트와 판넨베르그의 차이는 창조하시는 삼위의 행동에서 성자와 성령의 행위를 판넨베르그가 보다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다는 데에서 발견할 수 있다. 판넨베르그와는 달리 바르트는 성부로부터의 성자의 구별과 세계의 구별 사이의 유비에 대한 강조로서 창조의 기독론적인 중보라고 하는 개념에 많은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영원한 교제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매우 다르지만 상이하지 않는 교제에서 상응점을 발견한다’ (50).

판넨베르그는 자신의 <조직신학>의 두 번째 권에서 창조론을 다루면서 바르트와는 대조적으로 위격적 구별을 존재론적 구별의 기초로 삼고 있다. ‘성자는 성부의 사랑의 주된 대상이다. 자신의 사랑을 발하시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은 성자를 사랑하신다’ (21). 그러나 그것 이상이다. ‘성자 안에는 성부와 다른 모든 것의 근원이 있다. 그러므로 성부에 대한 피조물의 독립의 근원이 성자에게 있다’ (22). ‘하나님과 구별되는 피조세계의 창조는 영원한 성자의 자기 구별에 의존한다’ (63). 게다가 성자는 또한 하나님과 피조된 실체 사이의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31). 그러므로 기독론은 하나님과 세계를 구별해주며 동시에 하나님과 세계를 관계 지어준다.

바르트는 창 1:2을 무에 대한 종말론적인 패배를 선언하고 있는 약속으로 보기 때문에 명확하게 성령론적인 독법으로 창 1:2을 읽기를 거부함으로서 창조의 행위 가운데 성령의 의해 이루어진 역할을 최소화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판넨베르그는 동시에 흥미롭기는 하지만 의문스러운 또 다른 기여를 하고 있는데 우주론적인 이론으로부터 빌어온 언어로 성령의 창조하시는 행위를 말한다. 신적인 ‘역장(field of force)’으로서의 성령에 대한 생각으로 판넨베르그는 어떤 근대의 장이론이 우리로 하여금 피조된 실체를 스며들 수 없는 원자로서가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역장으로 보게 하듯이 신적인 성령은 세계가 그를 통하여 본질적으로 그러한 것이 되게 하고 그렇게 유지하는 역장이다. ‘한편으로 성령은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피조물 가운데 창조적으로 현존하시는 원리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성령은 신적인 생명 가운데 피조물이 참여하고 그러므로 생명 자체에 참여케 하는 도구이시다’ (32). 한 마디로 바르트의 창조론은 이렇듯 삼위일체론적 창조론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고 기독론적인 창조론으로 머물러 있는 듯하다.

로버트 리탐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 대하여 논하면서 그리스도와 창조 사이의 이중적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영원하고 선재하는 아들로서 그리스도는 우주를 창조하셨고 그것의 존재를 계속 유지하신다.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성육신하신 아들로서 그리고 우리의 중보자로서 이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며, 절대적 권세의 자리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결국은 우리와 전 피조계를 구속하실 것이다. 이 두 축의 관계는 우리가 창조와 구속을 어떻게 연결하며 우선 순위를 어떻게 매기느냐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III. 창조와 언약

20세기에 창조론을 회복하려고 한 바르트의 시도의 두 번째 장점은 창조와 구속 또는 구원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새롭게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바르트는 자신의 기독론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필연적으로 구원 또는 바르트 자신이 선호한 용어를 사용하자면 화해에 강한 강조점을 제안하고 있는 신학자이다. 바르트는 창조와 구속 모두를 하나의 더 상위 원리에 복속시키고 있다. 그 원리는 언약이다. 이 언약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인류를 하나님과 화해된 관계로 선택하시는 것이다. 역사적이고 시간적인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시고 그 안에서 온 인류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결과이다. 이러한 설명에서 구원은 신적인 목적의 역사하심을 의미하며 이것은 신적인 의도에 있어서 창조를 앞서며 인류와의 화해된 관계에 이르게 하신다. 죄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에 대한 인간의 비합리적인 거절이기 때문에 화해는 원래적인 언약적인 의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첫 번째 실패된 기획 이후에 두 번째 시도라기보다는 시작부터 목표되었던 화해이다.

그렇다면 창조의 자리는 무엇인가? 피조된 질서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목적이 구현되고 유비를 바꾸자면 화해가 발생하는 장소이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이레니우스와 보다 최근의 서구적인 주제들을 조합한 것이다. 화해는 바르트에게 일종의 총괄갱신(recapitulation)이다. 이것은 단지 완벽한 시작으로의 복귀라기보다는 원래적인 의도의 완성이며 충족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특징은 창조와 화해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바르트적인 강조에 있다. 하나님은 피조세계를 영원부터 사랑하셔서 자유로이 그것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변덕스러움이나 필연성으로부터 뜻하시고 세우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피조물을 사랑하셨고 피조물을 위한 사랑을 나타내기를 원하셨으며 피조물의 존재와 본질로 자신의 영광을 제한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피조물 안에 피조물과의 그 자신의 공존을 계시하시고 나타내시려 하셨던 것이다.

인용문의 후반부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전형적으로 바르트적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세계와 하나님의 공존에 계시된다. 그러나 영원의 논리에는 난점이 있다. 바르트의 하나님은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영원 동안 인류를 향하여 그 자신을 자유로이 드리신다는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리겐과 어거스틴의 영원한 창조 교리 언저리에 있다. 비록 단지 언저리이기는 하지만, 로버트 젠슨이 주장하고 있듯이 바르트의 그리스도는 위험스럽게도 플라톤적인 형상에 가까운 대등한 것에 근접하여 있다. 만일 하나님이 영원부터 피조세계를 사랑하신다면 그는 결과적으로 그것을 창조하실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바르트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세세한 부분을 어떻게 해석하든지간에 전체로서의 그 교리는 구원이 조직적으로 창조와 연계되며 잘못된 일을 고치기 위한 나중의 개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바르트의 방식이다.

창조와 언약을 연결하는 바르트의 방식에 중심적인 것은 이중적이며 그 관계를 인식하는 보완적인 방식이다. 첫째로 창조는 언약의 외적인 기초이다. 자기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작동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만 한다. 창조는 ‘피조세계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목적을 실현하는’ 하나의 전제가 된다는 의미에서 외적이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이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 사랑받는 이는 자신의 존재를 가지며 자신을 사랑하는 분과 독자적인 존재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해야할 구별된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 창조는 그러한 사랑의 대상을 가져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실 수 있는 것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기에서 그것을 사랑하실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하신다. 바르트에 따르면 이것이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의 논점이다. 둘째로 언약은 창조의 내적인 기초라는 것이 따라 나온다. 언약은 창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피조물은 단지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는 하나의 점을 가지며, 그리고 그것은 ‘목적과 계획과 질서를 실현하는’ 것이다 (229). 언약은 창조의 목표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의 아담과 이브의 창조에 대한 기사는 전체 인류와의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하는 창조의 목표를 보여주는 징후이자 예기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안으로부터의 창조의 역사’이다 (232). ‘여기에 창조의 특별한 존엄성이 있다. 모든 것의 외적인 시작으로서 그것은 어떤 면에서 그 내적인 시작인 하나님의 결정과 계획에 있어서 외적인 근원과 직접적으로 대립한다’ (43).

몰트만은 “바르트는 창조와 언약을 너무나 배타적으로 하나의 짝으로 연결하였고... 자신이 ‘현대의 종교’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인간중심주의를 창조와 언약을 짝지음으로 개정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창조를 단지 인간 존재에게만 관계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의 창조론은 인간중심주의적인 초점을 가진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언약이 “창조의 내적인 기초”로 간주될 수 있으며 창조는 “언약의 외적인 기초”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시작이요, 중간이며, 끝이다. 마치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서만 오셨고 단지 인류의 화해자요 주님이시다. 비인간적인 세계의 창조는 ‘언약의 외적인 기초’로서 설명되고 있다”라고 몰트만은 주장하고 있다. 몰트만은 바르트 자신의 말을 사용하여 바르트의 견해를 개정하고 있다: “‘창조 그 자체가 이러한 역사(즉 언약)의 시작이다.’ 이것이 그러하다면, 창조 그 자체는 이미 하나님의 언약이다. 만약 하나의 전체로서의 창조가 시작부터 하나님의 언약이라면, 그렇다면 인간 존재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이러한 언약 가운데 살고 있으며, ‘언약의 중심’이다.” 몰트만은 “자연의 역사화”가 아니라 도리어 종말론적인 “역사의 자연화”가 창조의 목표라고 주장하고 있다. 몰트만은 “창조, 즉 하나님의 내주하심에 의해 변혁되는 창조가 역사의 목표이다”라고 쓰고 있다.

바르트의 창조론의 장점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말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르트 신학의 모든 것과 같이 기독론적으로 드라이브가 걸려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창조론과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바르트의 찬사에서 모두 바르트는 자신이 피조된 질서를 우리를 위해서뿐 아니라 그 자체로서도 선한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 감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다른 장점들도 가지고 있다. 때때로 주장되는 것과는 반대로 바르트가 모차르트와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교의학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 칭의로서의 창조에 대한 항목에서 바르트는 매우 명시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피조물은 ‘단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존재는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악하지 않으며 선하다... 피조세계는 확증되고 부정되지 않으며 선택되고 거절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즐거움의 대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되었기 때문에 또한 매우 선하다... 이것은 유보조항이나 아무런 수식 없이 타당하다.

이 동일한 단락 안에는 종말론적인 어조도 또한 있다: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자신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과 만남에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발전되는 것이다’ (366). 이레니우스와 같이 바르트는 창조를 투사(project)로 이해한다. 종말론적으로 완결되는 하나의 투사라는 것이다. 이것이 발전되는 방식의 한계에 대하여 그 어떤 다른 것이 말해져야만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교의학적인 중요성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창조론을 자연신학의 항목이 아니라 기독교 신조의 고백의 부분으로 확증함으로써 바르트는 전통이 분리해 놓곤 하였던 창조와 구속의 영역, 즉 시작과 중간에서의 신적인 행동의 영역을 통합하는 방향을 시작할 수 있었으며 그 일을 기독론을 수단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바르트의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중보되며 그러므로 성부로부터 성자를 영지주의적으로 추상화하는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IV. 창조와 무로서의 악

칼 바르트는 전적으로 성공적이지만은 않은 무(Nothingness, das Nichtige)라는 자신의 개념을 가지고 설명을 시도하였다. 바르트는 무를 창조주의 선한 즐거움에 저항하는 부정적인 힘의 일종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무를 어떤 면에서 선의 부재로 보는 소위 말하는 악에 대한 결여적 개념의 또 다른 역본이라고 치부되어서는 안된다. 창조를 파괴하려는 하나의 시도로서 무는 능동적인-만일 그것이 적극적인 어떤 것을 제안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의 ‘적극적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힘을 가지고 있으며, 단지 부정 이상의 것이다. 어떤 경우에 선에 능동적으로 기생하고 선을 그렇게 파괴하는 어떤 것을 제안하는 악에 대한 결여적인 개념은 거의 단지 결여적이지만은 않다. 최상의 것이 타락하면 최악의 것이 된다! 악을 비록 실재적인 것은 아니지만 선한 창조가 타락한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최소한 그것은 가능하다. 악은 선에 기생하는 것으로써만 실재적이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잠시 멈추게 하는 것은 바르트의 악 개념이 창 1:2에 있는 어두움에 대한 마니교식 해석의 몇 가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로세테스테가 바실을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그 자체로 그 자신의 근원의 원칙을 가지는 악한 능력, 차라리 악 자체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반대된다.’ 분명 ‘불가능한 가능성’ 그리고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것으로서의 바르트의 악 개념은 종말론적으로 그것이 아무런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제안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개념은 아마도 조합에 의해 유죄가 된다. 그리고 널리 납득시키기 어려운 것이 바로 바르트 신학의 한 특징이다.

하지만 무라고 하는 개념은 바르트에게 우리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 두 가지 구별되는 형식을 서로 구분할 공간을 부여한다. 한편으로 바르트가 ‘창조의 어두운 면’이라 부르는 것이 있다. 즉 ‘피조물의 실존, 그리고 특별히 사람의 실존에는 밝은 날과 어두운 날, 성공과 실패, 웃음과 울음, 젊음과 나이듦, 얻음과 상실, 출생과 조만간 그 필연적인 결과로 죽음에 이르는 시간과 날과 해가 있다.’ 이것은 무를 상기시켜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무와 동일시되어서는 안되며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속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상에서의 우리의 나날의 적절한 한계로서의 죽음과 그들을 치명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끼어든 죽음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지상에서의 우리의 삶에 창조주가 부여하는 한계와 그 유한성을 무의 위협으로 돌려놓는 것은 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죄는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을 담당하시고 부활의 약속을 담당하시는 것 없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모든 것을 넘어서 모든 관계성의 중단으로서의 죽음은 우리에 관해 이야기되어지는 최종적인 행동이 될 것이며 그래서 창조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의 최종적인 무화가 될 것이다. 이것이 왜 많은 전통이 피조세계가 파멸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선함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과 괘를 같이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악이 창조의 타락 이외의 것이 아니며 그 적절한 목적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며 그 최종적인 패배의 약속 가운데 십자가에서 극복된 것이라는 것 외에는 더 말할 수 없는가? 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가져온다. 악의 근원으로서의 신비가 아무리 크다 해도 악을 파괴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성육신한 성자의 인내심 있는 순종에 의하여 악을 극복하는 본성이 악은 마침내 단지 종말론적으로 파괴될 것(고전 15장)임을 분명히 해준다. 십자가 위에서의 악의 극복이라고 하는 수단은 힌트를 준다: 악은 마치 하나님께서 피조세계가 그 완전함을 성취하게 하실 수 있기 위해 ‘시간이 걸리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하신 때에 종말론적으로 극복될 것이다. 이러한 극복은 분명 예수의 부활에서 예견되고 있으며 우리의 시대 안에서 특수한 존재와 사건들이 성자 안에서 창조되었던 것이 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으로 예견되고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 이것은 단지 부분적이고 예기(anticipation)에 의한 것일 뿐이다.

그 다음 우리는 창세기의 타락 기사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어떤 특징을 보여준다고 말함으로써 섭리에 대한 토론으로 인도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각 단계에서 그 목표가 악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고 그 충만한 수확이 되지 않도록 한계 안에 악을 붙들어 매는 것이다. 살인자 가인에게 주어진 표가 전형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인에게 그 이상의 처벌에 대한 면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창 4:15). 이와 유사하게 그 모든 비극적인 본성에 있어서 홍수는 효과에 있어 보편적이지 않았고 창조 언약의 갱신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십자가에서의 악의 극복을 위한 모체가 된다. 십자가는 그 즉시로 이 이야기를 성취하며 초월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또한 어떻게 십자가가 하나님의 섭리적인 행동 일반과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으며 도리어 그 절정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는데 도움이 된다.


V. 비판적 평가

서론에서 우리는 바르트와 반틸이 두 가지 점에서 비슷한 입장임을 제시한 바 있다. 로버트 레이몬드는 흥미롭게도 바르트와 반틸이 진리의 본성이 때때로 역설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있어 같은 결론에 이르렀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특별계시로서의 성경에 배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지식의 가능성, 즉 일반계시를 통해서 하나님께 이르는 가능성을 부인한 점에 있어 바르트와 반틸이 유사하다는 입장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반틸의 입장이 지니는 약점은 또한 바르트 신학의 약점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맥그라스는 반틸의 전제주의적 변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짐짓 자연과 인간이라는 일반계시를 무시하는 듯한 반틸의 입장은 역사적으로뿐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심각한 약점이 있다. 반틸이 지지하고 강력하게 변호하고 있는 전제주의적 변증의 방법론은 신학적으로 기독교적인 창조론과 구속론을 통합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창조와 구속을 통합하려고 한 바르트의 시도는 여러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은 기독론 중심주의 (Christocentricism) 또는 기독론 단일론(Christomonism)으로 비판을 받는다. 그만큼 기독론적인 집중이 심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기독론에 집중하다보면 구속론은 강할 수 있지만 창조라고 하는 부분에 대한 강조는 약할 수밖에 없을 텐데 창조론에서부터 기독론적인 접근을 함으로써 도리어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이른바 복음주의 신학 안에서 널리 관찰할 수 있는 ‘창조의 일식’이 바르트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도리어 훌륭하게 극복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르트는 특별계시를 강조하다 못해 일반계시를 거의 부정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해는 바르트가 에밀 브루너와 벌였던 논쟁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1930년에 바르트는 단 하나의 빛이요, 진리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서를 통해서 만나고 교회의 설교를 통해서 만나는 것으로, 세상의 이념이나 세상의 탁월한 인물이나, 정치적 어떤 운동으로 만날 수는 없다라고 강력하게 설교하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이해에 대해 김명용 교수는 바르트가 1959년 발간된 <교회교의학>IV/3에서 교회 밖에, 창조세계 속에 존재하는 빛들과 진리들과 말씀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된 세계에는...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지 못하시는 세속 영역은 없다.” 유감스럽게도 바르트는 빛과 빛들에 관한 교리 속에 구체적 예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바르트 연구가들에 의하면 모차르트의 음악이나 사회 민주주의와 같은 것들이 바르트가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유비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모차르트의 음악은 기독교 교부들의 가르침 이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표현하는 음악이다.

하지만 1959년에도 바르트는 창조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거부했다. 그러면 세속세계에 존재하는 빛들, 진리들, 말씀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바르트에 의하면 이 빛들과 진리들과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혹은 예수 그리스도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빛들이고 진리들이고 말씀들이다. 이 말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세속세계 속에서도 활동하시고, 이 활동에 의해 그리스도에 의해 쓰인 빛들과 진리들과 말씀들이 있다는 뜻이다. 이 빛들을 자연을 관찰해서 얻었다면 그 빛의 근원은 자연에 있는 것이고 창조계시와 자연신학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르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 가능성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1959년의 바르트는 여전히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라고 김명용 교수는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일반계시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의 신학에 나타나는 자연세계 또는 창조세계에 대한 무관심이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어느 정도 해소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듯하다. 물론 여하한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입장에는 시종일관 변함이 없긴 하지만 말이다.

벌카우어는 바르트에게 있어서의 창조론의 독특한 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창조에 관한 성서의 메시지는 이성이라는 천부(天賦)의 빛을 통하여 아주 눈 먼 사람이 아니면 누구나 다 깨달을 수 있는 우주론적 또는 실체론적인 진리들을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 먼저 창조 그 자체를 알고 그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창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와 말씀의 성육신과의 관련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벌카우어는 <칼 바르트의 신학: 은총의 승리> 3장 “창조에 나타난 은총의 승리”에서 바르트의 창조 교리 가운데에 이미 은총의 승리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르트는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으신, 또는 사실상 경멸하여 간과하여 버리신 바로 그 세계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혼돈과 흑암이 비록 간과되고 거부당했더라도, 역시 그들은 어떤 의미로는 “실재적”(real)이다. 거부당한 흑암은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 또는 비존재로 설명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이것을 (창조되지 아니한) 하나의 실재로 논의한다.

악을 무로 설명하고 있는 바르트의 주장은 짐짓 죄의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바르트는 죄의 실재적인 위협을 부정하지 않는다. 벌카우어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죄는 하나의 무서운 실재이다. 그러나 인간이 한 선택은 불합리하고 어이없는 것, 곧 죄는 불가능한 가능성이었다. 죄는 어이없고 불합리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불가능한 가능성 이외에 어떠한 가능성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며, 이것은 창 3장의 ‘혼돈의 괴수’의 세력에 굴복하는 인간의 ‘어이없는 능력’(absurd ability)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피조물은 그 어느 것이나 “무(無: nothing)”가 아니라, 반드시 “어떤 무엇(something)"이지마는, 혼돈의 기슭에 존재하는 안전하지만 역시 위험한 그 무엇인 것이다. 흑암의 면은 이렇듯 독립적이 아니고 자립적(autonomous)이 아닌 핍절한 (needy) 것으로 나타나 있는 피조물에 속한다.

악의 기원이라는 문제에 대한 답은 있지 않으나, 악의 정복이라는 문제에 대한 답은 있다. 이 답(이것이 선택과 창조의 승리의 본질이 되는 것이거니와)은 그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곧 그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죄를 무로 설명하는 것은 결여로서의 악에 대한 설명과는 다른 내용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반적인 은총의 승리에 대한 바르트 신학의 기조가 이 부분에도 스며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바르트의 창조론은 죄의 영향력을 최소화한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만든다.


VI. 결론

지금까지 바르트의 창조론의 기본적인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바르트는 창조를 단지 성부의 사역으로만 이해하려 하지 않고 기독론적인 접근을 통해 창조론의 내용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이를 통해 구속의 드라마 배후에 밀려나 있기 십상인 창조를 구속과 밀접히 연관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창조론을 성령론과 연계하는데는 실패하고 있다. 그 이유는 창 1:2에 대한 바르트의 독특한 이해에 기인한다. 바르트는 창 1:2을 무에 대한 종말론적인 패배를 선언하고 있는 약속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악을 무로서 이해하는 바르트의 설명에는 바르트 신학의 전반적인 기조라고 할 수 있는 은총의 승리가 확연하게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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