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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문지기의 행복(시편 84:4-12)

by 【고동엽】 2023.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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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기의 행복(시편 84:4-12)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나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고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월남 난민들이 고향을 떠나서 방황하는 모습을 우리가 마음 아프게 본 일이 있지 않습니까? 고향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더욱이 마음의 고향이 없는 사람, 이것은 더할 나위 없이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 항상 우리의 마음의 고향을 두고 그것을 중심해서 사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불쌍한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많은 일에서 배신을 당했습니다. 부모로부터 애인으로부터 혹은 사회로부터 계속 속기만 하고 이젠 믿음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제 그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게 됩니다.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 나 자신조차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믿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병입니다. 아주 큰 병입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끝난 것입니다. 어쨌든 믿음이란 에베소서 2:8 말씀처럼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 중에 아주 소중한 선물이 믿음입니다.

셋째는 봉사를 모르는 사람, 이것 역시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사의 대상이 없는 사람, 그래서 할 일이 없고,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 기울일 수 있는 그러한 일거리나 그러한 일의 대상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자기만 위할 줄 알고, 남을 위할 줄 모르는 사람, 이 사람은 인생을 반도 못 사는 사람입니다. 사실 기쁨이란 남에게 봉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를 위해서 내 자신을 바치기도 하고 수고도 하고 희생도 하는 바로 그 속에서 인간은 인간 최고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인데, 이 소중한 행복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봉사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내 수고의 대상이 분명하고 그를 위해서 자기를 바칠 정열이 있고, 그 수고 자체가 희열이요 그리고 영광으로 감수될 수 있을 때 이것을 행복의 극치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길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간에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을 다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안다.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알아나가는 그 길이 가장 행복하고 소중하고 복된 것이란 말입니다.

시편 146:5에 보면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이고, 허물 사함을 받은 사람, 죄로 가리워졌던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연결하고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 했습니다.

또한 시편 32:1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 그의 말씀을 꿀보다 꿀송이보다 더 달게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속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이 제일 행복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말을 줄여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본의 아니게 때로는 많은 고통을 당합니다. 마음대로 되는 일도 있지만 안 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 않았던 어려운 일들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상실만은 아닙니다. 이러한 일로 인해서 우리는 더 소중한 것을 얻게 됩니다.

하나를 잃어버리면서 더 큰 것을 얻습니다. 고난은 인간의 소원을 단순하게 합니다. 그리고 가치관을 바꾸어 줍니다. 건강할 때에는 인간의 이런 것이 소중했습니다. 병들고 보니 그것은 소중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혀 다른 것이 소중합니다. 사업에 성공할 때는 소중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업에 실패하고 보니 이것들이 다 의미 없는 일이요,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그 무엇이 귀한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관과 가치관을 바꾸어 주는 것, 이것이 고난입니다. 고난은 때로 종말적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행복이 무엇인가 이것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해 줍니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선물입니다.

다윗은 왕위에 있었습니다. 일국의 왕입니다. 그러나 그 왕위는 그에게는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왕이기에 전쟁에 나가야 하고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많은 산적한 업무로 인해서 피곤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가 지금 당한 이 어려움 속에서는 그 누구도 그를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가정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범죄하면서까지 사랑했던 그 사랑하는 밧세바도 이 결정적 순간에 다윗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는 피곤했습니다. 많은 자녀들은 괴로운 존재였습니다. 신하들은 배신했고 아들 중에 하나가 자기 아버지를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차마 그를 대항해서 싸울 수 없어서 왕위를 내놓고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이리저리 산기슭으로 방황하게 됩니다. 그의 마음은 착잡하고 아팠습니다. 이제 그는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아무 미련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리운 것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하나님의 성전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것만이 그리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지금 우리 교회처럼 이렇게 지어 놓은 건물이 아닙니다. 다윗이 그리워하던 하나님의 성전은 성막입니다. 천막입니다.

수달피 가죽으로 만들어 놓은 몇백 년 묵은 낡아빠진 천막입니다. 먼지가 자욱합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라고 하는 궤짝이 하나 놓여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나가 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본문 시편 84편은 그러한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을 실은 시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어찌 사랑스러운지요." 그는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장막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그리워하는 행복, 하나님의 성정을 향해서 가는 발걸음의 행복, "시온의 대로가 그 마음에 있는 자는 복이 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전에 거하는 행복, 하나님의 전을 봉사하는 행복, 그는 행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제비와 참새를 부러워했습니다. 제비와 참새는 마음대로 날아서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둥지를 틀고 사는데 나는 왜 하나님의 전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까? 이래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목회 하면서 교인 중 참 딱한 사람을 만나본 일이 있습니다. 이분은 왕년에 경찰서장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고혈압으로 인해서 쓰러졌는데 누워서 쉬지를 못합니다. 물론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앉아서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예수를 믿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몇 번 만나서 전도하고 또 회개하고 참회의 고백도 받았습니다. 신앙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분이 소원이 많았습니다. 내가 빨리 나아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겠는데 하며 많은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년이 넘어가고 3년으로 가게 되자 마지막에는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 "목사님, 나 한번만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게 해 주세요. 한 번만 예배드리고, 교회 나가 보고 죽으면 한이 없겠습니다." 이것이 소원입니다.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 싶었지만 의사의 말에 의하면 차를 타고 가다가 객사할까봐 이걸 못했습니다. 만일 그랬다가는 그 가족들에게 원한이 될 것 같아서 그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고, 그는 3년만에 세상을 떠나 교회 묘지에 장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에는 ", 한 번만 교회 나가보고 죽으면 한이 없겠습니다." 그러한 소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소원하는 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한 번 더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그것만이 소원이요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고향은 교회입니다. 여기서 유아 세례를 받고, 여기서 결혼식을 하고, 여기서 장례식을 합니다. 보십시오. 12세 된 소년 예수께서는 부모가 "너 왜 여기 있었냐"고 물었을 때에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 하는 것이 대답입니다. 내 아버지 집, 내 아버지 집에 내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제가 1963년 프린스턴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 오리엔테이션 맨 첫 시간에 큰 강당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예배 때에 총장님이 설교하신 말씀 가운데 한 말씀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가 보시면 아십니다만 저기 큰 예배당에 촛불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 있는 오랜 파이프 오르간은 국보급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잘 지은 큰 단층 돌집 예배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 도서관이 있습니다.

총장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예배당과 도서관이 가지런히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라. 교회는 우리 마음의 고향입니다. 도서관은 우리 지성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이 있었습니다. "교회당보다 도서관을 높을 수가 없어서 돈을 많이 들여가면서 한 층을 지하로 넣고 한 층을 지상으로 해서 예배당보다 낮게 도서관을 지었습니다. 돈을 많이 들여가면서라도 도서관을 채플보다 낮춰 지었다는 그 의미를 아시오. 이것이 프린스턴의 정신이오."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서관과 채플은 가지런히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도서관보다 교회가 위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성인인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평생 교회에서 삽니다. 저는 생전에 결혼 주례를 많이 한편입니다만 참 기분이 좋지 않은 결혼 주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에는 공동 묘지에 장례식을 위해 만들어 놓은 조그만 채플이 있습니다. 예배당들이 있는데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은 아니고 장례식만 위해서 만들어 놓은 예배당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결혼 주례를 많이 합니다. 굳이 거기서 결혼을 하겠다니 어떻게 합니까. 거기 가서 장례도 주례를 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서 장례 주례를 하고 며칠 있다가 결혼 주례를 합니다. "왜 여기서 결혼을 하느냐?" "여기서 장례식까지 하려고요. 미리 예행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옳은 얘기입니다.

장례식과 결혼식이 따로 될 것 없지요. 다같이 아버지 집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평생 교회 안에서 삽니다. 세상에서 부모를 잘 만났다는 것은 큰복입니다. 잘못 만나면 고생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공부하는 사람은 선생님을 잘 만나는 것이 또 보통 복이 아닙니다. 잘못 만나면 참 불행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는 교회를 잘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이것 또한 잘못 만나면 내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교회를 잘 만나는 것, 이것도 큰 축복입니다.

내 아버지 집, 우리는 여기에서 삽니다. 그런고로 피난길이나 여행길에서 보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믿는 사람은 어디 가든지 교회만 만나면 반갑습니다. 누가 다니는 교회인지 모르지만 조그만 십자가만 보이면 ", 저기 교회가 있구나." 어떻게 반가운지 모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복덕방 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근방 집 값이 비싼 이유가 우리 교회 때문이랍니다. 그건 잘된 얘기입니다. 집 사 가지고 오는 분에겐 좀 안됐지만 만일 반대로 교회 근방 집 값이 내려간다면 그 교회는 큰일났습니다.

, 우리가 마음의 고향을 여기에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사할 때에도 될 수 있는 대로 교회 가까이, 단 몇 미터만이라도 좋으니까 가까이 가까이 오십시오. 자꾸 멀리 갈 생각 마십시오. 좋은 집 나쁜 집이 따로 없습니다. 교회 가까이가 좋은 집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집 값이 얼마나 손해냐 이로우냐 그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간절한 소원은 교회 가까이 교회를 중심해서 삽니다.

여러분, 자녀 교육할 때 학군이 좋고, 좋은 학교 근방으로 이사가는 것도 역시 당연한 얘기가 아닙니까? 자녀 교육을 제대로 하자면 이사 다녀야지요.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교회, 주의 장막, 내 아버지 집에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내 마음의 고향입니다. 주의 집에 가는 자, 주의 집에 사는 자, 주의 집을 봉사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의 집에서 하루를 사는 것이 다른 곳에서 천 날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행복합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47:9에 보면 야곱은 바로 왕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나이 130입니다.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오래 살아 봐야 욕만 많습니다." 문제는 내 아버지 집에 사는 하루가 밖에서 천 날 사는 것보다 아름답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하루를 살 것입니다. 악인의 장막 안에서 평안히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 밖에서 문지기가 되는 그것이 더 좋다는 말입니다. 악인의 장막 같은 세상이요, 불의한 세상이요, 불안한 세상에 살기보다 내 아버지 집에 살고자 하는 그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저와 함께 피난길을 나오던 어느 장로님이 있습니다. 이 분이 성미가 좀 급합니다. 가다가 자꾸 길이 막히고 어려워지니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왜 돌아가겠느냐 그러니까 "나가 봐야 뭘 하겠나? 나는 교회에 돌아가서 한 번 더 기도하고 죽으려네" 그러십니다. "난 교회에 돌아가서 한 번 더 봉사하고 기도하고 그냥 죽으려네. 피난은 무슨 피난인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정말 순교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서 하루를 사는 것, 그것이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그 영광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서 문지기가 되겠습니다." 하루의 문지기라도 그것이 더 아름다운 것이란 말입니다. 봉사하는 기쁨, 수고하는 특권, 그것을 영광으로 아는 그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 뜻의 의미를 알고 사라에 넘쳐서 봉사하며 교회를 섬기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록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다 하는 말을 합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나라 없이 2천년을 방황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안식일을 부지런히 지켰다는 일, 안식일이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 주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봉사해 나가는 동안 마침내는 교회가 나를 지켜 주고, 내 명예를 지켜 주고, 내 생명을 지켜주고, 내 영광을 지켜 줍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피곤한 이유가 있다면 헛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뒤에 생각하면 다 후회스러운 일뿐입니다.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섬기고 봉사한 그것만은 영원히 후회가 없습니다. 이것만이 자랑거리로 남을 것입니다.

평안도에 가서 선교하던 미국 선교사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어떤 시골에 갔더니 웬 사람이 밭을 가는데, 소 멍에를 아버지가 메고 앞에서 끌면 아들이 뒤에서 그것을 잡고 밭을 갑니다. 하도 이상해서 가까이 가보니까 마침 아는 장로님입니다. "장로님, 어찌해서 이렇게 소가 메는 멍에를 메고 밭을 갑니까?" ", 예배당 짓는데 소를 팔아 바쳤거든요. 그래서 소 대신 내가 밭을 갑니다." 장로님의 그 얼굴빛은 여전히 밝고 감사와 찬송이 넘치더랍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것 같아도 그분만이 가지는 기쁨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이렇게 사는 사람에게 인색한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요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넘치도록 채워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을 섬기는 자에게 축복과 그 영광이 항상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이렇게 불안하고 어수선한 세대이지만 한정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마음대로 지을 수 있게 하시고, 이 교회를 섬길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아버지여,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다윗처럼 주의 전을 사랑하게 하시고 봉사하게 하사, 주의 전을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그 모든 축복을 함께 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문지기의 행복(시편 84:4-12)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나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고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월남 난민들이 고향을 떠나서 방황하는 모습을 우리가 마음 아프게 본 일이 있지 않습니까? 고향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더욱이 마음의 고향이 없는 사람, 이것은 더할 나위 없이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 항상 우리의 마음의 고향을 두고 그것을 중심해서 사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불쌍한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많은 일에서 배신을 당했습니다. 부모로부터 애인으로부터 혹은 사회로부터 계속 속기만 하고 이젠 믿음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제 그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게 됩니다.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 나 자신조차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믿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병입니다. 아주 큰 병입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끝난 것입니다. 어쨌든 믿음이란 에베소서 2:8 말씀처럼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 중에 아주 소중한 선물이 믿음입니다.

셋째는 봉사를 모르는 사람, 이것 역시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사의 대상이 없는 사람, 그래서 할 일이 없고,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 기울일 수 있는 그러한 일거리나 그러한 일의 대상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자기만 위할 줄 알고, 남을 위할 줄 모르는 사람, 이 사람은 인생을 반도 못 사는 사람입니다. 사실 기쁨이란 남에게 봉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를 위해서 내 자신을 바치기도 하고 수고도 하고 희생도 하는 바로 그 속에서 인간은 인간 최고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인데, 이 소중한 행복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봉사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내 수고의 대상이 분명하고 그를 위해서 자기를 바칠 정열이 있고, 그 수고 자체가 희열이요 그리고 영광으로 감수될 수 있을 때 이것을 행복의 극치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길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간에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을 다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안다.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알아나가는 그 길이 가장 행복하고 소중하고 복된 것이란 말입니다.

시편 146:5에 보면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이고, 허물 사함을 받은 사람, 죄로 가리워졌던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연결하고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 했습니다.

또한 시편 32:1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 그의 말씀을 꿀보다 꿀송이보다 더 달게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속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이 제일 행복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말을 줄여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본의 아니게 때로는 많은 고통을 당합니다. 마음대로 되는 일도 있지만 안 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 않았던 어려운 일들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상실만은 아닙니다. 이러한 일로 인해서 우리는 더 소중한 것을 얻게 됩니다.

하나를 잃어버리면서 더 큰 것을 얻습니다. 고난은 인간의 소원을 단순하게 합니다. 그리고 가치관을 바꾸어 줍니다. 건강할 때에는 인간의 이런 것이 소중했습니다. 병들고 보니 그것은 소중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혀 다른 것이 소중합니다. 사업에 성공할 때는 소중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업에 실패하고 보니 이것들이 다 의미 없는 일이요,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그 무엇이 귀한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관과 가치관을 바꾸어 주는 것, 이것이 고난입니다. 고난은 때로 종말적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행복이 무엇인가 이것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해 줍니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선물입니다.

다윗은 왕위에 있었습니다. 일국의 왕입니다. 그러나 그 왕위는 그에게는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왕이기에 전쟁에 나가야 하고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많은 산적한 업무로 인해서 피곤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가 지금 당한 이 어려움 속에서는 그 누구도 그를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가정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범죄하면서까지 사랑했던 그 사랑하는 밧세바도 이 결정적 순간에 다윗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는 피곤했습니다. 많은 자녀들은 괴로운 존재였습니다. 신하들은 배신했고 아들 중에 하나가 자기 아버지를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차마 그를 대항해서 싸울 수 없어서 왕위를 내놓고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이리저리 산기슭으로 방황하게 됩니다. 그의 마음은 착잡하고 아팠습니다. 이제 그는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아무 미련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리운 것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하나님의 성전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것만이 그리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지금 우리 교회처럼 이렇게 지어 놓은 건물이 아닙니다. 다윗이 그리워하던 하나님의 성전은 성막입니다. 천막입니다.

수달피 가죽으로 만들어 놓은 몇백 년 묵은 낡아빠진 천막입니다. 먼지가 자욱합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라고 하는 궤짝이 하나 놓여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나가 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본문 시편 84편은 그러한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을 실은 시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어찌 사랑스러운지요." 그는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장막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그리워하는 행복, 하나님의 성정을 향해서 가는 발걸음의 행복, "시온의 대로가 그 마음에 있는 자는 복이 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전에 거하는 행복, 하나님의 전을 봉사하는 행복, 그는 행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제비와 참새를 부러워했습니다. 제비와 참새는 마음대로 날아서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둥지를 틀고 사는데 나는 왜 하나님의 전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까? 이래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목회 하면서 교인 중 참 딱한 사람을 만나본 일이 있습니다. 이분은 왕년에 경찰서장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고혈압으로 인해서 쓰러졌는데 누워서 쉬지를 못합니다. 물론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앉아서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예수를 믿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몇 번 만나서 전도하고 또 회개하고 참회의 고백도 받았습니다. 신앙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분이 소원이 많았습니다. 내가 빨리 나아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겠는데 하며 많은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년이 넘어가고 3년으로 가게 되자 마지막에는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 "목사님, 나 한번만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게 해 주세요. 한 번만 예배드리고, 교회 나가 보고 죽으면 한이 없겠습니다." 이것이 소원입니다.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 싶었지만 의사의 말에 의하면 차를 타고 가다가 객사할까봐 이걸 못했습니다. 만일 그랬다가는 그 가족들에게 원한이 될 것 같아서 그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고, 그는 3년만에 세상을 떠나 교회 묘지에 장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에는 ", 한 번만 교회 나가보고 죽으면 한이 없겠습니다." 그러한 소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소원하는 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한 번 더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그것만이 소원이요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고향은 교회입니다. 여기서 유아 세례를 받고, 여기서 결혼식을 하고, 여기서 장례식을 합니다. 보십시오. 12세 된 소년 예수께서는 부모가 "너 왜 여기 있었냐"고 물었을 때에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 하는 것이 대답입니다. 내 아버지 집, 내 아버지 집에 내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제가 1963년 프린스턴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 오리엔테이션 맨 첫 시간에 큰 강당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예배 때에 총장님이 설교하신 말씀 가운데 한 말씀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가 보시면 아십니다만 저기 큰 예배당에 촛불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 있는 오랜 파이프 오르간은 국보급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잘 지은 큰 단층 돌집 예배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 도서관이 있습니다.

총장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예배당과 도서관이 가지런히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라. 교회는 우리 마음의 고향입니다. 도서관은 우리 지성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이 있었습니다. "교회당보다 도서관을 높을 수가 없어서 돈을 많이 들여가면서 한 층을 지하로 넣고 한 층을 지상으로 해서 예배당보다 낮게 도서관을 지었습니다. 돈을 많이 들여가면서라도 도서관을 채플보다 낮춰 지었다는 그 의미를 아시오. 이것이 프린스턴의 정신이오."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서관과 채플은 가지런히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도서관보다 교회가 위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성인인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평생 교회에서 삽니다. 저는 생전에 결혼 주례를 많이 한편입니다만 참 기분이 좋지 않은 결혼 주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에는 공동 묘지에 장례식을 위해 만들어 놓은 조그만 채플이 있습니다. 예배당들이 있는데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은 아니고 장례식만 위해서 만들어 놓은 예배당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결혼 주례를 많이 합니다. 굳이 거기서 결혼을 하겠다니 어떻게 합니까. 거기 가서 장례도 주례를 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서 장례 주례를 하고 며칠 있다가 결혼 주례를 합니다. "왜 여기서 결혼을 하느냐?" "여기서 장례식까지 하려고요. 미리 예행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옳은 얘기입니다.

장례식과 결혼식이 따로 될 것 없지요. 다같이 아버지 집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평생 교회 안에서 삽니다. 세상에서 부모를 잘 만났다는 것은 큰복입니다. 잘못 만나면 고생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공부하는 사람은 선생님을 잘 만나는 것이 또 보통 복이 아닙니다. 잘못 만나면 참 불행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는 교회를 잘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이것 또한 잘못 만나면 내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교회를 잘 만나는 것, 이것도 큰 축복입니다.

내 아버지 집, 우리는 여기에서 삽니다. 그런고로 피난길이나 여행길에서 보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믿는 사람은 어디 가든지 교회만 만나면 반갑습니다. 누가 다니는 교회인지 모르지만 조그만 십자가만 보이면 ", 저기 교회가 있구나." 어떻게 반가운지 모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복덕방 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근방 집 값이 비싼 이유가 우리 교회 때문이랍니다. 그건 잘된 얘기입니다. 집 사 가지고 오는 분에겐 좀 안됐지만 만일 반대로 교회 근방 집 값이 내려간다면 그 교회는 큰일났습니다.

, 우리가 마음의 고향을 여기에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사할 때에도 될 수 있는 대로 교회 가까이, 단 몇 미터만이라도 좋으니까 가까이 가까이 오십시오. 자꾸 멀리 갈 생각 마십시오. 좋은 집 나쁜 집이 따로 없습니다. 교회 가까이가 좋은 집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집 값이 얼마나 손해냐 이로우냐 그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간절한 소원은 교회 가까이 교회를 중심해서 삽니다.

여러분, 자녀 교육할 때 학군이 좋고, 좋은 학교 근방으로 이사가는 것도 역시 당연한 얘기가 아닙니까? 자녀 교육을 제대로 하자면 이사 다녀야지요.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교회, 주의 장막, 내 아버지 집에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내 마음의 고향입니다. 주의 집에 가는 자, 주의 집에 사는 자, 주의 집을 봉사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의 집에서 하루를 사는 것이 다른 곳에서 천 날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행복합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47:9에 보면 야곱은 바로 왕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나이 130입니다.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오래 살아 봐야 욕만 많습니다." 문제는 내 아버지 집에 사는 하루가 밖에서 천 날 사는 것보다 아름답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하루를 살 것입니다. 악인의 장막 안에서 평안히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 밖에서 문지기가 되는 그것이 더 좋다는 말입니다. 악인의 장막 같은 세상이요, 불의한 세상이요, 불안한 세상에 살기보다 내 아버지 집에 살고자 하는 그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저와 함께 피난길을 나오던 어느 장로님이 있습니다. 이 분이 성미가 좀 급합니다. 가다가 자꾸 길이 막히고 어려워지니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왜 돌아가겠느냐 그러니까 "나가 봐야 뭘 하겠나? 나는 교회에 돌아가서 한 번 더 기도하고 죽으려네" 그러십니다. "난 교회에 돌아가서 한 번 더 봉사하고 기도하고 그냥 죽으려네. 피난은 무슨 피난인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정말 순교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서 하루를 사는 것, 그것이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그 영광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서 문지기가 되겠습니다." 하루의 문지기라도 그것이 더 아름다운 것이란 말입니다. 봉사하는 기쁨, 수고하는 특권, 그것을 영광으로 아는 그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 뜻의 의미를 알고 사라에 넘쳐서 봉사하며 교회를 섬기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록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다 하는 말을 합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나라 없이 2천년을 방황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안식일을 부지런히 지켰다는 일, 안식일이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 주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봉사해 나가는 동안 마침내는 교회가 나를 지켜 주고, 내 명예를 지켜 주고, 내 생명을 지켜주고, 내 영광을 지켜 줍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피곤한 이유가 있다면 헛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뒤에 생각하면 다 후회스러운 일뿐입니다.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섬기고 봉사한 그것만은 영원히 후회가 없습니다. 이것만이 자랑거리로 남을 것입니다.

평안도에 가서 선교하던 미국 선교사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어떤 시골에 갔더니 웬 사람이 밭을 가는데, 소 멍에를 아버지가 메고 앞에서 끌면 아들이 뒤에서 그것을 잡고 밭을 갑니다. 하도 이상해서 가까이 가보니까 마침 아는 장로님입니다. "장로님, 어찌해서 이렇게 소가 메는 멍에를 메고 밭을 갑니까?" ", 예배당 짓는데 소를 팔아 바쳤거든요. 그래서 소 대신 내가 밭을 갑니다." 장로님의 그 얼굴빛은 여전히 밝고 감사와 찬송이 넘치더랍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것 같아도 그분만이 가지는 기쁨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이렇게 사는 사람에게 인색한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요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넘치도록 채워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을 섬기는 자에게 축복과 그 영광이 항상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이렇게 불안하고 어수선한 세대이지만 한정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마음대로 지을 수 있게 하시고, 이 교회를 섬길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아버지여,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다윗처럼 주의 전을 사랑하게 하시고 봉사하게 하사, 주의 전을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그 모든 축복을 함께 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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