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K자료 1,910편

그리스도인의 자랑(고린도후서 1장 12절~14절)

by 【고동엽】 2023. 2. 16.
목차로 돌아가기

 

그리스도인의 자랑(고린도후서 1장 12절~14절)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 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 자랑이 되는 것이라.

 

현대를 가리켜서 광고(廣告)의 시대라고도 부릅니다. 혹은 피아르(PR)의 시대라고도 하고 정보(情報)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그만큼 광고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광고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 많은 광고들의 내용이란 저마다 제것이 제일이라는 자랑 일색입니다. 광고대로라면 세상에 겁날 것이 없고 안 되는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가령 약 광고들을 볼라치면 못 고칠 병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자랑과 과대 선전을 우리는 예사로 듣고 삽니다. 하루도 광고의제 자랑을 듣지 않고 사는 날이 없지 않은가 싶습니다. 광고의 선전이 정직하여 믿을 만하다면야 오죽이나 다행이겠습니까마는 그렇지 못한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실망과 허탈을 안겨 주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은 더더욱 피곤한 것입니다.

실망한다는 것은 사람을 여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대한 실망도 실망이지만 우리 사람에게는 자신에 대한 실망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자랑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이 자기 자랑이 부끄러움으로 바뀔 때에 우리는 엄청난 실망을 느낍니다. 자기 영광이 수치로 바뀌고 말 때에 우리는 나락(奈落)에 떨어지는 듯한 실망을 맛봅니다. 자랑이란 이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자기 자랑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물리적인 고통, 생리적인 고통은 그리 무서운고통이 되지 못합니다. 실로 무서운 고통은 정신적인 고통이요 부끄러움이라고 하는 고통입니다. 영광스러운 고통이라면 그런고통은 우리가 기꺼이 감내할 수 있습니다. 더 큰 영광으로, 더큰 자랑으로 귀결되는 끝이 있다면 그리로 향하는 고통이란 어떤 것이라도 기꺼이 참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6절에보면, 사도 야고보는 사람의 허탄한 자랑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사실과 다르게 자기를 과장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장차는 이러 저렇게 될 것이다, 일년 후에는 이러 저렇게 하겠다……이런 식으로 장담하는 것은 다 허탈한 자랑입니다. 소유, 지식, 경험, 능력이 모두 허탈한 것입니다.

제가 만난 분 가운데 꽤 지성을 갖춘 미모의 여성이 한 분 있습니다. 한번은 이분이 저를 만나 자신의 슬픈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용모가 빼어난 데다 머리도 좋고 공부도 많이 한 여성입니다. 그러나 이분에게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워낙 몸이 약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늘 소원하는 것이 건강이었습니다. 결혼 상대를 고를 때에도 다른 것은 바라지 않았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남편인즉 평소 병원 같은 데는 가본 일이 없다는 건강한 남자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남편은 과연 건강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고 몸집이 발달하여 건강미 넘치는 근육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루는 테니스를 하고 돌아와서는 가슴이 아프다고 하더니 그 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건강하던 사람이 이처럼 허무하게 떠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건강, 그리 자랑할 것 못됩니다. 쭈그렁 밤송이 삼년 간다고, 오히려 겉보기 비실비실한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을 봅니다. 밤낮 병원 문턱을 드나들면서 휘청휘청하는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뜻밖에도 오래 살더군요.

생각해 보십시오. 어찌 건강하다고 자랑할 일이겠습니까? 젊음도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자칫하면 객기로 허송세월 합니다. 경험을 자랑하십니까? 잘못하면 고집불통의 인간이 됩니다. 미래의 꿈을 자랑하십니까? 허황 되고 거짓말 많은 사람이 됩니다. 현재를 자랑하십니까? 그것은 스쳐 지나가는 영화의 한 장면이나 차창 밖 풍경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닙니다. 허무하고 무상합니다.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요새는 누가 출세했다고 해도 선뜻 축하 인사를 보내기가 두렵습니다. 얼마 전 우리 교인 한 분이 대학총장 되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를 나눌 때 저는 그분께 농담을 했습니다. "며칠이나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대학총장이라는 것이 얼마나 명예로운 직분입니까? 그러나 명예로운 만큼 큰 부끄러움이 될 위험도 있습니다. 추풍낙엽(秋風落葉)이라는 말은 아마도 오늘의 이 시대에 아주 잘 어울리는 말일 것입니다. 도대체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변치 않는 자랑거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빌립보서 3장 7절 이하를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그가 전에 자랑으로 여겼던 전통, 족보, 명예, 학벌, 신분 따위를 모두 분토(糞土)와 같이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며 살아가노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자랑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자랑,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착각하는 그런 자랑 때문에 세상에 화(禍)가 있고 나 자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자세히 보면 자랑의 성격이 서너 가지로 나와있습니다. 첫째는 나만이 아는 비밀한 자랑입니다. 이것이 내 양심이 증거 하는, 나만이 아는 자랑, 은근한 자랑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양심, 성령의 조명을 받은, 깨끗한 양심의 성원을 받는 그러한 자랑입니다. 아시다시피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를 칭찬해도 내 양심이 나더러 '죽일 놈!' 하고 찌르면 나는 죽일 놈입니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다리 뻗고 단잠을 청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나쁘다고 해도 내 양심만은 나를 성원해 주며 네가 옳았다고 말해 준다면 참으로 나는 떳떳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비밀한 자랑입니다. 이 비밀한 자랑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나도 드러내기를 좋아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모두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 말입니다.

1964년에 미국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뉴욕 은행장이 장로님이었는데, 제가 그 댁에 초대를 받아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은행장 부인과 '데이트'를 하게되었지 뭡니까? 공교롭게도 두 내외가 같은 시간에 따로따로 중요한 모임에 초청을 받았으므로 부인을 에스코트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저는 남편 대리였지요. 자, 이렇게 해서은행장 부인과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교 파티란 먹는 것보다 이 얘기 저 얘기하면서 분위기를 돋우고 서로 친해지자는 모임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 부인과 저는 아무래도 조금은 서먹한 사이이고 대화의 소재도 넉넉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인과 둘이 마주앉게 되었을 때에 저는 무슨 말을 하기는 해야겠고 해서 겨우 그 부인의 목걸이를 화제로 삼았습니다. "그 목에 거신 진주 목걸이가 참 아름답습니다. 아주 잘 어울립니다." 칭찬을 하고 나서 제가 또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모조품인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부인은 빙긋이 웃으며 어떻게 아느냐고 약간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제가 진주 목걸이를 목에 걸어보지는 못했지만 백화점 윈도우 쇼핑을 많이 해서 진짜 가짜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고, 그것은 분명히 가짜라고 대답했습니다. 은행장 부인은 똑바로 보았다고 크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얘기가, 실은 남편이 생일 선물로 사다 준 3,500불 짜리 진주 목걸이가 있지만 아까워서 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딱 한번 목에 걸고 거울을 봤지요. 그리고는 벗어서 고이 간직해놓고 외출 때에는 그것과 똑같이 만든 모조품을 걸고 나온답니다." 여러분, 이 부인한테 진품이 없었다면 "그거 모조품이죠?" 하는 제 말이 얼마나 모욕적이고 마음 아팠겠습니까? 은행장 부인쯤 되니까 제가 그런 농담도 기탄 없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한테 한다면 뺨맞을 농담이지요.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비밀한 자랑이 있는 사람은 아무 일에도 거침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눈뜬 사람한테 장님이라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합니까? 눈감은 사람보고 소경이라고 할 때 그것이 실례입니다. 미친 사람보고 미쳤다고 하면 펄펄 뜁니다. 유식한 사람보고 아무리 무식하다 욕한들 그가 어디 얼굴 한번 붉히겠습니까? 정말 무식한 사람더러 "당신 참 무식하군" 했다가는 평생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식하냐 아니냐, 부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기본적인 자랑이 속에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속이 텅텅 빈 사람들이 모여 앉으니 문제입니다. 속이 꽉 차 있으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우리 속담에도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짐을 가득 실은 수레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적으로 충실하고 내적으로 자랑이 있는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비교 의식에 취해있고 너무나도 승부욕에 가득차 있어서 자기 존재가 다 없어지는 줄도 모릅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은 무엇으로 해야 합니까? 감추어진 보화와 같이 은근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여담입니다만, 동양 사람들과 서양 사람들을 비교해 보면 매우 대조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양인들은 표현이 은근한 반면, 서양인들은 노출이 심합니다. 공항에 나가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이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서양 사람들의 상봉은 아주 가관입니다. 껴안고 소리지르고 정신없이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십시오. 아무리 오랜 세월만에 만났어도 멀리서보고 빙긋이 웃거나 눈물을 훔쳐내면 그만입니다. 평생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해도 생명을 다해 깊이깊이 사랑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이 참사랑 아니겠습니까? 그저 남이 알아주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얄팍한 마음으로 사니 갑갑한 것입니다. 알아주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내 양심이 성원하고 나만이 아는 비밀한 자랑---말로도 행동으로도 표현하지 않으나 고요한 호수와 같은, 감추어진 보화와 같은 그런 자랑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건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첫째는 비밀한 자랑이요, 둘째는 그리스도만이 아시는 자랑입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자랑입니다. 내가 선행을 할 때에 그리스도만이 아십니다. 기도하는 것도, 내 경건의 신비도, 이 진실도 그리스도만이 아십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해도 그리스도께서 알고 인정하시는 나의 비밀, 진실, 사랑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신비로운 행복에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두 사람씩 복음을 전하고 들어와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내가 명했더니 귀신이 도망갔습니다." "내가 손을 얹고 기도했더니 병자가 나았습니다."저마다 자랑할 때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우리들의 말로 풀어 보겠습니다. "병자가 나았다고? 언젠가는 그 사람도 죽을 날이 오겠지. 귀신이 나갔다고? 글쎄, 그 사람이 언제까지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는지 걱정이다." 별것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능력을 행했다고 해서 내일도 같은 능력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할 일도 있으리라고 경계하십니다. 성경을 봅시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 : 20)." 주님의 사업에서 작으나마 나도 한몫을 감당했다는 것, 주님이 이를 아시고 내 이름을 기록하셨다는 것--이 사실로 인하여 기뻐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기쁨의 근본, 자랑의 근본은 그리스도와 나 사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자랑은 미래 지향적이요 종말론적인 사랑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자랑이 과거에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과거의 자랑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문제는 미래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랑은 미래적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로 말하더라도 과거나 현재보다 그 후손이 훌륭해야 합니다. 그래야 훌륭한 가문이 아니겠습니까? 언젠가 미국에서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일류 고등학교 일류 대학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한 사람은 예일, 한 사람은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가 된 수재들이었답니다. 두 사람이 아주 어울리는 짝으로 만나 모든 이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신혼여행을 떠나면서 두 사람은 참으로 어이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당신도 천재이고 나도 천재 소리를 많이 들었소. 그러니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식은 아주 훌륭한 작품이 될 것이오." 이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뜻밖에도 저능아였습니다. 자식만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들에게도 불가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그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는 끊임없는 긴장과 불안, 초조, 불화의 벽이 가로놓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이 아이의 저능이 누구 때문이냐고, 어느 쪽 가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냐고 서로 원망하며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교만한 부부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 남들이 알아주는 것을 자랑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하고 허무합니까?

생각난 김에 한 가지 예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옛날, 로버트 케네디의 인기가 한창 높았을 때입니다. 그의 기사가 라이프지에 크게 났습니다. 그때 그가 건강한 모습을 자랑하기 위해 스키장 눈 위에 웃 통을 벗고 누운 것을 사진 찍었습니다. 그리고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자녀가 몇 명입니까?" "열 하나입니다." "어떻게 그다지도 많은 아이들을 가지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로버트 케네디의 대답이 라이프 지에 기사로 실렸는데, 저는 그것을 보고 섬뜩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나같이 우수한 종자는 후손을 많이 퍼뜨려야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으로서 누가 감히 이러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따위 자랑을 하나님께서는 허락지 않으십니다. 로버트 케네디의 최후를 보십시오. 그러한 기사가 실린 지 얼마 후 그는 유언 한마디 못 남기고 비명횡사(非命橫死)를 당했습니다. 여러분, 참자랑은 먼 훗날에나 합시다. 좀더 미래적인 자랑---어쩌면 내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누군가가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자랑, 특별히 그리스도 앞에 가서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자랑을 가집시다.

자랑은 서로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자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자기 자랑을 간직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만을 자랑하고 남의 자랑과는 공감대를 이루지 못하며남의 자랑을 함께 느낄 수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남의 자녀라도 잘됐다는 말을 들으면 내 일처럼 기뻐하지 못하고, 돌아와서는 자기 아이를 나무라는 부모가 있습니다. 너는 왜 그 애만 못하냐는 것입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자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남편이 땅을 사도 배아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자식 잘 돼 가는 것까지 질투하는 부모가 있으니, 이것 참 어떻게 된 노릇입니까? 다른 사람 잘되는 것보고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 남을 자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자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하더라도 나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 자랑이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을 내 자랑으로 삼는 사람, 이런 사람한테 참 자랑이 있습니다.

구제로서 으뜸가는 구제는 명예의 구제입니다. 자랑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자랑을 주는, 자랑의 원인을 제공하는 바로 거기에 진정한 자랑이 있고 가장 큰 봉사가 있습니다. 자랑은 돈을 주고 살수도 없고 팔 수도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제 몸처럼 사랑하며 값없이 자랑할 때에 참 자랑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가장 큰 구제와 봉사는 명예를 주는 것, 자랑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이야기 속에는 더욱 엄청난 뜻이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편지하고 있는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을 비난하기로 유명한 교회입니다. 바울의 사도권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사생활까지 비난합니다. 없는 말 있는 말, 갖가지 빈정거림으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편지로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엄청난 믿음입니다.

엄청난 확신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잘 몰라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나를 비난한다마는 주님 앞에 갈 때에는 나 때문에 예수님 믿고 나 때문에 구원받은 것에 대하여 나로 인하여 자랑하게 될 것이고, 나는 또 너희를 인하여 자랑하게 될 것이다---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입니까? 이런 마음으로 봉사하고 섬긴다면 자랑 없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학자 매튜 헨리는 말했습니다. "교회는 목자를, 목자는 교회를 자랑하는 그 자랑이 가장 큰 기쁨이다."

제가 세계 곳곳을 다니며 많은 목사님들한테서 한결같이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망교회 교인들이 온 세계 곳곳에 가있어서 어디 가든지 소망교회 교인을 한두 분씩은 꼭꼭 만나게된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들 말씀하시기를, 소망교회 교인들은 일도 잘하지만 자기 교회 자랑하는 것이 전공이라고 합니다. 우리교회는 어떻고, 우리 목사님은 어떻고 어떻고 하면서 어찌나 열심히 자랑을 하는지 좀 지나칠 정도라고 합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지나친 것이 아니라 최소한도가 그렇습니다" 하고 응수합니다. 어떻습니까? 소망교회 교인들이 소망교회를 자랑하는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교인들은 목사를 자랑하고, 목사는 교인들을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바로 여기에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인천 제일교회에 부목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날 총회 사무실에 앉아 저는 한참동안 우리 원목사님이 참 좋으신 분이라고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제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분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우시지 뭡니까? 저는 영문을 몰라 왜우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 대답이, 방금 이기영 목사님이 부목인 곽선희 목사 자랑을 열심히 하고 나가셨는데, 지금은 당신이 들어와 이기영 목사님 자랑을 하니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고, 너무 감격스러워서 운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제발 제발 이렇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그리고 자식은 부모를, 부모는 자식을 맘껏 자랑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리해서 서로 자랑하는 그 자랑, 이것이 그리스도 앞에까지 이어질 때에 여기에 진정한 영광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자랑을 봅시다. 먼저, 그는 거룩함을 자랑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속되다는 것의 반대말입니다. 성결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묻지 않은 마음, 타협하지 않는 의---이것을 자랑합니다. 가난하지만 거짓이 없고, 멸시를 받으나 비굴해지지 않으며, 고난을 당해도 의와 함께 고난 당하는 것, 이것이 사도 바울의 자랑입니다. 요새 젊은이들 중에 진심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젊은이가 얼마나 됩니까? 가슴아픈 이야기입니다마는 아무리 부모가을 많이 벌어다 주어도 돈버는 방법이 잘못 되어서 부끄럽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부모 구실 했다고 자랑하지만 '나는 그 부모님의 아들 된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거룩함이란 최고의 명예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거룩함, 깨끗함, 성결함을 자랑합니다.

바울의 두 번째 자랑은 진실함입니다. 여기에는 햇빛에 비추어 시험해 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동기의 순수함(purity of motive)을 말합니다. 모든 일에 동기가 깨끗한 것---이것은 시간과 함께 결정됩니다. 당장 순수한 것같이 보여도 진실은 두고보아야 합니다. 어떤 직장에 있었느냐, 이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오래 있었느냐가 문제입니다. 미국에는 '헌팅턴 라이브러리'라고하는 아주 크고 유명한 공원이 있습니다. 저도 그곳에서 가끔 책을 읽곤 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 공원의 수위 한 분이 제 곁에 앉아 말동무가 되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늘 자신의 직업에 긍지를 가지고, 그 일에 오래 종사한 것을 자랑하곤 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일한 지 40년이 됐다'고, '이 공원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뭐든지 물어 보라'고---얼마나 아름다운 자랑입니까? 출세가 문제가 아닙니다. 의로운 외길 인생을 사는 것, 변함없고 진실하고, 충성되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얼마나 진실하고 충성되게 살았느냐---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산에서 며칠 동안 어떻게 금식기도를 했다는 것보다 10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했다는 이것이 더 크고 귀한 일입니다. 하루같이 10년, 하루같이 20년,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두 번이야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진실함이란 꾸준한 것입니다.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랑입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은혜로 행함을 자랑합니다.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고 은혜로 행했다는 말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의 말씀처럼 오직 십자가만 알기로 했습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는 그 마음을 자랑삼고 있습니다. 또한 은혜로 행했다는 것은 신령한 기쁨을 의미합니다. 율법적 의를 위하여 하거나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깊은 의도는 조금도 보상을 바라지 않는 마음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되돌려 받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일이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은 전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인간으로부터는 어떠한 칭찬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그런 마음입니다. 오직 은혜로--오직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신 바 은혜에 보답하며 사는 것이 그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자랑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랑을 다시 한번 점검해 봅시다. 세월 따라 퇴색해 가는 것, 녹슬어 가는 것을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때문에 슬프지 않습니까? 세대가 변함에 따라 자랑이 오히려 부끄러움으로 변해 버린 것은 없습니까? 불변하는 자랑---이것은 비밀한 것입니다.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자랑을 다시 새롭게 가다듬읍시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아니 그때 가서 더욱 더 크게 자랑할 수 있는 그러한 자랑을 마음에 품고 언제나 승리하는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