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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자가 들은 복음(열왕기상 19:9-18)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네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위하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요즈음에도 어느 가정에 가 보면 십자매를 키우는 집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 새장 속에 갇혀서 나오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푸드덕거리는 새, 또 체념한 듯 얌전하게 갇혀 있는 새를 보고 있노라면 불쌍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새장 문만 열어준다면 당장 뛰쳐나와 푸른 창공으로 힘껏 날갯짓하며 어디론가 날아가 자유롭게 살 것 같은데, 만일 문을 열고 십자매를 밖으로 놓아주면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얼마 살지도 못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십자매는 그 좁은 조롱 속에서 그대로 일생을 살아야 한다는 운명입니다. 밖으로 뛰쳐나갈 것처럼 날고 푸드덕거리지마는 사실상 좁은 그 세계가 자기 세계의 전부인 것입니다. 철인 하이데거는 인생을 가리켜 "하나의 던져진 생(thrown life)을 사는 존재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어떤 고독한 운명에 던져진 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하늘을 마음대로 날 것처럼 생각하지마는 사실은 어림도 없습니다. 주어진 테두리 안에서 맴돌다 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정말로 고독합니다. 누가 뭐라고 위로해 준다 해도 그 마음의 근본에 있어서는 누구나 고독을 느낍니다.
우리는 고독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육체적인 고독이 있습니다. 부모가 없는 고아, 가정이 없는 사람, 자식이 없는 부모, 형제가 없는 고독한 독자, 친구가 없는 사람, 그리고 사실상 참기 어려운 배고픔의 고독도 있습니다. 또한 병고에 시달리는 고독과 늙음을 의식하게 되면서 오는 고독은 더욱 심각합니다.
늙어 가면 점점 주위의 사람에게서 멀어집니다. 나에게 관심을 주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곁에서 떠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기에 늙는다는 사실과 가난과 병은 고독의 큰 원인이 됩니다. 더 나아가 무식함도 고독의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깨닫게 될 때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소외감, 이것은 가장 어렵고 참기 힘든 고독입니다.
어느 한계점을 느꼈을 때 무한히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던 자신감도 사라지고 이제는 여기서 끝나는구나 하고 생각함과 동시에 밀려오는 허전함으로 고독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사회학자들은 한 사람이 35세가 넘어서 또 다른 계획을 세운다면 그 계획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인생의 절정(peak)은 35세를 기준으로 잡습니다. 그 이후로는 이전에 하던 일이 석연치 않더라도 그대로 해야지 어떤 다른 일은 더 피곤만 할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한계점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외국의 은행 같은 데 가 보면 은행장과 같이 중요한 자리에는 기지가 넘치고 창의력이 풍부한 아주 젊은 사람이 앉아 있고, 수의 자리에는 이전에 은행장이었던 아주 인자한 신사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정신적 노동 직업에서 육체 노동직으로 전향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바로 인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내리받이에 섰다는 이것이 우리에게 무거운 고독으로 엄습합니다.
어린이는 소외감에서 운다고 합니다. 젖을 뗄 때에 배신감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반항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대화가 상실될 때 혹은 반응 없는 짝사랑의 고독, 많은 수고와 값비싼 희생을 지불하지만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을 때, 나는 넓은 마음으로 맞이하지만 상대편에 흡수가 되지 않을 때, 정신적으로 고아와 같이 방황하는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영혼의 고독입니다. 모름지기 이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고독이 아닌가 합니다. 인생관, 세계관 혹은 신앙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고독은 신앙의 반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언제나 변함없는 존속 상태가 아닙니다. 인천 앞 바다의 물이 창일 했다가도 어느덧 물이 다 밀려나가 뭍이 드러나듯이 우리의 신앙에도 끊임없는 변화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축복이 충만한 것 같은 그런 부푼 가슴을 가지고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사람들 속에서 소외감을 느낄 때 마치 하나님까지 나를 버리신 것만 같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아 우리의 믿음의 수은주가 푹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그 믿음의 수은주가 내려갈 때에 고독을 느낍니다.
참 믿음 안에는 고독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깊은 고독을 경험합니다. 성경에 보면 고독에 우는 한 청년을 봅니다. 그는 가인입니다. 죄를 짓고 자기의 동생을 죽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 그는 고독에 빠집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두렵습니다. 고독해지면 이렇게 됩니다. 그 가인이 가지고 있는 고독은 심각한 종교적인 고독입니다.
또 한 사람 사울 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다윗이 높아지는 것을 보고 그를 시기하여 그가 자기 사위인데도 불구하고 죽일 계획을 세웠고 살해할 시도도 했습니다. 도저히 가져서는 안될 살의를 품고, 그래서 그는 몹시 괴로워하는 것을 봅니다. 이 때문에 미치기까지 합니다. 양심의 가책, 이에 몰려서 양심의 심판을 받고 났을 때에 그는 처절하게 고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정반대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요한복음 16:32에 보면 '너희가 다 나를 버릴 때가 있을 것이다.
벌써 그때가 왔다. 그러나 나는 고독하지 않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나를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외면하고 버리고, 특별히 제자들마저 다 날 버린다 해도 하나님만은 나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만 내 편에 계실 수 있다면, 그렇게 믿을 수만 있다면 고독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고독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마저 나를 버리시는 것처럼 느낄 때 말입니다.
욥은 재물을 잃었고 가정을 잃었고 그리고 특별히 건강마저 잃었고 친구도 잃었습니다. 아주 깊은 고독에 사로잡힌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믿음으로 버텼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까지 말하게 됩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욥 13:24)
그는 육체적인, 경제적인, 또는 갖은 정서적인 모든 고독도 참을 수 있었지마는 하나님마저 얼굴을 돌리신다고 생각될 때는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하여 얼굴을 돌리십니까? 이렇게 부르짖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독의 가장 깊은 면이요, 또 근본적인 것입니다.
본문에는 엘리야의 깊은 고독도 있습니다. 그는 아합 왕과 이세벨에게 핍박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쫓기고 쫓겨서 산에서 3년이나 살았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얻어서 그 바알 신의 제사장들과 1대 1로 대결을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그는 갈멜산 제일 높은 곳에 제단 둘을 만들어 놓고 "바알 신이 참 신인지, 여호와가 참 신인지, 한 번 대결해 보자"고 했습니다. 제단을 벌여 논 다음에 기도를 했습니다.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수는 무려 850명. 그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했지마는 하늘로부터 어떠한 응답도 없었습니다. 그 때 엘리야는 단 혼자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지마는 하늘로부터 응답이 있어서 그 제물을 다 불태웠습니다.
그는 이겼습니다. 아주 통쾌한 승리였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제사장 850명을 끌어다가 전부 기손 강에서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대단한 승리입니다. 이만 했으면 통쾌감에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독이 옵니다. 이세벨이 복수를 하겠답니다. 800명이 넘은 선지자를 죽일 수 있었던 그가 왜 다시 용기를 내지 못하고 한 사람에게 쫓기어 비겁하게 산에 올라가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한탄을 합니다. 고독을 씹으며 웁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왕기상 19:4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더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생명을 걸고 고독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죽여 주시옵소서. 넉넉합니다. 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고독에 우는 사람을 한 번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로하시면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물을 때에 그는 대답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합니다. 나는 열심이 보통이 아닙니다. 특심하지마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습니다. 주의 제단을 헐었습니다.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고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나 혼자입니다. 그런고로 내 생명을 취해주세요. 나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고독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웁니다. 이 고독한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복음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는 너무 피곤했습니다. 승리했다고 하지마는 그 나름대로 말할 수 없는 피곤에 지쳐 있습니다. 이제 낙심합니다. 또 허무하기도 합니다. 800명을 죽였지마는 아무 것도 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죽기를 원합니다. 그의 고독은 수를 생각한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 혼자 남았습니다." 이 수를 생각하는 동안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자기 능력의 한계를 생각했습니다. 다 해보았습니다. 최대한도로 최선을 다해 보았지마는 도리가 없습니다.
그는 한계를 느끼면서 고독해 합니다. 그런가 하면 위기에 이른 것같습니다. 이젠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이젠 정말 시간적으로도 한계점에 온 것을 느낍니다. 그저 죽는 길 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이 있다." 이건 엄청난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나 혼자 남았습니다. 홀로 나만 남았습니다. 나 혼자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아직 7,000명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의롭기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독의 원인이 됩니다. 독선은 고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 진실한 줄로 압니다. 자기만이 의를 위해 사는 줄로 생각하고 자기만이 참되게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것의 고독의 이유입니다. 독선입니다. 교만입니다. 교만은 고독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는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은 너만이 아니다. 무슨 소리냐? 7천이 있다.
또한 그는 깊은 곳을 보지 못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가 보고 있는 것. 눈으로 보고 있는 것만 생각했지 보이지 않는 세계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 보지 못한 곳에 동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아무리 고통과 어려운 일을 당해도 동지만 있다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피난을 가보신 분이 계시겠지만 지금 피난 가서 살던 것처럼 깡통을 차고 살라고 하면 못 살 것입니다. 그러나 다같이 깡통을 차야 했을 땐 그래도 거기에 낭만도 있고 삶의 작은 재미도 있었습니다.
고독이라는 것도 다같이 당한다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나 혼자 당하는 것 같고 나만 진실한 것 같고 나만 억울한 희생을 하는 것 같을 때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 네가 보지 못한 사람, 네가 만나지 못한 사람 7천이 있다. 네가 알지 못하는 사람, 숨은 진리의 사람 7천이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이 동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진리는 고독하다고 하는 것은 수를 말하는 것이요, 외형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뒤에서 보살피시고, 또한 보이지 않는 많은 친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고독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절대로 외로워하지 맙시다. 겉으로는 이 말 저 말할지 몰라도 그 깊은 곳에서는 진리와 의를 동정할 것입니다.
순교자의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순교자가 보좌에 앉아서 죽이는 사람이 순교자를 불쌍히 여기는 말을 할 때에 죽어 가는 순교자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당신도 보좌가 아니면 나와 같이 순교하기를 바랄 것이오" 그런 것입니다. 적어도 그 깊은 곳에서는 누구나 의를 동정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희생자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독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후계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 남았습니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소리냐? 저기에 지금 소 열두 겨리에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엘리사가 있지 않는냐? 저 사람이 농사꾼 같아도 네 후계자가 될 것이다" 하십니다.
그 다음 본문을 계속해서 읽으면 그 말이 나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만났을 때 엘리사는 소를 몰면서 밭을 갈다가 이것을 그만두고 그 한 마리를 잡아 그 고기로 온 동리 사람들을 다 삶아 먹이고 그리고 그 멍에와 보습 쟁기를 다 불태워버리고 엘리야를 따라갑니다.
외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후계자가 있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희생을 당하고 마는 것 같아도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그 의인의 의를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주실 것입니다.
고독할 것 없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에는 고독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에는 무한한 가능성만이 있는 것입니다.
친구와 동역자가 있습니다.
칼 바르트가 근대에 있어서 세계적인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바르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칼 바르트에는 두 가지 중요한 배경이 있습니다. 오늘날 바르트가 되기까지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사펜벨이라고 하는 곳에서 10년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조용한 시골 공장 지대에서 목회를 했는데, 여기엔 사회적으로 복잡한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데모와 파업이 발생함으로 이런 문제들을 놓고 10년 동안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바르트가 되게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에게는 투베센이라고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루도 빼지 않고 전화를 걸고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모여서 이 복잡한 문제를 의논하며 같이 기도했습니다. 이런 귀한 친구가 있었기에 그는 고독하지 않았고 그 대화 속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하고 마침내 위대한 바르트의 신학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이 한사람의 친구가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엘리사라고 하는 귀한 후계자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깊은 섭리 속에 후계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독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그 깊은 중심을, 그 진실을 알아줄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으나 이 후계자가 될 친구가 있음을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할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고독에 우는 엘리야에게 일일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사람아 할 일이 많다. 너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가 되게 하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할 일이 많습니다.
사명을 아는 자, 신앙 가운데 적극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고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 속에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또한 세상은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어떤 미국 청년은 한국 사람을 몹시 부러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은 얼마든지 할 일이 산재해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경제계에서나 정치계에서 사회계에서나 또는 종교계에서 그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에게는 할 일이 무진장으로 있습니다. 일할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즉 생각만 하는 사람은 고독합니다. 뛰는 사람에게 고독이란 없습니다. 생각을 하고 뛰는 것이 아니라 뛰면서 생각하는 것이 옳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달려나갑니다. 그 때에 우리 앞에 고독은 없습니다.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의심이 많습니다. 즉시 나가서 전도하고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의심의 그림자가 덮일 겨를이 없습니다. 밀려오는 의심을 해결하는 길은 사색이 아닙니다.
논리도 아닙니다. 뛰는 것입니다. 행동(acting)입니다. 행동의 힘(acting power)이 바로 그 모든 근심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정신질환 조사통계 기록에 보면 남성보다는 여성이 우세합니다. 여성 중에도 독신생활자에게 가장 높은 수치가 나타납니다. 또한 기혼 여성 중에는 어린 아이 하나 가진 이에게서 발생률이 높고, 어린아이가 다섯 이상이 딸린 주부에게는 정신병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기록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가사 일이 분주한 주부는 정신병에 걸릴 시간도 없습니다. 도시락 싸느라고 바쁘고, 남편의 출근 준비하면서 동시에 아이들 등교 준비해주고, 이렇게 분주하게 뛰어다니다 보니 한가하게 앉아서 한숨이나 쉬면서 인생의 의미를 물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물은 썩는 법이 없습니다. 고인 물만이 흐려지고 부패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생을 살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야 하겠습니다. 할 수 있는 길을 찾아 그대로 내달리십시오. 불가능한 것에 매달리지 말고 가능한 길로 뜁시다.
환영하지 않는 사람에게 불평하지 말고 기꺼이 환영하는 사람에게로 뛰시오.
전도의 문이 막힌 곳으로 가려고만 애쓰지 말고 열린 곳으로 갑시다.
두드릴 것도 없습니다. 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여 열심히 뛰는 것입니다. 나에게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부름을 찾아서 그 곳으로 뛰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기회만 있으면 얽어매려는 고독의 사슬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독한 자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고독의 반대 개념은 사랑입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졌든지, 어떤 이유에서 죄를 지었든지, 혹은 근심 중에 있을 때 우리는 고독하게 됩니다. 쓸데없는 욕망과 썩어지는 육체와 늙어 가는 인생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고독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사랑합시다. 앞에 죽음이 옵니까? 죽음까지도 사랑합시다. 사랑하는 자는 고독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다. 나만 이라고 하는 교만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죄입니다. 나만 이라고 하는 고독 가운데 절망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는 죄가 됩니다.
사랑 앞에 고독이 없고 사랑하는 자에게도 고독은 없습니다. 우리는 고독에 울어야 하는 모든 여건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세계에서 소망 중에 무한한 가능성을 바라며 담대히 달려나가는 활동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위로부터 부르는 하나님의 부름에 구체적으로 응답하면서 나를 부르는 현실 속에서 전 생을 기울여 봅시다.
"할 일이 너를 기다리는데 왜 여기서 우느냐"고 엘리야에게 물으시던 주님의 음성이 구태여 엘리야를 향해서만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우리가 씹고 있는 고독 속에서도 이 고요한 중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들어야 하겠습니다.
기도:전능하신 하나님, 이 고독한 세대 속에 살고 있는 저희에게 위로의 복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고독하다는 것은 우리의 불신으로 말미암기 때문임을 아오니, 우리에게 굳센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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